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

자유를 약속하는 노예들

자유를 약속하는 사람이 사실은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면 어떨까요? 더구나 그 사람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의 거짓 선생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부패의 노예」라고 말합니다(2:19). 그들은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인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고(2:1–3), 자신감에 넘치지만 정작 무엇을 말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2:12). 새로운 삶으로 이끌겠다고 하지만, 참으로 옛 삶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그곳으로 끌어들입니다(2:18).

이 장의 중심에는 이처럼 겉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대조가 있습니다.

앞 장에서 베드로는 예언이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영에 이끌린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아 전한 말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은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백성 가운데 거짓 예언자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묻는 것은 단지 어떤 가르침이 옳고 그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을 누구에게 속하게 하는가, 어떤 삶으로 이끌어 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을 따라가면, 거짓 선생들의 위험을 고발하는 듯했던 이 장이 점차 참된 자유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2장 본문 읽기 →

자신들을 사신 주인을 부인하다

베드로후서 2:1–3 본문 →

베드로는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옛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짓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그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선생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몰래 끌어들이고,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인마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갑작스러운 멸망을 불러올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1 · 두루새김

하나님의 백성이 언제나 참된 말씀만 들어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에는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경고가 거듭 등장하고, 특히 예레미야 23장에서는 거짓 예언과 예언자의 부도덕한 삶이 함께 고발됩니다. 베드로후서 2장도 거짓된 가르침과 타락한 삶을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몰래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가르침」으로 옮긴 그리스어 하이레시스(αἵρεσις)는 본래 무엇을 선택하는 일에서 출발하여 학파나 분파를 가리키던 말로, 훗날 교회가 쓰는 제도적 의미의 「이단」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비판하는 것은 다른 해석을 가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며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대상입니다. 「주인」은 다스릴 권한과 소유권을 가진 주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바로 앞의 「값 주고 사신」이라는 표현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사람을 산다는 표현은 노예의 소유권을 얻는 행위와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문맥에서 이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제시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 가지 교리를 잘못 설명하는 일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정확히 어떤 문장으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특정 교리를 공개적으로 부정했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권위를 거부하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는데, 2장에서는 후자의 문제가 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곧바로 그들의 행동을 경제적인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꾸며 낸 말로 여러분을 이용해 이익을 챙길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심판은 오래전부터 쉬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멸망도 졸고 있지 않습니다.베드로후서 2:3 · 두루새김

「이용해 이익을 챙길」(ἐμπορεύομαι)에 해당하는 동사는 거래하거나 상업적 이익을 얻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이들이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그 신뢰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깁니다.

여기서 1절과 3절 사이에 날카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을 이용해 이익을 챙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속하게 하시고,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을 자기 욕망을 위해 이용합니다.

2절은 그 결과를 더 넓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따라 욕망대로 거리낌 없이 살 것입니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독을 받을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2 · 두루새김

그들의 행실은 그들 자신의 평판만 해치지 않고, 그들이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진리 자체가 모독받게 만듭니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쉽게 이들을 따를까요? 베드로는 18–19절에서 그 유혹을 밝힐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자유를 약속합니다.

3절 끝에서 심판은 「쉬지 않고 있으며」, 멸망도 「졸고 있지 않습니다」. 심판과 멸망을 살아 있는 존재처럼 표현하여, 그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에도 심판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 이유를 오래된 성경 이야기들에서 찾아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3:1–5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다른 신들을 따르라고 이끄는 예언자를 경계하고, 예레미야 23:16–22는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자기 마음에서 나온 환상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고발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셨다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6:19–20과도 연결됩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되었으므로, 그들의 몸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아끼지 않으셨고, 누구를 지키셨는가

베드로후서 2:4–9 본문 →

4절부터 9절까지는 이 장에서 가장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문장입니다.

베드로는 죄지은 천사들의 심판, 노아 시대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차례로 이야기합니다. 원문에서는 이 사건들이 모두 「만일」이라는 조건 아래 놓여 있고 9절에 이르러서야 결론이 등장하는데, 두루새김은 사건들을 차례로 풀어 쓴 뒤 9절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면」으로 결론을 연결합니다. 이 단락의 중심은 심판의 사례를 많이 소개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례들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천사들도 아끼지 않으셨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천사들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캄캄한 사슬로 묶어 타르타로스에 던지시고, 심판 때까지 갇혀 있게 하셨습니다.베드로후서 2:4 · 두루새김

타르타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적인 존재들이 형벌을 받는 깊은 지하 영역을 가리키던 이름으로, 베드로는 당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심판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이 천사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창세기 6장을 배경으로 보는 해석이 많지만, 베드로후서 자체는 어떤 천사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논증에서 중요한 것은 천사들의 정체보다 그들이 받은 심판입니다. 인간보다 높은 지위와 능력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의 영향력이나 특별한 지식을 내세워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옛 세상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노아를 지키셨다

이어지는 홍수 이야기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추가합니다.

또 옛 세상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지만, 의로운 삶을 선포하던 노아는 다른 일곱 사람과 함께 지켜 주셨습니다.베드로후서 2:5 · 두루새김

옛 세상은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파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분명해집니다.

베드로는 노아를 「의로운 삶을 선포하던」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창세기 6–9장은 노아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선포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의 수보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지키실 사람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행동과 노아를 지키시는 행동은 같은 하나님의 판단에서 나온 두 결과입니다.

롯은 왜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리는가

세 번째 사건에서는 이 대조가 더욱 강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 두 도시에는 멸망의 판결을 내리시고 재로 만드셨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살아갈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신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6 · 두루새김
그러나 의로운 롯은 건져 주셨습니다. 롯은 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욕망대로 거리낌 없이 사는 모습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베드로후서 2:7 · 두루새김

「의로운 롯」이라는 호칭은 창세기 19장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롯은 언제나 모범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돔 사람들에게 자신의 두 딸을 내어주겠다고 제안하는 장면(창세기 19:8)은 특히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후의 가족 이야기도 롯을 흠 없는 인물로 이상화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그를 의롭다고 부를까요? 8절이 설명합니다.

그 의로운 사람은 그들 가운데 살면서 날마다 그들의 악한 행실을 보고 들었고, 그 때문에 그의 의로운 마음은 고통을 겪었습니다.베드로후서 2:8 · 두루새김

베드로는 롯의 모든 행동이 완전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롯이 그 도시 안에서 날마다 악을 보고 들으며, 그것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괴로워했다는 사실입니다. 롯이 의롭다고 불리는 이유는 완벽한 도덕적 이력이 아니라, 소돔 사람들이 법을 무시하며 사는 모습에 물들지 않았다는 베드로의 평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본문에 가깝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를 구하신 이유를 그의 괴로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19:29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롯을 멸망 가운데서 내보내셨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는 롯의 의로운 고통을, 창세기는 하나님의 기억과 구원 행동을 강조하며 같은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세 이야기가 도달하는 하나의 결론

이 긴 조건문이 마침내 9절에서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면, 주님은 자신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시련에서 건져 내실 줄 아십니다. 또한 불의한 사람들을 벌하시면서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두실 줄도 아십니다.베드로후서 2:9 · 두루새김

베드로는 하나님이 언젠가 심판하실 것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셔야 하는지 「아신다」고 말합니다.

노아를 지키실 줄 아셨습니다. 롯을 건져 내실 줄 아셨습니다. 죄지은 천사들을 심판 때까지 갇혀 있게 하실 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악한 사람들이 잘살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무능력이나 무관심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9절 후반부의 「벌하시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리스어 현재 분사의 일반적인 시간 관계를 따르면 심판의 날까지 이미 형벌을 받고 있는 상태로 읽을 수 있고, 마지막 심판을 위해 가두어 둔다는 문맥의 목적을 따르면 심판의 날에 벌받도록 가두어 두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벌을 받는 상태가 이어지는 읽기를 따랐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본문의 논점은 심판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악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며 자신의 백성을 건져 내실 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시련을 겪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홍수의 시대를 통과해야 했고, 롯은 소돔에서 날마다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련 없는 곳에 따로 두신 것이 아니라, 시련과 심판 가운데서 건져 내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다시 거짓 선생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조금 더 깊이

「타르타로스에 던지시고」에는 이 이름에서 파생된 동사가 쓰였고, 신약에서 이 동사가 나오는 곳은 이 구절뿐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그리스 신화의 지하 세계에 관한 설명을 신앙의 교리로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많은 해석자들은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 이야기와 그것을 천사들의 범죄로 설명하는 고대 유대 전승(특히 에녹1서 6–15장)을 배경으로 보며, 유다서 6절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이 심판 때까지 매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의 천사들을 그 사건과 동일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노아가 「다른 일곱 사람과 함께」 지켜졌다는 것은 창세기 7:13의 노아와 아내, 세 아들과 그들의 아내들, 곧 여덟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3:20에서도 노아의 시대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함께 언급되지만, 노아의 선포 방식을 상세히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말은 많지만 정작 알지 못하는 사람들

베드로후서 2:10–12 본문 →

10절부터는 문장의 분위기가 거칠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불의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히 자기 몸의 더러운 욕망을 따라 살며 주님의 다스림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벌하시면서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두실 줄 아십니다. 이들은 겁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베드로후서 2:10 · 두루새김

베드로는 그들의 두려움 없음을 용기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상대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영광스러운 존재들」은 11절의 천사들과 연결할 때 하늘의 존재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유력하지만, 선한 천사들인지 악한 천사들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에 나오는 비교입니다.

천사들은 더 큰 힘과 능력을 지녔지만, 주님 앞에서 그런 존재들을 모독하는 판결을 내리지는 않습니다.베드로후서 2:11 · 두루새김

더 큰 능력을 가진 천사들은 함부로 모독하지 않는데, 거짓 선생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모독합니다. 능력이 큰 존재가 오히려 조심하고, 능력이 작은 존재가 오히려 오만합니다. 이 비교가 보여 주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생각 없이 본능대로 움직이며 잡혀 죽도록 태어난 짐승과 같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모독하다가, 그 짐승들이 죽듯 이들도 멸망할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12 · 두루새김

베드로가 문제 삼는 것은 동물적인 욕망만이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모독하다가」 멸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세계를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비난합니다. 두루새김은 「그 짐승들이 죽듯 이들도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풀어, 원문에서 부패와 파멸을 가리키는 같은 계열의 단어들이 반복되는 효과를 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해는 없습니다. 자신감은 넘치지만 분별력은 없습니다.

이 짐승의 비유는 뒤에 등장할 발람의 나귀 이야기와 이어질 때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베드로는 잠시 뒤 그 역전을 보여 줄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유다서 8–9절에도 비슷한 논증이 나옵니다. 유다서는 천사장 미가엘이 악마와 다툴 때에도 모독하는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베드로후서는 미가엘의 이름이나 모세의 몸에 관한 이야기 없이 천사들의 절제된 태도를 일반적인 형태로 서술합니다. 두 편지 사이의 폭넓은 유사성 때문에 베드로후서가 유다서의 자료를 다시 구성했다는 해석이 있지만, 개별 구절의 차이만으로 어느 편지가 다른 편지를 참고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욕심에 길들여진 마음

베드로후서 2:13–16 본문 →

그들은 나쁜 짓을 한 대가로 자신도 해를 당할 것입니다. 대낮에 흥청거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이들은 얼룩과 흠 같은 존재로, 여러분과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 자기들의 속임수를 즐깁니다.베드로후서 2:13 · 두루새김

고대 사회에서도 흥청거리는 잔치는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이들은 밤이 아니라 대낮에도 그런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숨기거나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는 고발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이 「여러분과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 그렇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공동체의 식탁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 자리는 신뢰와 친밀함이 형성되는 자리인데, 그들은 바로 그 친밀함 속에서 속임수를 즐깁니다.

14절에서는 그들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봅니다.

그들의 눈에는 간음할 상대밖에 보이지 않으며, 죄짓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굳게 서지 못한 사람들을 유혹하며, 욕심을 부리는 데 길든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주받을 자들입니다.베드로후서 2:14 · 두루새김

「유혹하며」(δελεάζω)에 해당하는 동사는 미끼로 꾀는 일을 가리키며, 18절에서도 반복되어 그곳에서는 「미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로 옮겼습니다. 미끼를 쓴다는 것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보고 그 욕망을 이용하여 끌어들인다는 뜻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이 어떤 유혹에 약한지 알아내고 그것을 이용합니다.

그들이 노리는 사람들은 「마음이 굳게 서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한 사람들,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 않고, 그들을 꾀는 자들의 악함을 고발합니다.

「길든」은 훈련하거나 연습한다는 뜻으로, 체육 훈련을 가리킬 때에도 쓰이던 말입니다. 이들은 어쩌다 한 번 욕심에 넘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반복된 선택을 통해 욕심을 부리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선한 일에도, 악한 일에도 훈련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베드로가 꺼내는 인물이 발람입니다.

발람은 왜 다시 등장하는가

그들은 곧은 길을 버리고 길을 잃었습니다. 보솔의 아들 발람이 간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발람은 나쁜 짓을 하고 받는 보상을 사랑했습니다.베드로후서 2:15 · 두루새김

민수기 22–24장에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발람을 부릅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말씀만 전하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축복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발락의 보상이 제시되고, 민수기 31:16은 이스라엘이 브올 사건에서 죄를 짓도록 유도한 일과 발람을 연결합니다.

베드로후서는 이 복잡한 인물에게서 한 가지 특징을 뽑아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나쁜 짓을 하고 받는 보상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거짓 선생들과 닮은 점입니다.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큼,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발람을 설명하면서 특히 한 장면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말을 못 하고 짐을 나르던 짐승이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여, 그 예언자의 미친 짓을 막았습니다.베드로후서 2:16 · 두루새김

민수기 22:22–35에서 발람의 나귀는 길에 서 있는 하나님의 천사를 먼저 알아봅니다. 발람은 그것을 보지 못한 채 나귀를 때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자 그 짐승이 사람의 말로 항의합니다.

예언자는 보지 못합니다. 짐승은 봅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짐승은 그 길에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언자는 짐승을 때립니다. 그러나 그 짐승이 오히려 예언자의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12절에서 거짓 선생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을 떠드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라고 고발받았습니다. 그런데 발람 이야기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짐승이 예언자보다 더 바르게 행동합니다. 문제는 말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진실을 보고 그 진실 앞에서 멈출 수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면, 예언자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자기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물 없는 샘이 약속하는 자유

베드로후서 2:17–19 본문 →

17절에서 베드로는 두 가지 짧은 비유를 내놓습니다.

이들은 물 없는 샘이며, 거센 바람에 밀려가는 안개입니다. 이들을 위해 캄캄한 어둠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베드로후서 2:17 · 두루새김

목마른 사람이 샘을 찾아가는 것은 그곳에 물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물이 없습니다. 그 샘의 문제는 약속하는 것을 실제로 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도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것에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없습니다.

「거센 바람에 밀려가는 안개」도 비슷합니다. 안개는 습기를 품고 있는 듯 보이지만 바람에 떠밀려 사라지고, 메마른 땅에 물을 공급하는 비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그 공허함의 내용이 밝혀집니다.

그들은 속이 빈 말을 거창하게 늘어놓으며, 몸의 욕망과 그것을 거리낌 없이 따르는 생활을 미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이 꾀는 사람들은 잘못된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서 참으로 벗어나고 있는 이들입니다.베드로후서 2:18 · 두루새김

그들의 크고 인상적인 말은 특별한 지식이나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미끼는 「몸의 욕망과 그것을 거리낌 없이 따르는 생활」입니다. 새로운 욕망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익숙한 욕망을 다시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길입니다.

그들이 꾀는 사람들은 이미 옛 삶에서 떠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바로 그 사람들을 겨냥합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할까요?

그들은 그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부패의 노예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굴복시킨 것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2:19 · 두루새김

이 장 전체의 중심을 찌르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외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는 힘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누군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겠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을 멈출 힘이 없다면, 사실은 욕망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첫 절을 다시 떠올리면 이 장의 역설이 완성됩니다. 거짓 선생들은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인을 인정하지 않았고, 주인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그렇게 해서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부패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을 값 주고 사신 주인이시지만, 그들에게 베푸시는 것은 생명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이며 부패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 속하는 일이 사람을 부패에서 해방시키는 길이 되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거부하며 욕망을 따르는 일이 오히려 노예가 되는 길이 됩니다. 베드로가 그들의 자유를 비판하는 까닭은 자유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실제로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그리스어 사본에는 「겨우」 벗어나고 있다는 읽기와 「참으로」 벗어나고 있다는 읽기가 있습니다. 전자는 벗어남이 아직 미약하거나 가까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후자는 그 벗어남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두루새김은 「참으로 벗어나고 있는」으로 옮겨 후자를 따랐으므로, 그들이 실제로 옛 삶에서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이 더 두드러집니다.

처음보다 나빠진 마지막 형편

베드로후서 2:20–21 본문 →

20절은 이 장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어려운 질문을 일으키는 부분입니다.

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다시 그 더러움에 얽혀 굴복한다면, 그들의 나중 형편은 처음보다 더 나빠진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20 · 두루새김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았고, 세상의 더러움에서 실제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종교적인 가르침을 잠시 접했다가 흥미를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볍게 만들 수 없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참으로 알게 된 사람도 다시 부패에 사로잡혀 멸망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이 문제에는 서로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한 해석은 본문이 「알아」와 「벗어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분명하게 쓰므로, 실제로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도 돌아설 수 있다는 경고로 읽습니다. 다른 해석은 이들이 앞에서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로 묘사되고 마지막에 개와 돼지의 속담이 나온다는 점을 근거로, 복음의 영향으로 삶이 변했지만 끝까지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 남지는 않았다고 이해합니다. 이 구절만으로 구원과 믿음을 버리는 일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을 해결하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해석을 따르든 베드로의 경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새로운 책임을 가져오며, 그 진리를 알고 더러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는데도 다시 자신을 내어준다면 나중 형편은 처음보다 심각해집니다.

의로운 길을 알고도 자신들에게 전해진 거룩한 명령에서 돌아서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들에게 더 나았을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21 · 두루새김

그들은 알지 못해서 잘못된 길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옳은 길을 「알고도」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르는 편이 언제나 더 낫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강한 비교는 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지식을 배반하는 행위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장에는 길을 가리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2절에서는 「진리의 길」이 모독받고, 15절에서는 거짓 선생들이 「곧은 길」을 버리고 발람의 길을 따라가며, 21절에서는 「의로운 길」을 알고도 돌아섭니다. 길은 지도 위의 정보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실제로 걸어야 하듯, 베드로는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걷는 것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길을 알고도 버렸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주로 거짓 선생들인지, 18절에서 유혹의 대상으로 등장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는지도 논의할 수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에 대한 고발이 계속된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바로 앞에서 유혹당하는 사람들이 강조되었으므로 두 집단의 경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21절의 책임 문제는 누가복음 12:47–48에서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은 종과 알지 못하고 잘못한 종을 구별하는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더 많이 알고 맡은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이 주어집니다.

씻은 돼지는 왜 다시 진창으로 돌아가는가

베드로후서 2:22 본문 →

베드로는 마지막에 두 개의 속담을 인용합니다.

참된 속담이 말하는 일이 그들에게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돌아간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몸을 씻은 돼지는 진흙탕으로 가서 뒹군다.」베드로후서 2:22 · 두루새김

첫 번째 속담은 잠언 26:11에서 미련한 사람이 자기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 속담을 가져와, 이미 벗어났던 부패로 되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속담은 잠언의 인용이 아니며, 고대의 속담적 이미지와 관련될 수 있지만 정확한 출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개는 자기 몸에서 내보낸 것을 다시 찾고, 돼지는 깨끗해진 몸을 다시 더럽힙니다. 두 장면 모두 한 번 내보냈거나 벗어났던 것에 다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특히 두 번째 속담은 20절과 긴밀하게 이어져,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얽히는 사람의 모습을 씻었다가 진흙탕으로 돌아가는 돼지로 그립니다.

여기서 돼지가 씻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씻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진흙탕으로 돌아갔습니다.

부패에서 벗어나는 자유

베드로후서 2:1–22 본문 →

이 장의 날카로운 표현들 때문에 베드로후서 2장을 읽는 일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짐승에 비유되고, 저주받을 자들이라고 불리며, 마지막에는 개와 돼지의 속담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 거친 언어가 누구를 향하는지 놓쳐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고발하는 사람들은 연약하거나 신앙이 미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약함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현대의 모든 신학적 의견 차이나 지도자의 실수를 곧바로 거짓 선생이라는 판정으로 연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고발하는 것은 욕심과 속임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따르는 생활과 권위의 거부, 그리고 사람들을 다시 부패에 얽매이게 하는 삶의 방향이 함께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물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그 가르침은 연약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웁니까, 아니면 그들의 연약함을 이용합니까?

거짓 선생들은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인」께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유를 약속했지만, 그들에게서 나타난 것은 부패의 노예 상태였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부패에서 벗어나는 길을 여시고, 하나님은 노아를 지키시고 롯을 건져 내셨듯 자신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건져 내실 줄 아십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을 누구에게 속하게 하는가 하는 처음의 물음에, 이 장은 이렇게 답합니다. 자유는 주인을 버리는 데서가 아니라, 사람을 사신 주인께 속하는 데서 옵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는 몸을 씻은 돼지 한 마리가 있습니다.

깨끗해진 몸으로 진흙탕 밖에 서 있었지만, 이제 다시 그 속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장면을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문장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