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
자유를 약속하는 노예들
자유를 약속하는 사람이 사실은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면 어떨까요? 더구나 그 사람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의 거짓 선생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부패의 노예」라고 말합니다(2:19). 그들은 자신들을 사신 주인을 부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한 장사 밑천으로 삼고(2:1–3), 말은 자신감에 넘치지만 무엇을 말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며(2:12), 참으로 옛 삶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그곳으로 끌어들입니다(2:18).
이 장의 중심에는 이처럼 겉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대조가 있습니다.
앞 장에서 베드로는 예언이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영에 이끌린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아 전한 말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은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백성 가운데 거짓 예언자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묻는 것은 단지 어떤 가르침이 옳고 그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을 누구에게 속하게 하는가, 어떤 삶으로 이끌어 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신들을 사신 주인을 부인하다
베드로는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그처럼 여러분 가운데도 거짓 선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파당적 가르침을 몰래 끌어들이고, 자기들을 사신 주인마저 부인하여 스스로 곧 닥칠 멸망을 불러들일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1 · 본디새김
하나님의 백성이 언제나 참된 말씀만 들어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13:1–5는 표징이 일어나더라도 다른 신들을 따르라고 이끄는 예언자를 경계하고, 예레미야 23:16–22는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자기 마음에서 나온 환상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고발합니다.
특히 예레미야 23장에서는 거짓 예언의 문제와 예언자의 부도덕한 삶이 함께 등장합니다.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행실로 악을 퍼뜨리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돌이키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도 거짓된 가르침과 타락한 삶을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파당적 가르침을 몰래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파당적 가르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하이레시스(αἵρεσις)는 본래 어떤 것을 선택하는 일에서 출발하여 학파나 집단, 분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훗날 교회가 사용하는 제도적 의미의 「이단」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은 아닙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부인하며,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이 부인하는 대상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주권과 소유권을 가진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 바로 앞의 「사신」이라는 동사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사람을 산다는 표현은 노예의 소유권을 얻는 행위와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언어를 사용하여 주인과 그에게 속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문맥에서 이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제시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셨다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6:19–20과도 연결됩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그들의 몸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베드로후서 역시 이 소유 관계를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로 다룹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예수님의 권위를 부인한다는 것은 단지 한 가지 교리를 잘못 설명하는 일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거짓 선생들이 정확히 어떤 문장으로 예수님을 부인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특정 교리를 공개적으로 부정했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예수님의 권위를 거부하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2장에서는 후자의 문제가 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들의 방탕한 삶과 가르침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가 그들의 방탕을 좇을 것이고,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독을 받을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2 · 본디새김
그들의 행실은 그들 자신의 평판만 해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진리 자체가 모독받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쉽게 이들을 따르는지는 18–19절에서 밝혀집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자유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들의 행동을 경제적인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지어낸 말을 써서 욕심으로 여러분을 장사 밑천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들을 두고 내려진 심판은 오래전부터 놀고 있지 않고, 그들의 멸망은 졸고 있지 않습니다.베드로후서 2:3 · 본디새김
「장사 밑천으로 삼다」는 거래하거나 상업적 이익을 얻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들이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 자기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을 장사 밑천으로 삼습니다.
1절과 3절 사이의 이 대비는 두 주인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속하게 하시는 분이시고,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을 자기 욕망을 위해 이용합니다.
3절 후반은 심판과 멸망을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그립니다. 그들이 아직 심판받지 않았다고 해서 심판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에도 심판은 무효가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 이유를 오래된 성경 이야기들에서 찾아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아끼지 않으셨고, 누구를 지키셨는가
4절부터 9절까지는 이 장에서 가장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문장입니다.
베드로는 죄지은 천사들의 심판, 노아 시대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차례로 이야기합니다. 이 사건들은 모두 「만일」이라는 조건 아래 놓여 있고, 9절에 이르러서야 「그렇다면」이라는 결론이 등장합니다. 이 단락의 중심은 무서운 심판의 사례를 많이 소개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례들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한 가지 사실을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천사들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하나님이 죄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도리어 캄캄함의 사슬로 타르타로스에 던져 심판을 위하여 지켜지도록 넘기셨고,베드로후서 2:4 · 본디새김
그리스 신화에서 타르타로스는 신적인 존재들이 형벌을 받는 깊은 지하 영역을 가리켰습니다. 베드로가 그 지하 세계에 관한 모든 설명을 신앙의 교리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당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심판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어떤 천사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논증에서 중요한 것은 천사들의 정체보다 그들이 받은 심판입니다. 천사들은 인간보다 높은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지지만, 그러한 지위와 능력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죄를 지은 천사들조차 아끼지 않으셨다면, 인간이 자신의 영향력이나 특별한 지식을 내세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할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 세상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노아를 지키셨다
옛 세상도 아끼지 않으시고 오히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불러들이시면서 의의 선포자 노아를 일곱 사람과 함께 지켜 주셨으며,베드로후서 2:5 · 본디새김
옛 세상은 「아끼지 않으셨고」, 노아는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파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분명해집니다.
베드로는 노아를 「의의 선포자」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6–9장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를 만들었고, 가족과 함께 홍수에서 살아남았다고 기록하지만, 노아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의를 선포했는지는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의 호칭은 노아를 의의 증언자로 이해하는 해석을 보여 줍니다.
홍수 이야기에서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의 수보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지키실 사람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행동과 노아를 보존하시는 행동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판단에서 나온 두 결과입니다.
롯은 왜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리는가
세 번째 사건에서는 이 대조가 더욱 강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읍들은 재로 뒤엎어졌지만(6절), 그 안에 있던 롯은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처신에 짓눌린 의로운 롯을 건져 내셨다면 —베드로후서 2:7 · 본디새김
「의로운」이라는 호칭은 창세기 19장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조금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롯은 언제나 모범적인 모습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돔 사람들에게 자신의 두 딸을 내어주겠다고 제안하는 장면(창세기 19:8)은 특히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후의 가족 이야기도 롯을 흠 없는 인물로 이상화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그를 의롭다고 부를까요?
그 의로운 사람이 그들 가운데 살면서 날마다 무법한 행위들을 보고 들어 제 의로운 목숨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2:8 · 본디새김
베드로는 롯의 모든 행동이 완전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단락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롯이 소돔의 무법한 삶을 괴로워했다는 사실입니다. 7절의 「짓눌린」과 8절의 「괴롭혔기 때문입니다」를 함께 읽으면 그 고통이 두 방향에서 표현됩니다. 주변의 무법한 행위가 그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는 그것을 보며 자기 마음속에서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악한 사람들의 행실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롯이 의롭다고 불리는 이유를 그의 완벽한 도덕적 이력에서 찾기보다는, 소돔의 무법함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베드로의 평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본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구하신 이유를 그의 내적인 괴로움만으로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창세기 19:29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롯을 멸망 가운데서 내보내셨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는 롯의 의로운 고통을 강조하고, 창세기는 하나님의 기억과 구원 행동을 강조합니다. 두 본문은 같은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 이야기가 도달하는 하나의 결론
이 긴 조건문이 마침내 9절에서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경건한 이들을 시험에서 건져 내실 줄 알고 계시고, 의롭지 않은 자들은 벌을 받는 상태로 심판의 날까지 지켜 두실 줄 알고 계십니다.베드로후서 2:9 · 본디새김
주님은 건져 내실 줄 아십니다. 동시에 심판을 위해 지켜 두실 줄도 아십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하나님이 언젠가 심판하실 것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셔야 하는지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노아를 지키실 줄 아셨습니다. 롯을 건져 내실 줄 아셨습니다. 죄지은 천사들을 심판을 위해 지켜 두실 줄 아셨습니다.
따라서 현재 악한 사람들이 번영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무능력이나 무관심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9절 후반부의 「벌을 받는 상태로」는 해석이 갈리는 표현입니다. 심판의 날까지 이미 형벌을 받고 있는 상태로 읽을 수도 있고, 심판의 날에 벌받도록 지켜 두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본문의 논점은 심판의 정확한 시간표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방치하지 않으시며, 자신의 백성을 건져 내실 줄 아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경건한 사람들이 반드시 시험을 겪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홍수가 일어난 시대를 통과해야 했고, 롯은 소돔에서 날마다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처음부터 따로 두신 것이 아니라, 시험과 심판 가운데서 건져 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고통을 미리 제거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고통 속에서 사람을 잃지 않고 지키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베드로는 다시 거짓 선생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에는 「타르타로스」에서 파생된 동사 타르타로오(ταρταρόω)가 쓰였는데, 신약에서 이 동사가 나오는 곳은 이 구절뿐입니다. 죄지은 천사들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자들이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천사들의 범죄로 설명하는 고대 유대 전승(특히 에녹1서 6–15장)을 배경으로 봅니다. 유다서 6절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이 심판 때까지 매여 있다고 말하므로 이런 배경을 떠올리게 하지만, 베드로후서가 죄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므로 그 사건들과 동일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5절의 「일곱 사람과 함께」는 노아를 포함한 여덟 사람이 보존되었다는 뜻으로, 창세기 7:13에는 노아와 그의 아내, 세 아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방주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20에서도 노아의 시대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함께 언급되지만, 두 본문이 노아의 선포 방식을 상세히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9절의 「벌을 받는 상태로」는 그리스어 현재 분사 콜라조메누스(κολάζω)로, 이미 형벌을 받고 있다고 읽는 쪽은 현재 분사의 일반적인 시간 관계를, 심판의 날에 벌받도록 지켜 둔다고 읽는 쪽은 최종 심판을 위해 보존한다는 문맥상의 목적을 근거로 듭니다.
말은 많지만 정작 알지 못하는 사람들
10절부터는 문장의 분위기가 거칠어집니다.
무엇보다 더러운 욕망으로 육을 따라 살아가며 주 되심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그렇게 지켜 두십니다. 겁 없는 자들이요 제멋대로인 자들이라, 영광들을 모독하면서도 그 앞에서 떨지 않습니다.베드로후서 2:10 · 본디새김
베드로는 그들의 두려움 없음을 용기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상대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영광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원문에도 설명 없이 복수형이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11절의 천사들과 연결할 때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유력하지만, 선한 천사들인지 악한 천사들인지는 논의가 있으므로, 이 구절을 특정한 천사 집단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으로 확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천사들은 힘과 능력이 더 크면서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모독하는 심판을 내리지는 않는데 말입니다.베드로후서 2:11 · 본디새김
더 큰 능력을 가진 천사들은 함부로 모독하지 않는데,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모독합니다. 이 비교가 보여 주는 것은 능력의 많고 적음보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태도입니다.
능력이 큰 존재가 오히려 조심하고, 능력이 작은 존재가 오히려 오만합니다.
그러나 이자들은 잡혀 죽도록 태어난 본능적인 말 못 하는 짐승 같아서, 알지도 못하는 것을 모독하다가 그 짐승들이 썩는 가운데 이자들도 썩을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12 · 본디새김
여기서 베드로가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동물적인 욕망이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것을 모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영적인 세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비난합니다. 이는 종교적인 교만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해는 없습니다. 자신감은 넘치지만 분별력은 없습니다.
이 짐승의 비유는 뒤에 등장할 발람의 나귀 이야기와 연결될 때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거짓 선생들은 짐승처럼 알지 못한다고 비난받는데, 정작 발람의 이야기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짐승이 예언자의 잘못을 막습니다.
한편 12절에서는 부패와 파멸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반복되어, 짐승이 붙잡혀 죽는 운명과 거짓 선생들이 멸망하는 운명이 겹쳐집니다.
그들의 끝은 그들이 무모하게 선택한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유다서 8–9절에는 비슷한 논증이 나옵니다. 유다서는 천사장 미가엘이 악마와 다툴 때에도 모독하는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베드로후서는 미가엘의 이름이나 모세의 몸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천사들의 절제된 태도를 일반적인 형태로 서술합니다. 두 편지 사이에는 광범위한 문학적 유사성이 있으며, 베드로후서가 유다서의 자료를 재구성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별 구절의 차이만으로 문학적 의존의 방향이나 모든 수정 의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욕심에 길들여진 마음
불의의 삯으로 불의를 당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대낮의 흥청거림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얼룩이요 흠이라, 여러분과 함께 어울려 먹으면서 제 속임수를 즐기며 흥청거립니다.베드로후서 2:13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도 방탕한 잔치는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베드로는 이들이 밤이 아니라 대낮에도 그런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묘사합니다. 숨기거나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는 고발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이 「여러분과 함께 어울려 먹으면서」 그렇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밖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공동체의 식탁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 자리는 신뢰와 친밀함이 형성되는 자리인데, 그들은 바로 그 친밀함 속에서 속임수를 즐깁니다.
그들의 눈은 간음하는 여자로 가득하고 죄짓기를 그칠 줄 모릅니다. 미끼를 써서 굳게 서지 못한 목숨들을 꾀고, 마음은 욕심에 길들어 있습니다. 저주의 자식들입니다.베드로후서 2:14 · 본디새김
「미끼를 써서」는 낚시나 사냥에서 미끼를 사용하여 대상을 끌어들이는 모습과 연결할 수 있는 말로, 18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보고, 그 욕망을 이용하여 끌어들인다는 뜻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이 어떤 유혹에 약한지 알아내고 그것을 이용합니다.
그들이 노리는 사람들은 「굳게 서지 못한 목숨들」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한 사람들,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 않고, 그들을 꾀는 자들의 악함을 집중적으로 고발합니다.
「길들어 있다」는 훈련하거나 연습한다는 뜻으로, 체육 훈련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던 말입니다. 이들은 어쩌다가 한 번 욕심에 넘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욕심을 추구하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이들의 탐욕을 순간적인 충동이 아니라 반복된 선택을 통해 마음에 굳어진 습관으로 묘사합니다.
발람은 왜 다시 등장하는가
그들은 곧은 길을 버리고 헤매게 되었으며, 보솔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아갔습니다.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한 자입니다.베드로후서 2:15 · 본디새김
민수기 22–24장에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발람을 부릅니다. 발람은 처음부터 단순히 돈을 받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께서 허락하신 말씀만 전하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축복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이야기는 발람의 행동에 복잡한 긴장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발람에게는 발락의 보상이 제시되고, 그는 길을 떠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마주하며 나귀를 통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민수기 31:16은 이스라엘이 브올 사건에서 죄를 짓도록 유도한 일과 발람을 연결합니다.
베드로후서는 이 복잡한 인물에게서 한 가지 특징을 뽑아냅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부당한 보상에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으로 제시됩니다. 거짓 선생들도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큼,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올리면서도 실제로는 보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자기가 법을 어긴 일을 두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말소리를 못 내는 짐 나르는 짐승이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여 그 예언자의 미친 짓을 막았습니다.베드로후서 2:16 · 본디새김
민수기 22:22–35에서 발람의 나귀는 길에 서 있는 여호와야훼의 천사를 먼저 알아봅니다. 발람은 그것을 보지 못한 채 나귀를 때립니다. 마침내 여호와야훼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고, 그 짐승이 사람의 말로 발람에게 항의합니다.
예언자는 보지 못합니다. 짐승은 봅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짐승은 그 길에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언자는 짐승을 때립니다. 그러나 그 짐승이 오히려 예언자의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12절에서 거짓 선생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을 떠드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라고 고발받았습니다. 그런데 발람 이야기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짐승이 예언자보다 더 바르게 행동합니다.
문제는 말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진실을 보고, 그 진실 앞에서 멈출 수 있느냐입니다.
이 반전은 거짓 선생들의 영적 권위에 대한 고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면, 예언자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자기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물 없는 샘이 약속하는 자유
이자들은 물 없는 샘이요 돌풍에 밀려가는 안개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둠의 캄캄함이 지켜져 있습니다.베드로후서 2:17 · 본디새김
샘은 물을 기대하게 하는 장소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찾아가는 것은 그곳에 물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물이 없습니다.
그 샘의 문제는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것을 실제로 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게 만들지만, 정작 그들이 제공하는 것에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없습니다.
「돌풍에 밀려가는 안개」도 비슷합니다. 안개는 습기를 품고 있는 듯 보이지만, 여기서는 바람에 떠밀려 사라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메마른 땅에 물을 공급하는 비와 달리, 무엇인가를 가져다줄 듯하지만 실제로는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그 공허함의 내용이 밝혀집니다.
그들이 헛된 것을 부풀려 말하면서 육의 욕망과 방탕을 미끼로 삼아, 헤맴 속에 사는 이들에게서 참으로 벗어나고 있는 이들을 꾀는 까닭입니다.베드로후서 2:18 · 본디새김
그들의 크고 인상적인 말은 특별한 지식이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사용하는 미끼는 「육의 욕망과 방탕」입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것은 새로운 욕망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익숙하게 느끼는 욕망을 다시 정당화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들이 꾀는 사람들은 이미 옛 삶에서 떠나고 있는 사람들,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겨냥합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기들은 부패의 노예입니다. 누구든지 무엇에 지면 그것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2:19 · 본디새김
이 장 전체의 중심을 찌르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단순히 외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는 힘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누군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겠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욕망을 거스를 수 없다면, 그는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일까요?
욕망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을 멈출 힘이 없다면, 사실은 욕망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 절을 다시 떠올려 보면, 이 장의 역설이 완성됩니다.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을 사신 주인을 부인했습니다. 주인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예수님의 주 되심을 부인함으로써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부패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을 사신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것은 생명과 경건이며, 부패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주인의 권위에서 벗어나라고 부추기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다시 부패에 얽매이게 합니다.
예수님께 속하는 일이 사람을 부패에서 해방시키는 길이 되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거부하며 욕망을 따르는 일이 오히려 노예가 되는 길이 됩니다.
베드로가 거짓 선생들의 자유를 비판하는 까닭은 자유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실제로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그들의 가르침은 물 없는 샘과 같습니다.
갈증을 해결해 주겠다고 하지만, 정작 물이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그리스어 사본에는 「겨우」 벗어나고 있다는 읽기와 「참으로」 벗어나고 있다는 읽기가 있습니다. 전자는 벗어남이 아직 미약하거나 가까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후자는 그 벗어남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 제시된 본문은 후자의 읽기를 따르므로, 문면에서는 그들이 실제로 옛 삶에서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처음보다 나빠진 마지막 형편
20절은 이 장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어려운 질문을 일으키는 부분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아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그것들에 얽혀서 지고 만다면, 그들에게는 마지막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20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가르침을 잠시 접했다가 흥미를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을 깨달아 알았고,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가볍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알게 된 사람도 다시 부패에 사로잡혀 멸망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이 문제에는 서로 다른 신학적 해석이 존재합니다. 어떤 해석은 본문이 「깨달아 알아」와 「벗어났다가」라는 표현을 분명하게 사용하므로, 실제로 예수님을 알고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던 사람도 다시 돌아설 수 있다는 경고로 읽습니다. 다른 해석은 앞에서 그들이 주인을 부인하는 자들로 묘사되고 마지막에 개와 돼지의 속담이 등장한다는 점을 근거로, 이들이 복음의 영향으로 삶에 변화가 나타났지만 끝까지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 남지는 않았다고 이해합니다.
또한 20절의 「그들」이 주로 거짓 선생들을 가리키는지, 앞 절에서 유혹의 대상으로 등장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는지도 논의할 수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에 대한 고발이 계속된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바로 앞에서 유혹당하는 사람들이 강조되었으므로 두 집단의 경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구원과 배교에 관한 모든 체계적인 신학적 논쟁을 해결하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해석을 따르든 베드로의 경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에게 새로운 책임을 가져옵니다. 그 진리를 알게 되고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는데도 다시 그 더러움에 자신을 내어준다면, 그 마지막 형편은 처음보다 심각해집니다.
의의 길을 깨달아 알고 나서 자기들에게 넘겨진 거룩한 계명에서 돌아서느니, 차라리 그 길을 깨달아 알지 못했더라면 그들에게 더 나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2:21 · 본디새김
그들은 알지 못해서 잘못된 길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옳은 길을 「깨달아 알고 나서」 그 길에서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책임은 단순한 무지의 책임과 다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르는 편이 언제나 더 낫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아 알지 못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강한 비교로,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돌아서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냅니다. 이는 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지식을 배반하는 행위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장에는 길을 가리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2절에서는 「진리의 길」이 모독받고, 15절에서는 거짓 선생들이 「곧은 길」을 버리고 발람의 길을 따라가며, 21절에서는 「의의 길」을 알고도 돌아섭니다. 베드로는 가르침을 하나의 길로 묘사합니다.
길은 지도 위에 표시된 정보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길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정작 다른 방향으로 걷는다면, 그 지식은 목적지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걷는 것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문제는 단순히 길을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길을 알고도 버렸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아는 사람의 더 큰 책임은 누가복음 12:47–48에서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은 종과, 알지 못하고 잘못한 종을 구별하는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더 많이 알고 맡은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이 주어집니다.
씻은 돼지는 왜 다시 진창으로 돌아가는가
베드로는 마지막에 두 개의 속담을 인용합니다.
참된 속담이 말하는 그대로가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개는 제가 토한 것으로 돌아간다.」 또 「몸을 씻은 돼지는 다시 진창에 뒹군다.」베드로후서 2:22 · 본디새김
첫 번째 속담은 잠언 26:1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잠언에서는 미련한 사람이 자기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베드로는 이 속담을 거짓 선생들에게 적용하여, 이미 벗어났던 부패로 되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보여 줍니다.
개는 자기 몸에서 내보낸 것을 다시 찾고, 돼지는 깨끗해진 몸을 다시 더럽힙니다. 두 장면 모두 한 번 밖으로 내보냈거나 벗어났던 것에 다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특히 두 번째 속담은 20절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깨달아 알아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거기에 얽히는 사람의 모습이, 몸을 씻었다가 다시 진창으로 돌아가는 돼지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돼지가 씻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씻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진창으로 돌아갔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번째 속담인 「몸을 씻은 돼지는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잠언 26:11의 직접적인 인용은 아닙니다. 고대에 전해지던 속담적 이미지와 관련될 수 있지만, 이 문구의 정확한 출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부패에서 벗어나는 자유
이 장의 날카로운 표현들 때문에 베드로후서 2장을 읽는 일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짐승에 비유되고, 저주의 자식들이라고 불리며, 마지막에는 개와 돼지의 속담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 거친 언어가 향하는 사람들은 단지 연약하거나 신앙이 미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약함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모든 신학적 의견 차이나 지도자의 실수를 곧바로 거짓 선생이라는 판정으로 연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고발하는 것은 탐욕과 기만, 방탕과 권위의 거부, 그리고 사람들을 다시 부패에 얽매이게 하는 삶의 방향이 함께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물은 것은 가르침이 사람을 누구에게 속하게 하는가였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자기들을 사신 주인께 속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유를 약속하지만,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부패의 노예 상태입니다. 베드로가 경계하는 것은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유의 이름으로 욕망에 종속되는 삶이며, 심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노아와 롯을 건져 내실 줄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는 몸을 씻은 돼지 한 마리가 있습니다.
깨끗해진 몸으로 진창 밖에 서 있었지만, 이제 다시 그 속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장면을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문장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