디모데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감독과 집사

하나님의 집을 돌보는 사람들

교회의 지도자를 세운다면 무엇부터 살펴보아야 할까요?

성경 지식이 풍부한지, 사람들을 이끌 능력이 있는지, 설교를 잘하는지부터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3장을 읽으면 조금 의아해집니다. 바울은 감독의 자격을 설명하면서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 않는 사람, 폭력을 쓰지 않는 사람,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손님을 잘 맞이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섬기는 이들에게는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는 기준이 이토록 평범한 일상생활에 집중되어 있을까요?

그 답은 이 장의 중간에 나오는 짧은 질문, 「누구든지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겠습니까?」에서 드러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지배한다거나 소유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돌본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어느 지도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독과 섬기는 이들의 자격을 길게 설명한 다음, 마지막에 뜻밖의 찬양을 들려줍니다. 「경건의 비밀은 위대합니다. 그분은 육을 지닌 채 드러나셨고 … 영광 가운데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지도자들의 행동을 말하던 편지가 갑자기 그리스도를 노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개의 주제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자격을 설명해 온 모든 이야기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디모데전서 3장은 교회를 맡는 사람의 자격에서 출발하여, 교회가 누구의 집이며 어떤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지를 밝히는 장입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83장 본문 읽기 →

감독이 되고 싶다면

디모데전서 3:1–3 본문 →

믿음직한 말입니다. 누가 감독의 일을 열망한다면 좋은 일을 사모하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3:1 · 본디새김

바울은 감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현대 교회의 어느 직함과 정확히 일치하는지를 결정하는 것보다, 바울이 그 직무에 어떤 책임을 부여하는지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정신이 맑고 분별력이 있고 단정하고 손님을 잘 맞이하고 가르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3:2 · 본디새김

「나무랄 데가 없다」는 것은 죄를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는 완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누구도 이 자격을 갖출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에서 지도자로서의 신뢰를 무너뜨릴 만한 분명한 흠이 발견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목록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거나 폭력을 쓰지 않고, 너그럽고 다투지 않으며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어집니다. 대부분의 항목은 감독에게만 요구되는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분별력과 절제, 너그러움, 금전적인 정직함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성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런 덕목들을 감독의 자격으로 특별히 제시했을까요? 감독에게는 이러한 성품이 선택적인 미덕이 아니라 직무를 맡기 전에 확인되어야 할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돌보는 사람이 폭력적이거나 다투기를 좋아한다면 그 피해는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성품이 공동체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르칠 능력과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

「가르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는 다른 덕목과 조금 다릅니다. 감독이 수행해야 할 일과 직접 연결되는 능력입니다. 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이 퍼져 있다는 1장의 상황을 생각하면, 감독은 단순히 사람들을 모으거나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르칠 능력 바로 앞에 「손님을 잘 맞이하고」를 놓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가르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자신의 삶 안으로 맞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가정에서 이루어지기도 했고(로마서 16:5, 빌레몬서 1:2), 여행하는 신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맞이하는 일도 공동체의 삶에서 중요했습니다(요한삼서 5–8절). 손님을 맞아들이는 태도는 개인적인 친절을 넘어 공동체를 돌보는 구체적인 행동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진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진리를 듣는 사람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가르침의 능력과 사람을 맞아들이는 태도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한 아내의 남편」은 무엇을 뜻할까

2절의 「한 아내의 남편」은 실제로 해석이 갈리는 표현입니다. 낱말 순서대로 풀면 「한 여자의 남자」에 가깝습니다. 주요 해석은 한 번에 한 사람과만 결혼한 상태를 요구한다는 읽기, 평생 한 번만 결혼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읽기, 결혼 관계에서 배우자에게 충실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첫 번째 해석은 한 배우자라는 수적 제한에 주목하고, 두 번째는 「한」이라는 표현을 결혼 이력 전체에 적용하며, 세 번째는 이 표현이 성품에 관한 다른 자격들 사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중시합니다. 이 구절만으로 감독은 반드시 결혼한 사람이어야 한다거나, 사별 후 재혼한 사람은 언제나 자격이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택하든 바울이 지도자의 결혼생활을 공적인 신뢰와 무관한 사생활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가르치고 돌보려는 사람이라면,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보여 주는 태도 역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감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에피스코포스는 살피고 감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훗날 교회 제도에서 감독 또는 주교라는 직분명으로 발전했지만, 이 구절만으로 후대에 형성된 감독제의 모든 구조를 당시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감독과 장로라는 명칭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사도행전 20:17, 28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그들이 공동체를 돌보는 감독의 책임을 맡고 있다고 말하고, 디도서 1:5–7에서도 장로를 세우라는 지시가 이어지는 감독의 자격 설명과 연결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의 그리스어는 미아스 귀나이코스 안드라이며, 이 표현에 대한 여러 역사적 해석 가운데 특히 재혼을 제한하는 읽기와 결혼 관계에서의 충실함을 요구하는 읽기가 모두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이끈다는 것은 돌본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3:4–5 본문 →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온전히 품위 있게 복종하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3:4 · 본디새김

바울은 이제 감독이 가정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살펴봅니다. 왜 가정생활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길까요? 5절에서 이유를 직접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겠습니까?)디모데전서 3:5 · 본디새김

자기 집안을 「이끌다」(προΐστημι)와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다」(ἐπιμελέομαι)는 서로 다른 그리스어 동사입니다. 앞의 동사는 앞에 서서 이끌거나 관리하는 일을, 뒤의 동사는 관심을 기울여 보살피는 것을 뜻합니다. 감독은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이지만, 그 지도력의 목적은 공동체를 돌보는 데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여관에서 부탁한 일

누가복음 10:34–35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지나갑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고, 자신의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를 돌봅니다. 여관 주인에게도 그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바로 그때 사용된 동사가 디모데전서 3:5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다」라고 할 때의 동사와 같습니다.

같은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돌보다」라는 말이 얼마나 구체적인 행동을 가리킬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명령하지 않았고,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상처를 돌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돌본다는 것은 회의와 재정을 관리하거나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도록 돕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보호하며, 필요한 곳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포함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성품들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폭력을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돌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투지 않고 너그러워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맡겨진 사람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저 착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돌보는 일을 맡겨도 안전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가정과 교회가 동일한 조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고대의 가정에는 가장이 가족과 종들을 관리하는 사회적 질서가 있었지만, 바울이 그 구조를 교회에 아무런 구별 없이 옮겨 놓으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논점은 가정에서 드러나는 책임감과 지도력이 더 큰 공동체를 돌볼 자격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끌다」는 프로이스테미 계열의 동사이고, 「돌보다」는 에피멜레오마이입니다. 4절의 「온전히 품위 있게」가 자녀의 복종하는 태도를 수식하는지, 아니면 집안을 이끄는 사람의 태도를 수식하는지는 문법적으로 열려 있습니다. 뒤의 읽기를 따르면 감독 자신이 품위 있게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가정의 질서를 권위자의 위엄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잘 이끄는 책임과 품위를 함께 요구합니다.

갓 심은 나무를 너무 빨리 세우지 말라

디모데전서 3:6–7 본문 →

갓 믿게 된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마귀의 심판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3:6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번역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비유가 숨어 있습니다. 「갓 믿게 된 사람」(νεόφυτος)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새로 심어진 식물을 가리키는 말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신약에서는 이 구절에만 등장합니다. 바울은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을 갓 심은 어린 나무처럼 표현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다. 갓 믿은 사람도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뿌리가 충분히 내리기 전에 너무 큰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독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가르치고, 판단하고, 공동체의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한 가지 위험을 지적합니다.

교만입니다.

여기서 교만은 단순히 자신감이 지나친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는 상태입니다. 갓 심은 나무가 충분히 뿌리내리기도 전에 거센 바람을 맞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나무에 문제가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아직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무게를 너무 일찍 지게 한 것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경고에는 지도자를 보호하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직분을 너무 빨리 맡기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라, 충분히 자랄 시간을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귀의 심판과 올무

6절에서는 교만해져서 「마귀의 심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7절에서는 「마귀의 올무」에 빠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마귀의 심판」은 마귀가 교만으로 인해 받은 것과 같은 심판을 가리킨다는 읽기와, 마귀가 그 사람을 고발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가리킨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그리스어의 소유격만으로 어느 관계인지 완전히 확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위험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교회 지도자의 지위가 오히려 그 사람을 넘어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권위가 커질수록 자신을 높이고 싶은 유혹도 커지고,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을수록 자신의 약점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밖에 있는 이들에게서도 좋은 증언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욕을 당하지 않고 마귀의 올무에도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3:7 · 본디새김

교회가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이웃과 거래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 안에서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는 경건하고 존경받는 사람인데 밖에서는 부정직하거나 폭력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교회를 맡기는 것은 공동체에 위험한 일이 됩니다.

물론 「좋은 증언」을 받는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얻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비난받는 상황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당한 비난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도자의 권위를 보호하기에 앞서, 그 권위가 지도자 자신과 공동체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의 말과 양심

디모데전서 3:8–10 본문 →

섬기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품위 있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고, 술을 많이 마시는 데 몰두하지 않고,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않고,디모데전서 3:8 · 본디새김

「섬기는 이」(διάκονος)에 해당하는 말은 신약에서 섬기는 사람이나 사역자를 가리키는 데 폭넓게 사용되며, 이곳에서는 감독과 나란히 언급되므로 공동체 안의 특정한 섬김의 역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1에서도 감독들과 섬기는 이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감독의 자격과 섬기는 이들의 자격은 상당히 비슷합니다. 품위, 절제, 돈에 대한 태도, 가정생활, 책잡힐 만한 일이 없는지 살피는 기준이 반복됩니다. 섬기는 일이 감독보다 덜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할과 책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일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신뢰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고」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는 두 가지 말을 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이 구절에만 등장합니다. 섬기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만나고, 서로 다른 사정을 듣고, 공동체의 필요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때 사람에 따라 말을 바꾸거나, 한 사람에게 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다르게 전달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신뢰가 무너집니다.

섬기는 일은 일을 빨리 처리하는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신뢰를 지키는 일도 포함됩니다. 술에 몰두하지 말고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말라는 당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맡았는지는 이 구절에 상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섬기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 때문에 맡겨진 책임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9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생활상의 기준을 갑자기 믿음의 문제와 연결합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비밀을 지닌 사람이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3:9 · 본디새김

믿음의 비밀을 지닌 사람

여기서 「비밀」은 일부 사람들만 아는 숨겨진 정보나 난해한 종교적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셨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로마서 16:25–26, 골로새서 1:26–27). 이 장의 마지막 절에 「경건의 비밀」이 다시 등장하므로, 9절의 「믿음의 비밀」은 16절에서 밝혀질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 고백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을 지닌 사람의 양심이 깨끗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거나 부정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섬기는 이들은 교회의 실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이기 전에, 자신이 믿는 복음을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검증받아야 한다

이들도 먼저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다음에 책잡힐 데가 없으면 그들이 섬겨야 합니다.디모데전서 3:10 · 본디새김

바울은 좋은 의욕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직무를 맡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살펴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만 일정한 시험이나 정해진 교육 기간 같은 구체적인 절차가 이 구절에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자체가 요구하는 것은 먼저 사람을 검증하라는 원칙입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갓 믿은 사람의 위험과도 통합니다. 책임을 맡기는 것은 그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 사람과 공동체 모두에게 무게를 지우는 일입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디모데전서 3:11–13 본문 →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품위 있고, 헐뜯지 않고, 정신이 맑고, 모든 일에 믿음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3:11 · 본디새김

여기서 말하는 여성들은 누구일까요? 감독이나 섬기는 이들의 아내들일까요, 아니면 여성으로서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들일까요? 원문의 낱말은 여자들과 아내들이라는 두 의미로 사용될 수 있고, 이 구절에는 누구의 아내인지를 명시하는 소유 표현이 없습니다. 따라서 문맥을 통해 판단해야 합니다.

왜 8절과 12절 사이에 여성들이 등장할까

8–10절에서는 섬기는 이들의 자격을, 11절에서는 여성들의 자격을 설명하고, 12절에서는 다시 섬기는 이들의 가정생활을 다룹니다. 이 배열을 두고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됩니다.

한쪽에서는 11절의 여성들을 섬기는 이들의 아내로 이해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가정과 공동체의 일을 맡고 있다면 배우자의 태도 역시 공동체의 신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12절에서 다시 남성 섬기는 이들의 결혼생활이 언급된다는 점이 근거가 됩니다.

다른 쪽에서는 이 여성들을 실제로 공동체 안에서 섬기는 역할을 맡은 여성들로 이해합니다. 8절에서 감독의 자격을 설명한 뒤 「섬기는 이들도 마찬가지로」라고 했듯, 11절도 같은 방식으로 여성들을 소개합니다. 또한 감독의 아내들에게는 별도의 자격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섬기는 이들의 아내들만 특별히 언급했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로마서 16:1의 뵈뵈가 중요한 사례로 제시됩니다. 바울은 뵈뵈를 겐그레아 교회의 「섬기는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표현이 후대의 제도화된 집사 직분과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논쟁이 있지만, 여성이 공동체에서 중요한 섬김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결국 본문만으로 이 여성들이 누구인지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여성들에게도 품위와 절제와 신뢰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헐뜯지 않는 사람

「헐뜯는 사람」(διάβολος)에 해당하는 원문의 낱말은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같은 낱말의 명사형이 앞의 6–7절에서는 「마귀」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문맥이므로 모든 의미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지만, 한 단락 안에서 마귀라는 말과 헐뜯는 사람이라는 말이 같은 낱말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바울은 이 짧은 단락에서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말의 위험을 계속 강조합니다. 섬기는 이들은 한 입으로 두말해서는 안 됩니다. 여성들도 남을 헐뜯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의 「모든 일에 믿음직한」은 말을 조심하라는 소극적인 명령을 넘어,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공동체의 직무가 아무리 훌륭하게 마련되어 있어도,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을 서로 신뢰할 수 없다면 그 공동체는 건강하게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좋은 자리와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

12절에서 바울은 다시 섬기는 이들의 결혼생활과 가정생활을 언급한 뒤, 13절에서 그들이 얻게 될 것을 말합니다.

섬기기를 잘한 이들은 자기를 위하여 좋은 자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가운데서 거리낌 없이 말할 큰 자유도 얻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3:13 · 본디새김

「좋은 자리」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얻는 좋은 평판이나 존중받는 위치를 뜻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사역을 잘 감당한 결과로 얻게 되는 더 큰 책임이나 영적인 지위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만으로 직분의 승진 제도를 말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는 두려움 없이 솔직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본문은 섬김과 이 자유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신뢰할 만한 섬김을 통해 그 사람의 믿음이 더욱 확고해지고 공동체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게 된다는 이해가 가능합니다.

바울은 섬기는 일을 잘한 사람이 자기 능력을 자랑할 자유를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 가운데서 자유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누구의 것인가

디모데전서 3:14–15 본문 →

나는 그대에게 곧 가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그대에게 씁니다. 그러나 내가 늦어질 경우에, 하나님의 집,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대가 알고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입니다.디모데전서 3:14–15 · 본디새김

여기서 편지의 시야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 앞의 목록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감독의 자격과 섬기는 이들의 자격은 단순히 교회의 인사 규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가르침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집」은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과, 그 집에 속한 가족이나 공동체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같은 낱말이 앞에서는 감독의 「집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바울은 앞에서 감독이 자기 집안을 잘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고, 이제 그가 돌보아야 할 교회가 하나님의 집임을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돌보도록 맡겨진 사람이지, 그 집의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교회도 아니고, 오래 봉사한 사람들의 소유도 아닙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많은 재산을 바친 사람들의 소유도 아닙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규칙을 만들어 놓으신 뒤 멀리 떠나 계신 분이 아니라, 살아 계신 분으로서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공동체의 질서와 지도자의 성품을 그토록 중요하게 설명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어울리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

기둥과 버팀대는 구조물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고, 그 위에 놓인 것을 지지합니다. 바울은 교회에 이런 역할을 부여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진리를 만들어 낸다는 뜻일까요? 교회가 어떤 것을 진리라고 결정하면 그것이 곧 진리가 된다는 말일까요? 본문의 비유는 그런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가 진리를 지탱하고 드러내는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 진리일까요? 바울은 곧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에 관한 고백을 노래합니다. 이 연결을 놓치면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라는 표현을 교회의 조직이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선언으로만 읽게 됩니다. 교회가 지탱해야 할 진리는 무엇보다 예수님께 관한 복음입니다.

교회의 중요성은 예수님을 대신할 만큼 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맡았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오이코스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고백은 구약에서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29:45–46에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밝힙니다. 그 고백은 신약에서 예수님 안에 있는 공동체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전서 3:16–17에서 바울은 신자들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고, 에베소서 2:19–22에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교회 건물이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경건의 비밀은 한 분을 가리킨다

디모데전서 3:16 본문 →

그리고 두말할 것 없이 경건의 비밀은 위대합니다. 그분은 육을 지닌 채 드러나셨고, 영으로 의롭게 되셨고, 천사들에게 목격되셨고, 이방 사람들 가운데 선포되셨고, 세상에서 믿음의 대상이 되셨고, 영광 가운데 들려 올라가셨습니다.디모데전서 3:16 · 본디새김

이제 바울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짧고 리듬 있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여섯 동사가 모두 과거의 사건을 서술하는 수동형으로 각각 짧은 구절과 결합되어, 이 부분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이나 찬양에서 가져온 표현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제시됩니다. 다만 실제로 예배에서 불렸던 독립된 찬송이었는지, 편지를 위해 구성한 고백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경건의 비밀」은 복잡한 종교적 지식이나 숨겨진 규칙의 목록이 아닙니다. 한 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육을 지닌 채 드러나셨다

「드러나셨다」는 표현은 이전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나타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고백의 문맥에서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역사 안에 드러났다는 의미가 중심에 있습니다. 여기서 육은 인간의 실제적인 삶과 존재 방식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처럼 보이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 속에 나타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사실은 이 장 앞부분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감독은 가정생활에서 신뢰할 만해야 하고, 섬기는 이들은 말과 행동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왜 교회는 이토록 구체적인 삶을 중요하게 여길까요? 하나님의 구원이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도 사람의 실제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영으로 의롭게 되셨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짝을 이룹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원래 죄인이셨는데 나중에 용서받아 의롭게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롭게 되셨다」는 의로움이 인정되거나 정당함이 입증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입증되었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정당함을 드러내셨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로마서 1:3–4에서 육과 거룩한 영의 대조 속에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연결된다는 점이 이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다른 해석에서는 「육」과 「영」을 예수님의 존재 또는 활동을 설명하는 두 영역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첫 문장은 인간의 조건 속에 드러나신 예수님을, 두 번째 문장은 영적인 차원에서 의로우심이 입증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영」이 성령을 직접 가리키는지, 영적인 존재 방식이나 영역을 가리키는지도 문법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문장을 함께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현실 속에 나타나셨으며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는 인간의 겉모습만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정당함과 신분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천사들에게 목격되시고, 이방 사람들 가운데 선포되시다

한쪽에는 천사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방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증언은 하늘과 땅의 차원을 함께 아우릅니다. 「천사들에게 목격되셨다」가 탄생, 부활, 승천 가운데 어느 장면을 가리키는지 본문은 지정하지 않으므로, 예수님의 드러나심이 천사들에게도 목격되었다는 고백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시선을 땅으로 돌립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이제 이방 사람들에게도 선포됩니다. 바울은 앞 장에서 자신이 이방 사람들의 선생으로 세워졌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이 복음을 특정한 집단이 독점하도록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가운데 선포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을 목격합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포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건은 목격되고, 전해지고, 받아들여지는 사건입니다.

세상에서 믿음의 대상이 되셨다

선포 이후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교회가 가르치는 지식이나 규범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계십니다.

감독은 가르칠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가 가르치는 목적은 자신에게 사람들을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이들이 깨끗한 양심으로 지녀야 할 믿음의 비밀도 자신들만 아는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 세상에서 믿음의 대상이 되신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 「영광 가운데 들려 올라가셨습니다」는 예수님의 높아지심을 고백합니다. 여섯 문장은 시간 순서대로 모든 사건을 나열하기보다, 육과 영, 천사들과 이방 사람들, 세상과 영광이 서로 대응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구원 사건의 깊이와 넓이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사실과 영광 가운데 높아지셨다는 사실이 하나의 고백 안에 담겨 있습니다.

왜 「그분은」으로 시작하는가

고백은 「그분은」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는 한 분에 관해 노래를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가리키는지 굳이 이름을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듯이, 곧바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것은 독립적으로 사용되던 신앙 고백이나 찬송의 일부였다는 해석과도 잘 어울리지만, 그 기원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경건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정의를 늘어놓지 않습니다. 바로 한 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경건의 비밀은 결국 예수님께서 누구시고 무엇을 하셨는가에 관한 고백으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3:16의 첫머리에는 사본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하나님」에 해당하는 테오스가 나타나지만, 현대의 주요 비평 본문은 「그분은」이라는 뜻의 관계대명사 호스를 채택합니다. 두 표현은 고대 필사 과정에서 혼동되기 쉬운 형태였고, 더 오래된 사본 증거를 중시하는 본문 비평에서는 관계대명사 읽기를 지지합니다. 「그분은」은 이 읽기에 따른 번역입니다. 또한 여섯 문장의 순서를 엄격한 시간 순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사도행전 1:9–11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으로 서술되고, 복음 선포와 믿음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지탱하는 진리

디모데전서 3:1–16 본문 →

이 장에는 두 가지 모습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을 잘 돌보고, 손님을 맞아들이고, 분노를 절제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말을 정직하게 하고, 남을 헐뜯지 않는 평범한 일상생활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육을 지닌 채 드러나시고 영광 가운데 들려 올라가신 큰 구원 사건입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그 집이 지탱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라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진리를 가리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돈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이용한다면, 그가 전하는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설득력을 잃기 쉽습니다. 공동체를 돌보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상처를 준다면, 그 공동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라는 고백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진리를 새롭게 만들어 내지는 않지만, 그 진리가 어떤 것인지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돕거나 가립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교회가 모범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어야 한다는 교훈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전서 3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감독이나 섬기는 이들을 바라보며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 육을 지닌 채 드러나셨습니다.

영으로 의롭게 되셨습니다.

천사들에게 목격되셨고, 이방 사람들 가운데 선포되셨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의 대상이 되셨고, 영광 가운데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맡은 사람들에게 바울은 특별한 영예보다 먼저, 사람을 잘 돌보는 삶을 요구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