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직접 보고 들은 증언

잊지 않도록 남겨 두는 빛

사람은 무엇을 몰라서 믿음에서 멀어지는 것일까요? 베드로후서 1장은 조금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처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진리를 알고 있고, 그 진리 안에 굳게 서 있습니다(1:12). 그런데 편지를 쓰는 이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면서, 자기가 떠난 뒤에도 그들이 계속 기억할 수 있도록 같은 이야기를 거듭 들려주겠다고 합니다.

무엇을 그토록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교훈이나 신앙생활의 규칙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어떤 삶이 열렸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장에는 세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그 선물에 합당한 삶을 이야기합니다(1:1–11). 이어서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남겨 두려는 자신의 결심을 밝힙니다(1:12–15). 마지막으로 그 믿음이 어디에 근거하는지, 곧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한 증언과 하나님에게서 온 예언의 말씀을 제시합니다(1:16–21).

이 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서로를 비춥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뒤에서는 그 지식이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삶이 참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1장 본문 읽기 →

사도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다른가

베드로후서 1:1–2 본문 →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며 사도인 시므온 베드로가, 우리 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와 똑같이 값진 믿음을 몫으로 받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베드로후서 1:1 · 본디새김

사도는 예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노예는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두 호칭을 함께 놓음으로써 편지의 화자는 자신에게 권위가 있음을 밝히면서도, 그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소개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수신자들을 부르는 방식입니다.

「똑같이 값진」은 동등한 가치나 지위를 나타냅니다. 그들의 믿음이 사도의 믿음만큼 강하거나 성숙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믿음의 가치가 사도의 믿음보다 낮지 않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뒤에서 자신이 예수님의 위엄을 직접 보았고,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을 들었다고 말할 것입니다(1:16–18). 수신자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에게는 그들보다 특별한 경험과 증언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믿음의 가치를 나누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을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서 찾습니다. 믿음의 동등한 가치는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자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신 분에게서 나옵니다. 「몫으로 받은」이라는 표현에도 자신이 획득했다기보다 받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은 값싼 모조품이 아니라 같은 구원자에게서 비롯된 선물입니다.

이렇게 높은 그리스도 이해가 편지 첫머리에 놓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후에 등장할 모든 권면은 바로 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은 은혜와 평화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깨달아 앎으로」 넘치기를 빕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이 이 편지의 중심 주제입니다. 그 앎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고 선물을 주신 일을 이해하며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앎은 은혜를 받은 뒤에 생겨나는 결과만이 아니라, 은혜와 평화가 더욱 넘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에게는 실제로 무엇이 주어진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편지는 자신을 시므온 베드로라고 밝힙니다. 전통적으로 사도 베드로의 저술로 받아들여졌지만, 사도 베드로가 직접 썼다는 견해와 후대의 저자가 베드로의 이름과 권위를 빌려 기록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문체와 다른 신약 문헌과의 관계, 초기 교회의 수용 역사 등이 논의의 근거이며, 이 문제는 확정적으로 판정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편지가 스스로 제시하는 베드로의 목소리와 논증을 따라 읽습니다. 또 「우리 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서는 두 호칭이 하나의 관사 아래 놓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구원자를 별개의 인물로 보기보다는, 예수님을 하나님이자 구원자로 부르는 읽기가 문법적으로 유력합니다. 이 이해는 뒤이어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과 영광을 말하는 내용과도 잘 어울립니다.

신적인 본성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

베드로후서 1:3–4 본문 →

3절은 그 질문에 대담하게 대답합니다.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분을 깨달아 앎을 통해서, 그분의 신적인 능력이 생명과 경건에 딸린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베드로후서 1:3 · 본디새김

베드로는 사람들이 충분히 노력하면 언젠가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신자들에게 더 이상 성장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단락에서 온갖 노력을 다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과 자원이 예수님에게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4절에 이르면 더욱 낯선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영광과 덕으로 그분은 귀하고 더없이 큰 약속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그 약속들을 통해 세상에 있는, 욕망으로 말미암은 부패에서 벗어나 신적인 본성의 동반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1:4 · 본디새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일까요? 핵심은 「신적인 본성」 못지않게 「동반자」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을 함께 나누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신자가 하나님 자체로 변한다거나 하나님과 구별되지 않는 존재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어떤 현실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엇에 참여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바로 다음 단락에 덕과 절제, 경건과 사랑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부패와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앞의 「부패에서 벗어나」와 11절의 영원한 나라, 편지 마지막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3:13)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도덕적 변화와 부패를 넘어서는 생명이라는 두 측면을 함께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윤리적 성숙으로만 한정하거나, 반대로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변하는 형이상학적 주장으로만 읽는 것은 본문의 폭을 좁힐 수 있습니다. 본문 자체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부패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부패에서 벗어난 삶이 신적인 본성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욕망으로 말미암은 부패」, 곧 욕망이 삶을 지배하고 사람을 무너뜨리는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2장에서는 이 부패가 사람을 붙드는 노예 상태로 묘사됩니다(2:19). 부패에서 벗어나 신적인 본성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종교적 지위를 얻는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하던 힘에서 벗어나 다른 삶에 참여하게 되는 일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신적인 세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먼저 찾아오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이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 줍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사실에서 다음 권면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으므로, 온갖 애를 다 쏟으십시오

베드로후서 1:5–7 본문 →

5절의 첫마디는 「바로 이 때문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으니, 이제는 편안히 그 선물을 누리라고 말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여러분은 온갖 애를 다 쏟아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대어 주십시오. 덕에는 앎을,베드로후서 1:5 · 본디새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다는 사실이 인간의 노력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력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베드로는 덕을 쌓아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얻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덕을 더하라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앞의 방식에서는 인간의 성취가 하나님의 선물에 이르는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논증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이 먼저 주어지고, 인간의 삶은 그 선물에 응답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앎을, 앎에 절제를, 절제에 견딤을, 견딤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사랑을, 형제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곱 단계를 차례로 통과하는 성장 과정으로 읽기 쉽지만, 8절은 이 모든 것이 신자들 가운데 함께 있고 넘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연쇄는 엄격한 순서표라기보다 믿음이 여러 방향으로 풍성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첫 번째 덕(ἀρετή)목인 「덕」은 3절에서 우리를 부르신 분의 「덕」과 같은 그리스어 낱말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드러난 덕이 이제 믿는 이들의 삶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이는 4절의 「신적인 본성의 동반자」가 어떤 삶을 가리키는지 이해하는 실마리입니다.

덕에는 앎을 더해야 합니다. 선한 의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이 선한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앎도 혼자서는 충분하지 않아서, 베드로는 곧바로 앎에 절제를 더하라고 합니다.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자기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능력과 진리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절제」는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제어하는 능력입니다. 다음 장에서 욕망에 사로잡힌 거짓 교사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절제가 이 자리에 놓인 것은 중요한 대비를 이룹니다. 절제가 자신의 욕망을 다루는 일이라면, 이어지는 견딤은 자신이 뜻대로 바꿀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버티는 일과 관계됩니다. 신앙은 내면의 충동을 제어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외부의 압력 가운데서도 삶의 방향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견디는 삶은 경건으로, 경건은 형제 사랑으로, 형제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경건을 개인의 종교적 성숙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경건은 공동체 안의 관계로 나타나야 하고, 가까운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은 더 넓은 사랑으로 열려야 합니다. 「형제 사랑」과 「사랑」이 반드시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에 사랑을 둔 것은 경건한 삶이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완성되어 간다는 인상을 분명히 줍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자기 안에 쌓아 두는 소유물이 아니라, 절제하고 견디며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 선물입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무엇을 잊었다는 뜻인가

베드로후서 1:8–11 본문 →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있고 넘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아는 데에 여러분이 게으르지도 열매 없지도 않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1: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예수님을 깨달아 앎으로 모든 것을 선물받는다고 했습니다(1:3). 여기서는 예수님을 아는 일이 열매를 맺도록 덕목들을 풍성히 갖추라고 말합니다.

두 방향이 서로 맞물립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이 삶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변화된 삶은 예수님을 아는 일을 열매 있게 합니다.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뜻과 성품이 자신의 삶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면, 베드로는 그러한 앎을 열매 없는 앎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9절에서 갑자기 시각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실제로 이것들이 없는 사람은 눈이 멀고 가까운 것밖에 보지 못하며, 자기가 지난 죄에서 깨끗해진 것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베드로후서 1:9 · 본디새김

눈이 멀었다는 말과 가까운 것밖에 보지 못한다는 말이 겹쳐 영적 인식의 결핍을 표현합니다. 그런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은 미래의 영광도,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자기가 지난 죄에서 깨끗해진 것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삶의 열매가 사라지는 이유를 베드로는 자신의 구원 경험에 대한 망각에서 찾습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의 변화가 더 강한 결심이나 더 많은 훈련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도 노력을 요구하지만, 그 노력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다시 보여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깨끗해진 사람이 그 은혜를 잊으면, 다시 자신을 중심에 놓기 쉽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지 잊은 채 자신의 욕망이나 성취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10절에서 베드로는 부르심과 뽑히심을 굳게 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부르시고 뽑으셨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것을 굳게 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사람의 선행이 하나님의 선택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셨다는 사실은 3절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갈 때, 자신이 받은 부르심이 삶 속에서 확고해집니다.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이것들을 행하면」이라는 조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신자가 다시는 어떤 죄도 짓지 않는다는 무조건적인 보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말한 덕목들을 실천하며 믿음 안에 굳게 서는 삶이 넘어짐을 막는 길이라는 권면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길이 여러분에게 넉넉히 마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1:11 · 본디새김

5절의 「덕을 대어 주십시오」(ἐπιχορηγέω)와 11절의 「넉넉히 마련될 것」에는 필요한 것을 공급하거나 넉넉히 제공한다는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5절에서는 여러분이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하고, 11절에서는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길이 여러분에게 넉넉히 공급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반복은 앞의 명령과 뒤의 약속을 하나로 묶습니다.

은혜로 시작된 삶은 인간의 응답을 통과하여 또다시 은혜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신앙의 노력은 자신의 힘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작업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나라를 향해 걷는 삶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깨끗해진 것」을 세례와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세례와 죄의 씻음이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2:16). 다만 이 구절 자체는 세례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그 연결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5절과 11절에 쓰인 동사는 에피코레게오이며, 11절에서는 수동형으로 쓰입니다.

떠날 사람의 마지막 관심

베드로후서 1:12–15 본문 →

12절에서 편지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나」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이것들을 알고 있고 이미 여러분 곁에 있는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다 하더라도, 늘 여러분에게 이것들을 되새겨 주려 합니다.베드로후서 1:12 · 본디새김

그들은 이미 알고 있고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는데도, 계속 되새겨 주어야 합니다. 9절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경계하는 위험은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되새김은 알고 있는 진리가 삶에서 힘을 잃지 않도록 일깨우는 일입니다.

13절의 「내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에서 장막은 화자 자신의 현재 몸과 생명을 가리킵니다. 장막은 언젠가 거두어지는 거처이므로, 14절의 「내 장막을 벗을 날」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자신의 업적이나 명성을 정리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사람들을 일깨워야 할 이유로 삼습니다.

14절은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자신에게 밝혀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21:18–19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죽음을 암시하신 사건과 연결하는 전통적인 해석이 있지만, 베드로후서 자체는 언제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여러분이 이것들을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베드로후서 1:15 · 본디새김

「떠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엑소도스(ἔξοδος)는 떠남이나 나감을 뜻하며, 출애굽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죽음에 붙인 이름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존재를 계속 기억하라고 부탁하지 않습니다. 그가 남기려 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받은 것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편지 자체도 그런 목적을 수행하는 하나의 증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전하는 말을 계속 기억해야 할까요? 그의 가르침이 다른 이야기보다 더 신뢰할 만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고 말하는 사건을 꺼냅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9:31에서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이야기하실 때에도 같은 단어가 등장하며, 그곳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그에 이어질 일을 가리킵니다. 베드로후서 1장 역시 곧이어 산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두 표현 사이에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이 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같은 단어가 두 본문에서 나타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 산에서 베드로가 가장 중요하게 들은 것

베드로후서 1:16–18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교묘하게 꾸며 낸 이야기를 좇아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오심을 알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엄을 두 눈으로 본 사람으로서 알렸습니다.베드로후서 1:16 · 본디새김

「오심」은 일반적으로 도착이나 현존을 뜻하지만, 이 편지에서는 예수님의 장래의 오심을 가리킵니다. 3:4에서는 바로 이 오심에 대한 약속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등장합니다. 장래에 일어날 예수님의 오심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위엄을 직접 보았다고 대답합니다.

그가 회상하는 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진 사건입니다.

관련 본문: 마태복음 17:1–8 · 마가복음 9:2–8 · 누가복음 9:28–36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빛나는 모습,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 제자들의 반응을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고 기록합니다(마태복음 17:2).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그 장면을 길게 묘사하지 않고 한 가지에 집중합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입니다.

실제로 저 크신 영광이 그분에게 이런 소리를 전하셨을 때에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은 이 사람이다. 내가 그를 두고 기뻐했다.」베드로후서 1:17 · 본디새김

베드로가 증언하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놀라운 빛이 나왔다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말하려 합니다.

그 음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분임을 선언합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신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음성이 온 곳을 「저 크신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도, 앞에서 이미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밝혔으므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의 장래의 오심은 전혀 새로운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드러나신 바로 예수님의 영광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산 위의 사건은 장래의 오심을 미리 비추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산 위에서 미래의 오심 전체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위엄이 드러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선언하셨다는 그 경험이, 장래의 능력과 오심을 전하는 증언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베드로는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이른 이 소리를 우리 자신이 들었습니다」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자기 경험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자신들의 가르침이 교묘하게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산에 있지 않았습니다.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 무엇을 의지해야 할까요?

베드로는 이제 독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산 위의 음성에는 구약의 두 흐름이 함께 떠오릅니다. 시편 2편은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신 왕과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말하며, 본래 왕권을 선포하는 시편으로 읽을 수 있는 이 본문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왕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사도행전 13:33, 히브리서 1:5). 이사야 42:1은 하나님이 붙드시는 종, 기뻐하시는 이를 소개하며, 본래 여호와야훼의 종이 수행할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산 위의 음성은 이 본문들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지만, 왕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종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등불

베드로후서 1:19–21 본문 →

그리고 우리에게는 더욱 굳건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등불과 같은 그 말씀에,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이 마음을 두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베드로후서 1:19 · 본디새김

「더욱 굳건한」이라는 비교급은 무엇과 비교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가지 읽기는 예언의 말씀이 사도들의 개인적인 목격 경험보다 더 확실한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산 위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한 사건으로 인해 구약 예언이 가리키던 구원과 왕권이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고 있음이 드러나,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읽기 모두 문맥과 연결할 수 있고, 원문이 비교의 기준을 명시하지 않아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본문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산 위의 경험을 이야기한 뒤 독자들에게 새로운 환상을 추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예언의 말씀에 마음을 두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은 등불입니다.

등불은 어둠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지만, 어둠 속에서 걸어갈 길을 보여 줍니다. 등불이 켜졌다고 해서 밤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독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믿지만, 아직 그 영광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드러난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약속을 받았지만, 모든 약속의 완성을 이미 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에는 기다림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등불을 의지해야 하지만, 언젠가는 날이 밝을 것입니다. 샛별은 새벽에 나타나는 별로, 밤이 끝나고 아침이 다가온다는 이미지입니다. 이를 예수님의 장래의 오심과 연결하는 읽기와, 예수님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내적인 조명이나 확신으로 보는 읽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미지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아직 완전히 밝지 않은 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사람을 어둠 속에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믿을 만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먼저 성경의 예언은 어느 것도 제 나름의 풀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베드로후서 1:20 · 본디새김
예언은 한 번도 사람의 뜻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룩한 영에 이끌려 하나님에게서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1:21 · 본디새김

20절의 「제 나름의 풀이」는 성경을 개인이 스스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1절은 예언이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20절의 핵심도 독자의 해석 방식보다,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예언의 출처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모든 개인적 성경 연구나 해석의 시도 자체를 금지하는 규칙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직접적인 논증을 넘어섭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영에 이끌려 하나님에게서 받아 말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말하는 행위를 지우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 말씀이 인간의 뜻만으로 생겨났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께 「전해졌을 때」(φέρω), 18절에서 하늘에서 음성이 「이른」 사건, 21절에서 예언이 「전해진」 사건과 「이끌려」에는 모두 옮기다·전하다라는 같은 동사 계열이 쓰입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전해졌습니다.

예언자들은 거룩한 영에 이끌려 하나님에게서 받아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두 증언을 통해 독자들을 같은 대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인간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예수님입니다. 그 말씀을 신뢰할 이유도 인간의 영리함이나 종교적 상상력이 아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등불 이미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을 비추는 등불과 길의 빛으로 묘사하는 시편 119:105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지혜를 말하고, 베드로후서는 예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을 말합니다. 직접적인 인용이라기보다 말씀의 빛이라는 이미지를 공유하는 연결입니다. 「샛별」(포스포로스)을 장래의 오심으로 읽는 근거는 편지 전체가 예수님의 오심과 약속의 성취에 관심을 두고 있고 19절도 날이 밝아 올 때를 기다린다는 점이며, 내적인 조명으로 읽는 근거는 「여러분의 마음에」라는 표현입니다. 두 읽기는 반드시 서로 배척하지 않지만, 본문이 장래의 완성과 마음속 깨달음의 관계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하나만을 유일한 의미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가 샛별이 떠오르는 일에만 연결되는지, 날이 밝는 일까지 함께 수식하는지도 문법적으로 논의될 수 있습니다. 17–21절의 동사 계열은 그리스어 페로입니다. 이 반복이 의도적인 문학적 장치인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전해지는 방식이 일관된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기억하는 믿음, 빛을 따라가는 삶

베드로후서 1:1–21 본문 →

베드로후서 1장은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일과 그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살아갈 삶을, 예수님을 깨달아 아는 일로 잇습니다. 덕목을 더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선물이 삶에서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이고, 그 앎은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한 증언과 하나님에게서 온 예언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베드로가 하려는 일은 새로운 교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난 죄에서 깨끗해진 것을 잊지 않도록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되새겨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장은 마지막에 사도의 얼굴이 아니라 등불 하나를 남깁니다.

산 위에서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은 이제 독자들에게 그들의 손에 있는 예언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가 직접 보았던 영광을 그들도 똑같이 보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말씀에 마음을 두라고 권합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습니다. 아직 샛별이 떠오르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는 이미 등불이 비치고 있습니다.

그 등불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들을 남겨 놓은 채, 베드로는 자신이 장막을 벗을 날이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