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31장

이 장의 자리 · 29–32장 · 히스기야의 개혁

예배가 삶의 질서가 되기까지

예배가 끝난 뒤에 시작되는 개혁 —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공동체의 질서가 되기까지

역대하 31장은 성경에서 특별히 극적인 장면이 없는 장에 속합니다. 기적도 없고, 적군과의 전투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도 없습니다. 대신 제사장들의 근무 순서를 정하고,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를 모으고, 창고를 마련하고, 담당자를 임명하고, 사람들에게 몫을 나누어 주는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히스기야의 위대한 종교개혁을 이야기하면서, 왜 이렇게 많은 지면을 물품 관리와 분배 절차에 할애했을까요?

앞선 30장에서 히스기야는 오랫동안 소홀히 여겨졌던 유월절을 회복했습니다. 유다뿐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에서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큰 기쁨 가운데 절기를 지켰습니다. 본문은 솔로몬 시대 이후 예루살렘에서 그런 기쁨이 없었다고까지 말합니다(30:26).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성전이 다시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유월절의 열기는 금세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한때의 감격이 공동체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특별했던 행사 하나로 끝날 것입니다.

31장은 바로 그다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631장 본문 읽기 →

성전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산당을 허물다

역대하 31:1 본문 →

이 모든 일이 끝나자, 그곳에 있던 온 이스라엘이 유다의 성읍들로 나갔다. 그들은 기둥들을 부수고 아세라상들을 찍어 버렸으며, 유다와 베냐민 전역과 에브라임과 므낫세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남김없이 헐어 버렸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자기 성읍에 있는 각자의 소유지로 돌아갔다.역대하 31:1 · 본디새김

본문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빠짐없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앞선 30장에서는 북쪽 사람들 가운데 초청을 비웃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기록합니다(30:10). 따라서 ‘그곳에 있던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절기에 참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정치적으로 왕국은 이미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여호와야훼를 예배하는 이들을 여전히 한 백성으로 묘사합니다. 정치적 분열이 그들의 언약적 정체성까지 완전히 지워 버린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으로 모였던 사람들이 이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각 지역으로 흩어집니다. 그들의 개혁은 성전 안에서 시작되었지만 성전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특히 산당의 철거는 단순히 이방신의 형상을 없애는 것보다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산당은 이방신 숭배와 관련될 수도 있었지만, 여호와야훼를 예배하는 지방 제의 장소일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신명기 12:2–14에서 강조하듯,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의 질서와 장소를 따르는가 하는 데에도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종교적 열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느냐뿐 아니라, 어떻게 예배하느냐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새롭게 정비하려 했습니다.

열왕기하 18:4 역시 히스기야가 산당과 아세라상을 제거했다고 기록합니다. 역대하는 같은 개혁을 전하면서 특별히 유월절에 참여한 백성의 집단적인 행동을 부각합니다. 왕의 명령만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한 공동체가 개혁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에서의 공동체적 경험이 끝나고, 밭을 경작하고 가축을 돌보며 살아가는 평범한 날들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는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본문이 묘사하는 범위 안에서는, 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히던 장소들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허무는 것만으로는 개혁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예배를 제거한 자리에 올바른 예배가 지속될 수 있는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이제 히스기야가 그 일을 시작합니다.

예배가 계속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역대하 31:2–4 본문 →

1절에서는 백성이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2절부터는 히스기야가 주도적으로 행동합니다.

히스기야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조들을 배치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조에서 맡은 일에 따라 번제와 화목제를 맡고 여호와야훼의 진영 문들에서 섬기며 감사하고 찬양하게 했다.역대하 31:2 · 본디새김

여기서 히스기야는 새로운 예배 방식을 고안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진 질서를 회복합니다.

역대상 23–26장에는 다윗이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의 직무를 정비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하 8:12–14에서도 솔로몬이 제사와 제사장들의 직무를 다윗이 정한 규례에 따라 시행했다고 말합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 하지 않고, 오래전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마련되었던 질서를 다시 작동시키려 합니다.

성전을 ‘여호와야훼의 진영’이라 부르는 이유

성전을 가리키는 자리에서 왜 ‘진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이 표현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진을 쳤던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민수기 2–3장에서 이스라엘의 진영은 아무렇게나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성막이 중심에 있었고, 지파마다 정해진 위치가 있었으며, 레위 사람들은 성막 주변에서 특별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이 진영 전체의 구조를 결정했습니다.

역대상 9:18에서도 레위 사람들의 문지기 직무와 관련해 ‘진영’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성전의 문과 직무를 옛 이스라엘 진영의 질서와 연결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저자가 광야 시대를 의도적으로 환기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왕궁도, 군대도, 시장도 아니라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야훼이십니다.

히스기야가 성전 봉사의 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사 조정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가는지를 다시 정하는 일입니다.

왕이 먼저 자기 재산을 내놓다

3절에서 히스기야는 아침과 저녁, 안식일과 초하루, 정해진 절기에 드릴 번제를 위해 자기 재산을 내놓습니다. 이 절기와 제사의 일정은 민수기 28–29장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그가 국고를 사용했다고 하지 않고, ‘자기 재산에서 내놓은 몫’이라고 밝힙니다. 왕 자신도 회복하려는 예배를 위해 물질적 책임을 감당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에게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몫을 주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율법에 힘쓸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역대하 31:4 · 본디새김

민수기 18:20–24에 따르면 레위 사람들은 다른 지파와 같은 방식으로 땅의 기업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몫을 통해 생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헌물이 그들의 생계와 연결되는 구조였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회복하면서 그 일을 감당할 사람들의 생활은 돌보지 않는다면 개혁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예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질은 예배와 무관한 세속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는 그 예배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맡은 일에 충실할 수 있도록 책임을 나누어야 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 10:37–39에서도 성전 봉사에 필요한 첫 열매와 십일조를 마련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회복될 때 그 예배를 뒷받침할 실제적인 책임 역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주제가 반복됩니다.

여호와야훼의 복이 눈에 보이는 무더기가 되다

역대하 31:5–10 본문 →

히스기야의 명령이 전해지자 백성은 풍성하게 응답합니다.

그 말이 퍼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곡식과 새 포도주와 새 기름과 꿀과 밭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첫 것을 풍성하게 내놓았다.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넉넉히 가져왔다.역대하 31:5 · 본디새김

이어서 가축의 십일조와 거룩하게 바친 것들까지 가져옵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당시 사람들의 식탁과 밀접하게 연결된 생산물이었습니다. 소와 양과 염소는 그들의 재산이면서 생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앞선 장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였다면, 이제는 자기들의 밭과 가축에서 나온 것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옵니다. 성전에서의 예배와 일상의 노동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첫 열매와 십일조는 같은 것인가?

5절은 ‘소출의 첫 것’과 ‘모든 것의 십일조’를 구분합니다. 첫 것은 수확의 처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십일조는 정해진 비율에 따라 소출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두 제도는 모두 율법에 근거하지만 같은 행위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첫 열매를 드리는 규정은 신명기 26:1–11에서, 십일조와 관련된 규정은 레위기 27:30–33과 신명기 14:22–29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명기 26장은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을 단순한 납부 행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자기 조상들이 겪었던 고난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고백하면서 첫 열매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수확물을 바치는 행위에는 그 땅과 소출을 당연한 자기 소유로만 여기지 않는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씨를 뿌리고 밭을 가꾸었지만, 그 땅을 얻게 하신 분과 거기서 살아갈 수 있게 하신 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31장에서도 백성의 헌물을 이런 언약적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무더기를 쌓는 데 여러 달이 걸렸을까?

7절은 사람들이 셋째 달에 무더기들을 쌓기 시작해서 일곱째 달에 마쳤다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달력에서 셋째 달은 늦봄에서 초여름 무렵에 해당하고, 일곱째 달은 가을 절기와 관련됩니다. 본문은 여러 종류의 농산물이 수확되는 기간에 걸쳐 예물이 쌓여 갔음을 보여 줍니다.

유월절의 감격이 일상의 반복적인 순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고관들이 와서 그 무더기들을 보고 여호와야훼를 찬송하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빌었다.역대하 31:8 · 본디새김

하나님은 찬송의 대상이시고, 백성은 축복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히스기야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그 무더기에 관해 묻습니다. 질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수량을 확인했는지, 왜 이렇게 많이 남았는지 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사랴의 답변을 보면 무엇이 중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독 가문 출신의 수석 제사장 아사랴가 그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봉헌물을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가져오기 시작한 뒤로 저희는 먹고 배불렀으며, 남은 것도 아주 많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남은 것이 이 큰 무더기입니다.」역대하 31:10 · 본디새김

성전의 창고가 가득 찼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필요한 몫을 얻었다는 사실이 먼저 언급됩니다. 아사랴는 이 풍성함의 근원을 여호와야훼의 복으로 해석합니다.

복은 단순히 곡식의 양이 많아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이 자기 몫을 구별하여 가져오고, 필요한 사람이 배불리 먹으며, 남은 것이 풍성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남은 것’은 낭비되거나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장면에서 그 남은 것을 어떻게 다룰지 결정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6절의 ‘거룩하게 바친 것들의 십일조’에는 해석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마아사르(⁨מַעֲשֵׂר⁩) 코다심(⁨קֹדֶשׁ⁩), 곧 ‘거룩한 것들의 십일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미 거룩하게 구별한 것들 가운데서도 십일조를 드렸다는 뜻이 됩니다. 본디새김은 이 표현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다른 해석에서는 앞의 가축 십일조와 뒤의 봉헌물을 구별하여, 십일조와 거룩하게 바친 예물들이 함께 들어왔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첫 번째 해석은 표현의 직접적인 문법에 강점이 있고, 두 번째 해석은 성물에 관한 다른 율법 규정들과 조화시키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어떤 종류의 성물에 정확히 어떤 비율을 적용했는지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넘치는 헌물이 신실한 분배를 만나다

역대하 31:11–19 본문 →

11절부터 이야기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풍성한 곡식과 가축의 무더기가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창고와 담당자, 감독관과 명부, 그리고 분배의 대상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풍성하게 들어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올바르게 보관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신실함은 어떻게 재물을 다루는가?

11–12절에서 히스기야는 성전에 방들을 마련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들은 봉헌물과 십일조와 거룩하게 바친 것들을 성실하게 들여놓았다. 레위 사람 가나냐가 그것들을 관리하는 책임자가 되었고, 그의 형제 시므이가 그다음 책임자가 되었다.역대하 31:12 · 본디새김

역대기 저자는 이 장에서 헌물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성품을 표현할 때 ‘성실하게’라는 같은 단어를 반복합니다. 12절에서는 봉헌물을 들여놓는 일을, 15절에서는 그것을 나누어 주는 일을 설명하면서 사용합니다. 18절에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일과 관련하여 등장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만 신실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바친 것을 관리하는 사람도 신실해야 합니다.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도 신실해야 합니다. 거룩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삶에서 신실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렇게 신실함의 의미가 성전의 의식에서 재물의 관리와 공동체의 생활로 확장됩니다.

가나냐를 책임자로 세우고 시므이를 그다음 책임자로 임명하며, 여러 감독관을 그 아래에 배치합니다. 또한 왕뿐 아니라 하나님의 집 책임자인 아사랴도 이 임명에 관여합니다.

본문은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의 회계 감사나 재정 투명성 제도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고 여러 사람을 통해 헌물이 관리되도록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이름을 기록했을까?

12–15절에는 오늘날 독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이 길게 등장합니다.

가나냐, 시므이, 여히엘, 아사시야, 나핫, 아사헬, 여리못, 요사밧, 엘리엘, 이스마갸, 마핫, 브나야, 고레, 에덴, 미냐민 등입니다. 이들은 왕처럼 나라를 다스리거나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봉헌물을 관리하고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이들의 이름을 생략하지 않습니다.

역대상 9장과 23–26장에서는 문지기, 찬양하는 사람들, 성전의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들까지 상세하게 다룹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띄는 지도자들뿐만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제사를 드리고, 누군가는 찬양하며, 누군가는 문을 지키고, 누군가는 물품을 관리합니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성전의 봉사도 온전하게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역대기는 이런 직무들을 단순히 왕의 행정을 돕는 부수적인 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에 속한 실제적인 봉사로 기록합니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에게

그의 지휘 아래 에덴과 미냐민과 예수아와 스마야와 아마랴와 스가냐가 제사장들의 성읍들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그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조별로, 큰 이나 작은 이나 똑같이 몫을 나누어 주었다.역대하 31:15 · 본디새김

히브리어는 카가돌(⁨גָּדוֹל⁩) 카카탄(⁨קָטָן⁩), 곧 ‘큰 자와 같이 작은 자도’라는 대칭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이 나이를 기준으로 한 말인지, 지위나 다른 구분을 가리키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조의 규모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사람에게 정확히 같은 분량을 주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배가 공동체 내부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16–19절을 보면 이런 관심은 더욱 구체화됩니다. 성전에서 날마다 봉사하는 사람과 지방 성읍에 머무는 사람, 직무를 맡은 성인과 그 가족까지 함께 언급됩니다.

16절에는 ‘세 살 이상의 남자들’이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도 실제로 ‘세 살 이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들이 성전 봉사를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과 한 문장에 묶여 있기 때문에 해석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부 번역은 문맥상 ‘서른 살 이상’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이것은 히브리어 본문의 숫자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또한 절 앞의 ‘다만’에 해당하는 표현을 앞서 말한 분배의 예외로 볼지, 다른 방식으로 몫을 받는 사람들을 덧붙인 것으로 볼지도 해석이 갈립니다. 분명한 것은 세 살 된 아이들이 실제 성전 직무를 수행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명부에 포함되는 연령과 실제 봉사자의 연령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17절은 레위 사람들의 봉사 관련 등록 기준을 스무 살 이상이라고 명시합니다.

성전의 봉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상황에 맞는 분배가 필요했습니다.

봉사자만이 아니라 가족도 보이다

18절에서는 분배의 범위가 한층 넓어집니다.

그들의 모든 어린아이와 아내와 아들딸을 포함하여 족보에 등록된 온 회중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이 신실하게 자신을 거룩하게 했기 때문이다.역대하 31:18 · 본디새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함께 생활하는 집이 있으며, 돌봄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들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성전 봉사를 위해 사람들을 세웠다면 그들의 생활 기반에 속한 가족들을 무시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18절 후반부의 ‘신실하게 자신을 거룩하게 했다’라는 말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이트카데슈(⁨קָדַשׁ⁩)는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재귀적 형태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신실함 가운데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표현은 성물을 신실하게 다루었다는 뜻으로도 읽히며, 주어를 분배 담당자들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거룩함은 단순히 성전 건물이나 성물에만 속하는 속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까지 관련됩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성읍의 주변 들에 사는 제사장들에게까지 분배가 이루어집니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도 몫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읍마다 이름으로 지명된 사람들이 이 일을 담당합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모여드는 헌물에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이제는 그 헌물이 다시 여러 지역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바친 것이 한곳에 쌓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장에서 신실한 공동체는 잘 모으는 공동체일 뿐 아니라, 마땅한 몫을 잘 전달하는 공동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4:28–29는 십일조와 관련하여 레위 사람뿐 아니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도 배불리 먹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역대하 31장이 그 모든 대상을 동일하게 열거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율법이 예배와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활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는 같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신약의 사도행전 6:1–6에서는 공동체 안의 일상적인 분배가 소홀히 다루어지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두 본문이 직접 서로를 인용하거나 같은 제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의 신실함이 실제적인 돌봄과 분배에서도 드러나야 한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히스기야의 성공은 무엇으로 평가되는가?

역대하 31:20–21 본문 →

31장의 마지막 두 절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평가합니다.

히스기야는 유다 전역에서 이같이 행했다. 그는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 앞에서 선하고 올바르고 진실한 일을 했다.역대하 31:20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는 여러 담당자가 신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마지막에는 왕의 행동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히스기야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는지가 아닙니다. 얼마나 큰 종교 행사를 열었는지도 아닙니다. 그가 행한 일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 앞에서’ 선하고 올바르고 진실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역대하 25:2에서 아마샤는 여호와야훼의 눈에 옳은 일을 했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평가됩니다. 겉으로 옳은 일을 수행하는 것과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찾는 것은 반드시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자기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일과 율법과 명령에 관하여 시작한 모든 일을 온 마음으로 수행했고, 성공을 거두었다.역대하 31:21 · 본디새김

히스기야는 단순히 국가의 종교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삶이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하려 했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추상적인 종교적 열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자신의 재산을 구별하고, 공동체를 돌보고, 맡은 일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마음이 만들어 내는 질서는 눈에 보입니다.

마지막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을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충실히 섬겼기 때문에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바로 다음 장인 역대하 32:1은 히스기야의 이러한 신실한 행동 이후에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31:21의 성공은 고난과 위협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장에서 히스기야가 수행한 예배 회복과 공동체 정비가 온 마음으로 이루어졌고 그 일이 성취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역대하 31:1–21 본문 →

참된 예배 회복은 예배가 끝나는 순간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예배가 사람들의 일상과 공동체의 지속적인 삶을 바꾸어 놓을 때 비로소 그 깊이가 드러납니다. 역대하 31장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따라 공동체가 살아가도록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책임을 사용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공동체가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 제도나 십일조 규정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제도들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율법에 속한 구체적인 역사적 질서였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허물었는지 보게 되고, 다음에는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보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쌓인 것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 보게 됩니다.

역대하 31장이 보여 주는 회복의 풍경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성전에는 여호와야훼께 바친 것이 보관되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맡은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며, 그들의 가족들은 생활에 필요한 몫을 받습니다. 공동체는 자신들이 드린 것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살아갑니다.

유월절의 노래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가 불러일으킨 신실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신실함은 각 성읍의 집들과 사람들의 식탁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