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
하나님은 왜 아직 오시지 않았는가
약속한 사람이 오지 않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여러 해가 흘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기다리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오겠다고 약속한 것이 맞을까요? 약속을 했지만 지킬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후서 3장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롱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계속되는 모습을 근거로 예수님의 오심을 의심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렸지만,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은 죽어 갔으며 세상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계속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질문을 피해 가지 않고 편지의 마지막 장 전체를 사용하여 답합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계산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 시간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들이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비웃는 바로 그 시간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오래 참고 계시는 시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발견은 마지막에 이르러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조롱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약속을 의심하는가
편지는 먼저 독자들을 다정하게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둘째 편지입니다. 두 편지에서 나는 되새겨 주어 여러분의 진실한 생각을 깨우고 있습니다.베드로후서 3:1 · 본디새김
앞서 보낸 편지가 무엇인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를 가리킨다는 전통적인 이해가 있지만, 남아 있지 않은 다른 편지를 가리킬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새로운 비밀을 알려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해진 두 종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 합니다.
거룩한 예언자들이 미리 한 말과, 여러분의 사도들이 전한 주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계명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2 · 본디새김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일을 전했고,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시며 무엇을 명령하셨는지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두 증언을 서로 경쟁하는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기 위해 함께 기억해야 할 말씀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그 말씀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조롱을 일삼으며 와서 제 욕망을 따라 살아갈 것이고,베드로후서 3:3 · 본디새김
베드로는 그들의 생각과 삶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부정하는 주장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행동이 하나의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이라면 모두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묘사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롱을 일삼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뒤로 모든 것이 창조의 처음부터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베드로후서 3:4 · 본디새김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조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창조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세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의 계속됨은 미래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증거입니다.
「조상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다가 죽은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견해가 있고,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옛 조상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읽으면 약속된 오심이 첫 세대의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문제가 부각되고, 두 번째로 읽으면 오래전부터 약속된 하나님의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조롱의 초점이 놓입니다. 어느 해석이든 4절의 핵심은 세상의 지속을 근거로 약속의 신뢰성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는 중요한 비약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계속되어 왔다는 사실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앞으로도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조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빠뜨렸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계속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인가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늘이 옛적부터 있었고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에서 나와 물을 통해 형성되어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부러 못 본 체하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3:5 · 본디새김
베드로는 세상이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묻습니다. 세상이 존재하고 유지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롱하는 사람들은 창조 이후의 지속성에 주목하지만, 베드로는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는 창세기 1장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창세기 1:2에서 물은 아직 구별되지 않은 창조 세계의 모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어 하나님은 물 사이에 공간을 마련하시고(창세기 1:6–8), 물을 한곳에 모아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십니다(창세기 1:9–10).
그런데 6절에서 물은 전혀 다른 역할을 합니다.
그때의 세상은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물에 잠겨 멸망했습니다.베드로후서 3:6 · 본디새김
같은 물이 창조의 이야기와 심판의 이야기 양쪽에 놓여 있습니다. 창세기 7:11에서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묘사합니다. 창조 때 구분되었던 물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한 장면입니다.
그들은 창조의 처음부터 세상이 그대로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기억하는 성경의 역사는 다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형성되었고, 그 세계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하늘과 땅은 같은 말씀으로 불을 위하여 간직되어 있고,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멸망할 날까지 지켜져 있습니다.베드로후서 3:7 · 본디새김
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계의 형성과 존속을 설명하고, 6절에서는 그 말씀으로 옛 세상이 홍수에 잠겼으며, 7절에서는 지금의 하늘과 땅도 「같은 말씀으로」 지켜져 있습니다. 창조와 심판, 현재 세계의 보존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연결됩니다.
「간직되어 있다」는 말은 무언가를 모아 두거나 보관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앞으로 심판받을 세상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세계를 지켜 두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지속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무너졌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그 세계를 심판하실 것이라면, 왜 지금까지 지켜 두시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물에서」와 「물을 통해」는 서로 다른 전치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에서 나오는 관계를, 두 번째는 물을 수단으로 삼거나 물을 통과하여 형성되는 관계 등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창조 과정을 가리키는지는 논의할 수 있지만, 베드로의 논증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또 베드로가 말하는 홍수는 과거의 지질학적 사건을 현대 과학의 방법으로 입증하려는 논증이 아니라, 독자들이 알고 있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뜻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하나를 놓치지 마십시오. 주 앞에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베드로후서 3:8 · 본디새김
5절에서 조롱하는 사람들은 창조와 심판에 관한 사실을 「일부러 못 본 체」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놓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두 절에는 어떤 사실이 주의를 벗어나는 것과 관계된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쓰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동을 외면하지만, 독자들은 하나님의 시간에 관한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하루가 인간의 천 년에 해당한다는 계산법처럼 사용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루가 천 년 같다고만 하지 않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도 말합니다. 고정된 환산 비율이라면 반대 방향의 표현을 곧바로 붙이는 것은 어색합니다. 베드로는 시간을 환산할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을 바라보시는 방식이 인간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시간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디다고 여기지만, 주님은 약속을 더디 이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누구도 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므로 여러분을 향해 오래 참으십니다.베드로후서 3:9 · 본디새김
이것이 이 장의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흐르는 것은 약속이 거짓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그 시간은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고 계신 시간입니다.
「오래 참으십니다」는 분노나 심판을 즉시 실행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에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심판하실 분이지만, 사람들의 회개를 바라시기 때문에 기다리십니다.
「누구도 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얼마나 넓은가 하는 논의에서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어떤 해석은 이 말을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의지로 이해하고, 다른 해석은 「여러분을 향해」에 주목하여 편지의 수신자들과 하나님의 백성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회개를 향한 뜻을 분명하게 말하지만, 이 한 구절만으로 모든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 여부나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응답 사이의 모든 문제를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어서 생긴 공백이 아니라, 회개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직 회개할 수 있습니다. 아직 돌아설 수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오래 참으심이 무한정 계속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배경은 시편 90:4입니다.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 생명의 짧음을 대비합니다. 하나님은 대대로 사람들의 거처가 되셨고 산들이 생기기 전부터 하나님이셨지만(시편 90:1–2), 인간의 날들은 빠르게 지나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 문맥에서 시편은 천 년이 하나님 앞에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때와 같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원래 관심은 종말의 날짜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시간이 얼마나 짧고 덧없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에 반대 방향의 표현을 덧붙여,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판단을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도둑처럼 오는 날에 무엇이 사라지는가
그러나 주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은 뜨거워져 해체될 것이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10 · 본디새김
도둑은 방문 날짜를 미리 알려 주지 않습니다.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이 그날의 도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듯이,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만으로 그날이 언제 올지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설명한 뒤에도 날짜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도둑의 이미지는 예수님의 오심이 악하거나 부당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하늘이 사라지고, 원소가 해체되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사라집니다. 일상적인 규모의 재난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의 근본적인 질서가 무너지는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마지막을 현대 과학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우주적 붕괴의 언어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합니다.
10절 마지막 문장은 사본에 따라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와 「발견될 것입니다」로 갈립니다. 앞의 읽기는 사라지는 모습을, 뒤의 읽기는 심판 앞에 드러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는 본디새김이 따른 앞의 읽기대로 읽겠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장차 물질 세계가 완전히 소멸하는지, 아니면 심판을 거쳐 새롭게 되는지를 확정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 문제는 바로 뒤의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해체될 때 베드로가 묻는 질문
그런데 11절에서 문장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해체될 터이니, 여러분은 거룩한 처신과 경건 가운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베드로후서 3:11 · 본디새김
베드로는 그날이 언제 일어날지, 어떤 순서로 하늘과 땅이 무너질지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베드로에게 장래의 심판에 관한 지식은 미래의 사건을 계산하도록 주어진 정보가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세상에서 도망치라고도, 세상의 일들이 무의미하므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처신과 경건」은 미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세계에 합당한 삶의 방향입니다.
사람의 권력과 업적, 사회의 제도와 구조,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습조차 마지막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은 세상이 무너질 것이니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결론과 정반대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지금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날을 앞당길 수 있는가
하나님의 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앞당기면서 말입니다. 그날로 말미암아 하늘은 불타 해체될 것이고 원소들은 뜨거워져 녹아내립니다.베드로후서 3:12 · 본디새김
기다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당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 쓰인 동사는 서두르거나 속도를 내는 것을 뜻하며, 어떤 일을 서둘러 이루게 한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오는 것」이 이 동사와 직접 연결되므로 그날의 도래를 앞당긴다는 해석이 문법적으로 자연스럽고, 본디새김도 이 읽기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은 앞선 「기다리고」와 나란히 놓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날을 향하여 서두르거나 열렬히 기다린다는 뜻을 강조합니다.
「앞당기면서」를 따르면 독자들의 삶과 하나님의 날의 도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만, 본문은 그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개를 바라시기 때문에 오래 참고 계신다고 했으니, 회개와 거룩한 삶이 그날을 앞당기는 일과 연결된다는 이해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의 계획을 기계적으로 조정하거나, 특정한 종교적 활동의 양에 따라 재림 날짜를 계산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믿기 때문에,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기다림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13절에서 비로소 그 장면이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원소들」로 옮긴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ῖον)는 문맥에 따라 기본 구성 요소나 우주의 요소를 뜻할 수 있고, 다른 신약 본문에서는 세상의 초보적인 원리나 영적 세력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하늘과 땅, 불과 해체가 함께 등장하므로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 또는 천체들을 가리키는 읽기가 유력합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화학 원소나 원자와 정확히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10절 끝의 본문 문제는 신약 본문비평에서 특히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디새김은 부정 표현이 포함된 그리스어 읽기를 따랐고, 부정 표현이 없는 일부 사본의 「발견될 것입니다」는 땅과 그 안의 일들이 심판 앞에 드러난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도둑의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24:42–44에서는 집주인이 도둑이 올 때를 알았다면 깨어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데살로니가전서 5:2에서도 주의 날은 밤에 찾아오는 도둑처럼 온다고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무엇이 살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그곳에는 의가 깃들어 삽니다.베드로후서 3:13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하늘이 사라지고, 원소들이 해체되고, 현재의 세계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새롭게 나타나는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사야서에서 온 표현입니다. 이사야 65:17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선언하시고, 그 말씀은 예루살렘과 그 백성이 겪었던 고통과 수치가 끝나는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이사야 65:21–23에는 사람들이 집을 짓고 그 집에 살며,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서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천체나 물질의 구성이 달라지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하게 살고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새로운 질서에 관한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이 오래된 약속을 예수님의 오심과 연결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세계가 창조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의 창조 세계가 심판과 변화를 거쳐 새롭게 되는 것일까요? 10–12절의 해체와 불의 언어를 강조하면 전자에, 홍수로 옛 세상이 멸망했어도 창조 세계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았다는 점과 이사야서의 새 창조가 삶의 회복과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면 후자에 무게가 실립니다. 본문이 명시하지 않은 물질세계의 마지막 상태를 지나치게 구체화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으며, 그 세계가 현재의 세계와 같지 않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그 새 세계에 관해 그가 덧붙이는 구체적인 설명은 하나뿐입니다. 「그곳에는 의가 깃들어 삽니다.」 「깃들어 삽니다」는 거주하거나 자리를 잡고 산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의가 잠시 찾아오는 세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의가 깃들어 사는 세계를 말합니다.
지금의 세계에서 의는 종종 환영받지 못합니다. 의롭게 행동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정직한 사람은 속이는 사람에게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기다리는 세계에서 의는 낯선 손님이 아니라, 그 세계를 특징짓는 질서가 됩니다.
이 점에서 새 창조의 약속은 앞 장의 거짓 선생들에 대한 고발과 맞닿습니다. 그들은 욕심으로 사람들을 이용하고, 방탕을 자유라고 부르며, 무법함을 퍼뜨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전혀 관계없는 세계에 들어갈 자격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계의 질서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66:22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 앞에 계속 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조 세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해석도 있고, 베드로후서의 파괴적인 우주적 이미지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을 함께 읽으며 창조 세계의 미래를 재검토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1–5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며 죽음과 눈물과 고통이 사라지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는 이사야서의 약속이 신약에서 발전하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다만 베드로후서 3장이 직접 묘사하는 새 창조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의가 깃들어 삽니다」라는 표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날에 어떤 사람으로 발견될 것인가
13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한 뒤, 베드로는 다시 독자들의 현재 삶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들을 기다리면서 얼룩도 흠도 없이 평화 가운데서 그분께 발견되도록 애쓰십시오.베드로후서 3:14 · 본디새김
2:13에서 거짓 선생들은 「얼룩이요 흠」이라고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독자들은 「얼룩도 흠도 없이」 발견되도록 애쓰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편지 전체에서 문제 삼았던 욕심과 속임수, 방탕과 무법함을 떠올리면 그 삶이 어떤 방향인지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욕망을 자유라고 부르지 않으며, 맡겨진 진리를 자기 이익을 위해 비틀지 않는 삶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 가운데서」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이 평화는 죄에 대한 무관심이나 심판에 대한 안일함과 다르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며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삶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땅과 그 안의 일들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고, 14절에서 독자들은 예수님께 「발견되도록」 애쓰라고 합니다. 두 절에는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이 반복을 의도적 대조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지만, 함께 읽으면 물음 하나가 드러납니다. 현재 세계의 모든 것이 해체되는 날에, 독자들은 예수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 있을 것인가?
이제 베드로는 앞서 설명했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다시 꺼냅니다.
그리고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을 구원으로 여기십시오.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를 따라 여러분에게 그렇게 썼습니다.베드로후서 3:15 · 본디새김
9절이 오래 참으심이 왜 필요한지 설명했다면, 15절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합니다. 사람들은 오래 참으심을 약속의 실패로 해석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구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 자체가 자동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회개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믿음이 무너질 이유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아직도 구원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이유입니다.
바울의 편지들이 여기서 등장하는 이유
베드로는 자신이 전하는 가르침이 개인적인 생각만이 아니라 다른 사도의 가르침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로마서 2:4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이 사람을 회개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하고, 로마서 8:24–25에서는 보이지 않는 소망을 기다리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베드로가 구체적으로 어느 편지를 가리켰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모든 편지에서도 이 일들을 두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 편지들에는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이 더러 있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굳게 서지 못한 이들은 다른 성경들을 비틀듯 그 내용도 비틀어 버릴 것이며, 그로써 제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16 · 본디새김
사도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즉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문제 삼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내용을 「비틀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언가를 뒤틀거나 왜곡하는 뜻을 지닙니다. 거짓 선생들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르침을 이용했고, 이제 바울의 편지까지 자기 뜻에 맞게 비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문제와 성경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문제를 구별해야 합니다. 어려운 본문 앞에서 질문하고, 다른 해석을 검토하고,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거짓 가르침과 같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경계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무법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태도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을 경쟁자로 소개하지 않고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울의 지혜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의 권위가 각자의 독창적인 사상이나 지적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경고는 독자들 자신에게도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은 바울의 편지들과 나란히 「다른 성경들」을 언급합니다. 이는 바울의 편지들이 이미 특별한 권위를 가진 문헌으로 받아들여지고, 성경으로 여겨지는 문헌들과 함께 이해되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오늘날의 신약 27권이 이미 모두 확정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당시 알려져 있던 바울의 편지들이 어느 범위까지였는지도 본문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신약 정경의 형성은 여러 문헌의 수집과 유통, 공동체의 수용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습니다.
굳게 서 있는 것과 자라 가는 것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미리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헤맴에 함께 휩쓸려 여러분의 굳건함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 내십시오.베드로후서 3:17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무법한 사람들의 잘못된 길에 휩쓸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이미 서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굳게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앞으로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안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권면은 단순한 방어로 끝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 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앎에서 자라 가십시오. 그분께 이제도 영원한 날까지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베드로후서 3:18 · 본디새김
베드로는 지식의 양을 무한히 늘리라고도, 자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경험을 추구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앎」에서 자라 가라고 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모독하고, 어려운 성경을 비틀며,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은혜와 앎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지적 우월함을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졌는데도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기 욕망을 정당화한다면, 그 지식은 베드로가 권면하는 성장과 거리가 있습니다.
굳게 서 있다는 것은 아무 변화도 없이 그 자리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곧은 길을 버리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욱 알아 가며 자랍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길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은혜 안에서 성장합니다.
그들은 약속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구원으로 여기며 기다립니다.
그리고 편지는 한 문장의 송영으로 끝납니다. 이 장의 처음에서 조롱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의심했지만, 마지막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제도 영원한 날까지」라는 말은 약속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재와 하나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미래를 하나로 묶습니다.
기다림은 무엇을 변화시키는가
베드로후서 3장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은 지나온 세월을 보며 앞으로도 모든 것이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은 그 시간이 사람들이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오래 참으심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의가 깃들어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라면,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고, 욕망을 다스리고, 연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돌보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약속이 참되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 거룩하게 살아갑니다.
하늘이 타오르는 소리도, 원소가 녹아내리는 모습도 마지막 장면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모든 심판의 묘사를 지나 한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의가 깃들어 삽니다.
그 세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직 이곳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회개하고, 거룩하게 살며, 예수님의 은혜와 예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 갑니다.
아직 그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날짜 하나가 아닙니다.
의가 깃들어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