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참 가르침을 지키기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라는 삶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거룩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도 믿음이 더 깊은 삶이라고 여겼던 듯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혼하고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지만, 그보다 높은 경건에 이르려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향해 뜻밖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좋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며 받는 것은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겠다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거부한다면, 과연 그것이 경건한 삶일까요?

디모데전서 4장은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바울은 결혼과 음식을 금하는 가르침을 비판한 뒤, 디모데에게 경건하게 살도록 자신을 훈련하라고 권합니다. 금욕적인 생활을 비판하면서 곧바로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니, 얼핏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거부하는 금욕과 그가 권하는 훈련은 무엇이 다를까요?

이 차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표현이 6절에 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감사히 받아들이라고 말했고, 이제는 「믿음의 말씀과 지금까지 따라온 좋은 가르침으로 자라나며」 좋은 일꾼이 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 말씀으로 자라난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무조건 멀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바르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길러 가는 데 있습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그 일을 디모데 자신에게 맡깁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막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디모데 자신도 예수님을 섬기는 좋은 일꾼으로 자라야 합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94장 본문 읽기 →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

디모데전서 4:1–3 본문 →

그러나 성령께서는 앞으로 어떤 사람들이 속이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에 마음을 쏟으며 믿음을 떠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디모데전서 4:1 · 두루새김

바울은 먼저 성령의 경고를 전합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에 관한 신앙 고백을 들려준 뒤, 이제는 그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셨다는 고백에서, 사람의 몸과 관련된 삶을 제한하는 가르침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앞으로」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장차 어떤 사람들이 믿음을 떠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디모데에게 그런 가르침을 경계하고 바로잡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는 막연히 먼 미래의 일만을 예고하는 말이 아니라, 디모데가 마주한 교회의 문제를 마지막 때에 관한 경고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말입니다. 그 일을 오늘날의 특정 시대나 사건에 곧바로 맞추어 보는 것은 본문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단순히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의 뒤에 영적인 속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교회 안의 모든 해석 차이나 신학적 논쟁을 귀신들의 가르침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자신이 문제 삼는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므로, 그 내용과 방향을 살펴본 뒤 판단해야 합니다.

경건해 보이는 속임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쟁이들을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양심은 달군 쇠로 지져진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못 하게 하고 어떤 음식은 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음식은 믿는 사람들, 곧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감사하며 먹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디모데전서 4:2–3 · 두루새김

그들이 주장한 것은 제멋대로 욕망을 따라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하지 말고 음식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없는 특별한 규칙을 지키게 함으로써, 더욱 높은 수준의 경건을 추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가르침을 속임과 연결합니다.

결혼하지 않거나 음식을 절제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자신처럼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결혼하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7:7–9, 28). 음식도 마찬가지여서, 사도행전 13:2–3에서는 금식과 기도가 함께 등장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하고, 마치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절제와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금지는 다릅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것을 본래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생활 규칙의 차이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이해와 연결됩니다.

달군 쇠로 지져진 양심

2절에서 바울은 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의 양심이 「달군 쇠로 지져진 것과 같습니다」라고 묘사합니다. 달군 쇠에 지져진 피부는 상처를 입고 감각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에서 양심이 무뎌져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또한 고대에 낙인을 찍던 관행을 배경으로, 잘못된 주인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원문이 정확히 어느 모습을 떠올리게 하려는지는 논쟁이 있지만, 양심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는 나쁜 상태를 묘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결혼을 못 하게 하고 음식을 멀리하라며 다른 사람에게 매우 엄격한 생활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엄격함을 깨끗한 양심의 증거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양심이 손상되었다고 말합니다.

엄격한 규칙을 지킨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남보다 많이 포기하고, 남보다 어려운 규칙을 지킨다고 해서 그 가르침이 반드시 참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엄격함 자체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왜 이런 규칙을 만들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실제로 비판하는 두 가지 금지, 곧 결혼과 음식의 금지는 명확합니다. 그리고 그 금지에 대한 반박도 매우 분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 예수님의 오심 이후를 마지막 때의 시작으로 이해하는 모습은 사도행전 2:16–17과 히브리서 1:1–2에서도 발견됩니다. 이 가르침을 전한 사람들을 후대의 영지주의나 특정 금욕주의 집단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견해들이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그들이 정확히 누구이며 어떤 사상 체계를 가졌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 좋다

디모데전서 4:4–5 본문 →

3절에서 바울은 음식의 문제를 창조의 문제로 돌려놓습니다.

음식은 단순히 사람이 원하는 것을 채워 주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 곧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감사하며 먹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자신이 만드신 것을 좋다고 보시며, 창세기 1:31에서는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좋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며 받는 것은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아닙니다.디모데전서 4:4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창세기의 창조 선언과 주제 면에서 분명히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본래 악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먹고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음식 자체를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는 가르침에 반박하고 있을 뿐입니다. 창조의 선함이 사람의 모든 행동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가 두 번 등장하는 이유

3절은 하나님이 음식을 「감사하며 먹도록」 지으셨다고 말하고, 4절은 「감사하며 받는 것은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음식의 가치를 설명하면서 감사라는 행동을 거듭 언급합니다.

왜 감사일까요? 감사는 자신이 누리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만 여기지 않고, 그것을 주신 분을 인정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는 일은 너무도 평범합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즐기며, 때로는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평범한 행동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게 합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어떤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일이 그분을 인정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은 반드시 무언가를 거부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분이 주신 좋은 것을 감사히 누리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무엇이 음식을 거룩하게 하는가

그 음식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4:5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 좋다고 했습니다. 이미 좋은 것인데 왜 다시 거룩해져야 할까요? 「거룩해지기」라는 말은 음식의 물질적인 성질이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안에서 음식을 받아들이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창조를 선하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나 음식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볼 수 있고, 기도 가운데 선포되거나 사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 감사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뜻과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음식이 기도의 주문 같은 힘으로 비로소 먹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쪽 사람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면 그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한쪽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받아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겉으로 보면 앞사람이 더 엄격하고 경건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뒷사람의 태도에서 창조주를 올바르게 인정하는 믿음을 봅니다.

이것이 이 단락의 반전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것을 거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상적인 식사 한 번이 창조주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신앙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좋은 일꾼은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디모데전서 4:6–7 본문 →

디모데가 이런 내용을 형제자매들에게 알려 주면, 믿음의 말씀과 지금까지 따라온 좋은 가르침으로 자라나며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는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디모데전서 4:6 · 두루새김

바울은 디모데에게 단순히 사람들을 꾸짖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디모데는 형제자매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고, 그 자신도 좋은 가르침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며」(ἐντρέφομαι)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양육되거나 길러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음식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섬기는 좋은 일꾼이 무엇으로 자라는지 말합니다. 믿음의 말씀과 좋은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몸이 자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섬기는 일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과 분별에서도 자라야 합니다. 바울이 몸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먹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으니까요.

몸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으로 자라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랍니다.

디모데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배우고 자라는 일을 끝낸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자리에 도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과 이해를 계속 길러야 하는 책임을 맡는 일입니다.

버려야 할 것도 있다

속되고 늙은 여자들이나 할 법한 꾸며 낸 이야기는 물리치십시오. 오히려 경건하게 살도록 자신을 훈련하십시오.디모데전서 4:7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음식을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꾸며 낸 이야기를 물리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주신 것은 감사히 받아들이되, 사람들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이야기는 거부해야 합니다.

「늙은 여자들이나 할 법한」은 당시의 문화에서 근거 없는 이야기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낮추어 부르던 관용 표현입니다. 이것을 나이 든 여성들이 본래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이라는 일반적인 판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성별이나 나이가 아니라, 믿음을 길러 주지 못하는 그 이야기의 성격입니다.

이제 음식의 모습에서 운동의 모습으로 넘어갑니다.

경건은 단련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4:8–10 본문 →

몸을 훈련하는 것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경건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됩니다. 경건에는 지금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4: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흔히 운동보다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이해됩니다. 틀린 방향은 아니지만, 바울은 단순히 몸과 영혼을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훈련이 사람을 참된 경건으로 이끄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처럼 단련하십시오

7절의 「훈련하십시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귐나제(γυμνάζω)입니다. 운동이나 훈련을 뜻하는 말과 연결되어 있고, 오늘날 영어의 gymnasium과도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4–27에서도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와 권투하는 사람의 모습을 사용하여 자신이 맡은 일과 절제를 설명합니다.

경건은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운동선수가 자신의 몸을 훈련하듯이, 그리스도인도 믿음의 삶을 꾸준히 훈련해야 합니다. 그 목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은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태도와 그에 걸맞은 삶을 함께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경건하게 살도록 자신을 훈련한다는 것은 기도 시간을 늘리거나 종교적인 규칙을 많이 지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그 배움을 실제 삶에서 계속 실천하는 것입니다.

몸의 단련은 유익하지 않은가

「어느 정도」에 해당하는 원문은 조금이라는 뜻의 올리곤(ὀλίγος)입니다. 도움의 정도가 작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고, 도움이 미치는 범위나 기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몸을 훈련하는 것」도 두 가지로 읽힙니다. 일반적인 몸의 훈련으로 읽으면, 바울은 운동의 가치를 인정하되 경건의 더 큰 가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음식과 결혼에 관한 금욕적 훈련과 연결하여 읽으면, 몸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종교적 훈련이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어도 참된 경건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몸 자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고, 몸의 훈련에도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바울은 경건의 가치를 시간의 범위와 연결합니다. 몸을 훈련하는 일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살아가는 일은 현재의 삶뿐 아니라 앞으로 올 생명과도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경건한 사람이 지금 당장 건강과 부와 성공을 모두 얻는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수고하며 힘써 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경건이 주는 도움은 고난이 없는 생활을 보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지금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 앞으로 올 생명에 대한 희망을 붙들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

우리가 이를 위해 수고하며 힘써 싸우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특히 믿는 사람들의 구원자이십니다.디모데전서 4:10 · 두루새김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희망을 두었기 때문에 수고하고 싸운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훈련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바라보기 때문에 계속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자, 특히 믿는 이들의 구원자

10절 후반의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특히 믿는 사람들의 구원자」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마련하시고 믿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누린다는 읽기,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돌보시며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베푸신다는 읽기,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범위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읽기가 있습니다. 「특히」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에서 믿는 사람들을 구별하는지에 따라 구원이 누구에게 미치는지에 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10절만으로 모든 사람이 결국 구원받는다고 확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을 아무런 설명 없이 사실상 믿는 사람들로만 줄여서도 안 됩니다.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구원자이시며, 그 하나님께 둔 희망이 자신들의 수고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무엇을 포기해야 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희망을 두기 때문에 자신을 훈련하라고 합니다.

그 훈련의 중심에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에는 사본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현대 비평 본문을 따라 「수고하며 힘써 싸우는」으로 옮겼고, 다른 주요 본문에서는 수고하고 모욕을 받는 것으로 읽습니다. 앞의 읽기는 힘써 싸우는 일을, 뒤의 읽기는 맡은 일을 하며 겪는 비난을 강조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께 희망을 둔 사람들의 삶이 어려움과 노력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구원자」에 관한 첫째 읽기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뜻이 향하는 범위를, 「특히 믿는 사람들」은 그 구원이 실제로 경험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둘째 읽기는 「구원자」를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하며, 8절의 「지금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셋째 읽기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자라는 표현을 그 자체로 강하게 받아들이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젊은 지도자가 권위를 얻는 방법

디모데전서 4:11–12 본문 →

이런 일들을 명하고 가르치십시오. 아무도 젊다는 이유로 디모데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말과 행동과 사랑과 믿음과 깨끗한 삶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십시오.디모데전서 4:11–12 · 두루새김

바울은 디모데가 젊다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젊다는 표현은 오늘날의 청소년만을 가리키지 않았으므로, 이 표현만으로 디모데가 몇 살이었는지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도자로서 존중을 충분히 받지 못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자신의 권위를 강하게 주장해야 할까요?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도로부터 맡겨 받은 지위를 강조해야 할까요?

바울의 대답은 다릅니다.

디모데는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더 강한 태도를 보여 주라는 명령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본받을 만한 모습을 보게 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무엇에서 본이 되어야 할까

바울은 말, 행동, 사랑, 믿음, 깨끗한 삶을 말합니다. 말은 다른 사람들이 듣는 것이고,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도자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들을 뿐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지켜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다음에 사랑과 믿음과 깨끗한 삶을 덧붙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말과 행동을 움직이는 마음의 방향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삶」은 성적인 의미에만 제한할 필요는 없으며, 행동과 그 행동을 하려는 마음이 깨끗하고 흠 없이 유지되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삶을 통해 그 가르침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흠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15절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디모데의 성장을 볼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완벽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치는 말씀을 따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권위는 맡겨진 일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에 대한 신뢰는 삶을 통해 확인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하고 가르치는 일과 본보기가 되는 일, 이 두 가지를 분리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낭독하고, 권하고, 가르치라

디모데전서 4:13–14 본문 →

내가 갈 때까지 성경을 읽어 주고,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하며, 가르치는 일에 힘쓰십시오.디모데전서 4:13 · 두루새김

원문의 낱말 자체가 반드시 사람들 앞에서 읽어 주는 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격려하고 권하며 가르치는 일이 뒤따르는 이 문맥에서는 공동체 앞에서 성경을 읽는 일로 이해할 근거가 충분합니다. 그래서 두루새김은 「성경을 읽어 주고」로 옮겼습니다.

왜 낭독이 중요했을까요? 고대에는 문서를 만들고 소유하는 일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함께 모여 성경을 듣는 일은 믿음을 배우고 길러 가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받아 읽으시고,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누가복음 4:16–21). 그 장면에서도 성경을 읽는 일과 그 의미를 밝히는 일이 연결됩니다.

세 가지는 서로 관련되지만 완전히 같은 활동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 주는 일은 기록된 말씀을 공동체가 듣게 하는 일이고, 격려하고 권하는 일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믿음과 삶을 향해 호소하는 일이며, 가르치는 일은 말씀의 의미와 내용을 이해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가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그 말씀에 응답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받은 선물을 소홀히 하지 말라

디모데 안에 있는 은혜의 선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 선물은 장로들이 손을 얹을 때 예언을 통해 주어졌습니다.디모데전서 4:14 · 두루새김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지금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선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 선물을 언제나 충실하게 사용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고, 중요한 책임을 맡고도 그 일을 게을리할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이 정확히 어떤 은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앞의 성경을 읽어 주고 가르치는 문맥을 고려하면 말씀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섬기는 사명과 연결된 은사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특정한 능력 하나로 제한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언과 안수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 구절은 디모데가 사역을 맡게 된 과정에서 예언과 장로들이 손을 얹는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다만 손을 얹는 일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은사를 전달했는지, 예언과 손을 얹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결정적인 수단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디모데가 자기 자신에게 사명을 부여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고, 그 은사를 인정하며 사역을 맡긴 공동체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명령은 과거에 받은 은사를 자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 선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목적을 이루지 않습니다.

사용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디모데전서 1:18에서도 디모데에 관하여 전에 주어진 예언들이 언급되므로, 그 예언은 그의 사역을 확인하거나 격려하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손을 얹는 안수는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손을 얹는 장면은 민수기 27:18–23에 나타나며, 사도행전 13:2–3에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특별한 일을 위해 따로 세우면서 금식하고 기도한 뒤 손을 얹습니다. 디모데후서 1:6에서는 바울 자신이 손을 얹어 주었을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일깨우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을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설명으로 볼 수 있지만, 반드시 동일한 의식이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대의 진보를 보게 하라

디모데전서 4:15 본문 →

모든 사람이 디모데의 성장을 볼 수 있도록, 이 일들을 힘써 실천하고 여기에 온 힘을 쏟으십시오.디모데전서 4:15 · 두루새김

바울은 단순히 열심히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의 결과가 디모데의 성장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지도자가 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치는 능력도,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도, 자신의 행동을 분별하는 능력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성장의 모습을 감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공동체가 지도자의 신앙을 신뢰하는 데에는 완벽한 이미지보다 실제적인 성장이 중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배울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배우며 이전보다 더 성숙하게 행동하는 사람의 성장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믿음의 훈련이 무엇인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본보기는 한 번 완성된 뒤 더 이상 바뀌지 않는 모습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자라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6절의 「자라나며」라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디모데는 말씀으로 자라나는 사람이고, 그 말씀 안에서 자라는 모습이 공동체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바울은 그에게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권위자가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계속 배우면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대 자신과 가르침을 살피라

디모데전서 4:16 본문 →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이 일을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자신도 구원하고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4:16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짧지만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도자가 무엇을 살펴야 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이 어떻게 구원과 연결되는가입니다.

자신과 가르침을 함께 살피라

자기 자신의 삶만 살피면 자신의 태도와 인격에는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작 가르치는 내용이 참된지 확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르침만 살피면 정확한 교리를 설명하면서도 자신의 삶이 그 가르침과 어긋나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특히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야 하는 디모데에게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동안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올바른 가르침을 지키고 있다는 확신이 커질수록, 자기 행동을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일을 「꾸준히 계속하십시오」라고 권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가르침을 바로잡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삶은 계속해서 살펴야 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읽는 사람을 멈추게 합니다.

디모데가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고요?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사람의 구원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디모데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먼저 바울이 실제로 말한 것을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영적인 성숙이나 사역의 성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만 처리하기에는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이 너무 분명합니다. 그는 디모데의 꾸준한 실천이 자신과 듣는 사람들의 구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디모데가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구원자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근원이시고, 디모데는 그 구원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가 그 말씀을 충실하게 가르치고 자신의 삶에서도 지킬 때, 그 사역은 듣는 사람들의 구원과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은 어떨까요? 디모데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믿음이 자동으로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은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책임과 자기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책임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가르침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사람을 믿음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고, 참된 가르침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 장은 바로 그런 위험에서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속이는 가르침에 마음을 쏟다가 믿음을 떠난다는 경고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디모데가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살피면 자신과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잘못된 가르침이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마지막에는 참된 가르침과 그에 충실한 삶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끕니다.

조금 더 깊이

자신의 구원에 관한 이 진지한 경고는 고린도전서 9:27에서 바울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한 뒤 자신이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조심한다고 말한 것과도 주제 면에서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자라다

디모데전서 4:1–16 본문 →

디모데전서 4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음식은 감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은 자신을 기르는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은사는 소홀히 하지 않고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과 꾸며 낸 이야기는 단호하게 물리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하나님에게서 온 좋은 것인지 분별하고,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이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의 중심에는 디모데 자신이 이루어 낸 일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둔 희망이 있습니다. 바울이 거부한 금욕은 무엇을 포기해야 거룩해지는지를 묻지만, 그가 권한 훈련은 그 희망에서 시작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특별한 지위나 권위를 다시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이 일을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그 앞에 놓인 일은 성경을 읽어 주고,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하며, 가르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디모데 자신도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그 말씀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돌보면서 자신의 믿음도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까지 디모데를 가르치는 사람인 동시에 배우는 사람으로 세워 둡니다.

그의 앞에는 자신이 전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는 디모데 자신도 서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