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0–28장 · 둘로 갈라진 나라

하나님의 눈앞에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

여호사밧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아합은 죽었지만,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으로 평안히 돌아왔습니다. 적의 병거들이 자신을 에워쌌을 때 여호와야훼께서 도우셨으니, 그에게는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을 맞이한 것은 승리를 축하하는 행렬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죽음을 피했지만, 하나님의 책망까지 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 자신이 하나님의 판단을 받은 뒤, 이제 백성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역대하 19장은 잘못된 판단을 했던 왕이 나라의 판단 체계를 바로 세우는 이야기입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719장 본문 읽기 →

평안히 돌아온 왕에게 진노가 선언되다

역대하 19:1–3 본문 →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으로 평안히 돌아왔다.역대하 19:1 · 본디새김

이 짧은 문장은 바로 앞 장의 미가야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왕께서 정말 평안히 돌아오신다면, 여호와야훼께서 저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18:27)

아합은 평안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평안히 돌아왔습니다. 두 왕은 함께 전쟁터에 올라갔지만 서로 다른 결말을 맞았습니다. 이 차이는 미가야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여호사밧이 특별한 구원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그가 살아 돌아온 장면을 결론으로 삼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선견자 예후가 그를 만나러 나옵니다. 예후는 하나니의 아들입니다. 하나니는 아사 왕에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일을 책망했던 선견자였습니다(역대하 16:7–9).

이제 그 아들이 아사의 아들에게 같은 역할을 맡습니다.

아사는 하나니의 책망을 듣고 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예후의 책망을 듣습니다. 그러나 역대하 19장은 여호사밧이 예후를 처벌하거나 그의 말을 반박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의 구체적인 감정이나 대답도 전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이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야훼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다

하나니의 아들인 선견자 예후가 그를 만나러 나와 여호사밧 왕에게 말했다. 「왕께서 악한 자를 도우시고 여호와야훼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셔야 합니까? 이 일로 여호와야훼에게서 오는 진노가 왕 위에 있습니다.」역대하 19:2 · 본디새김

이 말은 아합과 맺은 정치적·군사적 동맹을 가리킵니다. 여호사밧은 아합과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고, 그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자기 군대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백성이 아합과 그의 백성과 같다고까지 말했습니다(18:3).

그러나 아합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부하고, 진실을 전하는 예언자를 감옥에 가둔 왕이었습니다. 예후의 책망은 바로 이러한 아합을 여호사밧이 도왔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예후는 악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원수를 긍휼히 여기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여호와야훼를 거부하는 왕의 계획에 여호사밧이 자신의 권력과 군대를 결합했다는 사실입니다.

예후의 책망은 누구를 만나거나 누구에게 호의를 베풀었는가보다, 누구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했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님은 잘못만 보신 것이 아니었다

예후의 말은 뜻밖의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왕에게서 좋은 일들도 발견되었습니다. 왕께서는 이 땅에서 아세라 상들을 없애셨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마음을 굳게 정하셨습니다.」역대하 19:3 · 본디새김

이 두 평가는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여호사밧이 아세라 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은 진실입니다. 그가 아합을 도와 잘못된 동맹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진실입니다.

본문의 「좋은 일들도 발견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왕의 삶에 실제로 있었던 선한 행동들이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찾는 일이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이나 형식적인 종교 활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정하는 문제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정했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판단을 자동으로 올바르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한 사람에게 선한 의도와 잘못된 판단이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올바른 행동이 현재의 잘못을 정당화하지도 않고, 현재의 잘못이 과거의 충실함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좋은 일들이 발견되었다는 말이 앞서 선언된 진노를 자동으로 취소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은 그 진노가 이후 어떤 사건으로 나타나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음 장의 위기를 이 진노의 즉각적인 실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여호사밧이 예후의 말을 듣고 즉시 회개했다고 본문이 직접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선견자의 책망과 왕의 개혁 활동이 연이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대기는 왕의 내면을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그의 다음 행동에 주목합니다.

돌아온 왕이 다시 길을 나서다

역대하 19:4 본문 →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그는 다시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 백성 가운데로 나가, 그들을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돌아오게 했다.역대하 19:4 · 본디새김

그런데 이번에는 목적지가 달라졌습니다.

앞 장에서 그는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에게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전쟁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결국 라못길르앗으로 올라갔습니다.

아합을 돕기 위해 움직였던 왕이 이제 유다의 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돌아온다는 말의 세 가지 방향

1절에서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4절에서는 그가 다시 백성 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여호와야훼께 돌아오게 했습니다.

장소를 옮기는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교육 내용이나 회개의 과정을 기록하지 않지만,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라는 표현은 백성에게 자신들의 오랜 언약적 관계를 다시 기억하게 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백성이 새롭고 낯선 신을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

브엘세바는 유다 남쪽에 있는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는 유다의 북쪽, 북왕국과 접하는 지역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는 여호사밧의 활동이 유다의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왕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지시만 내린 것이 아니라, 직접 백성 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왕에게는 외부의 적을 막고 국경을 지키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그가 백성의 신앙적 방향을 돌보는 일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할까요?

바로 다음 장면이 그 질문에 한 가지 중요한 대답을 제시합니다. 여호사밧은 재판관들을 세웁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재판정에서도 나타난다

역대하 19:5–6 본문 →

왕이 세운 것은 새로운 군대가 아니라 재판관들이었다

그는 그 땅에 있는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마다 빠짐없이 재판관들을 세웠다.역대하 19:5 · 본디새김

17장에서 여호사밧은 요새와 저장 성읍들을 건설하고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이제 같은 왕국의 요새화된 성읍들에 재판관들을 세웁니다.

요새화된 성읍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외부의 적만 위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 부당한 판결, 권력자의 횡포, 뇌물을 통한 재판의 왜곡도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성벽이 튼튼하다고 해서 그 안에서 정의가 저절로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신명기 16:18–20의 명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각 성읍에 재판관들과 관리들을 세우고, 백성을 공정하게 재판하며, 정의를 따라야 한다는 명령을 받습니다. 여호사밧의 행동은 이 명령과 뚜렷하게 부합합니다.

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 다음, 재판을 바로 세우는 일이 이어집니다. 이는 하나님을 찾는 삶이 예배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분쟁을 어떻게 해결하며, 권력자가 약한 사람의 말을 어떻게 듣는가도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재판관은 누구를 위해 재판하는가

여호사밧은 재판관들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립니다.

그가 재판관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살펴라. 너희가 사람을 위해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를 위해 재판하기 때문이다. 재판하는 일에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하신다.」역대하 19:6 · 본디새김

재판관들이 하는 일은 분명히 사람 사이의 분쟁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의 호소를 듣고,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재판의 궁극적인 기준과 책임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재판관은 왕에게 인정받기 위해 판결해서는 안 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기대에 맞추어 판결해서도 안 됩니다. 당사자들이 원하는 결과를 무조건 제공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의 임무는 여호와야훼의 정의에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판관들에게 큰 권위를 주는 말이면서 동시에 그 권위를 제한하는 말입니다.

이 원칙은 신명기 1:17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재판관들에게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작은 자와 큰 자의 말을 똑같이 들으라고 명령하면서, 재판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사밧의 명령은 그러한 신명기의 정신을 자신의 왕국에서 구체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판결의 무오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재판관들과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재판관이 내리는 모든 판결은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여호사밧은 재판관들에게 주의하여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의도, 편파성도, 뇌물을 받는 일도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재판관의 모든 판단이 아무 조건 없이 옳다면 이런 명령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판관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판결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 판결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따라 평가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재판관이신가

역대하 19:7 본문 →

「그러니 이제 너희에게 여호와야훼를 향한 두려움이 있게 하라. 주의하여 행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는 불의도, 사람을 편드는 일도, 뇌물을 받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역대하 19:7 · 본디새김

정의로운 재판의 기준은 왕의 취향이나 정치적 편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

첫 번째 표현은 「불의」입니다.

재판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재판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고 해서 반드시 정의로운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재판관이 사실을 제대로 살피지 않거나, 증거를 왜곡하거나, 법을 잘못 적용한다면 재판의 형식 안에서도 불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 재판하는 사람은 판결의 결과만이 아니라 판단하는 과정까지 바르게 해야 합니다.

사람을 편들지 않으시는 하나님

두 번째 표현은 「사람을 편드는 일」입니다.

재판의 문맥에서는 사람의 지위나 신분, 관계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편파성을 뜻합니다. 누가 말했는지가 무엇을 말했는지보다 중요해질 때, 재판은 쉽게 왜곡됩니다.

부유한 사람의 말이 가난한 사람의 말보다 더 신뢰받거나, 권력자의 잘못이 약한 사람의 잘못보다 가볍게 다루어진다면, 법의 기준은 같아도 재판의 실제 결과는 달라집니다. 재판관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보다 어떤 사실이 있고 무엇이 옳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 원칙은 재판 당사자를 무조건 똑같은 처벌에 이르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건의 실제 차이를 정확히 판단하되,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개인적인 관계가 그 판단을 왜곡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세 번째는 뇌물입니다.

뇌물은 재판관이 자신의 판단을 부당한 이익과 바꾸는 행위입니다. 뇌물이 통하는 재판에서는 돈이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유리한 판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그러한 자원이 없는 사람은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기 어려워집니다.

결국 뇌물은 정의를 거래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10:17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을 편들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바로 이어서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거류민을 사랑하시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고 말합니다(신명기 10:18). 하나님이 공정하시다는 것은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중립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돌보십니다.

따라서 재판관이 하나님의 성품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도 권력이나 재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하게 하고, 누구도 약하다는 이유로 정당한 권리를 잃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여호사밧은 이 모든 명령을 「여호와야훼를 향한 두려움」으로 시작합니다.

재판관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은 단순히 형벌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이 불의와 편파성과 뇌물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상대화합니다.

권력자를 두려워하면 그에게 유리하게 판결할 수 있습니다. 대중의 비난을 두려워하면 사실보다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옳은 판결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재판관은 그보다 높은 기준 앞에 서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재판관들에게 가르치는 두려움은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판관이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재판을 받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재판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미가 6:8은 정의를 행하고 인애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걸으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1:17은 정의를 배우고 억압받는 사람을 도우며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변호하라고 명령합니다. 두 본문은 역대하 19장의 재판 제도와 동일한 상황을 다루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공동체 안에서 정의로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이어집니다. 신약에서도 이러한 주제적 연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은 사람을 외모와 재산에 따라 차별하는 행동을 비판합니다. 이는 역대하 19:7의 재판 명령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동일한 윤리적 원칙을 드러냅니다.

예루살렘에도 재판의 자리를 마련하다

역대하 19:8–10 본문 →

지방의 재판과 예루살렘의 재판

여호사밧은 지방 성읍에 재판관들을 세운 뒤 예루살렘에도 재판을 담당할 사람들을 임명합니다.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에서도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가문 우두머리들 가운데 일부를 세워 여호와야훼의 재판과 분쟁의 심리를 맡게 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역대하 19:8 · 본디새김

백성의 일상적인 분쟁은 각 지역에서 다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은 더 높은 수준의 판단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신명기 17:8–13은 지방에서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할 때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올라가 제사장들과 당시의 재판관에게 판단을 구하도록 명령합니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마련한 조직은 이러한 신명기의 규정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특히 다음 절에서 피 흘린 사건과 율법에 관한 여러 종류의 분쟁을 언급하는 것은 어려운 사건들을 판단하는 역할과 잘 어울립니다.

다만 역대하 19장은 예루살렘의 재판 조직이 정확히 어떤 사건만을 담당했는지, 지방 재판의 모든 항소를 받아들였는지까지 자세히 규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현대적인 의미의 대법원이나 완성된 항소심 제도로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뿐 아니라 가문 우두머리들도 참여했습니다. 이는 분쟁을 판단하는 일에 종교적 책임을 맡은 사람들과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했음을 보여 줍니다. 재판이 단순히 제사의식과 관련된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실제 생활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온전한 마음은 재판관에게도 필요하다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의 재판 담당자들에게 말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며, 신실하게,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행해야 한다.」역대하 19:9 · 본디새김

여호사밧 자신은 하나님을 찾으려고 마음을 굳게 정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습니다(19:3). 이제 그는 재판관들에게도 온전한 마음을 요구합니다. 왕이 하나님께 보여야 하는 태도와 재판관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때 보여야 하는 태도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재판관의 마음이 진실과 사적인 이익 사이에서 갈라져 있다면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따른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특정 사람의 호의를 얻으려 한다면 그 마음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여호사밧은 재판관에게 단순히 법을 알고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 법을 적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온전한 마음은 올바른 판결로 나타나야 합니다.

재판관의 임무는 판결만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10절에서 여호사밧은 재판관들이 맡게 될 사건들을 열거합니다.

「자기 성읍들에 사는 너희 형제들에게서 어떤 분쟁이 너희에게 오든, 피 흘린 사건의 성격을 가리는 일이든, 율법과 계명과 규례와 법규에 관한 시비를 가리는 일이든, 그들에게 경고하라. 그들이 여호와야훼께 죄를 지어 너희와 너희 형제들에게 진노가 내리는 일이 없게 하라. 이렇게 행하라. 그러면 너희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역대하 19:10 · 본디새김

재판관의 역할은 이미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도록 분명하게 알려 주고, 공동체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책임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재판과 가르침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재판관이 사람을 벌하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잘못된 행동을 피하며, 공동체 안에서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돕는 기준이었습니다.

피와 피 사이를 판단하다

10절의 「피 흘린 사건의 성격을 가리는 일」이라는 표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피와 피 사이」(⁨דָּם⁩)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피와 관련된 사건들 사이의 차이를 판단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35:9–34와 신명기 19:1–13에서는 고의적인 살인과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사건을 구별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같은 사람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발생했더라도 그 사건의 의도와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달라져야 했습니다. 역대하 19:10이 정확히 이러한 사례만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17:8에서도 「피와 피 사이」를 가리는 일이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의 예로 등장합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누구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따른다는 것은 무조건 엄격하게 처벌하는 일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건들을 정확하게 구별하고 그에 맞게 판단하는 일입니다.

왜 잘못된 재판은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되는가

불의한 행동은 단순히 개인과 개인 사이의 문제로만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었습니다.

특히 재판관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 재판관이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거나, 불의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역시 공동체의 잘못에 책임을 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이렇게 행하라. 그러면 너희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재판관의 죄는 단순히 직접 불의를 행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판단과 경고를 소홀히 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 안에서 불의를 막고 바로잡기 위해 행동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다만 이 원칙을 근거로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을 지도자 개인에게 자동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재판관들이 맡은 구체적인 판단과 경고의 책임을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8절 마지막의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표현은 다소 어렵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사람들을 세웠다고 말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본문도 이 표현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누가 돌아왔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문장의 연결 방식이나 서술 순서를 다르게 이해할 여지는 있지만, 본문만으로 정확한 이동 경로를 복원하기는 어렵습니다.

왕도, 제사장도, 재판관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역대하 19:11 본문 →

여호사밧의 마지막 명령은 재판 조직의 책임자를 지정하는 일입니다.

「보아라. 여호와야훼에 관한 모든 일에서는 제사장들의 우두머리 아마랴가 너희를 감독하고, 왕에 관한 모든 일에서는 유다 집안의 지도자인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가 너희를 감독한다. 레위 사람들은 너희를 보좌하는 관리로 섬긴다. 힘을 내어 행하라. 여호와야훼께서 선한 사람과 함께하시기를 바란다.」역대하 19:1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여호사밧이 재판의 책임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여러 직무로 나누어 맡겼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왕의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 역시 여호와야훼의 정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재판관을 임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을 사용하는 목적은 재판관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판관들이 여호와야훼를 위해 재판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신이 임명한 사람들에게 자신보다 높은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마지막 명령은 용기를 요구한다

왜 재판관들에게 힘을 내라고 했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주어진 명령들을 생각하면 공정한 재판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의 편을 들지 않으려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뇌물을 거절하려면 눈앞의 이익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경고하려면 그 사람의 반발을 마주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는 옳은 일을 실제로 행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는 재판관들에게 자신이 가진 권력을 강하게 행사하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앞서 제시한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행동하라고 요구합니다. 그 용기는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복종시키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편들거나 뇌물을 받으라는 압력 앞에서도 옳은 판결을 내리는 힘입니다.

「선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문맥상 바로 앞의 명령을 따라 신실하고 공정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왕은 그들이 선한 일을 행하도록 명령하고, 여호와야훼께서 그런 사람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여호와야훼에 관한 모든 일」과 「왕에 관한 모든 일」이 정확히 어떤 사건들을 각각 포함했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율법적 문제와 왕국의 행정적·법적 문제를 구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현대적인 종교와 국가의 분리 제도로 직접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 유다에서는 왕의 통치와 여호와야훼의 율법이 오늘날의 제도적 구분과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왕권과 재판권이 현대적인 의미에서 완전히 독립되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본문은 재판관의 임명과 감독 체계에 왕이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책망받은 왕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

역대하 19:1–11 본문 →

왕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판단과, 그가 재판관들에게 요구한 판단의 원칙이 서로 연결됩니다. 정의로운 판단을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도 그 정의로운 판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말할 수 있는 권위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 정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재판관들에게 힘을 내어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처음에 왕은 자신에게 닥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행동하고, 여호와야훼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장면은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닙니다.

유다의 성읍마다 재판관들이 세워져 있고, 예루살렘에는 분쟁을 심리할 사람들이 임명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말을 듣고, 사건을 살피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 앞에는 여러 사람이 설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도, 약한 사람도,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들에게 누구의 얼굴을 보아야 하는지보다 먼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재판하는 자리에는 여호와야훼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