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참 가르침을 지키기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라는 삶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거룩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도 신앙적으로 우월한 삶이라고 여겼던 듯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혼하고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지만, 그보다 높은 경건에 이르려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향해 뜻밖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 좋고, 감사와 함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하나도 버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겠다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거부한다면, 과연 그것이 경건한 삶일까요?
디모데전서 4장은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바울은 결혼과 음식을 금하는 가르침을 비판한 뒤,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단련하라고 권합니다. 얼핏 모순처럼 보입니다. 금욕적인 생활을 비판하면서, 곧바로 엄격한 단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거부하는 금욕과 그가 권하는 단련은 무엇이 다를까요?
이 차이를 이해하는 실마리는 6절의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따라온 좋은 가르침으로 길러지면서」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감사히 받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기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 말씀으로 길러진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그 일을 디모데 자신에게 맡깁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막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디모데 자신도 예수님의 좋은 섬기는 사람으로 자라야 합니다.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
그런데 영은 분명히 말합니다. 앞으로 올 때에 어떤 이들이 속이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면서 믿음에서 떠나리라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4:1 · 본디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에 관한 신앙 고백을 들려준 뒤, 이제는 그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을 지닌 채 드러나셨다는 고백에서, 인간의 육체적인 삶을 제한하는 가르침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앞으로 올 때」는 그 일을 오늘날의 특정 시대나 사건에 곧바로 대응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가르침을 경계하고 바로잡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경고는 디모데가 직면한 교회의 문제를 종말론적 경고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단순히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의 배후에 영적인 속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교회 안의 모든 해석 차이나 신학적 논쟁을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자신이 문제 삼는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경건해 보이는 속임
그렇게 믿음에서 떠나는 일은 거짓을 말하는 이들의 위선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들은 자기 양심이 달군 쇠로 지져져 있으며,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그 음식은 진리를 알게 된 믿는 이들이 감사하며 먹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디모데전서 4:2–3 · 본디새김
그들이 주장한 것은 방탕한 생활이 아니라 결혼하지 말고 음식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없는 특별한 규율을 지키게 함으로써, 더욱 높은 수준의 경건을 추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가르침을 속임과 연결합니다.
혼인하지 않거나 음식을 절제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결혼하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7:7–9, 28). 사도행전 13:2–3에서는 금식과 기도가 함께 등장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하고, 마치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자발적인 절제와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금지는 다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것을 본래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이해와 연결됩니다.
달군 쇠로 지져진 양심
바울은 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을 「자기 양심이 달군 쇠로 지져져 있」다고 묘사합니다. 어떤 이미지를 의도했든, 양심이 온전하게 기능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상태를 묘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매우 엄격한 생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엄격함을 깨끗한 양심의 증거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양심이 손상되었다고 말합니다.
남보다 많이 포기하고, 남보다 어려운 규칙을 지킨다고 해서 그 가르침이 반드시 참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엄격함 자체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달군 쇠로 지져진」 양심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달군 쇠에 지져진 피부가 감각을 잃듯 양심이 무뎌져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읽을 수 있고, 고대의 낙인찍는 관행을 배경으로 잘못된 주인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문이 정확히 어느 이미지를 의도했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또 바울은 그들이 왜 이런 규칙을 만들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후대의 영지주의나 특정 금욕주의 집단과 연결하는 견해들이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그들의 정확한 정체와 사상 체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올 때」와 관련해서는, 예수님의 오심 이후를 마지막 때의 시작으로 이해하는 모습이 사도행전 2:16–17과 히브리서 1:1–2에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 좋다
바울은 음식의 문제를 창조의 문제로 돌려놓습니다. 3절에서 음식은 「진리를 알게 된 믿는 이들이 감사하며 먹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1:31에서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다고 하십니다. 4절은 이 창조 신앙을 받아들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 좋고, 감사와 함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하나도 버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4:4 · 본디새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근본적으로 악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먹고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음식 자체를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는 가르침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선함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가 두 번 등장하는 이유
3절에서는 하나님이 음식을 「감사하며 먹도록」 지으셨다고 말하고, 4절에서는 「감사와 함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하나도 버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감사는 자신이 누리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만 여기지 않고, 그것을 주신 분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음식을 먹는 일은 너무도 평범합니다. 때로는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평범한 행동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게 합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어떤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일이 그분을 인정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음식을 거룩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청원으로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4:5 · 본디새김
이미 좋은 것인데 왜 다시 거룩해져야 할까요? 「거룩해진다」는 말은 음식의 물질적인 성질이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안에서 음식을 받아들이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창조를 선하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나 음식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기도 가운데 선포되거나 사용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후자는 감사의 기도가 하나님의 계시와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음식이 기도의 주문 같은 힘으로 비로소 먹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쪽 사람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면 그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한쪽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받아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겉으로 보면 앞사람이 더 경건해 보일 수 있지만, 바울은 뒷사람의 태도에서 창조주를 올바르게 인정하는 믿음을 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것을 거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상적인 식사 한 번이 창조주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신앙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좋은 섬기는 이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이 일들을 형제들에게 일러 주면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섬기는 이가 될 것입니다.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따라온 좋은 가르침으로 길러지면서 말입니다.디모데전서 4:6 · 본디새김
바울은 디모데에게 단순히 사람들을 꾸짖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디모데는 공동체의 사람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고, 그 자신도 좋은 가르침으로 길러져야 합니다. 「길러지면서」는 양육되거나 길러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음식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의 좋은 섬기는 사람이 무엇으로 자라는지 말합니다. 믿음의 말씀과 좋은 가르침입니다.
몸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으로 자라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랍니다.
바울이 몸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는 먹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물과 연결됩니다.
디모데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말씀으로 길러져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자리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과 이해를 계속 길러야 하는 책임을 맡는 일입니다.
버려야 할 것도 있다
속되고 노파들이 할 법한 꾸며 낸 이야기는 물리치십시오. 도리어 경건에 이르도록 그대 자신을 단련하십시오.디모데전서 4:7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음식을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꾸며 낸 이야기를 물리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주신 것은 감사히 받아들이되, 사람들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이야기는 거부해야 합니다.
「노파들이 할 법한」은 근거 없는 이야기를 낮추어 부르는 당시의 관용 표현입니다. 이것을 나이 든 여성들이 본래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이라는 일반적인 판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성별이나 나이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성격입니다.
이제 음식의 이미지에서 운동의 이미지로 넘어갑니다.
경건은 단련하는 것이다
몸을 단련하는 것은 제한된 범위에서 유익하지만 경건은 지금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에 대한 약속을 지니고 있어 모든 일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4: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운동보다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이해됩니다. 틀린 방향은 아니지만, 바울은 단순히 육체와 영혼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훈련이 사람을 참된 경건으로 이끄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처럼 단련하십시오
7절의 「단련하십시오」는 운동이나 훈련을 뜻하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4–27에서도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와 권투하는 사람의 이미지로 자신의 사역과 절제를 설명합니다.
경건은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운동선수가 자신의 몸을 단련하듯이, 그리스도인도 믿음의 삶을 꾸준히 훈련해야 합니다. 그 목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은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와 그에 합당한 삶을 함께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단련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그 배움을 실제 삶에서 계속 실천하는 것입니다.
몸의 단련은 유익하지 않은가
「제한된 범위에서」(ὀλίγος)로 옮긴 말은 본래 「조금」이라는 뜻이어서, 유익의 정도가 작다는 뜻으로도, 유익이 미치는 범위나 기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몸을 단련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갈립니다. 일반적인 육체 훈련으로 읽으면 바울은 운동의 가치를 인정하되 경건의 더 큰 가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앞의 음식과 혼인에 관한 금욕적 훈련과 연결하여 읽으면, 육체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종교적 훈련이 일정한 유익을 줄 수 있어도 참된 경건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두 해석은 모두 문맥상 검토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몸 자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고, 몸의 훈련에도 유익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경건의 가치는 시간의 범위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일은 현재의 삶뿐 아니라 앞으로 올 생명과도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경건한 사람이 지금 당장 건강과 부와 성공을 모두 얻는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수고하며 힘써 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경건의 유익은 고난이 없는 생활을 보장하는 데 있지 않고, 앞으로 올 생명에 대한 소망을 붙들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
우리가 이를 위해 수고하며 힘써 싸우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요 특히 믿는 이들의 구원자이십니다.디모데전서 4:10 · 본디새김
바울은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수고하고 싸운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단련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일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바라보기 때문에 계속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자, 특히 믿는 이들의 구원자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면서 특히 믿는 이들의 구원자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해석은 세 갈래로 갈립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마련하시고 믿는 이들이 그것을 실제로 누린다는 읽기,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베푸신다는 읽기,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범위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읽기입니다. 논쟁의 핵심은 「특히」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에서 믿는 이들을 구별하는지이고, 그에 따라 구원의 적용 범위에 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10절만으로 모든 사람이 결국 구원받는다고 확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을 아무런 설명 없이 사실상 믿는 사람들로만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구원자이시고,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자신들의 수고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무엇을 포기해야 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때문에 자신을 단련하라고 합니다.
그 단련의 중심에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단련하십시오」는 오늘날 영어의 gymnasium과 같은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10절에는 사본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사본의 읽기는 「수고하며 힘써 싸우는」 것이고, 다른 주요 본문에서는 「수고하고 모욕을 받는」 것으로 읽습니다. 전자는 분투를, 후자는 사역 가운데 겪는 비난을 강조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들의 삶이 어려움과 노력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자」에 관한 첫째 읽기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향하는 범위를, 「특히 믿는 이들」은 그 구원이 실제로 경험되는 사람들을 강조합니다. 둘째 읽기는 「구원자」를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하며, 8절의 「지금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셋째 읽기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자라는 표현을 그 자체로 강하게 받아들이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젊은 지도자가 권위를 얻는 방법
이 일들을 당부하고 가르치십시오. 아무도 그대의 젊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말과 처신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이들에게 본이 되십시오.디모데전서 4:11–12 · 본디새김
바울은 디모데가 젊다는 이유로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충분히 받지 못할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자신의 권위를 강하게 주장해야 할까요? 사도로부터 위임받은 지위를 강조해야 할까요?
바울의 대답은 다릅니다.
디모데는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더 강한 태도를 보여 주라는 명령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본받을 만한 모습을 보게 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무엇에서 본이 되어야 할까
말은 다른 사람들이 듣는 것이고, 처신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다음에 사랑과 믿음과 순결을 덧붙입니다. 말과 행동을 움직이는 내면의 방향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순결」은 성적인 의미에만 제한할 필요는 없고, 행동과 동기가 깨끗하고 흠 없이 유지되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통해 그 가르침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1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나아가는 모습이 드러나게 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디모데 역시 계속 자라야 하는 사람입니다.
권위는 맡겨진 직무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에 대한 신뢰는 삶을 통해 확인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당부하고 가르치는 일과 본이 되는 일을 분리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조금 더 깊이
디모데의 정확한 나이는 이 구절에서 알 수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젊다」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청소년만을 가리키지 않았으므로, 이 표현만으로 디모데가 몇 살이었는지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낭독하고, 권하고, 가르치라
내가 도착할 때까지 낭독과 권함과 가르침에 마음을 두십시오.디모데전서 4:13 · 본디새김
권함과 가르침이 뒤따르는 것을 보면, 「낭독」은 공동체 앞에서 성경을 읽는 일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대에는 문서를 제작하고 소유하는 일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 성경을 듣는 일은 믿음을 배우고 형성하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낭독은 기록된 말씀을 공동체가 듣게 하는 일입니다. 권함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믿음과 삶을 향해 호소하는 일입니다. 가르침은 말씀의 의미와 내용을 이해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가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그 말씀에 응답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받은 선물을 소홀히 하지 말라
그대 안에 있는 은혜의 선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예언을 통하여, 장로단의 안수와 함께 그대에게 주어졌습니다.디모데전서 4:14 · 본디새김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지금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언제나 충실하게 사용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이 정확히 어떤 은사였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앞의 낭독과 가르침의 문맥을 고려하면 말씀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섬기는 사명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특정한 능력 하나로 제한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디모데는 자기 자신에게 사명을 부여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고, 그 은사를 인정하며 사역을 맡긴 공동체의 경험이 있습니다. 바울의 명령은 과거에 받은 은사를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선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목적을 이루지 않습니다. 사용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낭독」(ἀνάγνωσις)의 원문 낱말 자체가 반드시 공개 낭독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문맥에서 공동체의 예배와 가르침에 사용되는 성경 낭독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4:16–21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받아 읽으시고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 장면에서도 성경을 읽는 일과 그 의미를 밝히는 일이 연결됩니다. 14절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1:18에서도 디모데에 관하여 전에 주어진 예언들이 언급되므로, 그의 사역을 확인하거나 격려하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수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는 민수기 27:18–23,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며 금식하고 기도한 뒤 안수하는 사도행전 13:2–3에도 나타납니다. 다만 안수가 어떤 방식으로 은사를 전달했는지, 예언과 안수 가운데 어느 것이 결정적인 수단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1:6에서는 바울 자신의 안수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일깨우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을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설명으로 볼 수 있지만, 반드시 동일한 의식이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대의 진보를 보게 하라
이 일들을 힘써 실천하고 이 일들에 몰두하십시오. 이는 그대가 나아가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4:15 · 본디새김
지도자가 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치는 능력도,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도, 자신의 행동을 분별하는 능력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성장의 모습을 감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지도자의 신앙을 신뢰하는 데에는 완벽한 이미지보다 실제적인 성장이 중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것이 적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배우며 이전보다 더 성숙하게 행동하는 사람의 성장은 믿음의 단련이 무엇인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본보기는 한 번 완성된 뒤 더 이상 바뀌지 않는 모습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자라나는 모습입니다. 6절의 「길러지면서」처럼, 디모데는 말씀으로 길러지는 사람이고 그 자라는 모습이 공동체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바울은 그에게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권위자가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계속 배우면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대 자신과 가르침을 살피라
그대 자신과 가르침을 살피십시오. 이 일들을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대 자신도 구원하고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4:16 · 본디새김
자신과 가르침을 함께 살피라
자기 자신만 살피면 가르치는 내용이 참된지 확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르침만 살피면 정확한 교리를 설명하면서도 자신의 삶이 그 가르침과 어긋나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야 하는 디모데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동안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올바른 가르침을 지키고 있다는 확신이 커질수록, 자기 행동을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일을 「꾸준히 계속하십시오」라고 권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도, 가르침을 바로잡는 일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디모데가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고요?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사람의 구원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디모데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영적인 성숙이나 사역의 성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만 처리하기에는 「구원할 것」이라는 표현이 너무 분명합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구원자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근원이십니다.
디모데는 그 구원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가 그 말씀을 충실하게 가르치고 자신의 삶에서도 지킬 때, 그 사역은 듣는 사람들의 구원과 연결됩니다.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믿음이 자동으로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진지한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은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 장은 어떤 사람들이 속이는 가르침에 몰두하다가 믿음에서 떠난다는 경고로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참된 가르침과 그에 충실한 삶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끕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하는 신중함은 지도자 개인의 명예가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과 구원이 걸려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자신의 구원에 관한 이 경고는 고린도전서 9:27에서 바울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한 뒤 자신이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조심한다고 말한 것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책임과 자기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책임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자라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감사히 받아들이고, 말씀은 자신을 기르는 양식으로 삼고, 은사는 소홀히 하지 않고 사용하고, 맡겨진 사역은 꾸준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긍정하라는 낙관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바울은 꾸며 낸 이야기를 물리치고 자기 자신과 가르침을 철저히 살피라고 명령합니다. 거짓된 금욕은 포기를 통해 더 거룩해지려 했지만, 바울이 권하는 단련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둔 소망에서 나옵니다. 경건은 일상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할수록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그분 앞에서 분별하여 바르게 누리고 사용하는 가운데 자랍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특별한 지위나 권위를 다시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그대 자신과 가르침을 살피십시오」라고,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그 앞에 놓인 일은 낭독과 권함과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디모데 자신도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그 말씀으로 길러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돌보면서 자신의 믿음도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까지 디모데를 가르치는 사람인 동시에 배우는 사람으로 세워 둡니다.
그의 앞에는 자신이 전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는 디모데 자신도 서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