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기도와 모임의 질서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와 구원

교회가 세상을 위해 기도할 때, 누구까지 그 기도에 포함해야 할까요?

믿음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당연할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뜻밖의 사람들을 명시합니다. 바로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요? 교회를 위해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일까요? 바울은 그런 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라고 말하고, 곧이어 하나님도 한 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시는 중개자도 한 분이라는 데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2장의 출발점입니다. 교회의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기 때문에 교회도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장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남자들이 화를 내거나 다투는 것을 경계하고, 여자들의 화려한 꾸밈을 제한하며, 마침내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타락에서 찾습니다.

이 두 부분을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할까요?

이 둘을 단순히 개방과 제한이라는 대립으로 읽으면 본문의 흐름을 놓칩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가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기도의 범위를 넓힌 뒤, 그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삶을 살피고, 그 삶의 질서가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지 창조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2장 본문 읽기 →

왕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디모데전서 2:1–2 본문 →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 간절히 구하고 기도하며 간청하고 감사드리기를 권합니다.디모데전서 2:1 · 두루새김

「그러므로」는 앞 장에서 디모데에게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며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라고 당부했던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그 당부에 이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교회의 조직이나 가르침을 위한 새로운 규정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바울은 간절히 구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 간청하는 일과 감사드리는 일을 나란히 놓는데, 네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된 기도의 종류로 나누기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풍성한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종류보다 기도의 대상입니다.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가 평온하고 조용하게 살면서 모든 면에서 경건하고 품위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디모데전서 2:2 · 두루새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와 여러 통치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과 언제나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도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는 복음 전파가 지역 사회의 권력자들과 충돌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사도행전 16:19–24, 17:6–9).

그런데 바울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이 말은 통치자의 모든 행동을 지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권력과 가까워져 특권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하고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평온입니다. 「평온하고 조용하게 살면서」도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자기 신앙생활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아니라, 갈등이나 소란에 휘말리지 않고 신앙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될까요? 그 답은 다음 단락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디모데전서 2:3–7 본문 →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며, 우리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일입니다.디모데전서 2:3 · 두루새김

바울은 통치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그들의 지위나 권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자의 뜻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디모데전서 2: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디모데전서 2장의 논증을 이해하는 중심축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정말 모든 사람인가

1절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2절에서는 그 가운데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언급합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하고, 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풀어 주기 위한 몸값으로」 자신을 내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기도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뜻을 지나 예수님의 자기희생에 이르기까지, 같은 범위를 거듭 가리킵니다. 이 반복을 놓치면 1–2절은 통치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윤리적 교훈으로만 보입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범위에 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모든 개인을 빠짐없이 가리킨다고 읽는 견해가 있고, 왕과 통치자와 이방 사람을 포함한 모든 부류의 사람을 강조한다고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문맥상 분명한 것은 복음의 대상을 어떤 특정한 집단으로 좁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사람이 실제로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을 곧바로 뜻하지는 않습니다. 4절은 하나님이 구원을 원하신다는 뜻을 말하며, 모든 개인의 최종적인 운명을 확정하는 문장은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 한 분 중개자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시는 중개자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디모데전서 2:5 · 두루새김

「한 분」이 두 번 반복됩니다. 원문에서도 「하나」(εἷς)가 두 진술의 앞부분에 놓여, 먼저 한 분 하나님을 말하고 이어서 한 분 중개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신명기 6:4). 이스라엘이 오직 그분만을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그 고백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고백에서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유대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로마서 3:29–30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 사람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에 그분의 구원은 민족과 신분의 경계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시는 중개자도 한 분이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덧붙여 인간성을 강조할까요? 그 중개자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무관한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인간으로서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이 구절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바울의 관심은 그 중개자가 사람이시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사이를 이어 주셨을까요?

중개자는 자기 자신을 내주셨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풀어 주기 위한 몸값으로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이것이 정해진 때에 주어진 증언입니다.디모데전서 2:6 · 두루새김

「몸값」(ἀντίλυτρον)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신약에서 이 형태로는 이 구절에만 등장하며, 몸값이나 풀려나는 대가를 뜻하는 말에 대신한다는 의미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오셨다는 마가복음 10:45와도 연결됩니다. 다만 이 비유를 지나치게 세밀하게 풀어, 그 값을 정확히 누구에게 지불했는지까지 본문에서 찾아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5절의 중개자라는 표현에 깊이를 더합니다. 우리는 흔히 중개자라고 하면 양쪽의 이야기를 듣고 조건을 조정하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중개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견을 전달하신 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7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 증언을 전하는 사람과 사도, 그리고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과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세워졌다고 말하며,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으며 거짓말하지 않습니다」라고 사명에 대한 확신을 덧붙입니다. 유대 사람인 바울이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이유는 그 복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한 분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거룩한 손은 분노를 품은 채 들 수 있는가

디모데전서 2:8 본문 →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어디에서나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않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디모데전서 2:8 · 두루새김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은 구약에서도 발견됩니다. 시편 63:4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손을 들고, 열왕기상 8:22에서는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하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펼칩니다.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기도의 몸짓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손을 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논쟁에서 이기려 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과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와 다툼에 사로잡혀 있다면,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와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손의 거룩함은 겉으로 보이는 깨끗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의 삶과 태도에 관계됩니다. 바울은 손을 드는 자세를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으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몸짓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손은 하나님을 향해 들려 있는데 마음은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모순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자들에게도 예배에 합당한 태도를 요구합니다.

무엇으로 자신을 꾸밀 것인가

디모데전서 2:9–10 본문 →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단정한 옷차림과 조심스럽고 절제하는 태도로 자신을 꾸미기를 원합니다.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비싼 옷이 아니라, 선한 행동으로 자신을 꾸미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밝히는 여자들에게 어울리는 모습입니다.디모데전서 2:9–10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읽으면 머리를 땋거나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이 죄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대조하는 것을 보면, 한쪽에는 땋은 머리와 금, 진주, 비싼 옷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선한 행동이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단순한 복장 규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화려한 옷은 무엇을 보여 주었을까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복장과 장신구는 부와 신분, 명예를 나타내는 수단이었습니다. 화려한 꾸밈은 사치일 뿐 아니라 여성에게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영향력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모인 자리에서도 서로의 신분과 경제적 차이를 의식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과시를 신앙의 본질과 구별합니다. 모든 형태의 장신구나 단정한 꾸밈을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문장인지는 해석상 논의할 수 있지만, 화려한 외모가 경건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꾸밈을 완전히 없애라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자신을 꾸밀 것인지를 바꾸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드러내려 합니다. 비싼 옷은 재산을, 화려한 장신구는 지위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무엇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낼까요? 바울의 대답은 선한 행동입니다. 원문에서도 9절의 꾸밈과 관련된 같은 어근이 10절의 「선한 행동으로 자신을 꾸미기」까지 이어져, 겉모습을 꾸미는 일과 선한 행동으로 꾸미는 일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남자들에게 요구한 것이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않는 기도였다면, 여자들에게는 화려한 과시가 아니라 선한 행동으로 드러나는 경건을 요구합니다. 두 권면은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루지만, 하나님 앞에 모인 사람은 실제 삶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야 한다는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선한 행동을 뜻하는 말이 자신을 꾸미는 일에 연결되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밝히는 일에 연결되는지에 문법적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선한 행동으로 자신을 꾸미기」로 연결해 옮겼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경건의 고백이 실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히 배워야 한다

디모데전서 2:11–12 본문 →

이제 이 장에서 가장 논쟁적인 단락으로 들어갑니다.

여자는 조용히, 온전히 복종하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도,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2:11–1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여성의 가르침과 지도력에 관해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먼저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그다음에 논쟁의 핵심을 구별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오는 명령은 「배워야 합니다」이다

11절에서 흔히 시선이 머무는 곳은 「조용히」와 「복종하며」입니다. 그러나 문장의 중심 동사는 「배워야 합니다」입니다.

바울은 여자들에게 배우라고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교육 기회는 신분과 가정환경 등에 따라 달랐으므로, 이 명령이 모든 여성에게 전례 없는 기회를 주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본문에서 바울은 여성들을 배움의 자리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배움이 어떤 태도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입니다.

「조용히」에 해당하는 헤쉬키아(ἡσυχία)는 반드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절대적인 침묵만을 뜻하지는 않고, 조용하고 평온한 태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2절의 「평온하고 조용하게」도 원문에서 같은 어근의 낱말이어서, 바울이 이 장에서 조용하고 질서 있는 삶을 반복해서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조용히」를 평온한 태도로 설명하기만 하면 12절의 실제 금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시합니다.

여기서부터 해석의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무엇을 금지한 것인가

12절의 「권위를 행사하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우텐테인(αὐθεντέω)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이 동사가 일반적인 권위 행사를 뜻하는지, 독단적으로 권위를 장악하는 것을 뜻하는지가 논의됩니다. 또 「가르치는 것」과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따로 금지된 두 활동인지, 하나로 이어진 특정한 가르침의 방식인지도 문법적으로 연구됩니다.

한 해석은 이 금지를 교회의 지속적인 직무 질서로 이해합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남자를 대상으로 공적으로 가르치며 권위를 행사하는 지도자 역할을 맡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이며, 13절에서 특정 지역 문제를 넘어 창조 순서에 호소한다는 점과 3장의 감독 직무 설명이 근거입니다.

다른 해석은 에베소 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에 주목합니다. 디모데전서에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경계가 반복되므로, 바울이 당시의 잘못된 가르침과 권위 행사를 제한했다고 읽습니다. 여성에게 배움을 명령한다는 사실과, 그 동사의 가능한 부정적인 의미가 근거입니다.

두 해석 모두 설명해야 할 어려움이 있습니다. 앞의 해석은 신약의 다른 본문에서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며 가르침에 참여하는 모습을 함께 설명해야 하고, 뒤의 해석은 바울이 왜 근거를 에베소의 상황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에서 찾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여성이 언제나 모든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일반화하는 것도, 반대로 이 구절에 여성의 가르침을 제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판단입니다. 바울은 다음 두 절에서 자신의 이유를 직접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다른 장면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5는 여자들이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사도행전 18:26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며, 로마서 16장에는 교회를 위해 일하는 여러 여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들은 여성들이 초기 교회에서 아무런 발언이나 가르침의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이해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장면들만으로 디모데전서 2:12의 금지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제한하는지까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꺼냈을까

디모데전서 2:13–14 본문 →

먼저 아담이 지어졌고, 그다음에 하와가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아담은 속지 않았지만, 하와는 속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디모데전서 2:13–14 · 두루새김

바울은 갑자기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가 언급하는 아담이 먼저 지어진 일과 하와가 속아 명령을 어긴 일은 창세기 2–3장의 서로 다른 장면입니다.

먼저 빚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지으시고 그다음에 여자를 지으십니다. 그러나 먼저 지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언제나 더 우월하거나 더 큰 권위를 갖는다는 원리가 자동으로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그 순서가 창조 이야기 속에서 갖는 의미를 자신의 논증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창조 때부터 주어진 남녀의 역할 질서로 이해하는 해석에서는, 아담이 먼저 지어진 사실이 교회에서의 가르침과 지도력에 관한 구분의 근거가 됩니다. 반면 창조의 순서 자체를 위아래 권위의 근거로 보기 어렵다고 보는 사람들은, 바울이 당시의 왜곡된 가르침에 맞서 창세기의 실제 이야기를 다시 제시한다고 이해합니다.

어느 경우든 창세기 1:27은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2:18에서도 여자는 남자를 위한 적합한 돕는 이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을 여성이 남성보다 덜 인간적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낮다는 주장으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와는 속았고 아담은 속지 않았다는 말

14절은 더욱 어렵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이 여자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여자는 그 말을 받아들여 열매를 먹은 뒤 남편에게도 줍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17–19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책임을 물으시고, 로마서 5:12–19는 아담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 죄와 죽음이 들어왔다고 설명합니다. 「아담은 속지 않았지만」은 아담이 무죄라는 말이 아니라, 하와가 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왜 이 사실을 언급했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해석은 창조의 순서와 타락의 사건을 연결하여 교회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해하고, 다른 해석은 속아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 하와의 사례가 잘못된 가르침에 빠질 위험을 경고한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에서 여자들이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더 쉽게 속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하와가 속았다고 말할 뿐, 모든 여자가 지적으로 부족하거나 영적으로 분별력이 약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도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의 성별을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속아 명령을 어겼다는 이야기가 끝나자, 바울은 구원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를 낳는 일을 통해 구원받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15 본문 →

그러나 여자들이 자신을 절제하며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켜 나간다면, 아이를 낳는 일을 통해 구원받을 것입니다.디모데전서 2:15 · 두루새김

이것은 신약 전체에서도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시는 중개자가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신 예수님 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일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출산이 여자에게만 주어진 또 다른 구원의 방법이라는 뜻일까요?

구원의 의미가 달라졌을까

15절의 「구원받을 것입니다」(σῴζω)에는 4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고 할 때와 같은 동사가 쓰였습니다. 그래서 15절을 출산 과정에서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읽을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연결할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아이를 낳는 일을 통해」의 「통해」도 출산을 구원의 통로로 볼지, 출산이라는 삶의 경험을 겪는 가운데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볼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그러나」가 붙어 있습니다. 하와의 이야기를 마친 바울이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타락의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주요 해석

이 구절은 크게 세 가지로 읽힙니다. 출산의 위험에서 보호받는다는 읽기, 출산과 가정생활을 포함한 자신의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구원에 이른다는 읽기, 한 여자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읽기입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느냐에 따라 여기서 「구원」이 몸의 보호인지 하나님의 구원인지, 그리고 출산이 그 구원과 어떤 관계인지가 달라집니다. 출산과 구원의 관계에 대해 합의된 단일 해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여성이 얼마나 많은 자녀를 낳아야 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출산하지 못하는 여자가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중개자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신 한 분 예수님을 이야기했던 흐름을 생각하면, 이 구절을 출산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대체하는 별도의 조건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 절의 조건인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9절의 「조심스럽고 절제하는 태도」, 10절의 선한 행동에 이어 15절은 「자신을 절제하며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켜 나간다면」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에서 여자들에게 주어진 권면은 겉모습의 꾸밈에서 시작하여 배움과 질서를 지나,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켜 나가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겉모습이나 사회적 지위,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능력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물론 15절의 어려운 출산 표현이 왜 선택되었는지, 구원과 정확히 어떤 관계를 갖는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다만 바울은 하와의 타락을 말한 뒤 「그러나」라고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야기를 끝내는 곳은 하와의 속임이나 명령 위반이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창세기 3:16에서 출산의 고통이 언급된 것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믿음이 깊은 여자들도 출산 중에 죽거나 심각한 위험을 겪었다는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읽기는 혼인을 금지하는 사람들(4:3)과 젊은 과부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보기를 바란다는 권면(5:14)과 이어져, 결혼과 출산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가르침에 맞섰다고 보는 것으로 편지 전체 흐름과 맞지만, 출산하지 않는 여성에게도 같은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과 출산이 구원의 수단처럼 표현된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셋째 읽기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창세기 3:15,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갈라디아서 4:4와 연결되어 구원의 근거를 예수님께 두지만, 「아이를 낳는 일」이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 가리킨다는 표지가 부족하고, 정관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특정한 한 번의 출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원문에서 「구원받을 것입니다」는 단수(여자)인데 「지켜 나간다면」은 복수(그들)입니다. 하와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여자들 전체의 삶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고 볼 수 있으며, 두루새김은 이를 「여자들이」로 묶어 옮겼습니다. 이 변화만으로 세 해석 가운데 하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 분 중개자 앞에 모인 사람들

디모데전서 2:1–15 본문 →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야기들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의 남자들은 다투지 않고 기도해야 하고, 여자들은 과시보다 선한 행동으로 경건을 드러내야 하며, 가르침과 배움의 자리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여성의 가르침과 지도력에 관한 제한의 정확한 범위는 여전히 해석의 갈림길로 남지만, 이 논쟁 때문에 앞부분의 복음 선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분이나 부의 차이에 따라 다른 구원의 길을 마련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에게는 한 중개자를 주시고 여자에게는 다른 중개자를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역할 구분을 받아들이든,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치가 다르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권위를 행사하든, 그 권위를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시는 일은 권세를 과시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예수님을 전한 뒤에야 기도하는 사람들의 손과 옷차림과 말과 태도를 살핍니다. 교회의 경건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계산하는 데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신 예수님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처음 제시한 장면이 다시 떠오릅니다.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가운데 남자들은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않고 거룩한 손을 들고, 여자들은 비싼 장신구보다 선한 행동으로 경건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중개자도 한 분이십니다.

바로 사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