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왕의 잘못과 그 뒤
아무도 듣지 않은 다말의 말
사무엘하 13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옳고 그름을 말하는 사람은 왕도, 왕자도, 왕의 조언자도 아닙니다. 폭력의 위협 앞에 놓인 다말입니다.
다말은 자신에게 닥친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잘못인지 설명할 수 있고, 그 행동이 자신과 암논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말합니다.
그러나 암논은 듣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비극은 아무도 옳은 말을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옳은 말이 분명히 들렸는데도, 그것을 따라 행동해야 할 사람들이 외면했다는 데 있습니다.
왕궁에는 그렇게 많은 권력자가 있었는데, 왜 가장 먼저 보호받았어야 할 사람이 보호받지 못했습니까?
사랑이라고 불린 욕망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었는데, 이름은 다말이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녀를 사랑했다.사무엘하 13:1 · 본디새김
그녀는 압살롬의 누이이며, 다윗의 딸입니다. 암논도 다윗의 아들입니다. 사무엘하 3:2–3에 따르면 암논은 다윗의 맏아들이고, 압살롬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에게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암논과 다말은 아버지가 같은 이복남매입니다.
이 가족관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앞으로 암논이 저지를 폭력이 왕궁 바깥의 적에게서가 아니라 같은 가족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행동을 통해 그 사랑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암논은 자기 누이 다말 때문에 병이 날 만큼 괴로워했다. 다말이 처녀였으므로, 암논은 그녀에게 무슨 일을 하기가 어렵다고 여겼다.사무엘하 13:2 · 본디새김
암논의 괴로움은 다말이 겪는 어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왕의 미혼 딸에게 접근하는 데에는 가족과 왕실의 보호 및 사회적 제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다말의 정결함이 암논을 유혹했다는 뜻으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행동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논의 관심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그의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보여 주지만, 감정의 강렬함이 그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영리하지만 지혜롭지 않은 사람
암논에게는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다윗의 형제 시므아의 아들이었다. 요나답은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다.사무엘하 13:3 · 본디새김
요나답은 다윗의 조카이며 암논의 사촌입니다. 그는 암논이 아침마다 수척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유를 묻습니다.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요나답은 이 말을 듣고 암논의 감정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다말의 처지를 고려하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암논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여호나답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 침상에 누워 병든 척하게. 자네 아버지가 보러 오면 이렇게 말씀드리게. 『제 누이 다말이 와서 제게 빵을 먹이게 해 주십시오. 제가 볼 수 있도록 제 눈앞에서 음식을 만들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말의 손에서 받아먹겠습니다.』」사무엘하 13:5 · 본디새김
이 계획은 아버지의 애정과 누이의 돌봄을 이용합니다.
다윗은 병든 아들을 돌보려 할 것이고, 다말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오라비에게 음식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정상적인 가족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행동들이 암논의 욕망을 위한 통로로 바뀝니다.
구약에서 ‘지혜롭다’는 말은 좋은 판단력을 나타낼 수 있지만, 실제 문맥에 따라 교활한 능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요나답은 상황을 파악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도록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무엇을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아는 것과,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판단하는 것은 다른 능력입니다.
요나답은 전자에는 능숙하지만 후자에서는 실패합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암논의 강간을 구체적으로 계획했다고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암논의 욕망을 알고도 다말을 혼자 접근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암논은 그 계획을 실행합니다.
다윗은 집에 있는 다말에게 전갈을 보냈다. 「네 오라비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음식을 좀 만들어 주어라.」사무엘하 13:7 · 본디새김
그는 다말을 위험에 빠뜨리려고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병든 아들을 돌보게 하려 했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명령이 다말을 암논에게 보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다말은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오라비의 집으로 갑니다. 그녀가 위험을 예상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여기서 가족 안의 권위가 가진 책임이 드러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의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그가 내린 명령의 결과까지 반드시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돌봄을 위해 들어온 방에서 일어난 폭력
다말은 암논의 집에 도착하여 음식을 만듭니다.
다말이 오라비 암논의 집으로 가니, 그는 누워 있었다. 다말은 반죽을 가져다가 주무르고 그의 눈앞에서 빵을 빚어 익혔다.사무엘하 13:8 · 본디새김
다말은 아버지가 명령한 일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이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는 이유는, 암논이 그 모든 돌봄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가 그릇을 가져다가 그 안의 것을 그의 앞에 쏟아 놓았으나, 그는 먹기를 거절했다. 암논이 말했다. 「모두 내 곁에서 내보내라.」 그러자 모두 그의 곁에서 나갔다.사무엘하 13:9 · 본디새김
이 명령으로 암논을 지켜보거나 다말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방에서 사라집니다. 그런 다음 암논은 다말에게 음식을 안방으로 가져오라고 요구합니다. 다말은 다시 그의 요구에 따릅니다.
그러나 암논이 원한 것은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암논이 먹도록 다말이 음식을 가까이 가져가자, 그가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 「이리 와서 나와 동침하자, 내 누이야.」사무엘하 13:11 · 본디새김
암논은 다말이 자기 누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직접 그렇게 부릅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동침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서로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의 만남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붙잡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다말은 분명하게 거절합니다.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안 돼요, 오라버니. 저를 강간하지 마세요. 이스라엘에서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 마세요.」사무엘하 13:12 · 본디새김
이것은 모호한 반응이 아닙니다. 다말은 암논의 행동을 원하지 않으며, 그 행동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 행동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악이라고 선언합니다.
다말은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말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치욕을 안고 어디로 가겠어요? 오라버니도 이스라엘의 파렴치한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될 거예요. 그러니 이제 왕께 말씀드려 보세요. 왕께서는 저를 오라버니에게 주기를 거절하지 않으실 거예요.」사무엘하 13:13 · 본디새김
여기서 다말은 단순히 사회적 평판만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의 자리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당시 혼인과 가족관계는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와 깊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왕실의 미혼 딸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치가 본래 다말의 잘못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암논입니다. 다말은 그 행동 때문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녀가 암논의 행동을 막기 위해 계속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암논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힘으로 제압하고 강간하여 그녀와 동침했다.사무엘하 13:14 · 본디새김
그가 다말보다 힘이 강했다는 설명은 그녀에게 동의할 자유가 없었음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오늘 이 본문을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다말에게 왜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분명하게 거절했고, 암논은 힘으로 그녀를 제압했습니다.
이 사건의 책임은 암논에게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34:7에서도 세겜이 디나를 성폭행한 사건과 관련하여 같은 말이 등장합니다. 사사기 19:23에서도 심각한 성폭력의 위협을 두고 이 ‘파렴치한 짓’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레위기 18:9와 20:17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같은 남매 사이의 성관계를 금합니다. 따라서 다말의 말을 근거로 당시 이스라엘에서 이복남매의 혼인이 율법상 허용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말은 절박한 상황에서 암논을 멈추게 할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폭력을 피하기 위해 왕에게 문제를 가져가자고 제안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가 실제로 암논과 결혼하기를 원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녀의 말은 레위기 18장의 성관계 규범과, 약한 사람을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는 구약의 정의의 요구에 부합합니다.
사랑보다 더 커진 미움, 그리고 잠긴 문
폭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암논은 다말을 몹시 미워하게 되었다. 그가 다말을 미워하는 마음은 전에 다말을 사랑하던 마음보다 더 컸다. 암논이 그녀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가라.」사무엘하 13:15 · 본디새김
다말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에도 그는 그녀의 뜻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욕망을 실행한 뒤에는 그녀를 곁에 두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감정은 달라졌지만, 자기 욕망에 따라 다말을 움직이려는 태도는 그대로입니다.
두 번째로 거절당한 다말의 말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안 돼요. 저를 쫓아내는 이 악한 일은 앞서 제게 하신 일보다 더 큰 악이에요.」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사무엘하 13:16 · 본디새김
이것을 다말이 강간의 심각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조금 전에 그 행동을 ‘파렴치한 짓’이라고 분명히 규정했습니다.
그녀가 당한 일은 이미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녀를 집 밖으로 내쫓아, 그 일을 당한 사람이 홀로 그 결과를 감당하도록 만들려 합니다.
그러므로 다말의 말은 암논에게 지금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는 호소로 읽을 수 있습니다.
14절과 16절에는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듣지 않았을 때 강간이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로 듣지 않았을 때 다말은 쫓겨났습니다.
이 반복은 암논의 잘못이 순간적인 충동 하나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다말이 거절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 자신의 뜻만 실행했습니다.
다말에게 닫힌 문
암논은 이제 시종을 부릅니다.
그는 자기를 시중드는 하인을 불러 말했다. 「너희는 이 여자를 내 곁에서 밖으로 좀 내보내라. 너는 그 여자가 나간 뒤에 문을 잠가라.」사무엘하 13:17 · 본디새김
앞에서는 ‘내 누이야’라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이 여자’라고 부릅니다. 적어도 앞에서 사용한 가족의 호칭은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암논이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고 다말을 안쪽 방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이제는 다말을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급니다. 두 장면 모두 암논이 공간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통제합니다.
다말은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암논에게는 명령을 실행할 시종이 있습니다. 이렇게 폭력은 암논의 개인적인 힘에 그치지 않고 그의 집에서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통해 완성됩니다.
다말은 긴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처녀인 왕의 딸들은 이런 겉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암논의 시종이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고, 그녀가 나간 뒤에 문을 잠갔다.사무엘하 13:18 · 본디새김
다말의 경우 그 옷은 왕의 딸로서 지닌 지위를 나타내지만, 바로 그 왕가 안에서 폭력을 당합니다.
그리고 다말은 그 옷을 찢습니다.
다말은 재를 가져다가 자기 머리에 얹고, 입고 있던 긴소매 옷을 찢었다. 그녀는 머리에 손을 얹고 걸어가며 계속 울부짖었다.사무엘하 13:19 · 본디새김
재를 머리에 얹고 옷을 찢는 행동은 구약에서 극심한 슬픔과 재난을 표현할 때 나타납니다. 이 장에서 그녀가 울부짖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는 식의 해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말의 목소리는 폭력 앞에서도 분명했습니다. 그 목소리를 무시한 사람들이 문제였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암논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다말에게 돌렸을 수도 있고, 욕망을 충족한 뒤 다말을 더 이상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설명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옷의 정확한 모양은 분명하지 않지만, 본디새김은 손과 발을 가리키는 말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긴소매 옷’으로 옮겼습니다. 요셉의 경우 그 옷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과 연결되지만, 형제들의 적대 속에서 벗겨집니다. 두 본문이 의도적으로 서로를 암시하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특별한 옷이 가족 내부의 폭력과 연결된다는 점은 인상적입니다.
잠잠히 있으라는 오라비와 화만 내는 아버지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이 그녀에게 말을 겁니다.
그녀의 오라비 압살롬이 그녀에게 말했다. 「네 오라비 아미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내 누이야, 이제 잠잠히 있어라. 그는 네 오라비다. 이 일을 마음에 두지 마라.」 다말은 처참한 처지가 되어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서 지냈다.사무엘하 13:20 · 본디새김
압살롬은 다말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합니다. 따라서 그가 다말을 완전히 외면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말에게 침묵을 요구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말이 공개적으로 더 큰 수치를 겪지 않도록 보호하려 했을 수도 있고, 가문의 일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으며, 자신이 복수할 계획을 세우는 동안 사건을 조용히 두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말의 삶이 마치 황폐해진 장소처럼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녀의 삶을 지탱하던 관계와 미래의 가능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압살롬의 집은 그녀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곳에 머무는 것만으로 그녀가 겪은 피해가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아버지 다윗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다윗 왕은 이 모든 일을 듣고 몹시 화가 났다.사무엘하 13:21 · 본디새김
구체적인 처벌이나 피해 회복을 위한 행동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이 침묵한다고 해서 다윗이 사적으로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에서 확인되는 것은 왕의 분노이며, 그에 뒤따르는 사법적 조치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왕은 단순히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에게 일어난 불의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책임을 묻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이 사건은 왕궁 안에서 일어났으며,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왕의 자녀입니다. 왕의 아들이 가해자라는 이유로 사건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버지로서의 감정과 왕으로서의 공정한 판단을 구분해야 합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8:15에서 자기 백성 모두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왕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장 가까운 가족 안에서 심각한 불의가 일어났을 때, 그 정의와 공의가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윗의 분노만을 전한 뒤 곧바로 압살롬에게 시선을 옮깁니다.
압살롬은 암논에게 나쁜 말도 좋은 말도 하지 않았다. 암논이 자기 누이 다말을 강간한 일 때문에 압살롬은 그를 미워했다.사무엘하 13:22 · 본디새김
여기서 침묵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다말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했던 압살롬 자신도 암논에게 아무 말 없이 지냅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다말의 사건을 잊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말이 겪은 피해가 공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기록은 없는 가운데, 압살롬의 미움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미움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지는 두 해가 지난 뒤에야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 사무엘하 13:21에는 다윗이 암논을 사랑했고, 그가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암논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더 들어 있습니다. 이는 본디새김이 따른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맏아들을 편애하여 처벌하지 않았다는 해석은 이 고대 번역 전승의 뒷받침을 받지만, 현재의 히브리어 본문 자체가 그 이유를 명시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말씀하시거나 행동하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단과 같은 예언자가 등장하여 사건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이유를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말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기도를 기록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을 하나님께서 다말의 고통에 관심이 없으셨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꼬박 두 해 — 침묵이 살인 계획으로 바뀌다
꼬박 두 해가 지났을 때, 에브라임 곁의 바알하솔에서 사람들이 압살롬의 양털을 깎고 있었다. 압살롬은 왕의 아들들을 모두 초대했다.사무엘하 13:23 · 본디새김
‘꼬박 두 해’라는 표현은 단순한 날짜 정보가 아닙니다. 앞에서 압살롬이 암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그 침묵은 짧은 분노의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그동안 다말이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암논이 반성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사건을 해결했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양털 깎기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수확의 성과를 나누며 잔치를 벌일 수 있는 중요한 계절 행사였습니다. 사무엘상 25:2–8에서도 양털을 깎는 때가 손님을 대접하고 음식을 나누는 시기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왕의 아들들을 초대하는 행동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의 미움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다시 아들을 보낸다
압살롬은 먼저 다윗에게 직접 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은 거절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다시 부탁합니다.
압살롬이 말했다. 「그러지 않으시겠다면 제 형제 암논이라도 저희와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왕이 그에게 말했다. 「그가 왜 너와 함께 가야 하느냐?」사무엘하 13:26 · 본디새김
앞서 암논이 다말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다윗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압살롬이 암논을 보내 달라고 하자 다윗은 이유를 묻습니다.
압살롬이 왕에게 거듭 조르자, 왕은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보냈다.사무엘하 13:27 · 본디새김
두 경우 모두 아버지의 권위가 자녀를 다른 사람의 계획 속으로 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은 두 사건 모두에서 자신의 명령이 폭력에 이용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그 요청을 한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왕궁 안의 신뢰가 어떻게 악용되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족의 요청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행사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위험한 계획이 실행될 수 있었습니다.
용기를 요구하는 살인 명령
압살롬이 자기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잘 보아라. 암논이 포도주로 마음이 즐거워졌을 때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쳐라.』 하고 말하거든, 그를 죽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에게 명령한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니냐? 굳세어라. 용맹한 사람들이 되어라.」사무엘하 13:28 · 본디새김
앞서 사무엘하 10:12에서 요압은 아비새에게 백성과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해 힘을 내자고 말했습니다. 요압은 적군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동료들과 서로를 구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자기 형제를 살해하라고 명령하면서 용기를 요구합니다.
용기는 그 자체로 선한 덕목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용기를 내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인들은 명령대로 행동합니다.
암논은 죽고, 다른 왕자들은 달아납니다.
압살롬이 자기 누이에게 가해진 악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식은 정당한 재판이나 피해 회복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이었습니다.
암논의 강간은 악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압살롬이 그를 살해한 행동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도 압살롬에게 다말을 위한 정의를 집행하라는 여호와야훼의 명령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왕궁에는 또 다른 죽음이 찾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우리야가 죽도록 지시했습니다. 압살롬은 잔치 자리에서 암논을 죽이도록 지시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기보다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살인을 실행합니다. 왕이 사용했던 권력의 방식이 그의 아들들의 행동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버지의 행동을 직접 보고 배웠다고 본문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칼이 그의 집안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사무엘하 12:10). 나단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과, 압살롬의 살인이 정당하다는 판단은 전혀 다릅니다. 다윗의 집안에 폭력이 일어나리라는 예언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여도 된다는 명령도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습니다.
너무 빨리 소식을 해석하는 사람
왕자들이 달아나는 동안 예루살렘에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들이 아직 길에 있을 때 다윗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압살롬이 왕의 아들들을 모두 쳐 죽여서, 그들 가운데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사무엘하 13:30 · 본디새김
소식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암논만 죽었는데 모든 왕자가 죽었다고 전해진 것입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옷을 찢고 땅에 눕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요나답이 다시 등장합니다.
다윗의 형제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나서서 말했다. 「제 주인께서는 『그들이 왕의 아들인 젊은이들을 모두 죽였다.』 하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암논만 죽었습니다. 이 일은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날부터 압살롬의 뜻에 따라 정해져 있었습니다.」사무엘하 13:32 · 본디새김
이 장의 앞부분에서 요나답은 암논에게 계략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암논의 욕망을 실현할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암논의 죽음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가 압살롬에게서 직접 계획을 들었는지, 압살롬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알아차렸는지, 사건이 발생한 뒤 그 동기를 해석하여 말하는 것인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살인 계획에 가담했다거나 모든 것을 미리 알고 방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요나답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읽는 데 능숙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그의 영리함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특히 요나답의 말에서 다말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게 된 이유로 등장합니다. 다말의 피해가 사건을 설명하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요나답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모든 관심은 암논의 죽음과 살아남은 왕자들에게 쏠립니다.
다말의 처지는 다시 이야기의 뒤편으로 물러납니다.
두 해의 침묵과 세 해의 도피
요나답의 말이 끝나자 살아남은 왕자들이 돌아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왕의 아들들이 도착하여 소리를 높여 울었다. 왕과 그의 모든 신하도 아주 크게 통곡했다.사무엘하 13:36 · 본디새김
다말이 울부짖었을 때에는 왕궁 사람들이 함께 울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암논이 죽자 왕과 신하들이 함께 통곡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다윗이 다말의 고통을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의 모든 감정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말의 울부짖음은 그녀 자신의 행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반면 암논의 죽음은 왕궁 전체가 참여하는 애도의 사건이 됩니다. 이 차이는 왕가 안에서 누구의 고통이 공적으로 드러나고, 누구의 고통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압살롬이 향한 곳
압살롬은 도망쳐 그술 왕 암미훗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다. 다윗은 날마다 자기 아들을 두고 슬퍼했다.사무엘하 13:37 · 본디새김
그술은 이스라엘 북동쪽 지역에 있었던 왕국으로, 다윗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3:3에 따르면 압살롬의 어머니 마아가는 그술 왕 달매의 딸입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도망친 곳은 어머니의 친정 왕실입니다.
압살롬에게는 어머니 쪽의 왕실 관계가 있었고, 그는 그 관계를 통해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그곳에서 세 해 동안 머뭅니다.
앞에서는 다말이 강간당한 뒤 두 해가 지나 암논이 죽었습니다. 이제는 압살롬이 도망친 뒤 세 해가 지납니다.
시간이 계속 흐릅니다.
그러나 가족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어디를 향했는가
마지막 절은 해석이 갈립니다.
다윗 왕은 압살롬을 향해 나가기를 그쳤다. 암논의 죽음을 두고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3:39 · 본디새김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을 추격하거나 그에게 조치를 취하려던 움직임을 그만두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움직임이 압살롬을 처벌하려는 것이었는지, 만나려는 것이었는지는 본문에 직접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여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다윗이 암논의 죽음을 두고 시간이 지나며 위로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압살롬과의 관계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히브리어 문장의 주어와 동사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사 바테칼(כָּלָה)은 여성 단수형인데, 뒤에 나오는 다윗 왕은 남성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마음’처럼 생략된 주어를 보충하여 읽는 해석과, 동사를 ‘그치다’라는 뜻으로 읽는 해석이 나뉩니다.
이야기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사람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판단은 이미 다말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분명히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도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사람, 그 사람을 도와주는 영리한 조언자, 피해자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가족, 분노하면서도 책임 있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권력자가 한 이야기 안에 등장합니다. 다윗의 집안에서 다말이 보호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가족 불화가 아니라 왕권의 실패를 보여 줍니다.
다말은 자기 삶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녀의 피해는 다른 남자들의 갈등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만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다는 사실이 다말의 피해를 회복시켰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윗이 암논의 죽음으로 슬퍼했다는 사실이 다말의 고통을 대신 설명해 주지도 않습니다.
사무엘하 13장은 이 비극을 해결된 이야기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암논은 죽었고 압살롬은 멀리 그술에 있습니다. 왕궁에는 통곡이 있었지만, 다말에게 어떤 정의가 이루어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장을 읽고 마지막에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암논이 죽은 잔치 자리보다, 그보다 오래전에 다말이 걸어 나오던 길입니다.
다말은 재를 머리에 얹고 왕의 딸이 입던 긴소매 옷을 찢었습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계속 울부짖었습니다.
그녀의 뒤에서는 문이 잠겼습니다.
그러나 문을 잠근다고 해서 그 안에서 일어난 악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말의 찢어진 옷과 울부짖음은 왕궁에서 보호받지 못한 한 사람의 삶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하 13장은 그 목소리에 응답하지 못한 왕가의 비극을 남긴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