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35장

이 장의 자리 · 33–35장 · 므낫세와 요시야

가장 온전한 유월절과 듣지 않은 왕

가장 온전한 유월절,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은 왕 — 요시야의 마지막이 남긴 질문

역대하 35장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두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월절 가운데 하나가 열립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정해진 자리에 서고, 왕과 지도자들은 백성을 위해 제물을 제공합니다. 찬양하는 사람과 문지기들까지 자기 직무를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요시야는 이집트 왕 느고가 전한 경고를 듣지 않고 전쟁터로 나갑니다. 그는 활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결국 죽습니다.

이 두 이야기가 한 장에 놓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부분에서 요시야는 모세를 통해 전해진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따라 유월절을 준비하라고 명령합니다(35:6). 뒷부분에서 저자는 요시야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35:22).

한 장 안에서 같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으로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35장 본문 읽기 →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기억하는 일인가?

역대하 35:1–6 본문 →

요시야는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야훼를 위해 유월절을 지켰다. 사람들은 첫째 달 열나흗날에 유월절 제물을 잡았다.역대하 35:1 · 본디새김

먼저 요시야는 ‘여호와야훼를 위해’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행하신 구원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따르면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해 내신 사건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식사를 통해 자신들이 어떻게 자유를 얻었는지를 기억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자기 힘으로 나라를 세운 이야기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구해 내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했습니다.

더욱이 때는 첫째 달 열나흗날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12:6과 레위기 23:5에서 정한 날짜입니다.

역대하 30장에서 히스기야는 제사장들이 충분히 자신을 거룩하게 하지 못했고 백성도 모이지 못했기 때문에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민수기 9:10–11에는 특정한 사정으로 정해진 때에 지키지 못한 이들을 위한 둘째 달의 규정도 있습니다. 다만 요시야 시대에는 유월절을 준비할 수 있는 질서가 정비되어 있었고, 그 결과 정해진 때에 절기를 거행할 수 있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법궤를 어깨에 멜 필요가 없다는 말

3절에서 요시야는 레위 사람들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 곧 여호와야훼에게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거룩한 궤를 다윗의 아들인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지은 집에 두어라. 너희는 궤를 어깨에 멜 필요가 없다. 이제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겨라.」역대하 35:3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광야를 이동하던 시절, 레위 사람들은 성막과 그 기구들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특히 고핫 자손들은 지성소의 거룩한 기구들을 운반하도록 지정되었습니다(민수기 4:4–15).

법궤는 아무렇게나 운반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25:12–15에서는 궤에 채를 꿰어 운반하도록 규정합니다. 역대상 15:2에서는 다윗이 레위 사람들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메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법궤를 지성소로 옮긴 사실은 역대하 5:7–1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의 명령은 광야 시절처럼 법궤를 계속 운반하는 일이 이제 레위 사람들의 중심적인 직무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요시야 이전에 법궤가 성전 밖으로 옮겨져 있었는지, 누가 옮겼는지, 얼마 동안 다른 장소에 있었는지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법궤를 원래의 자리에 다시 두라는 구체적인 지시로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이동을 전제하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시야는 레위 사람들에게 성전 기구를 다루는 직무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일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레위 사람들은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의 의미를 백성이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신명기 33:10에서도 레위 사람들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요시야가 유월절을 준비하며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단순히 행사 진행 요원을 배치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백성이 그 말씀대로 예배하도록 도울 사람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모세

요시야는 다윗과 솔로몬의 기록에 따라 가문별 조를 편성하고, 모세를 통해 전해진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따라 유월절을 준비하라고 명령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과 유월절 규정에 연결됩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성전의 봉사와 직무 조직에 연결됩니다.

역대상 23–26장에는 다윗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조와 직무를 정비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역시 성전 봉사의 질서를 따랐습니다(역대하 8:14). 요시야의 유월절은 이러한 전통을 다시 이어 가는 행사로 묘사됩니다.

「유월절 제물을 잡고 자신을 거룩하게 하며, 모세를 통해 전해진 여호와야훼의 말대로 행하도록 너희 형제들을 위해 준비해라.」역대하 35:6 · 본디새김

레위 사람들이 열심히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에서 좋은 봉사는 다른 사람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게 만드는 봉사입니다.

왕이 제물을 내놓고, 모든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섬기다

역대하 35:7–15 본문 →

7절부터는 제물의 수량과 봉사자들의 역할이 길게 나열됩니다.

이번 유월절은 왕 혼자 준비한 행사도, 제사장들만 수행한 예배도 아니었습니다. 왕과 관리들,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찬양하는 사람과 문지기들, 그리고 백성이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아 참여한 예배였습니다.

왕이 자신의 재산을 내놓다

요시야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백성에게 양과 염소 떼에서 어린양과 새끼 염소 모두 삼만 마리를 유월절 제물로 내주었고, 소도 삼천 마리 내주었다. 이것들은 왕의 재산에서 나온 것이었다.역대하 35:7 · 본디새김

왕이 백성에게 재물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여 그들이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어서 왕의 관리들과 성전 지도자들, 레위 사람들의 지도자들도 자발적으로 제물을 내놓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수를 합하면 양과 염소 37,600마리, 소 3,800마리입니다.

출애굽기 12:5의 유월절 제물은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구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소는 유월절과 함께 이루어지는 다른 제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실제로 12–16절에는 번제와 다른 거룩한 제물들도 등장합니다.

이러한 자발적 제공은 사람들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는 실제적인 기반을 마련합니다. 요시야의 왕권은 여기서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돕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모두 자기 자리에 서다

섬기는 일이 갖추어지자, 왕의 명령대로 제사장들은 각자의 자리에 서고 레위 사람들은 각자의 조에 따라 섰다.역대하 35:10 · 본디새김

유월절은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참여하는 행사였지만, 각자의 역할이 뒤섞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에게는 제사장의 직무가 있고, 레위 사람들에게는 레위 사람들의 직무가 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제물을 잡았다. 제사장들은 레위 사람들의 손에서 받은 피를 뿌렸고, 레위 사람들은 가죽을 벗겼다.역대하 35:11 · 본디새김

본문은 이 일들을 단순한 노동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수행되는 예배의 일부로 기록합니다. 각자의 역할이 구별되어 있었지만, 그 역할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연결되었습니다.

번제물을 따로 떼어 백성의 가문별 편성에 따라 나누어 주고,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야훼께 드릴 수 있도록 합니다. 여기에는 5절에서 강조한 가문별 편성이 실제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제물을 굽고, 다른 제물은 삶다

그들은 유월절 제물을 규정대로 불에 구웠다. 거룩한 제물들은 냄비와 솥과 조리 그릇에 넣어 삶아, 모든 백성에게 서둘러 가져다주었다.역대하 35:13 · 본디새김

이는 출애굽기 12:8–9에서 유월절 제물을 불에 구워 먹고 물에 삶아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규정과도 연결됩니다. 역대기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유월절 제물이 정해진 방식에 따라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사를 드릴 물건들을 준비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제물들이 조리되고 전달되는 장면입니다.

먼저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다

그 뒤에 그들은 자기들과 제사장들을 위해 준비했다.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밤까지 번제물과 기름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과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역대하 35:14 · 본디새김

15절에서도 같은 배려가 나타납니다. 찬양하는 아삽 자손들과 문지기들은 각자의 자리를 떠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형제인 레위 사람들이 식사를 준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제사를 드리고, 누군가는 찬양하며, 누군가는 문을 지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이 맡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준비합니다.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봉사와, 그 사람이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먹을 것을 준비하는 사람의 봉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업무 분담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살피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유월절의 준비는 예배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역할과 필요를 존중하는 질서를 통해 완성됩니다.

사무엘 시대 이후 이런 유월절은 없었다

역대하 35:16–19 본문 →

16절은 지금까지의 준비를 하나로 모읍니다.

이제 17절에서는 백성이 유월절과 이레 동안의 무교절을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12장과 레위기 23:5–8의 절기 규정에 따른 것입니다.

예언자 사무엘 시대부터 이스라엘에서 이와 같은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어느 왕도 요시야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유다와 그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지킨 것과 같은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역대하 35:18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사무엘 시대 이후 유월절을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히스기야 시대에도 유월절을 지켰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역대하 30장). 그러므로 비교의 핵심은 유월절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이번 유월절이 지닌 특별한 성격에 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요시야뿐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 사람, 온 유다와 참석한 이스라엘 사람들, 예루살렘 주민들을 함께 언급합니다. 이번 유월절이 왕의 열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질서 있게 참여한 절기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히스기야의 유월절에서는 하나님이 부족한 준비 가운데서도 백성을 받아들이시는 자비가 돋보였다면, 요시야의 유월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온 공동체가 질서 있게 섬기는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모든 면에서 더 우월했다는 판단이 아닙니다. 역대기가 각 절기를 묘사할 때 강조하는 특징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열왕기하 23:22에서는 같은 유월절을 평가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사사들의 시대’ 이후 그런 절기가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역대기는 그 시대를 ‘예언자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합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를 연결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사울과 다윗의 시대를 준비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 시대부터’라는 표현은 요시야의 유월절이 왕국 역사에서 얼마나 특별한 사건인지 강조하는 비교 기준이 됩니다.

19절은 이 모든 일이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팔 년째에 이루어졌다고 기록합니다. 바로 앞 장에서 율법책이 발견된 때도 요시야의 십팔 년째였습니다(34:8). 율법책이 발견되었고,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낮추었으며, 백성과 함께 언약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말씀을 들은 일이 실제 예배의 회복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유월절을 마친 왕은 왜 이집트 왕과 싸우러 나갔는가?

역대하 35:20–21 본문 →

요시야가 그 집을 정비하는 일을 모두 마친 뒤, 이집트 왕 느고가 유프라테스강 가의 갈그미스에서 싸우려고 올라왔다. 요시야는 그에게 맞서러 나갔다.역대하 35:20 · 본디새김

역대기 저자는 요시야의 성전 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의 마지막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 순서 때문에 뒤이어 등장하는 요시야의 죽음은 더욱 뜻밖의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이집트 군대는 왜 북쪽으로 올라갔는가?

당시 유다는 아시리아, 이집트, 바벨론이라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역에 놓여 있었습니다. 요시야가 느고의 북진을 막으려 한 정치적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을 수도 있고, 아시리아의 재기를 막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하 35장은 요시야가 왜 느고와 싸우기로 결정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외교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뜻밖에도 이집트 왕이 하나님을 언급하다

느고는 그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말했다. 「유다 왕이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소? 오늘 내가 맞서려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오. 나는 나와 전쟁 중인 집안을 향해 가는 것이오. 하나님이 나에게 서두르라고 명령했소. 그가 당신을 멸하지 않도록, 나와 함께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그만두시오.」역대하 35:21 · 본디새김

앞서 역대하 32장에서 아시리아 왕 산헤립도 하나님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여호와야훼를 다른 민족의 신들과 같은 존재로 취급하면서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느고가 자기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언급한 것에 불과할까요? 21절만 읽는다면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22절에서 역대기 저자는 독자의 판단을 바꾸는 결정적인 설명을 덧붙입니다.

조금 더 깊이

기원전 612년 니느웨가 함락된 뒤에도 아시리아의 잔존 세력은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이집트는 아시리아를 지원하여 북쪽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기원전 609년에 이집트 군대가 아시리아의 잔존 세력과 함께 하란을 되찾으려 했다는 사실은 고대 바빌로니아 연대기에서도 확인됩니다. 열왕기하 23:29는 이집트 왕 느고가 아시리아 왕을 향해 유프라테스강으로 올라갔다고 기록합니다. 역대하 35:20은 그 목적지를 갈그미스와 연결합니다. 다만 예레미야 46:2에 나오는 갈그미스 전투는 요시야의 죽음보다 뒤인 여호야김 넷째 해의 사건입니다. 이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이집트 군대를 무찔렀다고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요시야가 느고를 막으러 나갔던 사건과 예레미야 46:2의 갈그미스 전투를 동일한 전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 — 요시야의 마지막 실패

역대하 35:22–23 본문 →

그러나 요시야는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그와 싸우려고 변장했다. 그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않고 싸우려고 므깃도 골짜기로 들어갔다.역대하 35:22 · 본디새김

느고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는 사실과, 역대기 저자가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차원의 진술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요시야가 단순히 이집트 왕의 외교적인 경고를 무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방 왕을 통해 말씀하셨는가?

요시야는 율법책을 발견한 왕이었습니다. 예언자 훌다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왕이었고,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전달된 경고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아니라 이집트 왕을 통해 왔습니다.

본문은 느고가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그 말씀을 확인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종교적 신앙 전체가 여호와야훼를 올바르게 섬기는 신앙이었다고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 특정한 상황에서 느고가 전한 경고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통해 모든 정치 지도자의 종교적 주장을 무조건 신뢰하라는 교훈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요시야의 이야기에서는 역대기 저자가 느고의 말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직접 밝혀 줍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정치적 사건이나 개인적인 선택에서 그런 서술자의 확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를 인간이 미리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토록 신실했던 요시야는 왜 듣지 않았을까?

요시야는 왜 느고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요? 그가 자신의 군사력을 과신했기 때문일까요? 이집트 왕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요? 자신이 추진했던 종교개혁의 성공을 하나님의 지속적인 승리 보장으로 이해했기 때문일까요?

이러한 가능성들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본문은 그 이유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의 마음에 특정한 교만이나 정치적 야심이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듣지 않았다’는 표현은 단순히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역대하 34장에서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반응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35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전해졌을 때, 요시야가 그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왜 요시야는 변장했는가?

전쟁터에서 왕이 변장하는 것은 적군이 자신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가 구체적으로 어떤 복장을 했는지, 왜 변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역대하 18:29에서 이스라엘 왕 아합은 전쟁에 나가면서 변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전투에 참여하지만, 결국 적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18:33–34). 요시야 역시 변장하고 전쟁에 나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이 유사성을 근거로 요시야를 아합과 같은 수준의 악한 왕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행동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왕이고, 요시야는 역대기가 특별히 신실한 왕으로 평가하는 인물입니다.

여기서 변장 자체가 죄의 본질은 아닙니다. 역대기 저자가 직접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요시야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활에 맞은 왕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다

활 쏘는 자들이 요시야 왕을 향해 쏘았다.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를 옮겨라. 내가 몹시 다쳤다.」역대하 35:23 · 본디새김

유월절을 준비하던 요시야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자기 직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 풍성한 제물을 마련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배하도록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의 몸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24절에서는 신하들이 그를 전쟁용 병거에서 내려 다른 병거에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요시야는 죽습니다.

‘평안히 묻힐 것이다’라는 약속과 요시야의 죽음

역대하 34:28에서 하나님은 요시야에게 평안히 묘소에 묻히고, 유다에 임할 재앙을 직접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전쟁에서 치명상을 입습니다.

이 두 진술 사이에는 실제로 해석상의 긴장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23:29–30은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느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신하들이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고 기록합니다. 역대기는 그가 변장하고 전투에 참여했으며, 활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병거를 바꾸어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는 과정을 더 자세하게 전합니다. 두 본문의 사건 전개에는 세부적인 서술 차이가 있습니다. 역대하 35:24의 표현만으로 요시야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는지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문맥상 훌다의 약속은 요시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결정적인 재앙을 살아서 보지 않게 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시야의 죽음 자체가 고통 없이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요시야가 전쟁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훌다의 예언 전체가 아무 의미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훌다의 신탁은 왕 개인의 마지막 순간과 유다 전체를 향한 심판이라는 두 문제를 함께 다룹니다. 따라서 ‘평안히 묻힐 것’이라는 표현을 오직 자연사만 가리키는 말로 한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전사했다는 사실과의 긴장을 완전히 해소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유월절의 찬양이 왕을 위한 애가로 바뀌다

역대하 35:24–25 본문 →

요시야가 죽자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를 애도합니다.

신하들은 그를 병거에서 내려 그의 둘째 병거에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데려갔다. 그는 죽어 자기 조상들의 무덤에 묻혔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요시야를 애도했다.역대하 35:24 · 본디새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라의 예배를 회복하고자 힘썼던 왕이었습니다. 백성의 슬픔은 그가 유다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야를 위해 애가를 부르다

예레미야는 요시야를 두고 애가를 불렀다. 노래하는 모든 남녀도 오늘날까지 자기들의 애가에서 요시야를 노래해 왔다. 사람들은 그 애가들을 이스라엘의 규례로 정했다. 그것들은 애가집에 기록되어 있다.역대하 35:25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요시야 시대에 활동을 시작한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 1:2에 따르면 그는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째에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야의 죽음은 일회적인 슬픔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노래를 계속 불렀습니다. 요시야의 죽음은 공동체 전체가 오래도록 기억할 만큼 중대한 상실이었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들이 다시 등장하다

유월절 때에는 아삽 자손의 찬양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준비된 예배 가운데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25절에서는 남녀 노래하는 사람들이 요시야를 위한 애가를 부릅니다.

같은 장에서 노래의 성격이 바뀝니다.

유월절은 이집트에서의 구원을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에서 이집트 왕과의 전투는 요시야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이것 역시 역대기 저자가 일부러 대비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을 함께 읽는 독자에게는 강한 역설로 다가옵니다.

그들의 애가는 요시야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가 마지막에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사실을 지우지도 않습니다. 그를 통해 경험했던 회복과 그의 죽음으로 겪게 된 상실을 함께 기억하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하 35장은 예레미야가 실제로 어떤 내용의 애가를 불렀는지 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경에 있는 예레미야 애가를 곧바로 이 구절에서 말하는 요시야의 애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전해지는 예레미야 애가는 주로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다의 고난을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역대하 35:25의 요시야 애가와 같은 문헌이라고 확인할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요시야를 애도하는 노래들이 별도의 애가집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마지막 평가 — 실패한 왕인가, 신실한 왕인가?

역대하 35:26–27 본문 →

35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납니다.

요시야의 나머지 행적과 여호와야훼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그가 행한 신실한 일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의 그의 행적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역대하 35:26–27 · 본디새김

역대기 저자는 요시야의 마지막 실수를 기록한 뒤에도 그의 신실함을 인정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일, 우상들을 제거한 일, 성전을 보수한 일, 율법책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춘 일, 온 백성과 언약을 새롭게 하고 유월절을 지킨 일들은 여전히 신실한 행동으로 기억됩니다.

과거의 신실함은 현재의 순종을 대신할 수 없지만, 마지막의 실패가 과거의 신실함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결론 — 유월절의 노래가 애가로 바뀌는 자리에서

역대하 35:1–27 본문 →

요시야의 유월절은 온전하게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자신이 언제나 온전하게 판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전의 모든 직무를 제자리에 세웠지만, 마지막 전쟁에서는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은 귀중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는 일은 과거의 성취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시야의 죽음 뒤에도 노래는 남았습니다.

그가 지킨 유월절의 기쁨도 기억되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가도 기억되었습니다. 예레미야와 노래하는 사람들이 부른 애가 속에서, 유다는 자신들이 잃어버린 왕을 오래도록 기억했습니다.

성전에서 울려 퍼졌던 노래는 이제 슬픔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요시야가 남긴 신실한 일들과 그의 마지막 선택을 모두 품은 채,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