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36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예루살렘의 멸망

무너진 성전에서 다시 들려온 말씀

역대하의 마지막 장에는 네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누구도 나라를 구하지 못합니다. 왕들은 차례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포로로 끌려가고, 마침내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타 버립니다. 다윗으로부터 이어진 왕조의 역사가 이렇게 끝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윗의 후손도, 이스라엘의 제사장도, 예언자도 아닙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돌아갈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누구든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역대하 36장은 유다가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 멸망이 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될 수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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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세우던 백성이 왕을 빼앗기다

역대하 36:1–4 본문 →

그 땅의 백성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예루살렘에서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게 했습니다.역대하 36:1 · 두루새김

이 장은 아직 유다 백성이 자기 나라의 왕을 선택할 수 있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왕을 세우는 주체가 외국의 통치자가 아니라 「그 땅의 백성」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왕권은 석 달밖에 이어지지 못합니다.

이집트 왕이 여호아하스를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막대한 벌금을 물리며, 그의 형제 엘리아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여기에 한 가지 행동이 더해집니다.

이집트 왕은 여호아하스의 형제 엘리아김을 유다와 예루살렘의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습니다. 느고는 여호야김의 형제 여호아하스를 붙잡아 이집트로 데려갔습니다.역대하 36:4 · 두루새김

이름을 바꾸는 일은 단순히 부르는 이름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고대에 다른 나라의 통치자가 왕을 세우고 이름까지 바꾼다는 것은, 그 왕의 지위가 외부 권력에 매여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이 변화는 요시야의 죽음과도 연결됩니다. 앞 장에서 요시야는 이집트 왕 느고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35:20–24). 이제 그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다른 아들을 새 왕으로 세웁니다.

왕좌는 남아 있지만, 그 왕좌를 지탱하던 독립성은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가 행사하던 권력은 곧 바벨론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왕의 운명과 성전의 운명이 함께 기울어지다

역대하 36:5–10 본문 →

여호야김은 11년 동안 다스립니다. 역대기는 그의 통치를 한 문장으로 평가합니다.

여호야김은 2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1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는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습니다.역대하 36:5 · 두루새김

여기서부터 왕들의 통치는 매우 빠르게 서술됩니다. 역대기 저자는 그들의 정책이나 전쟁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고 그 결과 무엇을 잃었는지에 집중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올라와 여호야김을 청동 사슬로 묶습니다. 이 장에서 더 눈에 띄는 것은 왕이 사슬에 묶인 직후 성전 기구의 운명이 언급된다는 사실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에 있던 기구 가운데 일부도 바벨론으로 가져가, 그곳에 있는 자기 궁전에 두었습니다.역대하 36:7 · 두루새김

유다의 정치적 중심과 신앙적 중심이 나란히 침해당하는 것입니다. 성전 기구는 단순한 보물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 마련되고 구별된 물건들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했을 때 다윗이 구별해 둔 은과 금과 기구들을 하나님의 성전에 들여왔다는 기록을 떠올려 봅니다(대하 5:1).

그때는 물건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성전에서 밖으로 실려 나갑니다.

이어서 여호야긴이 왕이 되지만, 그 역시 석 달 열흘 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의 성전에 있던 귀한 기구들」도 함께 옮겨집니다(36:10).

성전의 상실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왕위를 잇는 사람이 계속 등장하지만, 누구도 나라의 무너지는 방향을 돌려놓지 못합니다.

이제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에는 그를 바벨론으로 「데려가려고」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표현은 데려가려는 목적을 나타내므로, 실제로 바벨론까지 데려갔다는 사실까지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열왕기하 24:6은 여호야김의 죽음과 아들의 왕위 계승을 기록하지만, 그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궁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칼(⁨הֵיכָל⁩)은 왕궁과 신전 모두에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이 기구를 자기 궁전에 두었는지, 바벨론의 신전에 두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한편 9절의 여호야긴 나이는 두루새김에 「8세」로 기록되어 있지만, 열왕기하 24:8은 열여덟 살로 기록합니다. 고대 사본들 사이에도 숫자의 차이가 있어 베껴 쓰는 과정에서 차이가 생겼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 장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여덟 살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10절에서 두루새김은 시드기야를 여호야긴의 「친족」이라고 부릅니다. 원문에서는 형제라는 말을 쓰지만, 열왕기하 24:17은 그의 아버지의 형제, 곧 삼촌으로 설명합니다. 두루새김은 역대기의 표현을 넓은 친족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굽히지 않은 사람들

역대하 36:11–16 본문 →

시드기야에 관한 기록은 앞선 왕들보다 깁니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가 그의 실패를 설명하는 방식은 뜻밖입니다.

그는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았습니다.역대하 36:12 · 두루새김

본문은 예레미야가 단지 개인적인 의견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자신의 판단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원문에서는 요시야가 느고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하고(35:22), 시드기야도 예레미야가 전하는 여호와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장에서 그 표현을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으로 풀었습니다.

요시야와 시드기야는 신앙적 평가에서 크게 다른 왕입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두 왕의 마지막 장면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는 문제로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길을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13절은 그가 느부갓네살에게 반역했다고 기록합니다. 예레미야 27:12–15를 보면 당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바벨론 왕의 지배를 받아들이라고 권했습니다. 그것이 나라와 백성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시드기야의 반역은 단순히 강대국에 저항한 정치적 행동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는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말씀과 반대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했지만, 시드기야는 그 왕에게도 반역했습니다. 그는 고집을 부리고 마음을 굳게 닫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역대하 36:13 · 두루새김

「고집을 부리고」라는 말은 인도받기를 거부하는 완강함을 나타냅니다. 「마음을 굳게 닫아」라는 말 역시 자신의 뜻을 고집하며 돌이키지 않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시드기야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나은 외교적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4절에서 시선이 넓어집니다.

제사장들의 모든 지도자와 백성도 다른 민족들의 온갖 역겨운 일을 따라 하며 하나님을 거듭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성전을 더럽혔습니다.역대하 36:14 · 두루새김

나라의 멸망을 마지막 왕 한 사람의 잘못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되는 대목입니다. 역대기는 성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책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바치는 이야기에는 많은 분량을 씁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에서도 성전을 바로 세우고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유다의 신앙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께 바친 뒤 이미 경고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성전이라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대하 7:19–22).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지경에 이르기까지 기다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거듭 말씀하신 이유

그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사람들을 거듭 보내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자기 백성과 자신이 머무시는 성전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역대하 36:15 · 두루새김

역대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이야기합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을 거듭 보내」(⁨שָׁכַם⁩)라고 옮긴 자리에는 히브리어로 일찍 일어나 보낸다는 뜻을 지닌 관용적 표현이 쓰입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보내는 일이 지속적이고 간절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경고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계속 놀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자기 백성을 향해 타올라, 더는 손쓸 길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역대하 36:16 · 두루새김

세 표현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거절하는 행동이 결국 그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더는 손쓸 길이 없다는 것은, 경고를 듣고 돌이켜 다가오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던 기회가 끝내 다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조금 더 깊이

「더는 손쓸 길이 없는 지경」이라고 옮긴 히브리어 표현에는 마르페(치유·회복)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단순히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을 넘어, 이미 깊어진 병을 더는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졌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에서 하나님께서는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가엾게 여기심을 거절한 끝에, 가엾게 여기지 않는 군대가 오다

역대하 36:17–20 본문 →

17절은 앞 단락과 아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15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자신이 머무시는 성전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을 거듭 보내신 이유를 밝힙니다. 그런데 17절에서 갈대아 사람들의 왕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갈대아 사람들의 왕이 그들을 치러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그 왕은 그들의 성전 안에서 젊은 남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젊은 남자도 아직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는 여자도, 노인도 늙고 쇠약한 사람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모두를 그 왕의 손에 넘기셨습니다.역대하 36:17 · 두루새김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삶에서 가장 거룩하게 구별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사람들을 죽이는 장소가 됩니다.

17절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들의 왕이 그들을 치러 올라오게 하셨고, 백성을 그 왕의 손에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이 번역에서 칼로 죽이고 불쌍히 여기지 않은 주체는 그 왕입니다.

역대기는 바벨론의 침략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신앙의 관점에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정복자가 저지른 폭력을 아름답거나 본받을 만한 행동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서술합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개인마다 자기 죄의 대가를 받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도자와 백성이 함께 무너뜨린 언약 공동체가 겪는 역사적 파국에 있습니다.

그 왕은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크고 작은 모든 기구와 여호와야훼의 성전 보물, 왕과 지도자들의 보물을 모두 바벨론으로 가져갔습니다.역대하 36:18 · 두루새김
바벨론 군대는 하나님의 성전을 불태우고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었습니다. 성안의 모든 궁전을 불태우고, 귀한 물건도 모두 부수었습니다.역대하 36:19 · 두루새김

앞서 기구의 일부가 옮겨지고 귀한 기구들이 옮겨졌던 장면이 이제 완결됩니다. 역대기의 성전 이야기는 건축만큼이나 파괴를 통해서도 중요한 진실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성전이라고 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배신까지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장소였지만, 하나님을 거절하는 백성이 그 장소 자체를 절대적인 안전의 보증으로 삼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성전을 잃은 데 이어 이제는 땅도 잃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역대기 저자는 이 황폐한 땅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안식을 누리다

역대하 36:21 본문 →

이렇게 예레미야를 통해 전한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땅은 황폐해 있던 동안 내내 쉬면서 누려야 할 안식을 다 누렸고, 그렇게 70년을 채웠습니다.역대하 36:21 · 두루새김

레위기 25:2–5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땅에 들어가면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람만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땅도 안식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땅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소유하고 끝없이 이용할 수 있는 재산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땅이었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방식에도 하나님의 명령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26:34–35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다른 나라로 쫓겨날 때, 그들이 살지 않는 동안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역대하 36:21은 바로 그 경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이 땅에서 쫓겨난 것은 분명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땅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떠나 있는 동안 땅은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안식을 누립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흔듭니다.

70년은 예레미야의 예언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25:11–12는 여러 민족이 바벨론 왕을 섬기는 70년을 말하고, 예레미야 29:10은 바벨론을 위한 70년이 차면 하나님께서 백성을 돌아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역대기는 이 예언을 레위기의 땅의 안식 규정과 연결해 해석합니다. 바벨론의 지배가 끝나는 기간을 말할 뿐 아니라, 그 기간이 땅의 안식이라는 언약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의 반역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왕들은 말씀을 듣지 않았고, 성전은 더럽혀졌으며,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21절은 바로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는 있어도, 그 거절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무효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이제 이 사실이 마지막 두 절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렇다고 여기서 유다 백성이 정확히 몇 차례의 안식년을 어겼는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70년이라는 기간을 언급하지만, 그것을 특정한 횟수의 안식년 위반과 숫자로 맞추어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은 70년을 어느 사건부터 어느 사건까지 계산해야 하는지 자세한 연대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왕조 대신, 고레스의 마음을 일깨우시다

역대하 36:22–23 본문 →

역대기의 마지막 장면은 바벨론이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시작됩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다스린 첫해에, 여호와야훼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전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글로도 알렸습니다.역대하 36:22 · 두루새김

하지만 이번에는 외국 왕이 유다의 왕을 쫓아내거나 성전의 기구를 빼앗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전을 다시 지으라는 명령을 선포합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땅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분께서는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한 성전을 지으라고 나에게 명령하셨다. 너희 가운데 그분의 백성에 속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그와 함께하시기를 바란다. 그 사람은 누구든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역대하 36:23 · 두루새김

역대하 2:5–6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으려 하면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성전은 그 크기로 하나님을 담아 두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고레스는 여호와야훼를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분을 위해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에도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고레스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가보다,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통해 무엇을 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44:28과 45:1–13에 나오는 고레스에 관한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고레스가 예루살렘과 성전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일에 쓰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아닌 외국 왕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마지막 말씀이 왕이 아닌 백성에게 향하다

고레스의 선언은 성전 건축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절에서는 그 땅의 백성이 왕을 세웠습니다. 이후에는 외국 왕들이 유다의 왕을 세우고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 초점은 더 이상 누가 왕이 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올라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본문의 「너희 가운데 그분의 백성에 속한 사람이 있다면」과 「그 사람은 누구든지」는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사람 가운데 해당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초청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특정한 왕이나 지도자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응답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한 가지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그와 함께하시기를 바란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당부할 때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기를 바랐습니다(대상 22:11, 28:20). 솔로몬의 통치와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대한 믿음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왕조와 성전이 무너진 뒤, 똑같은 소망이 새로운 출발 앞에 놓입니다.

누가 그 명령에 응답했는지, 그 길이 어떠했는지, 성전 건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에스라 1장 이후에서 이어집니다. 실제로 에스라 1:1–3은 고레스의 선언을 다시 기록하면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역대기는 그 직전에서 멈춥니다.

왕조가 다시 세워졌다는 소식도 없고, 성전이 완공되었다는 보고도 없습니다. 다윗 왕조에 관한 약속이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 것인지도 이 장에서는 모두 설명되지 않습니다.

대신 한 사람의 행동을 요구하는 말씀이 남습니다.

조금 더 깊이

물론 고레스가 이러한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인이 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의 내면에서 어떤 종교적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시 열린 길에 말씀이 남다

역대하 36:1–23 본문 →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고, 끈질기게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배신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어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이 이루어진 뒤에도 다시 시작할 길을 여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불타는 장면은 실제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담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생명이 되돌아온 것도 아니고, 무너진 성전이 곧바로 복구된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그 고통을 지우지 않습니다.

한때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왔고, 그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칼을 피해 살아남아 먼 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성전이 있던 자리에는 불탄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페르시아 왕의 선포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지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으로 향할 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누구든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역대기는 누군가가 실제로 길을 떠나는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끝납니다.

아직 성전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향한 길이 다시 열렸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라는 말씀이, 역대기의 마지막에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