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장 · 재물과 마지막 당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갈 것인가

사람은 무엇을 얻으면 넉넉해질까요?

재산이 많아지면 더 이상 부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한 지식을 갖추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도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 줍니다.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들, 경건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교사들, 부자가 되려고 애쓰다가 믿음에서 벗어난 사람들,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진 부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특별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이야기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7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 장에서 두 번이나 생명을 붙잡으라고 말합니다. 12절에서는 디모데에게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십시오」라고 말하고, 19절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나누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참된 생명을 붙잡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돈을 붙잡으려다가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참된 생명을 붙잡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는 「맡겨진 것을 지키십시오」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이 장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보다 누구에게 희망을 두고 있느냐가 사람의 삶을 결정합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96장 본문 읽기 →

같은 형제인데 한 사람은 노예다

디모데전서 6:1–2 본문 →

노예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은 모두 자기 주인을 온전히 존중받을 만한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가르침이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1 · 두루새김

6장의 첫 문장은 현대 독자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바울은 노예에게 자기 주인을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 잘 섬겨야 한다고 권합니다. 이 명령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의 노예제가 어떤 제도였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노예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

여기서 「노예」는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아니라, 주인에게 속하여 법적인 자유가 제한되고 소유와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로마 사회에서 노예는 집안일이나 농업을 하기도 하고 전문 기술을 가지기도 했지만, 주인에게 소유된 신분이라는 근본적인 조건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절을 현대의 직장생활에 관한 권면으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에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보다 훨씬 심각한 권력의 불균형이 있었습니다. 멍에는 원래 짐승에게 씌워 노동하게 하는 도구이므로, 「노예의 멍에」라는 표현은 노예의 신분이 강제로 복종해야 하는 상태임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주인을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1절 끝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가르침이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노예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있고, 그들의 행동이 복음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제가 하나님께서 본래 정하신 좋은 제도라는 선언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두 절에서 노예제의 폐지를 요구하지 않고, 주인에게 노예를 해방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당시의 노예제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노예들에게 행동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흐려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바울이 노예들에게 복종을 권했다는 사실만으로 노예제의 모든 폭력과 소유 관계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범위를 넘어갑니다.

형제인데 여전히 주인이다

2절에서 더 어려운 상황이 등장합니다.

믿는 주인을 둔 사람들은 주인이 같은 믿음의 형제라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더욱 잘 섬겨야 합니다. 그 섬김으로 도움을 받는 주인이 믿는 사람이며 사랑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권하십시오.디모데전서 6:2 · 두루새김

노예도 그리스도인이고 주인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 밖의 사회적 관계에서는 여전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기 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긴장이었습니다.

바울은 형제 관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관계를 전제로, 형제라는 이유로 주인을 업신여기지 말고 더욱 잘 섬기라고 권합니다. 섬김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문법적 논의가 있지만, 앞에서 믿는 주인들을 언급하므로 그 주인들이 노예들의 충실한 섬김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해석이 문맥상 강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그 섬김으로 도움을 받는 주인」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 형제 관계가 법적인 노예 신분을 즉시 없애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 이 구절에는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 남아 있습니다.

빌레몬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이제 그를 「노예를 넘어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빌레몬서 1:15–16). 그곳에서도 법적인 해방을 명령하지는 않지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바라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요청합니다. 갈라디아서 3:28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노예와 자유인이 하나라는 선언도 등장합니다.

이 말씀들이 곧바로 로마 제국의 노예제를 철폐하는 법률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노예 소유가 계속되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으므로, 신약의 형제애가 노예제를 자동으로 없앴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같은 형제라는 고백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날 이 구절을 사람을 소유하거나 억압하는 관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당시 노예들에게 주어진 생존 조건 속의 권면을 모든 시대의 노예제 승인으로 바꾸는 것은 본문의 상황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절을 지나면 바울의 관심은 다시 가르침의 문제로 향합니다. 이번에는 경건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경건마저 이익을 얻는 수단이 될 때

디모데전서 6:3–5 본문 →

누구든지 다른 가르침을 전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말씀과 경건에 맞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디모데전서 6:3 · 두루새김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편지의 첫머리에서 디모데에게 다른 가르침을 막으라고 당부했던 문제가 마지막에서도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이 「바른」(ὑγιαίνω)으로 옮긴 원문의 표현은 건강하다는 뜻에서 나왔고, 이 편지에서 가르침을 평가할 때 반복해서 사용됩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정반대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교만에 부풀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논쟁과 말다툼에 병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거기서 질투와 다툼, 남을 헐뜯는 말과 악한 의심이 생기고,디모데전서 6:4 · 두루새김

예수님의 말씀은 건강하지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은 병적으로 매달립니다. 바울은 그들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만 말하지 않고, 그들의 가르침에 병든 상태의 특징이 나타난다고 묘사합니다.

지식이 많아 보이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 있게 주장하고, 여러 문제를 놓고 논쟁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에서 문제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논쟁에 매달린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실에 무지하다는 뜻이라기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그 결과는 질투, 다툼, 남을 헐뜯는 말, 악한 의심, 끊임없는 충돌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사상의 오류로만 남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바울은 가르침이 얼마나 정교한가만 묻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들을 어떤 상태로 이끌고 있는지도 살핍니다.

또 거기서 생각이 썩고 진리를 빼앗긴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도 생깁니다. 그들은 경건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깁니다.디모데전서 6:5 · 두루새김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경건해 보이면 신뢰를 얻고, 특별한 가르침을 내세우면 따르는 사람들을 얻으며, 종교적인 영향력을 경제적인 이익으로 바꾸려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의 돈벌이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득을 얻으려는 태도 때문에 그들이 경건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아무것도 더 얻지 않아도 넉넉한 사람

디모데전서 6:6–8 본문 →

그러나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경건하게 사는 것은 큰 이득입니다.디모데전서 6:6 · 두루새김

6절은 이 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전을 담고 있습니다.

경건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비판하더니, 이번에는 바울 자신이 경건하게 사는 것이 큰 이득이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절에 같은 그리스어 낱말 포리스모스(πορισμός)가 쓰였고, 두루새김은 5절에서는 「돈벌이 수단」으로, 6절에서는 「이득」으로 옮겼습니다. 신약에서 이 낱말은 바로 이 두 절에만 나타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사용하는 바로 그 언어를 받아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참된 이득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표현은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입니다.

넉넉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만족」(αὐτάρκεια)으로 옮긴 낱말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상태, 외적인 조건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만족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독립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11–13에서도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 넉넉히 여기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면서, 그 능력을 자신에게 힘을 주시는 분과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만족은 가진 것이 적어도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는 심리적인 조언이 아니라, 삶의 근거를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태도입니다. 거짓 교사는 경건을 이용하여 더 많이 얻으려 하지만, 하나님께 희망을 둔 사람은 무엇인가를 더 얻어야만 만족할 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납니다.

경건하게 사는 것이 큰 이득인 까닭은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해야만 넉넉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6:7 · 두루새김

우리는 태어날 때 재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죽을 때 그것을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욥기 1:21에서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은 고통 속에서 모태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나왔으며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라고 고백합니다. 전도서 5:15–16도 사람이 빈손으로 나왔듯이 수고로 얻은 것을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실을 허무주의로 이끌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므로 아무것도 누리지 말라고 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가지고 만족하라고 합니다.

먹을 것과 몸을 가릴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8 · 두루새김

먹고 몸을 가리는 필요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실제적인 삶에 속합니다. 문제는 필요를 채우는 것을 넘어,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이 삶을 지배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재의 궁핍을 무조건 참으라고 강요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의식주조차 충분히 갖지 못한 사람에게 도움을 거절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소유를 향한 끝없는 욕망과 만족할 줄 아는 태도를 대조합니다.

돈을 얻으려다가 자신을 잃는 사람

디모데전서 6:9–10 본문 →

그러나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유혹과 덫에 걸리고, 어리석고 해로운 여러 욕망에 빠집니다. 이런 욕망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 속으로 가라앉힙니다.디모데전서 6:9 · 두루새김

바울은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미 가진 재산의 규모보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이 문제의 중심에 놓입니다. 뒤에서 바울은 실제로 부유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모두 버리라고 말하지 않으므로, 9절을 재산이 많은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그 결과를 세 단계로 묘사합니다. 먼저 유혹과 덫에 걸리고, 어리석고 해로운 여러 욕망에 빠지며, 마침내 그 욕망들이 사람을 파멸과 멸망 속으로 가라앉힙니다. 원문의 동사는 물속에 가라앉히거나 잠기게 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어, 욕망이 사람을 서서히 아래로 끌어내리는 모습을 그립니다.

더 많이 얻으려는 욕망은 처음에는 유익한 선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삶 전체를 지배하면, 돈을 벌기 위해 관계를 희생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양심을 버리며,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경제적 실수가 아니라 사람을 무너뜨리는 영적인 위험으로 봅니다.

돈이 온갖 악의 뿌리인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온갖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벗어났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 자신을 꿰찔렀습니다.디모데전서 6:10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종종 「돈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라는 식으로 인용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 곧 탐욕을 말합니다. 돈은 가족을 부양하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도,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데도 쓰일 수 있습니다.

「온갖 악의 뿌리」는 「여러 뿌리 가운데 하나」로 읽을 수도 있고, 모든 악이 돈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악의 원인을 분류하는 이론이라기보다, 돈 사랑이 얼마나 많은 종류의 악을 낳을 수 있는지 강하게 경고하는 수사적인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돈 사랑에 사로잡혀 믿음에서 벗어난 「어떤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돈을 붙잡으려 했는데, 결국 자신이 고통에 찔렸습니다. 욕망은 원하는 대상을 얻는 것으로 반드시 끝나지 않고, 때로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 자신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이 어두운 장면 뒤에 갑자기 한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뿌리」(ῥίζα)는 관사 없이 서술 명사로 쓰입니다. 그러나 관사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여러 뿌리 중 하나」라고 확정할 수는 없고, 반대로 모든 악이 예외 없이 돈 사랑에서만 생긴다는 논리적 명제로 읽어야 하는지도 따져 보아야 합니다.

달아나야 할 것과 뒤쫓아야 할 것

디모데전서 6:11–12 본문 →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 이런 것들을 피해 달아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끈기와 온유함을 힘써 추구하십시오.디모데전서 6:11 · 두루새김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이 호칭은 모세(신명기 33:1)와 엘리야(열왕기상 17:24)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특별한 사명을 맡은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첫 명령은 달아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언제나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 사랑과 거짓된 가르침, 교만과 다툼을 낳는 욕망에서는 달아나야 합니다. 이것은 비겁한 행동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해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달아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의, 경건, 믿음, 사랑, 끈기, 온유함을 힘써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고 공동체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견디는 힘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지 않는 온유함도 필요합니다. 바울은 강함과 온유함을 서로 반대되는 성품으로 놓지 않습니다.

좋은 싸움의 목적은 무엇인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십시오. 디모데는 그 생명을 얻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고백을 했습니다.디모데전서 6:12 · 두루새김

앞에서는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욕망에 빠져 무너졌습니다. 이제 디모데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디모데가 자신의 노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가 그 생명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이미 그 생명을 얻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르심이 명령보다 앞섭니다.

돈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재산을 추구하다가 믿음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생명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의 고백을 이야기한 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하신 고백을 떠올립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그리스도

디모데전서 6:13–16 본문 →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고백으로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당부합니다.디모데전서 6:13 · 두루새김

바울은 엄숙한 당부를 전하면서 두 분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뜻밖의 장면을 언급합니다. 디모데는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고백을 했고,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선한 고백으로 증언하셨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과 권력 앞에 선 사람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제국의 권력을 대표하여 유대를 통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에게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붙잡혀 오신 피고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8:33–37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대 사람들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밝히십니다. 바울이 염두에 둔 고백이 정확히 복음서의 어느 문장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이 사건과 연결하여 읽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자신의 권력을 키우는 싸움이 아니라 진리에 충실하게 서 있는 싸움입니다. 디모데 역시 사람들의 반응과 압력 속에서 자신이 고백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명령을 흠 없이, 나무랄 데 없이 지키십시오.디모데전서 6:14 · 두루새김

나타나실 때까지

디모데의 사명은 일시적인 성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이어집니다. 「그 명령」은 앞에서 제시한 명령들 전체, 곧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흠 없이, 나무랄 데 없이」는 명령을 흠 없이 보존하라는 뜻으로도, 디모데 자신이 흠 없이 그 명령을 지키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의 형태만으로는 두 형용사가 명령을 꾸미는지 디모데의 태도를 묘사하는지 완전히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 명령을 지키는 일의 충실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복되시고 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들의 왕이시며 다스리는 이들의 주님이십니다.디모데전서 6:15 · 두루새김

빌라도는 제국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통치자 위에 계신 분을 찬양합니다.

「왕들의 왕」이라는 호칭은 요한계시록 17:14와 19:16에서 그리스도에게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실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 16절의 「그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볼 수도 없습니다」가 그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정하신 때」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결정하거나 앞당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때를 계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충실하라고 합니다.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사시는 분

오직 그분만이 죽지 않는 생명을 지니셨고,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사십니다. 그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볼 수도 없습니다. 그분께 존귀와 영원한 권세가 있기를 빕니다. 아멘.디모데전서 6:16 · 두루새김

하나님은 생명을 받으셔야 살아가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것은 13절의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이어집니다.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은 출애굽기 33:18–23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신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과 무관하게 멀리 계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지만, 동시에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강력해 보이고, 재산이 많은 사람은 안전하다고 느끼며, 특별한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더 높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한 분을 바라봅니다.

이제 바울은 이 찬양을 마친 뒤, 다시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갑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돈입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돈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 이유

디모데전서 6:17–19 본문 →

지금 이 시대에 부유한 사람들에게 명하십시오. 교만하지 말고, 믿을 수 없는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가 누리도록 모든 것을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라고 하십시오.디모데전서 6:17 · 두루새김

9절에서는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유혹과 덫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이미 부유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들이 재산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부자가 되는 것과 부를 신뢰하는 것

바울은 교만과 재물에 대한 희망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전할 것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그러나 재산은 변할 수 있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으며, 마지막까지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재물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리도록 모든 것을 넉넉히 주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는 일 자체를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4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 좋으며 감사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재물을 누리는 것과 재물에 희망을 두는 것은 다릅니다.

선한 일에 부유한 사람이 되라

선을 행하고, 선한 일에 부유한 사람이 되며, 기꺼이 베풀고 함께 나누라고 하십시오.디모데전서 6:18 · 두루새김

이미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시 부유한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무엇으로 부유해져야 할까요? 선한 일입니다.

재산이 많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선한 행동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도 자기 재산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고, 반대로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나눌 수도 있습니다. 「기꺼이 베풀고」와 「함께 나누라고」는 물건을 내어 주는 것을 넘어 자신의 소유를 나누려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무엇을 미래를 위해 쌓아 두는가

그렇게 해서 그들은 다가올 때를 위해 자신에게 좋은 기초를 쌓아 두게 됩니다. 참된 생명을 붙잡기 위해서입니다.디모데전서 6:19 · 두루새김

보통 사람은 미래를 위해 재산을 쌓아 둡니다. 그런데 바울은 선한 일을 행하고 나누는 것이 다가올 때를 위해 좋은 기초를 쌓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19–21에서 땅에 쌓는 보물과 하늘에 쌓는 보물을 대조하시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복음 12:16–21의 부자는 곡식을 쌓아 둘 창고를 마련하고 여러 해 동안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재산을 쌓아 두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지 않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십니다.

물론 이것이 선한 행동으로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에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붙잡아야 할 생명으로 제시되었습니다(6:12). 따라서 19절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행동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대신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믿음이 재산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실제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12절과 19절을 나란히 놓으면, 디모데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참된 생명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디모데에게는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일과 나눔으로 나타나지만,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같은 희망이 주어집니다.

디모데, 맡겨진 것을 지키십시오

디모데전서 6:20–21 본문 →

디모데, 맡겨진 것을 지키십시오. 거룩한 것을 함부로 대하는 헛된 말과, 지식이라고 잘못 불리는 것에서 나오는 반대 주장들을 피하십시오.디모데전서 6:20 · 두루새김

편지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다시 디모데의 이름을 부릅니다.

편지의 처음에서 다른 가르침을 막으라고 당부했던 바울은, 마지막에서 맡겨진 것을 지키라고 합니다.

맡겨진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맡겨진 것」(παραθήκη)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 보관하게 한 물건이나 재산, 또는 맡겨진 책임을 가리킬 수 있는 낱말입니다. 디모데후서 1:14에서도 맡겨진 좋은 것을 성령을 통해 지키라고 권합니다. 6:20도 디모데가 받은 복음과 바른 가르침을 지키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 범위를 이 한 절이 세부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맡겨진 것은 마음대로 바꾸거나 처분할 수 있는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맡긴 사람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보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만들어 사람들을 지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의 권위는 자신이 진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를 맡은 사람입니다.

지식이라고 잘못 불리는 것

「지식」으로 옮긴 그리스어는 그노시스(γνῶσις)입니다. 본래 앎을 뜻하는 말로, 그 자체가 부정적인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내세우는 것이 지식이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 구절의 「지식」을 곧바로 2세기에 체계적으로 발전한 영지주의 전체와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초기의 잘못된 가르침과 후대 영지주의 사이에 이어짐이 있었을 가능성은 연구할 수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그들이 후대의 특정한 영지주의 집단이었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온전히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에서는 지식을 가졌다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오히려 믿음에서 빗나갔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지식을 추구하다가 정작 그 지식이 가리켜야 할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은 명령이 아니라 은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지식을 가졌다고 내세우다가 믿음에서 빗나갔습니다.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디모데전서 6:21 · 두루새김

편지는 디모데 개인에게 보내졌지만, 마지막 인사의 「여러분」은 원문에서도 복수입니다. 이 은혜의 인사는 디모데 한 사람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향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많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또 다른 명령이 아니라 은혜의 인사입니다. 디모데와 공동체는 이 모든 책임을 자기 능력만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고 고백했던 바울은, 6장의 마지막에서 은혜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조금 더 깊이

「반대 주장들」은 서로 맞서는 주장이나 대립되는 논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후대 마르키온의 저작 《대조들》과 직접 같은 것으로 보는 해석은 그 시대의 사상을 앞선 본문에 거꾸로 적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사람이 붙잡아야 할 것

디모데전서 6:1–21 본문 →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사람은 무엇을 얻어야 넉넉해질까요? 바울은 재산을 버리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만 두어야 할 희망을 그 선물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소유를 끝없이 붙잡아야 할 이유에서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기꺼이 베풀고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재물을 어떻게 쓸지, 디모데는 맡겨진 복음을 어떻게 지킬지 결정해야 하지만, 방향은 같습니다.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참된 생명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에게 맡겨진 것은 그가 만들어 낸 진리가 아닙니다. 빌라도 앞에서 선한 고백으로 증언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가르침을 전하고, 지식을 자랑하며, 경건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맡겨진 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라고 인사합니다.

한 사람에게 복음을 지키라는 엄중한 당부가 주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인사 속에서 편지가 끝납니다.

그가 지켜야 할 복음도 은혜의 복음이고, 그 복음을 지키며 살아갈 힘 역시 그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