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장 · 재물과 마지막 당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갈 것인가
사람은 무엇을 얻으면 넉넉해질까요?
재산이 많아지면 더 이상 부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한 지식을 갖추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도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 줍니다.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들이 있습니다. 경건을 이득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다가 믿음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진 부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특별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이야기의 한가운데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고, 또 아무것도 가지고 나갈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 장에서 두 번이나 무엇인가를 「붙잡으라」고 명령합니다. 12절에서는 디모데에게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십시오」라고 말하고, 19절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을 붙잡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돈을 붙잡으려다가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참된 생명을 붙잡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맡겨진 것을 지키십시오」라는 또 다른 명령이 등장합니다. 이 장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 대답은 단순히 재산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보다 누구에게 소망을 두고 있느냐가 사람의 삶을 결정합니다.
같은 형제인데 한 사람은 노예다
멍에 아래 있는 노예들은 모두 자기 주인을 온전한 존귀를 받을 만한 이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 가르침이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1 · 본디새김
6장의 첫 문장은 현대 독자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바울은 노예에게 자기 주인을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 노예 노릇을 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이 명령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당시의 노예제가 어떤 제도였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멍에 아래 있는 노예들」
여기서 「노예」는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이나 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소속되어 법적인 자유가 제한되고, 소유와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로마 사회에서 노예 가운데는 집안일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했든 주인에게 소유된 신분이라는 근본적인 조건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절을 현대의 직장생활에 관한 권면으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에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보다 훨씬 심각한 권력의 불균형이 있었습니다.
「멍에」는 원래 짐승에게 씌워 노동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이 표현은 노예의 신분이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강제로 복종해야 하는 상태임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주인을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1절 끝에 나옵니다. 노예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우선 노예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제가 하나님께서 본래 정하신 좋은 제도라는 선언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두 절에서 노예제의 폐지를 요구하지 않고, 주인에게 노예를 해방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실을 희석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바울이 노예들에게 복종을 권했다는 사실만으로 노예제의 모든 폭력과 소유 관계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의 명시적인 진술을 넘어갑니다.
형제인데 여전히 주인이다
그런데 믿는 주인을 둔 이들은 그 주인이 형제라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더욱 노예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 은덕을 입는 이들이 믿는 이들이고 사랑받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십시오.디모데전서 6:2 · 본디새김
노예도 그리스도인이고 주인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 밖의 사회적 관계에서는 여전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기 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긴장이었습니다.
「그 은덕을 입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문법적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믿는 주인들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그 주인들이 노예들의 충실한 섬김으로 혜택을 받는다는 해석이 문맥상 강합니다.
바울은 형제라는 관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관계를 전제로 권면합니다. 그러나 그 형제 관계가 법적인 노예 신분을 즉시 없애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 점에서 이 구절에는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 남아 있습니다.
빌레몬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이제 그를 「노예를 넘어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빌레몬서 1:15–16). 그곳에서도 바울은 법적인 해방을 명령하지 않지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바라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요청합니다. 갈라디아서 3:28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노예와 자유인이 하나라는 선언도 등장합니다.
이 말씀들이 곧바로 로마 제국의 노예제를 철폐하는 법률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노예 소유가 계속되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형제애가 역사적으로 노예제를 자동으로 없앴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같은 형제라는 고백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디모데전서 6장은 이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실제로 노예 신분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권면합니다. 오늘날 이 구절을 사람을 소유하거나 억압하는 관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당시 노예들에게 주어진 생존 조건 속의 권면을 모든 시대의 노예제 승인으로 바꾸는 것은 본문의 상황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이 두 절을 지나면 바울의 관심은 다시 가르침의 문제로, 경건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로 향합니다.
경건마저 이익을 얻는 수단이 될 때
누구든지 다른 가르침을 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맞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디모데전서 6:3 · 본디새김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편지의 첫머리에서 디모데에게 다른 가르침을 막으라고 당부했던 문제가 편지의 마지막에서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거짓 교사들의 또 다른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경건을 이득을 얻는 수단으로 여깁니다.
3절에서 바울은 참된 가르침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건전한」(ὑγιαίνω)이라는 표현은 건강하다는 뜻에서 나왔으며, 이 편지에서 가르침을 평가할 때 반복해서 사용됩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는 정반대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논쟁과 말다툼에 병적으로 집착하면서 교만에 부풀어 있습니다. 거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 그리고디모데전서 6:4 · 본디새김
예수님의 말씀은 건전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단순히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병든 상태의 특징이 나타난다고 묘사합니다.
지식이 많아 보이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 있게 주장하고, 여러 문제를 놓고 논쟁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에서 문제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모든 사실에 관해 무지하다는 뜻이라기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면서 정작 예수님의 말씀과 경건에 맞는 삶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시기, 분쟁, 비방, 악한 의심, 끊임없는 충돌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의 결과는 추상적인 사상의 오류로만 남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무너집니다.
바울은 가르침이 얼마나 정교한가만 묻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들을 어떤 상태로 이끌고 있는지도 살핍니다. 그리고 5절에서 문제의 또 다른 근원을 지적합니다.
생각이 부패하고 진리를 빼앗긴 사람들 사이의 끊임없는 충돌이 생깁니다. 그들은 경건을 이득을 얻는 수단으로 여깁니다.디모데전서 6:5 · 본디새김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자신이 경건해 보이면 더 많은 사람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별한 가르침을 내세우면 추종자를 얻을 수도 있고, 종교적인 영향력을 경제적인 이익으로 바꾸려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의 금전적 이득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득을 얻으려는 태도가 그들의 경건 이해를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비판하더니, 이번에는 경건이 큰 이득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더 얻지 않아도 넉넉한 사람
그런데 스스로 넉넉히 여기는 마음을 동반한 경건은 큰 이득입니다.디모데전서 6:6 · 본디새김
6절은 이 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전을 담고 있습니다.
5절의 「이득을 얻는 수단」(πορισμός)과 6절의 「이득」에는 동일한 그리스어 낱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이 낱말은 바로 이 두 절에만 나타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사용하는 바로 그 언어를 받아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참된 이득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표현은 「스스로 넉넉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넉넉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표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상태, 외적인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만족할 수 있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 낱말은 고대 스토아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었고, 특히 외부 환경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자족의 이상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족을 단순히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독립적인 능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11–13에서도 어떤 형편에서든 넉넉히 여기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면서, 그 능력을 자신에게 힘을 주시는 분과 연결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어떤 형편에 있든 살아갈 수 있다는 신뢰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도 바울은 뒤에서 부유한 사람들에게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넉넉함은 가진 것이 적어도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는 심리적인 조언이 아니라, 삶의 근거를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태도입니다.
거짓 교사는 경건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경건을 통해 무엇인가를 더 얻어야만 만족할 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납니다.
경건이 큰 이득인 까닭은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해야만 넉넉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고, 또 아무것도 가지고 나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6:7 · 본디새김
이 말은 단순하지만 인간의 소유에 관한 근본적인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실을 허무주의로 이끌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므로 아무것도 누리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을 가지고 만족하라고 합니다.
먹을 것과 몸을 가릴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8 · 본디새김
바울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필요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실제적인 삶에 속합니다. 문제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이 삶을 지배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재의 궁핍을 무조건 참으라고 강요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의식주조차 충분히 갖지 못한 사람에게 도움을 거절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소유를 향한 끝없는 욕망과 만족할 줄 아는 태도를 대조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생각은 구약의 지혜문학에서도 발견됩니다. 욥기 1:21에서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은 깊은 고통 속에서 자신이 모태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나왔으며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라고 고백합니다. 전도서 5:15–16에서도 사람이 태어날 때 빈손으로 나왔듯이 죽을 때도 자신의 수고로 얻은 것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말하지만, 인간의 소유가 가진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디모데전서와 연결됩니다.
돈을 얻으려다가 자신을 잃는 사람
그러나 부자가 되려는 이들은 시험과 올무와 어리석고 해로운 많은 욕망에 빠집니다. 그런 욕망들이 사람들을 무너짐과 멸망 속으로 가라앉힙니다.디모데전서 6:9 · 본디새김
바울은 「부자가 되려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미 가진 재산의 규모보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이 문제의 중심에 놓입니다. 뒤에서 실제로 부유한 사람들에게 권면할 때에도 재산을 모두 버리라고 말하지 않으므로, 9절을 재산이 많은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 결과를 세 단계로 묘사합니다.
먼저 시험과 올무에 빠집니다.
그다음 어리석고 해로운 많은 욕망에 빠집니다.
마침내 그 욕망들이 사람을 무너짐과 멸망 속으로 가라앉힙니다.
「가라앉힙니다」(βυθίζω)에 해당하는 원문의 동사는 물속에 가라앉히거나 잠기게 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욕망이 사람을 서서히 아래로 끌어내리는 모습을 그립니다.
더 많이 얻으려는 욕망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유익한 선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삶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관계를 희생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양심을 버리며,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단순한 경제적 실수가 아니라 사람을 무너뜨리는 영적인 위험으로 봅니다.
돈이 온갖 악의 뿌리인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온갖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돈 사랑을 열망하다가 꾀임을 받아 믿음에서 벗어났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꿰찔렀습니다.디모데전서 6:10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종종 「돈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라는 식으로 인용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 곧 탐욕을 말합니다. 돈은 가족을 부양하거나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돈이라는 물건 자체에 도덕적인 악이 들어 있다고 말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는 욕망이 사람을 죄로 이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온갖 악의 뿌리」는 탐욕의 파괴성을 강하게 강조하는 수사적인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악의 모든 원인을 분류하는 철학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돈 사랑이 얼마나 많은 종류의 악을 낳을 수 있는지 경고합니다.
10절 뒷부분은 이 경고를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바울은 실제로 돈 사랑에 사로잡혀 믿음에서 벗어난 「어떤 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지만, 이러한 일이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돈을 붙잡으려 했는데, 결국 자신이 고통에 찔렸습니다.
처음에는 돈을 얻으면 더 안전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 사랑은 오히려 그 사람을 무너뜨렸습니다. 욕망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얻는 것으로 반드시 끝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 자신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이 어두운 장면 뒤에 갑자기 한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뿌리」(ῥίζα)는 관사 없이 서술 명사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관사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여러 뿌리 중 하나」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모든 악이 예외 없이 돈 사랑에서만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논리적인 명제로 읽어야 하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달아나야 할 것과 뒤쫓아야 할 것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것들을 피해 달아나십시오. 그리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견딤과 온유한 마음을 뒤쫓으십시오.디모데전서 6:11 · 본디새김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구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신명기 33:1에서는 모세가, 열왕기상 17:24에서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특별한 사명을 맡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언제나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먼저 달아나라고 합니다.
달아나야 할 것은 앞에서 말한 돈 사랑과 거짓된 가르침, 교만과 분쟁을 낳는 욕망입니다. 이것은 비겁한 행동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아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아는 것과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바울은 의, 경건, 믿음, 사랑, 견딤, 온유한 마음을 뒤쫓으라고 말합니다.
이 가운데 마지막 두 가지, 견딤과 온유한 마음이 특별히 눈에 들어옵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고 공동체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견디는 힘이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지 않는 온유함도 필요합니다. 바울은 강함과 온유함을 서로 반대되는 성품으로 놓지 않고, 좋은 싸움을 싸우는 사람에게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좋은 싸움의 목적은 무엇인가
믿음의 좋은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십시오. 그대는 그 생명에 이르도록 부름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좋은 고백을 했습니다.디모데전서 6:12 · 본디새김
첫 번째 명령은 싸움이고, 두 번째 명령은 붙잡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시험과 욕망의 올무에 빠져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디모데에게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디모데가 자신의 노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가 영원한 생명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이미 그 생명에 이르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르심이 명령보다 앞섭니다.
바울이 명령하는 것은 새로운 구원의 자격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부름받은 생명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돈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재산을 추구하다가 믿음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생명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의 고백을 이야기한 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하신 고백을 떠올립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그리스도
만물을 살리시는 하나님과,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좋은 고백을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당부합니다.디모데전서 6:13 · 본디새김
왜 하필 이 장면일까요?
디모데는 많은 증인 앞에서 좋은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좋은 고백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고백을 그리스도의 고백과 연결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과 권력 앞에 선 사람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제국의 권력을 대표하여 유대를 통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피고인으로 서십니다.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처벌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이 있고, 예수님께서는 붙잡혀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 장면에서 예수님의 왕권에 관한 질문을 전합니다. 요한복음 18:33–37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대 사람들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밝히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치적 권력 앞에서 자신이 누구신지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의 좋은 싸움은 자신의 권력을 키우는 싸움이 아니라, 진리에 충실하게 서 있는 싸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권력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셨듯이, 디모데 역시 사람들의 반응과 압력 속에서 자신이 고백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싸움의 끝은 어디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이르기까지 그 계명을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것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14 · 본디새김
나타나실 때까지
디모데의 사명은 일시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충실하게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계명」은 앞에서 제시한 명령들의 전체적인 내용, 곧 믿음의 좋은 싸움을 싸우고,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이라는 두 형용사가 「계명」을 꾸미는지, 그것을 지키는 디모데의 태도를 묘사하는지는 원문의 형태만으로 완전히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전자는 계명을 흠 없이 보존하라는 뜻이고, 후자는 디모데 자신이 흠 없이 그 명령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두 해석 모두 계명을 지키는 일의 충실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이야기하던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께서 알맞은 때에 그 나타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다스리는 왕들의 왕이시요 다스리는 주인들의 주인이십니다.디모데전서 6:15 · 본디새김
빌라도는 제국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통치자 위에 계신 주권자를 찬양합니다. 「왕들의 왕」, 「주인들의 주인」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통치 권력보다 높으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호칭은 요한계시록 17:14와 19:16에서 그리스도에게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6:15–16의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드러내실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을 「어떤 사람도 그분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라고 설명하는 점이 그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알맞은 때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결정하거나 앞당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때를 계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충실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으셨습니다. 디모데 역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자신의 사명을 지켜야 합니다.
다가갈 수 없는 빛 가운데 사시는 분
홀로 불멸을 지니시고 다가갈 수 없는 빛 가운데 사시는 분이며, 어떤 사람도 그분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분께 존귀와 영원한 권세가 있기를 빕니다. 아멘.디모데전서 6:16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을 인간의 시야와 능력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홀로 불멸을 지니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이 피조물처럼 생명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것은 13절의 「만물을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만물을 살리시는 분이기에 그분 자신은 생명을 주는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다가갈 수 없는 빛」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과 무관하게 멀리 계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다가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지만, 동시에 만물을 살리시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알맞은 때에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 찬양은 디모데가 누구를 두려워하고 누구에게 충실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의 권력은 강력해 보이고, 재산이 많은 사람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으며, 특별한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왕을 다스리시고, 만물을 살리시며, 홀로 불멸을 지니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분께서 모든 권세 위에 계십니다.
이제 바울은 찬양을 마친 뒤, 다시 매우 현실적인 문제인 부유한 사람들의 돈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이 염두에 둔 빌라도 앞의 고백이 정확히 복음서의 어느 문장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자신과 자신의 왕권에 관해 증언하신 사건과 연결하여 읽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14절의 「나타나심」(ἐπιφάνεια)은 나타나거나 드러나는 일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다가갈 수 없는 빛」은 출애굽기의 하나님 현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33:18–23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청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돈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 이유
지금 이 시대에 부유한 이들에게는 교만하지 말고,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며, 도리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넉넉히 주시어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당부하십시오.디모데전서 6:17 · 본디새김
9절에서는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시험과 올무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이미 부유한 사람들에게 직접 권면합니다. 그들을 모두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재산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부자가 되는 것과 부를 신뢰하는 것
바울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교만과 재물에 대한 소망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이 둘은 서로 깊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자신의 능력과 판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있고, 돈이 있으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안전할 것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재물을 「불확실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미래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재산을 잃을 수도 있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사람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소유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경고의 목적은 부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소망을 둘 대상을 바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넉넉히 주시어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부유한 사람들이 가진 것을 모두 미워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는 일 자체를 죄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4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 좋으며 감사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재물을 누리는 것과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만 두어야 할 소망을 그 선물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일로 부유해지라
선을 행하고, 좋은 일로 부유한 이가 되고, 기꺼이 베풀고, 함께 나누는 이가 되라고 하십시오.디모데전서 6:18 · 본디새김
이미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시 부유해지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좋은 일로 부유해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참으로 가치 있는 부가 무엇인지 새롭게 설명합니다.
재산이 많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선한 행실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도 탐욕스럽게 살 수 있고, 자기 재산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재산을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나눌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 선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기꺼이 베풀고」와 「함께 나누는」이라는 두 표현은 단순히 물건을 내어 주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자신의 소유를 나누려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행동을 미래의 생명과 연결합니다.
무엇을 미래를 위해 쌓아 두는가
그렇게 하면서 앞날에 대비해 자신들을 위한 좋은 기초를 쌓아 두는 것입니다. 이는 참된 생명을 붙잡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19 · 본디새김
「쌓아 두는 것」은 다시 재산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보통 사람은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돈을 저축하고, 재산을 마련하고,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좋은 일을 행하고 나누는 것이 앞날을 위해 좋은 기초를 쌓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선한 행실로 영원한 생명을 구매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에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붙잡아야 할 생명으로 제시되었습니다(6:12). 따라서 19절을 자선 행위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대신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믿음이 재산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실제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그러한 삶을 참된 생명과 연결합니다.
12절과 19절을 나란히 놓으면, 디모데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참된 생명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구되는 구체적인 행동은 다릅니다. 디모데에게는 믿음의 좋은 싸움을 싸우고 의와 경건과 사랑을 뒤쫓으라고 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하고 나누라고 합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같은 소망이 주어지고, 그 소망은 각자의 삶에서 서로 다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19–21에서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쌓아 두는 보물과 하늘에 쌓아 두는 보물을 대조하시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16–21의 부자 비유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부자는 많은 곡식을 쌓아 둘 창고를 마련하고 여러 해 동안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를 마치면서 자신을 위해 재산을 쌓아 두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지 않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십니다.
디모데여, 맡겨진 것을 지키십시오
디모데여, 속된 빈말과 거짓으로 지식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면서 맡겨진 것을 지키십시오.디모데전서 6:20 · 본디새김
편지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다시 디모데의 이름을 부릅니다.
바울은 편지의 처음에서 다른 가르침을 막으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서는 맡겨진 것을 지키라고 합니다.
맡겨진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맡겨진 것」(παραθήκη)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은 물건이나 재산, 또는 맡겨진 책임을 가리킬 수 있는 낱말로, 보관하도록 위탁된 것을 뜻합니다. 디모데후서 1:12–14에서도 관련된 표현이 등장하며, 특히 1:14에서는 맡겨진 좋은 것을 성령을 통해 지키라고 권합니다. 디모데전서 6:20에서도 디모데가 받은 복음과 건전한 가르침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맡겨진 것의 범위를 이 한 절이 세부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맡겨진 것은 그 사람이 마음대로 바꾸거나 처분할 수 있는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맡긴 사람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보관하고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만들어 사람들을 지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디모데의 권위는 자신이 진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를 맡은 사람입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자신을 진리의 소유자처럼 여기면 안 됩니다. 진리를 맡았다는 사실은 특권이면서 동시에 책임입니다.
거짓으로 지식이라 불리는 것
「지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그노시스(γνῶσις)입니다. 이 낱말은 본래 지식이나 앎을 뜻하며, 그 자체가 부정적인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앞에 「거짓으로 …… 불리는」이라는 표현을 붙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바울은 그 지식이 참된 이름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 구절의 「지식」을 곧바로 2세기에 체계적으로 발전한 영지주의 전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의 잘못된 가르침과 후대 영지주의 사상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그들이 후대의 특정한 영지주의 집단이었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참된 앎과 거짓된 앎을 혼동하는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온전히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의 마지막에서는 자신이 지식을 가졌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믿음에서 빗나갔다고 말합니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진리를 참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참된 지식은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믿음 안에 머무는 것과 연결됩니다. 바울이 가장 경계하는 문제는 지식을 추구하다가 정작 그 지식이 가리켜야 할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은 명령이 아니라 은혜다
어떤 이들은 그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다가 믿음에서 빗나갔습니다.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디모데전서 6:21 · 본디새김
편지는 디모데 개인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인사의 「여러분」은 원문에서도 복수입니다. 따라서 이 은혜의 인사는 디모데 한 사람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향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많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막고, 공동체를 돌보고, 사람들을 공정하게 판단하고, 믿음의 좋은 싸움을 싸우며, 맡겨진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또 다른 명령이 아닙니다. 은혜의 인사입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반론들」에 해당하는 안티테세이스(ἀντίθεσις)는 서로 맞서는 주장이나 대립되는 논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후대 마르키온의 저작 《대조들》과 직접 동일시하는 해석은 그 시대의 사상을 본문에 소급할 위험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나갈 수 없는 사람이 붙잡아야 할 것
디모데전서 6장에는 노예를 소유한 주인, 경건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바울은 그 한가운데에서 인간이 아무것도 가지고 나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재산을 버리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넉넉히 여기는 마음」을 배운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끝없이 붙잡아야 할 이유에서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기꺼이 베풀고,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지, 디모데는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을 어떻게 지킬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방향은 같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분이 주신 것을 그분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재산이 아무리 커 보여도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편지의 마지막 당부에서 바울은 디모데의 이름을 다시 부르며 맡겨진 것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맡겨진 것은 그가 만들어 낸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가르침을 전하고, 지식을 자랑하며, 돈을 사랑하고,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 자신의 힘으로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1장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고 고백했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디모데와 공동체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인사로 편지를 끝맺습니다. 그가 지켜야 할 복음도 은혜의 복음이고, 그 복음을 지키며 살아갈 힘 역시 그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잊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