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장 · 식구처럼 돌보기

공경과 돌봄의 책임

교회 안에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여인이 있습니다. 가족이 곁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왔고, 누군가는 아직 젊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가진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먼저 도와야 할까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요?

한편 교회를 이끄는 장로들도 있습니다. 성실하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못을 저질렀다는 고발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존경받는 지도자라는 이유로 고발을 무시해야 할까요? 아니면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죄인으로 취급해야 할까요?

디모데전서 5장은 이런 문제들을 다룹니다.

처음 읽으면 과부를 지원하는 규정과 장로를 다루는 규정이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부분을 연결하는 낱말이 있습니다.

바로 「공경」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과부 가운데 참으로 과부인 이들을 공경하라고 말하고, 17절에서는 잘 이끄는 장로들이 갑절의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두 표현은 같은 그리스어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이 공경은 과부에게는 실제적인 부양과, 장로에게는 수고에 합당한 보상과 연결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공경은 마음속의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그에게 무엇을 제공하며, 그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5장을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바울은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하여,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돕는 책임을 살피고, 마지막에는 교회 지도자에 대한 존중과 공정한 판단을 다룹니다. 그리고 그 모든 권면을 마친 뒤, 사람의 죄와 선한 행실이 언제 드러나는지에 관한 뜻밖의 관찰로 장을 끝냅니다.

읽는 시간 32분소단락 105장 본문 읽기 →

교회를 가족처럼 대한다는 것

디모데전서 5:1–2 본문 →

어른을 호되게 나무라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 어른에게 아버지를 대하듯 권하십시오. 젊은 남자들에게는 형제를 대하듯, 나이 든 여자들에게는 어머니를 대하듯, 젊은 여자들에게는 자매를 대하듯 온전히 순결하게 권하십시오.디모데전서 5:1–2 · 본디새김

바울은 교회를 단순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 안의 관계를 가족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교회에는 나이와 신분, 형편과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되게 나무라지」 말라는 것은 잘못을 지적하지 말라는 뜻일까?

나이 든 사람이 잘못된 일을 해도 나무라지 말아야 할까요?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호되게 나무라다」(ἐπιπλήσσω)로 옮긴 동사는 본래 치거나 타격을 가하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나왔으며, 여기서는 상대방을 거칠게 질책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반면 「권하다」는 상대를 타이르고 권면하여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일입니다. 바울은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 자체보다, 그것을 행하는 태도를 봅니다.

나이 든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말로 후려치듯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대하라는 것은 아버지가 언제나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과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존중해야 할 이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원칙은 젊은 사람들과 여자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이어집니다. 젊은 여자들을 「자매를 대하듯 온전히 순결하게」 대하라는 말은, 목회적인 관계에서 성적인 부적절함과 사적인 욕망이 끼어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성적인 문제에만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모든 관계가 존중과 절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족처럼 서로 가까워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함부로 대할 권리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친밀함과 존중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가족이라는 표현을 훨씬 더 현실적인 문제로 가져갑니다.

누군가를 가족처럼 대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대답은 의지할 곳 없는 과부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참으로 과부인 이들」은 누구인가

디모데전서 5:3–8 본문 →

과부 가운데 참으로 과부인 이들을 공경하십시오.디모데전서 5:3 · 본디새김

남편을 잃었으면 과부인데, 참으로 과부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왜 구별할까요?

그 이유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어떤 과부에게는 자녀나 손주가 있습니다. 반면 어떤 과부는 정말로 홀로 남아 의지할 가족이 없습니다. 「참으로 과부」라는 표현은 남편을 잃은 사실의 진위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족의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공경은 실제적인 돌봄이다

「공경하다」(τιμάω)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뜻하지만, 문맥에 따라 물질적인 지원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4절에서는 자녀와 손주가 과부를 부양해야 한다고 말하고, 16절에서는 교회가 참으로 과부인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가족이 먼저 책임을 다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3절의 공경은 예의를 갖추거나 존경하는 말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구약에서 과부는 고아와 나그네와 함께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을 잃은 여자는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과부가 가난했던 것은 아니지만, 남편의 죽음으로 가족의 보호와 경제적 기반을 잃는 일은 실제적인 위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은 과부를 돌보는 일을 개인의 선택적인 친절에만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정의와 연결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도 그 흐름이 이어집니다. 과부를 돌보는 것은 여유가 있을 때 베푸는 호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받은 것을 앞선 세대에게 갚으라

그런데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주가 있으면, 그들이 먼저 자기 집안을 경건히 받들고 받은 것을 앞선 세대에게 갚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일 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5:4 · 본디새김

바울은 가족이 있는 과부를 교회가 돌볼 필요가 없다고 냉정하게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조부모는 자녀와 손주가 어렸을 때 먹이고, 돌보고, 가르치고, 보호했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놓였습니다. 여기서 「갚는다」는 말을 금전적인 빚을 정산한다는 의미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앞선 세대에게 받은 돌봄에 보답하는 관계적인 책임을 가리킵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본 것은 미래에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가 성장하여 부모를 돌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과거에 받았던 사랑과 돌봄을 기억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단순한 가족 윤리가 아니라 경건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흔히 경건을 기도하거나 예배드리는 모습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모와 조부모를 돌보는 일도 경건을 실천하는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야 합니다.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사람

5절과 6절에서 바울은 두 종류의 과부를 대조합니다. 한쪽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과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흥청거리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흥청거리며 사는 이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습니다.디모데전서 5:6 · 본디새김

「흥청거리며 사는」 것은 자기만족과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과부에게 오직 슬픔과 기도만 허락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과 자기 욕망만을 중심에 두는 삶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조를 경제적인 지원 여부와 기계적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신앙적으로 성숙해야만 음식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본문의 돌봄에 관한 가르침이 왜곡됩니다.

그리고 8절에서 바울은 과부를 돌볼 수 있는데도 돌보지 않는 사람을 향해 매우 엄중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자기 친족, 무엇보다 집안 식구를 부양하지 않으면, 믿음을 저버린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디모데전서 5:8 · 본디새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가족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외면한다면, 그 믿음이 삶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기본적인 가족 부양의 책임을 그리스도인이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다만 이 구절은 실제로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돌볼 책임과 능력이 있음에도 그 책임을 외면하는 행위가 문제입니다. 또한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의 지원을 무조건 거절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가족이 실제로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지 살피지 않고 지원을 끊는 것은 3절의 공경 명령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책임의 순서입니다.

이제 바울은 더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갑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돌보는 과부의 명부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0:18은 여호와야훼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해 공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신명기 24:19–21은 추수할 때 남겨진 곡식과 열매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 두라고 명령합니다. 부모를 돌보는 일을 경건으로 보는 4절은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7:9–13에서 지적하신 문제와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명목으로 부모에게 제공해야 할 도움을 거부하는 관행을 비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종교적인 명분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7:11–17에서 예수님께서는 남편에 이어 외아들까지 잃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를 믿는 공동체라면,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에도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과부의 명부에 기록된 것은 무엇인가

디모데전서 5:9–10 본문 →

과부로 명부에 오를 이는 적어도 예순 살이 되었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사람이라야 합니다.디모데전서 5:9 · 본디새김

여기에는 특별한 제도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이 명부는 그저 도움이 필요한 과부들의 지원 대상자 명단이었을까요? 아니면 교회 안에서 특별한 사역을 맡은 과부들의 명단이었을까요? 본문은 명부의 운영 방식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 해석은 이 명부를 교회의 지속적인 부양을 받는 과부들의 명단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명부에 오른 과부들이 일정한 기도와 봉사의 책임도 맡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고대 교회 문헌에는 과부들이 특별한 기도와 섬김의 역할을 맡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 후기의 제도를 디모데전서의 시대에 그대로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명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제도였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예순 살이라는 기준을 이해할 때 중요합니다. 바울이 예순 살 미만의 과부에게는 어떤 도움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9절은 특정한 명부에 오를 자격을 말할 뿐, 모든 형태의 긴급한 구호나 개인적인 지원을 금지하는 규정이라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11절에서도 젊은 과부들을 「명부에 받아들이지 마십시오」라고 하지, 그들이 어려움을 겪더라도 돕지 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과거를 왜 살피는가

좋은 일을 했다고 증언을 받는 이라야 합니다. 곧 자녀를 길렀고, 손님을 맞아들였고, 성도들의 발을 씻었고, 고난받는 이들을 도왔고, 온갖 선한 일에 힘썼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5:10 · 본디새김

바울은 과부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했는지, 어떤 가문 출신인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평생 누구를 돌보았는지를 살핍니다. 이 모든 행동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수고를 사용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발을 씻었고」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먼지가 많은 길을 샌들을 신고 걷는 일이 흔했던 시대에,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실제적인 환대의 행동이었습니다. 동시에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지금 교회가 돌보아야 할 사람은 과거에 다른 사람들을 돌보았던 사람입니다.

그 여인은 자녀를 길렀고, 낯선 사람을 맞아들였고, 고난받는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들고 남편을 잃어 자신이 도움을 받아야 할 자리에 놓였습니다. 바울은 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라고 합니다.

다만 10절의 목록을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자녀를 기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인 여성이 선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자녀를 길렀다」는 표현에는 친자녀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을 돌본 경우도 포함될 수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특정한 가족 형태보다, 삶에서 드러난 선한 행실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젊은 과부에 관한 규정이 등장하면서 이 단락은 한층 어려워집니다.

조금 더 깊이

발을 씻기는 일에서 요한복음 13장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자신이 그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데도 발을 씻어 주었으니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3:12–15). 디모데전서가 그 장면을 직접 인용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두 본문은 발을 씻기는 행위를 통해 타인을 섬기는 삶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왜 젊은 과부는 명부에 받아들이지 않는가

디모데전서 5:11–15 본문 →

그러나 젊은 과부들은 명부에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슬러 욕정에 끌리면 혼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5:11 · 본디새김

처음 읽으면 당황스럽습니다.

젊은 과부가 다시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바울은 바로 뒤에서 젊은 여자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집안을 돌보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11절에서는 결혼하려는 욕구를 문제 삼는 듯한데, 14절에서는 결혼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12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심판 아래 있습니다. 처음의 믿음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5:12 · 본디새김

문제는 결혼 자체가 아니라 「처음의 믿음」을 저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무엇을 저버렸다는 것일까

「처음의 믿음」에서 「믿음」은 신앙 자체를 뜻할 수도 있고, 약속이나 신의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크게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첫째는 처음에 가졌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버렸다는 해석입니다. 이 경우 바울은 단순히 재혼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떠나는 일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과부의 명부에 오를 때 그리스도께 특별히 헌신하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렸다는 해석입니다. 명부에 오른 과부들이 일정한 독신 생활이나 봉사를 약속했다면, 젊은 과부가 나중에 결혼하려 할 때 그 약속을 깨뜨리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바울이 재혼 자체를 금지하지 않고 오히려 권한다는 점, 곧 11절과 14절의 긴장을 설명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부에 등록할 때 반드시 독신 서약을 했다는 사실은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전적인 주석은 그러한 헌신 서약을 중요한 해석 근거로 제시하지만, 이는 본문에서 추론한 설명이므로 확정된 역사적 사실로 전제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바울이 결혼 자체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7:39에서도 배우자를 잃은 사람에게 재혼의 자유가 있음을 인정하고, 디모데전서 4:3에서는 혼인을 금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므로 5:11–12를 젊은 과부가 재혼을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다른 본문들과 충돌합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함을 저버리는 일이며, 그 구체적인 상황에는 해석상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빈둥거리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빈둥거리는 것을 배웁니다.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 남의 일에 참견하며, 해서는 안 될 말을 합니다.디모데전서 5:13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젊은 과부들을 게으르고 수다스러운 사람들로 일반화하는 것처럼 보여 오늘날 독자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모든 젊은 여성에 대한 성격 평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특정한 공동체 상황, 곧 여러 집을 오가는 동안 쓸데없는 말을 전하거나 남의 일에 참견하게 되는 상황을 경계합니다.

「빈둥거리는 것을 배웁니다」는 원문 문법상 「빈둥거리며 배운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이 문제 삼는 행동은 분명합니다. 맡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삶을 간섭하며, 해서는 안 될 말을 퍼뜨리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미 모든 젊은 과부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15절에서는 「이미 어떤 이들은」 사탄의 뒤를 따라 곁길로 빠졌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나타난 문제를 염두에 두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적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4절의 결혼과 출산에 관한 권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결혼하고 집안을 건사하라

그러므로 나는 젊은 여자들이 혼인하고 아이를 낳고 집안을 건사하며, 맞서는 이에게 비방할 빌미를 조금도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디모데전서 5:14 · 본디새김

이 권면은 잘못된 가르침이 혼인을 금한다고 했던 디모데전서 4장의 내용과도 연결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악한 일이 아니며,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삶의 방식입니다.

다만 이 문장을 모든 젊은 여성이 반드시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명령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젊은 과부들의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그의 권면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삶이 언제나 열등하다는 판단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집안을 건사하며」(οἰκοδεσποτέω)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집안을 관리하고 이끄는 일을 가리킵니다. 수동적으로 집에 머물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이 여성의 활동을 가정 안으로만 제한하는 모든 시대의 규정인지에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구절에서 바울의 관심은 그들이 그리스도께 충실하며 책임 있는 생활을 하고, 교회를 비방하려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긴 논의의 마지막에 바울은 처음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빈둥거리는 것을 배웁니다」의 원문은 아르가이 만타누신입니다. 「빈둥거리는」에 해당하는 말이 주격 형용사여서, 「빈둥거리는 것을 배운다」뿐 아니라 「빈둥거리며 배운다」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고, 그렇다면 그들이 무엇을 배우는지는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부 해석은 그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게으른 생활 습관을 익힌다고 이해하고, 다른 해석은 빈둥거리는 상태에서 여러 이야기를 듣고 배워 그것을 다른 집에 옮기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교회가 돌볼 수 있도록 가족이 도우라

디모데전서 5:16 본문 →

믿는 여자에게 과부들이 있으면 그 여자가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부담이 지워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참으로 과부인 이들을 도울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5:1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3절에서 시작된 과부에 관한 논의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명부에 관한 여러 기준을 설명했지만, 결국 처음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누가 누구를 돌보아야 하는가?

그런데 왜 여기서는 특별히 믿는 여성을 언급할까요? 앞에서는 자녀와 손주, 친족과 집안 식구 모두에게 부양의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16절에서 여성을 언급했다고 해서 남성에게는 가족을 돌볼 책임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여성을 명시한 이유는 특정한 돌봄의 상황과 관련되었을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가족 관계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 구절의 뜻을 밝힙니다. 바울은 교회가 돌봄의 책임에서 벗어나도록 가족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도록 책임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아무런 분별 없이 같은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언제나 공정한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사람과,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는 사람의 형편은 다릅니다. 바울은 그 차이를 살펴, 가장 의지할 곳 없는 사람에게 공동체의 돌봄이 실제로 닿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과부들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장로들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러나 주제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누군가를 공경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 19:26–27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채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서로를 어머니와 아들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요한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합니다. 그 장면이 디모데전서의 과부 지원 제도를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고난 가운데에서도 어머니의 장래를 돌보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도움이 필요한 가족을 돌보는 일이 서로 적대적인 책임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고(1:15),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신 한 분 중개자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2:5–6). 교회가 사람을 소중히 대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장로에게 주어지는 갑절의 존귀

디모데전서 5:17–18 본문 →

잘 이끄는 장로들은 갑절의 존귀를 받기에 합당한 이들로 여겨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 그렇습니다.디모데전서 5:17 · 본디새김

여기서 장로는 1절의 「어른」과 구별됩니다. 그리스어에서는 둘 다 프레스뷔테로스(πρεσβύτερος)라는 낱말을 사용하지만, 1절에서는 젊은 사람들과 대비되는 나이 든 남자를, 17절에서는 교회를 잘 이끄는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받기에 합당하다는 「갑절의 존귀」는 무엇의 갑절일까요?

존경인가, 보수인가

「존귀」는 3절의 「공경하십시오」와 같은 어근의 낱말입니다. 이 낱말은 존경이나 명예를 뜻할 수도 있지만, 문맥에 따라 물질적인 가치나 보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갑절의 존귀」를 존경을 더 많이 받으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사역에 합당한 물질적 지원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타작하는 소의 입을 막지 마라.」 그리고 「일꾼은 자기 삯을 받을 만하다.」디모데전서 5:18 · 본디새김

바울은 갑절의 존귀를 설명하면서 노동과 보수에 관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존귀에는 실제적인 물질적 보상이 포함된다고 읽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갑절」을 어떤 기준 금액의 정확히 두 배로 계산해야 한다는 뜻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합당하고 넉넉한 존중과 지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부를 공경하라는 말이 실제적인 도움과 연결되었듯이, 장로를 공경하라는 말도 그들의 수고를 정당하게 인정하고 지원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타작하는 소의 입을 막지 마라

18절의 첫 번째 인용은 신명기 25:4에서 왔습니다. 소가 곡식을 밟아 낟알을 떨어내며 일하는데, 그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입을 막는다면 노동하는 동물에게조차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됩니다. 바울은 이 명령을 인간에게도 소처럼 먹을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옮겨 놓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의의 원리를 읽어 냅니다. 노동하는 사람에게 그 수고에 합당한 몫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용인 「일꾼은 자기 삯을 받을 만하다」는 누가복음 10:7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 문장을 어디서 가져왔는지에는 논의가 있지만, 바울이 말하려는 원리는 분명합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사람들의 노동 역시 정당하게 인정되어야 합니다.

다만 바울은 「잘 이끄는」 장로들을 말합니다. 장로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수고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장로를 공경해야 한다고 말한 바울이 이제는 장로를 고발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은 고린도전서 9:9–14에서도 신명기 25:4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그 사역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설명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두 문장을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라는 하나의 도입구 아래에 놓습니다. 첫 번째 문장이 신명기 25:4에서 왔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두 번째 문장이 누가복음이라는 문서를 직접 인용한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으로 전해지던 전승을 사용한 것인지, 당시 알려진 격언을 가져온 것인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두 문장을 모두 그 도입구 아래에 읽는 해석이 있는 반면, 도입구를 첫 번째 인용에 우선 적용하고 두 번째 문장은 이어지는 별도의 격언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장로를 보호하되, 장로의 죄를 덮지 말라

디모데전서 5:19–21 본문 →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의 증언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이지 마십시오.디모데전서 5:19 · 본디새김

지도자는 공동체 안에서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중요한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의 불만이나 원망을 살 수도 있고, 정당한 이유가 없는 고발로 사람의 명예와 사역이 무너질 위험도 있습니다. 이 기준은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죄를 확정하지 말고 두세 증인의 증언에 근거하여 사건을 확정하라는 신명기 19:15의 율법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한 사람만 피해를 말하면 조사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고발을 판단하고 확정하는 일의 신중함을 요구할 뿐, 고발의 내용을 확인하거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까지 금지하지 않습니다.

특히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잘못은 여러 사람이 직접 목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한 사람의 진술을 무조건 거짓으로 취급하거나, 지도자에 대한 문제 제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를 넘어섭니다.

바울은 지도자가 억울한 고발로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보호가 지도자의 죄를 감추는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는 이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하라

죄를 짓는 이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하십시오. 다른 이들도 두려운 마음을 지니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5:20 · 본디새김

고발을 함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령과 공개적으로 책망하라는 명령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고발로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죄가 드러났다면 그 사실을 덮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공정한 판단입니다.

20절의 「죄를 짓는 이들」은 앞절의 문맥상 잘못이 확인된 장로들을 우선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표현을 공동체 전체의 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원칙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나이 든 사람을 「호되게 나무라지」 말라고 했는데, 20절에서는 죄를 짓는 사람을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하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동사가 다릅니다. 1절의 표현은 사람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행동을 금지하고, 20절의 표현은 잘못을 드러내고 바로잡는 일을 가리킵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일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존중과 책임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특히 지도자의 경우에는 그 책임이 더욱 무겁습니다. 공동체의 신뢰를 받는 사람의 잘못이 감추어진다면, 그 피해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입견 없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함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선입견 없이 이것들을 지키되 아무 일도 어느 한쪽에 치우쳐 행하지 말라고 그대에게 엄히 이릅니다.디모데전서 5:21 · 본디새김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단순한 행정적인 조언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와 책임을 판단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택함을 받은 천사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천사들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엄숙한 선언이 판단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선입견과 편파성을 경계합니다. 선입견은 충분히 확인하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려 놓는 태도이고, 편파성은 사람의 신분이나 관계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태도입니다.

둘은 서로 다르지만 함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잘못을 쉽게 눈감아 주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의혹만으로도 죄를 확정할 수 있습니다. 유력한 지도자의 잘못에는 관대하면서, 힘없는 사람의 잘못에는 엄격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판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에게 특권을 주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대하는 일입니다.

장로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과부는 도움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형편을 살피지 않고 획일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은 부양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까지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공정한 판단의 원칙을 사람을 세우는 일에도 적용합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죄를 짓는」은 현재분사여서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반드시 오랜 기간 반복된 죄여야 공개적인 책망의 대상이 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확인된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문맥입니다.

성급히 손을 얹지 말라

디모데전서 5:22–23 본문 →

아무에게도 성급히 손을 얹지 마십시오. 남의 죄를 함께 나누지도 마십시오. 그대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십시오.디모데전서 5:22 · 본디새김

「손을 얹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디모데전서 4:14에서는 디모데가 장로단의 안수와 함께 은사를 받았다고 했고, 사도행전 6:6과 13:3에서도 사람들을 사역에 세우는 과정에 안수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도 교회의 직무를 맡길 사람에게 안수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과정의 안수나 화해의 행위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장로들을 판단하고 세우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지도자 임명에 관한 경고로 읽는 견해에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문제는 안수 자체가 아닙니다.

충분히 살피지 않고 너무 서둘러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남의 죄를 함께 나누지도 마십시오」라는 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함께 나누다」(κοινωνέω)로 옮긴 동사는 신약에서 좋은 것에 함께 참여하는 일을 설명할 때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죄를 함께 나누는 일에 쓰입니다.

공동체를 이끌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은 채 지도자로 세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나중에 사람들을 해치거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한다면, 그 사람을 세운 책임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타인의 모든 죄가 자동으로 임명한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던 위험을 무시하고 사람을 세우거나, 잘못을 알고도 그에게 권한을 계속 맡긴다면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은 성급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일도 성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포도주 이야기가 나올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대의 위장과 잦은 병 때문에 포도주를 조금 마시십시오.디모데전서 5:23 · 본디새김

사람을 세우는 책임과 남의 죄에 관한 경고 사이에, 디모데의 위장과 건강에 관한 개인적인 조언이 들어 있습니다. 디모데는 위장에 문제가 있었고 잦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을 오늘날 포도주가 위장 질환에 효과적인 치료법이라는 의학적 판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시대와 디모데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개인적인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은 「그대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지나치게 엄격한 금욕 생활로 건강까지 해치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4장에서 음식과 혼인을 금하는 잘못된 금욕주의를 비판했으니, 이제 디모데 자신도 몸을 해치는 지나친 절제를 피하도록 권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물만 마신 이유를 본문이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를 그의 금욕주의 때문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를 돌보라고 명령하면서, 디모데 자신의 건강도 살핀다는 사실입니다. 과부는 부양받아야 하고, 장로는 수고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며, 디모데 자신도 몸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사람은 단순히 일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몸을 지니고 살아가며 실제적인 필요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포도주에 관한 짧은 조언 뒤에 바울은 다시 사람을 분별하는 문제로 돌아가, 장의 마지막에 인상적인 이미지를 남깁니다.

어떤 죄는 앞서 가고, 어떤 죄는 뒤따라간다

디모데전서 5:24–25 본문 →

어떤 사람들의 죄는 심판을 향해 그들보다 앞서 가며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사람들을 뒤따라갑니다.디모데전서 5:24 · 본디새김

죄가 마치 사람과 별도로 움직이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앞에서는 사람을 성급히 세우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사람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이유는 조사해야 할 항목이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진실이 언제나 즉시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와 뒤늦게 밝혀지는 죄

어떤 사람은 잘못된 행동이 너무 분명해서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죄는 마치 그보다 앞서 가는 것처럼 드러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겉으로는 신뢰할 만해 보이지만, 나중에 감추어진 잘못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지도자를 세우는 일과 연결됩니다. 누군가가 좋은 말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며, 능력이 뛰어나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죄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25절에서 같은 구조를 선한 행실에 적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행위 가운데도 훤히 드러나 있는 것들이 있고, 그렇게 드러나 있지 않은 좋은 행위들도 숨겨질 수 없습니다.디모데전서 5:25 · 본디새김

드러나지 않는 선한 행실도 있다

어떤 사람의 좋은 행동은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돕고, 중요한 일을 맡고, 공동체에서 눈에 띄는 봉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도 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선한 행실이 당장 드러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숨겨질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모든 선한 행동이 반드시 세상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된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그 드러남을 공동체 안에서 시간이 지나며 밝혀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를 세울 때도, 누군가를 판단할 때도,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사람을 제대로 본다는 것

디모데전서 5:1–25 본문 →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5장의 모든 권면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칠게 나무라서는 안 되고, 과부라는 이유로 모두 같은 형편이라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장로라는 이유로 모든 고발을 덮어서도 안 되고, 누군가 고발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으로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부모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일 만한 일이고(5:4), 장로에 관한 판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과 택함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5:21). 바울이 말하는 공경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책임, 실제로 행한 일을 제대로 살피는 데서 드러납니다.

좋은 공동체는 사람의 죄를 무조건 감추는 공동체도 아니고, 눈에 띄는 업적만 인정하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드러난 잘못에는 책임을 묻고, 드러나지 않은 선한 행실도 소홀히 하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말씀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수고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오랫동안 자녀를 기르고, 낯선 사람을 맞아들이고, 성도들의 발을 씻고, 고난받는 사람을 도왔던 여인들도 있습니다. 자녀를 기르는 수고는 오랜 시간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고, 손님을 맞아들이는 친절과 고난받는 사람을 돕는 일도 조용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이제 나이가 들어 홀로 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한때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살아온 삶을 살피고, 실제로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그들을 공경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서 조용히 덧붙입니다. 「그렇게 드러나 있지 않은 좋은 행위들도 숨겨질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어 주던 손길, 고난받는 이웃을 위해 내어 준 시간, 오랫동안 가족을 돌보며 들인 수고가 당장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서 그 행실들은 공경받아야 할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공동체가 그에게 손을 내밀 차례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