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36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예루살렘의 멸망
무너진 성전에서 다시 들려온 말씀
역대하의 마지막 장에는 네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누구도 나라를 구하지 못합니다. 왕들은 차례로 폐위되거나 포로로 끌려가고, 마침내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타 버립니다. 다윗으로부터 이어진 왕조의 역사가 이렇게 끝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윗의 후손도, 이스라엘의 제사장도, 예언자도 아닙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입니다.
역대하 36장은 유다가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 멸망이 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될 수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왕을 세우던 백성이 왕을 빼앗기다
요시야가 죽자 그 땅의 백성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웁니다.
그 땅의 백성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아버지를 뒤이을 왕으로 세웠다.역대하 36:1 · 본디새김
이 장은 아직 유다 백성이 자기 나라의 왕을 선택할 수 있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왕을 세우는 주체가 외국의 통치자가 아니라 「그 땅의 백성」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왕권은 석 달밖에 지속되지 못합니다.
이집트 왕이 여호아하스를 폐위하고, 막대한 벌금을 부과하며, 그의 형제 엘리아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여기에 한 가지 행동이 더해집니다.
이집트 왕은 여호아하스의 형제 엘리아김을 유다와 예루살렘의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느고는 엘리아김의 형제 여호아하스를 붙잡아 이집트로 데려갔다.역대하 36:4 · 본디새김
이름을 바꾸는 일은 단순한 호칭 변경이 아닙니다. 고대 왕권의 맥락에서 다른 나라의 통치자가 왕을 임명하고 이름까지 바꾼다는 것은, 그 왕의 지위가 외부 권력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이 변화는 요시야의 죽음과도 연결됩니다. 앞 장에서 요시야는 이집트 왕 느고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35:20–24). 이제 그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들을 폐위하고 임명합니다.
왕좌는 남아 있지만, 그 왕좌를 지탱하던 독립성은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가 행사하던 권력은 곧 바벨론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왕의 운명과 성전의 운명이 함께 기울어지다
여호야김은 열한 해 동안 다스립니다. 역대기는 그의 통치를 한 문장으로 평가합니다.
여호야김은 스물다섯 살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열한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눈에 악한 일을 했다.역대하 36:5 · 본디새김
여기서부터 왕들의 통치는 매우 빠르게 서술됩니다. 역대기 저자는 그들의 정책이나 전쟁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그들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어떻게 살았고 그 결과 무엇을 잃었는지에 집중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올라와 여호야김을 청동 족쇄로 묶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와야훼의 집에 있던 기물 가운데 일부도 바벨론으로 가져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궁전에 두었다.역대하 36:7 · 본디새김
왕의 자유가 제한되고, 성전의 물건들이 외국으로 옮겨집니다. 유다의 정치적 중심과 신앙적 중심이 나란히 침해당하는 것입니다.
성전 기물은 단순한 보물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 마련되고 구별된 물건들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했을 때 다윗이 구별해 둔 은과 금과 기구들을 하나님의 집에 들여왔다는 기록을 떠올려 봅니다(대하 5:1).
그때는 물건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집에서 밖으로 실려 나갑니다.
이어서 여호야긴이 왕이 되지만, 그 역시 석 달 열흘 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의 집에 있던 귀한 기물들」도 함께 옮겨집니다(36:10).
성전의 상실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일부 기물이 옮겨지고, 다음에는 귀한 기물들이 옮겨집니다. 훗날 18절에 이르면 크고 작은 모든 기물과 보물이 사라지고, 19절에서는 성전 자체가 불탑니다.
이제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에는 그를 바벨론으로 「데려가려고」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이송의 목적을 나타내므로, 실제로 바벨론까지 데려갔다는 사실까지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열왕기하 24:6은 여호야김의 죽음과 아들의 왕위 계승을 기록하지만, 그가 바벨론으로 이송되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궁전」(הֵיכָ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칼은 왕궁과 신전 모두에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이 기물을 자기 궁전에 두었는지, 바벨론의 신전에 두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한편 9절의 여호야긴 나이는 본디새김에 「여덟 살」로 기록되어 있지만, 열왕기하 24:8은 「열여덟 살」로 기록합니다. 고대 사본들 사이에도 숫자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의 차이일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 장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여덟 살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10절은 시드기야를 여호야긴의 「형제」라고 부르지만, 열왕기하 24:17은 그의 아버지의 형제, 곧 삼촌으로 설명합니다. 역대기의 표현은 넓은 친족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굽히지 않은 사람들
시드기야에 관한 기록은 앞선 왕들보다 깁니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가 그의 실패를 설명하는 방식은 뜻밖입니다.
그는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눈에 악한 일을 했다. 여호와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역대하 36:12 · 본디새김
본문은 예레미야가 단지 개인적인 의견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시야는 느고가 전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갔다가 죽었습니다(35:22). 이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전한 「여호와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습니다. 요시야와 시드기야는 신앙적 평가에서 크게 다른 왕입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두 왕의 마지막 장면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는 문제로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길을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13절은 그가 느부갓네살에게 반역했다고 기록합니다. 예레미야 27:12–15를 보면 당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바벨론 왕의 지배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했습니다. 그것이 나라와 백성의 생존을 위한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시드기야의 반역은 단순히 강대국에 저항한 정치적 행동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는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말씀과 반대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한 느부갓네살 왕에게도 반역했다. 그는 목을 뻣뻣하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돌아오지 않았다.역대하 36:13 · 본디새김
목을 뻣뻣하게 한다는 표현은 인도받기를 거부하는 완강함을 나타냅니다.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는 말 역시 자신의 뜻을 고집하며 돌이키지 않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시드기야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나은 외교적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4절에서 시선이 넓어집니다.
제사장들의 모든 지도자와 백성도 다른 민족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배신을 거듭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여호와야훼의 집을 더럽혔다.역대하 36:14 · 본디새김
나라의 멸망을 마지막 왕 한 사람의 잘못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되는 대목입니다.
역대기는 성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책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는 이야기에는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에서도 성전을 바로 세우고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유다의 신앙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집을 사람들이 더럽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 이후 이미 경고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집이라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대하 7:19–22).
하나님께서 거듭 말씀하신 이유
그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자기 사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부지런히 거듭 말을 보냈다. 자기 백성과 자기 거처를 가엾게 여겼기 때문이다.역대하 36:15 · 본디새김
역대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가엾게 여기심을 이야기합니다.
본문에서 「부지런히 거듭」(שָׁכַם)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일찍 일어나 보낸다는 뜻을 지닌 관용적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사자들을 보내는 일이 지속적이고 간절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경고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계속 조롱하고, 그의 말을 업신여기며, 그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마침내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그의 백성을 향해 치솟아, 치유할 길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역대하 36:16 · 본디새김
세 표현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거절하는 행동이 결국 그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치유할 길이 없다는 것은, 경고와 돌이킴을 통해 다가오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던 기회가 끝내 소진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에 앞서 하나님의 가엾게 여기심이 있었습니다. 심판에 앞서 반복된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사람들이 계속 거절한 말씀이었습니다.
가엾게 여기심을 거절한 끝에, 가엾게 여기지 않는 군대가 오다
17절은 앞 단락과 아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15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과 거처를 「가엾게 여겼다」.
그런데 17절에서 갈대아 사람들의 왕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여호와야훼는 갈대아 사람들의 왕이 그들을 치러 올라오게 했다. 그 왕은 그들의 성소 안에서 그들의 젊은 남자들을 칼로 죽였고, 젊은 남자도 처녀도 노인도 늙고 쇠약한 사람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여호와야훼는 모두를 그의 손에 넘겼다.역대하 36:17 · 본디새김
성소는 여호와야훼께 예배드리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삶에서 가장 거룩하게 구별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사람들을 죽이는 장소가 됩니다.
17절은 여호와야훼께서 갈대아 사람들의 왕을 올라오게 하셨고, 백성을 그의 손에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이 번역에서 칼로 죽이고 가엾게 여기지 않은 주체는 그 왕입니다.
역대기는 바벨론의 침략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정복자가 자행한 폭력을 아름답거나 본받을 만한 행동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서술합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개인별 응보가 아니라, 지도자와 백성이 함께 무너뜨린 언약 공동체가 겪는 역사적 파국에 있습니다.
18–19절에 이르면 성전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들을 잃습니다.
그 왕은 하나님의 집에 있던 크고 작은 모든 기물과 여호와야훼의 집의 보물, 왕과 그의 관리들의 보물을 모두 바벨론으로 가져갔다.역대하 36:18 · 본디새김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불태우고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었다. 그 성의 모든 궁전을 불로 태우고, 그 안의 귀한 기물도 모두 파괴했다.역대하 36:19 · 본디새김
앞서 기물의 일부가 옮겨지고 귀한 기물들이 옮겨졌던 장면이 이제 완결됩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준비했고,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으며, 백성은 그곳에서 여호와야훼께 예배드렸습니다. 역대하 5–7장은 성전의 완성과 봉헌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백성의 예배가 만나는 장면을 길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집이 불타 버립니다.
역대기의 성전 이야기는 건축만큼이나 파괴를 통해서도 중요한 진실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집이라고 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배신까지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생존자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성전을 잃은 데 이어 이제는 땅도 잃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역대기 저자는 이 황폐한 땅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안식을 누리다
이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전해진 여호와야훼의 말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유배는 땅이 제 안식을 다 누릴 때까지 이어졌다. 땅은 황폐해 있던 모든 날 동안 쉬어 칠십 년을 채웠다.역대하 36:21 · 본디새김
레위기 25:2–5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땅에 들어가면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람만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땅도 안식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땅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소유하고 끝없이 이용할 수 있는 재산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땅이었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방식에도 하나님의 명령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26:34–35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다른 나라로 쫓겨날 때, 그들이 살지 않는 동안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역대하 36:21은 바로 그 경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이 땅에서 쫓겨난 것은 분명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땅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떠나 있는 동안 땅은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안식을 누립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 균열을 냅니다.
칠십 년은 예레미야의 예언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25:11–12는 여러 민족이 바벨론 왕을 섬기는 칠십 년을 말하고, 예레미야 29:10은 바벨론을 위한 칠십 년이 차면 하나님께서 백성을 돌아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역대기는 이 예언을 레위기의 땅의 안식 규정과 결합해 해석합니다. 바벨론의 지배가 끝나는 기간을 말할 뿐 아니라, 그 기간이 땅의 안식이라는 언약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의 반역 때문에 성취되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왕들은 말씀을 듣지 않았고, 성전은 더럽혀졌으며,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21절은 바로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는 있어도, 그 거절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무효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이제 이 사실이 마지막 두 절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렇다고 여기서 유다 백성이 정확히 몇 차례의 안식년을 어겼는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칠십 년이라는 기간을 언급하지만, 그것을 특정한 횟수의 안식년 위반과 산술적으로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은 칠십 년을 어느 사건부터 어느 사건까지 계산해야 하는지 자세한 연대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왕조 대신, 고레스의 마음을 일깨우시다
역대기의 마지막 장면은 바벨론이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시작됩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 첫해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전해진 여호와야훼의 말이 이루어지도록 여호와야훼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일깨웠다. 고레스는 온 왕국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글로도 알렸다.역대하 36:22 · 본디새김
그런데 이제 또 다른 외국 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외국 왕이 유다의 왕을 폐위하거나 성전의 기물을 빼앗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전을 다시 지으라는 명령을 선포합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땅의 모든 왕국을 나에게 주었다. 그는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기를 위한 집을 지으라고 나에게 명했다. 너희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온 백성에 속한 사람이 누구이든, 그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그와 함께하기를. 그 사람은 올라가라.」역대하 36:23 · 본디새김
성전은 다시 세워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건물 안에 갇혀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에도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물론 고레스가 이러한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여호와야훼만을 섬기는 신앙인이 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의 내면에서 어떤 종교적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레스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가보다,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통해 무엇을 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말씀이 왕이 아닌 백성에게 향하다
고레스의 선언은 성전 건축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절에서는 그 땅의 백성이 왕을 세웠습니다. 이후에는 외국 왕들이 유다의 왕을 세우고 폐위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 초점은 더 이상 누가 왕이 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올라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본문의 「너희 가운데 누구이든」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사람 가운데 해당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초청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특정한 왕이나 지도자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응답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역대하 36장은 그들이 실제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누가 그 명령에 응답했는지, 그 길이 어떠했는지, 성전 건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에스라 1장 이후에서 이어집니다. 실제로 에스라 1:1–3은 고레스의 선언을 다시 기록하면서 귀환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역대기는 그 직전에서 멈춥니다.
왕조가 다시 세워졌다는 소식도 없고, 성전이 완공되었다는 보고도 없습니다. 다윗 왕조에 관한 약속이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 것인지도 이 장에서는 모두 설명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하 2:5–6에서 솔로몬은 여호와야훼를 위해 집을 건축하려 하면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성전은 그 크기로 하나님을 담아 두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고레스는 여호와야훼를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분을 위해 집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44:28과 45:1–13에 나오는 고레스에 관한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고레스가 예루살렘과 성전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일에 쓰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당부할 때도 여호와야훼께서 그와 함께하시기를 바랐습니다(대상 22:11, 28:20). 솔로몬의 통치와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대한 믿음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왕조와 성전이 무너진 뒤, 똑같은 소망이 새로운 출발 앞에 놓입니다.
역대기의 마지막 장이 앞선 역사를 다시 읽게 하는 방식
15–1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경고로 나타납니다. 백성이 그 말씀을 거절하자 17–21절에서 예고되었던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22–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여는 명령으로 나타납니다. 심판과 회복은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신 말씀의 두 국면입니다.
예루살렘이 불타는 장면은 실제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담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생명이 되돌아온 것도 아니고, 무너진 성전이 곧바로 복구된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그 고통을 지우지 않습니다.
한때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왔고, 그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칼을 피해 살아남아 먼 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성전이 있던 자리에는 불탄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페르시아 왕의 선포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시 지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집으로 향할 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올라가라.」
아직 성전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향한 길이 다시 열렸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라는 말씀이, 역대기의 마지막에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