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사도행전 15장은 초대 교회가 이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여러 도시에서 이방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영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을 받아들이셨다는 증거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에서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이미 받아들이신 사람들을 교회가 어떤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가장 놀라운 말은 베드로의 입에서 나옵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15:11) 이방 사람들이 유대 사람들처럼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들인 우리가 이방 사람들과 똑같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한 문장의 순서가 뒤집히면서, 논쟁의 중심도 뒤집힙니다.

그리고 이 장은 또 다른 뜻밖의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방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하나가 된 바울과 바나바가 정작 동역자를 받아들이는 문제에서는 서로 갈라섭니다.

누가는 이 두 장면을 한 장 안에 남겨 놓았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여전히 서로 부딪칠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15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받아들이신 사람에게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인가

사도행전 15:1–5 본문 →

안디옥에 유대에서 내려온 몇 사람이 도착합니다.

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쳤다. 「모세의 관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너희는 구원받을 수 없다.」사도행전 15:1 · 본디새김

문제의 핵심은 ‘할례’만이 아니라 마지막의 「구원받을 수 없다」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에게 낯선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7:9–14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셨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몸에 그 표징을 지니며 자신들이 언약 백성에 속한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문제는 그 표징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이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 가운데 믿게 된 몇 사람이 일어나, 이방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해야 한다고 말했다.사도행전 15:5 · 본디새김

이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성경과 언약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제 이방 사람들도 그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그들 역시 언약의 표징을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도행전이 던지는 질문은 더 근본적입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을 받아들이실 때 실제로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하고, 안디옥 교회는 그들을 예루살렘에 보냅니다. 두 사람이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지나며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곳의 형제들은 크게 기뻐합니다. 같은 소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이룬 성과를 보고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행한 모든 일을 알렸다.사도행전 15:4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앞선 선교 여행의 마무리에서도 나타났습니다(14:27). 누가는 하나님의 행동을 이야기의 앞자리에 놓습니다.

논쟁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지만, 판단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있습니다.

베드로의 증언 —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이미 깨끗하게 하셨다

사도행전 15:6–11 본문 →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였지만 곧바로 합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누가는 「많은 논쟁이 있은 뒤에」 베드로가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 제시하지 않고, 이방 사람들이 자신의 입을 통해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되짚습니다.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거룩한 영을 주셔서 그들을 두고 증언하셨습니다.」사도행전 15:8 · 본디새김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거룩한 영이 말씀을 듣는 이방 사람들에게 내려왔습니다(10:44–48). 그들은 먼저 할례를 받거나 모세의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을 주셨고, 베드로는 이것을 하나님 자신의 증언으로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표징을 보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구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낱말이 등장하는 다른 자리는 1:24입니다.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울 때 공동체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 누구를 택하셨는지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사람이 겉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제시하는 증거는 이방 사람들의 문화적 적응이나 종교적 열심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거룩한 영을 주셨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두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5:9 · 본디새김

여기에는 고넬료 이야기에서 시작된 두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구별도 두지 않으시고」(διακρίνω)는 가르다, 차별하여 판단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베드로가 이방 사람들의 집에 가기를 주저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영은 그에게 사람들을 가리지 말고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20; 11:12). 당시 베드로는 그 까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구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은 10:15의 선언,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마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환상은 음식의 정결과 부정에 관한 문제처럼 보였지만, 베드로는 그것을 사람을 대하는 문제와 연결하여 이해했습니다(10:28). 15장에서는 이 연결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은 이방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할례와 같은 외적인 표징으로 그들의 자격을 심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9절이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의 모든 문화적 차이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부정하는 구별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구원받는 일에서의 구별입니다.

짊어질 수 없었던 멍에

「그러니 이제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짊어질 수 없었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얹어 하나님을 시험합니까?」사도행전 15:10 · 본디새김

율법을 멍에라고 부른다고 해서, 베드로가 율법 자체를 악한 것으로 선언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기꺼이 짊어지는 멍에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가 문제 삼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이방 제자들의 구원에 필요한 조건으로 부과하려는 일입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고까지 불릴 만큼 심각합니까? 하나님이 이미 그들에게 거룩한 영을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는데, 사람들은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문제는 무거운 의무를 지우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신 판단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느냐가 됩니다.

그리고 11절에서 베드로는 논쟁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행전 15:11 · 본디새김

처음에 제기된 질문은 이방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느냐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방 사람들이 유대 사람들과 같아져야 한다고 답하지 않고, 유대 사람들 자신도 이방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들에게 주어진 언약과 율법의 역사를 지우는 말이 아닙니다. 그 모든 역사를 지닌 사람들조차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주 예수님의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이방 사람들에게 예외를 허락하자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사람 자신들이 누구의 은혜로 살아가는지를 다시 고백했습니다.

야고보의 해석 — 무너진 다윗의 장막에서 모든 민족으로

사도행전 15:12–18 본문 →

베드로가 말을 마치자 온 무리가 잠잠해집니다. 그 침묵 속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신들을 통해 이방 사람들 가운데 행하신 표징과 놀라운 일을 이야기합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 다른 이방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험만으로 논쟁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가 일어나 예언자들의 말을 가져옵니다.

「시므온이 낱낱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이름을 위한 백성을 취하려고 처음으로 찾아오신 일입니다.」사도행전 15:14 · 본디새김

여기서 「백성」은 흔히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킬 때 사용되던 말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외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속한 백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야고보가 인용하는 예언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이 뒤에 내가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겠다. 헐린 자리를 다시 세우고 그것을 바로 일으키겠다.』」사도행전 15:16 · 본디새김

아모스 9:11–12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불의와 우상 숭배를 책망하며 심판을 선포했지만, 책의 마지막에서는 심판 이후의 회복을 약속합니다. 다윗의 장막은 궁전이 아닙니다. 장막이라는 초라하고 허약한 이미지로 표현된 다윗 왕조의 처지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시고, 다윗의 집과 관련된 약속을 회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가운데 남은 이들과, 내 이름이 붙여진 모든 민족이 주를 찾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을 하는 주가 말한다.』」사도행전 15:17 · 본디새김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시는 목적이 여러 민족이 주를 찾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히브리어 아모스 본문은 이 회복을 에돔과 여러 민족에 대한 통치로 그리지만, 야고보가 인용하는 그리스어 형태는 여러 민족이 주를 찾는 모습을 전면에 둡니다.

야고보는 이 예언을 ‘먼 훗날 이방 사람들도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예언으로만 가져오지 않습니다. 다윗의 장막이 회복된다는 약속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약속을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장막은 어떻게 다시 세워지고 있습니까? 야고보는 이 구절에서 상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사도행전의 앞선 설교들이 방향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예수님의 부활과 높아지심에 연결했습니다(2:30–36). 바울도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예수님을 구원자로 세우셨다고 선포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와 연결했습니다(13:22–23, 32–37).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일은 이스라엘의 경계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방 선교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난 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회복이 예상보다 넓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행동을 증언했다면, 야고보는 그 행동이 예언자들의 말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아모스 9:12는 다윗 왕조가 「에돔의 남은 자」를 차지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고대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에돔」이 「사람들」로, 「차지하다」가 「찾다」로 달라지고, 사도행전은 이 그리스어 전통을 따르면서 「주」라는 목적어까지 명시합니다. 그렇다고 야고보의 논증 전체가 이 번역 차이에만 의존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두 형태 모두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된 여러 민족을 언급하며, 사도행전의 인용 형태는 지금 일어나는 이방 사람들의 회심을 더 직접적으로 설명해 줄 뿐입니다. 더 넓게 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처음부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고(창세기 12:3), 하나님의 종은 민족들에게 구원을 알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이사야 49:6). 사도행전 15장은 이러한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되지만 같은 말의 반복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선물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그 약속이 어떻게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미치는지를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구원에 조건을 더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다

사도행전 15:19–21 본문 →

야고보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이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사도행전 15:19 · 본디새김

「번거롭게 하지 말고」는 가볍게 들릴 수 있지만, 이미 하나님께 돌아서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자격을 입증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을 지우지 말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야고보는 네 가지를 삼가라고 권합니다.

「그 대신 그들에게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것과 음행과 목 졸라 죽인 것과 피를 삼가라는 글을 보내자는 것입니다.」사도행전 15:20 · 본디새김

할례와 율법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왜 다시 네 가지 금지 사항을 제시합니까? 이것들도 구원받기 위한 조건 아닙니까?

본문의 배열을 보면, 야고보는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을 방해하지 말자고 말한 뒤 이 네 가지를 제시합니다. 편지에서도 이것들을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네 가지를 구원의 또 다른 조건으로 읽으면 베드로의 증언과 야고보의 결론이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규정들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여기에는 크게 두 방향의 해석이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정인가, 우상 숭배와 단절하기 위한 규정인가

한 해석은 레위기 17–18장과의 연결에 주목합니다. 레위기 17장은 제사와 피의 문제를, 18장은 금지된 성적 관계를 다루며, 일부 규정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도 적용됩니다(레위기 17:8–14; 18:26). 이 관점에서 네 가지는 유대 출신 신자와 이방 출신 신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경계입니다. 당시 함께 먹는 것은 교제의 중요한 표현이었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나 피가 남아 있는 고기를 대하는 태도는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가와 직접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네 가지가 이방 세계의 우상 숭배와 연결된 관습들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것, 피와 관련된 의례, 성적 부도덕이 종교적 환경과 연결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항목을 하나의 이교 의식에 결부시키거나, 네 가지가 레위기 17–18장을 정확히 요약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음행」도 일반적인 성적 부도덕을 가리킬 수도 있고, 레위기 18장의 금지된 관계와 더 밀접하게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네 가지를 선정한 세부 이유를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스라엘의 모든 율법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선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무관한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구원의 조건을 더하지 않는 것과 공동체 안에서 어떤 책임도 요구하지 않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모세는 옛 세대부터 도시마다 자기를 선포하는 이들을 가지고 있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읽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5:21 · 본디새김

이 말의 정확한 논리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읽고 지키는 유대인들이 여러 도시에 있으므로 이방 신자들도 그들과 함께 지내기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이방 신자들이 회당에서 읽히는 모세의 가르침을 계속 접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두 번째 이해를 발전시켜, 이방 신자들에게 나중에는 율법 전체를 지키도록 가르칠 계획이었다고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편지는 오히려 더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명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유대 사람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한 주님 아래에서 살아가는 문제는 여전히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에서는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것과 음행과 목 졸라 죽인 것과 피」의 순서인데, 29절의 편지에서는 「우상에게 바친 것과 피와 목 졸라 죽인 것과 음행」의 순서이고 처음 항목의 표현도 달라집니다. 누가는 이 차이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순서가 바뀐 데 특별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후에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일과 음식 자체를 먹는 일을 구별하고 다른 사람의 양심까지 고려합니다(고린도전서 8:4–13; 10:14–29). 초대 교회가 이 문제를 하나의 규칙만으로 다루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네 가지 규정이 잠시 유효했다가 사라진 조치였다고 본문만으로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상 숭배와 음행의 문제는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계속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거룩한 영과 우리는」 — 사람들의 결정이 하나님의 행동을 따라가다

사도행전 15:22–29 본문 →

이제 회의의 결정이 편지로 작성됩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온 교회와 함께 사람을 골라, 바울과 바나바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인 형제인 유다와 실라도 함께 보냅니다. 안디옥에서 논쟁을 일으킨 이들은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의 입장만 전하는 것으로 보였다면 갈등이 쉽게 끝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직접 사람을 보내는 것은 이 결정이 공동체가 함께 내린 판단임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그들 편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사도들과 장로 형제들이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 출신 형제들에게 문안합니다.」사도행전 15:23 · 본디새김

보내는 사람들도 형제들이고, 받는 사람들도 형제들입니다.

편지는 이방 사람들을 앞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후보자처럼 부르지 않고, 이미 같은 공동체에 속한 형제들로 부릅니다.

「우리 가운데서 몇 사람이 나가 여러분을 말로 뒤흔들고 여러분의 마음을 뒤엎어 놓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시킨 일이 아닙니다.」사도행전 15:24 · 본디새김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가르침에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편지는 교리적 논쟁만이 아니라, 잘못된 권위 주장 때문에 흔들린 사람들의 마음도 다룹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던 안디옥의 신자들에게 어떤 이들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고, 편지는 그 불안을 직접 바로잡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이들입니다.」사도행전 15:26 · 본디새김

야고보는 앞서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이름을 위한 백성」을 취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편지는 그 일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살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백성이 세워지는 일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헌신하는 사역이 한 이야기 안에 놓입니다. 하나님이 살아나게 하시고 높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도행전이 처음부터 증언해 온 내용과 맞닿아 있습니다(2:32–36; 4:10–12).

그리고 편지의 가장 유명한 선언이 등장합니다.

「거룩한 영과 우리는 꼭 필요한 이것들 말고는 여러분에게 더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5:28 · 본디새김

사람들이 의논한 끝에 자기 결정을 거룩한 영의 뜻이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순서는 다릅니다. 거룩한 영은 이 회의가 열리기 전에 이미 이방 사람들에게 주어졌고, 베드로는 바로 그 사실을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그 뒤에 바울과 바나바의 증언이 있었고, 야고보가 예언자들의 말씀으로 그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이 선언은 거룩한 영이 이미 행하신 일을 사람들이 뒤늦게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공동체의 결정을 내렸다는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물론 이것이 이후 모든 교회 회의의 결정을 거룩한 영의 판단과 동일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는 이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증언, 그 행동을 밝히는 성경의 말씀, 공동체의 숙고가 함께 판단의 근거였음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10절에서 짊어질 수 없는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얹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공동체는 「더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제기된 문제가 실제 결정에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이 편지는 구원의 문을 열어 주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문 앞에서, 교회가 불필요한 장애물을 치우겠다고 알리는 편지에 가깝습니다.

안디옥의 기쁨 — 불안하게 하던 말이 위로하는 말로 바뀌다

사도행전 15:30–35 본문 →

편지는 예루살렘을 떠나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무리가 모이고, 편지가 읽힙니다.

무리는 읽고 나서 그 위로에 기뻐했다.사도행전 15:31 · 본디새김

이 장에서 기쁨은 이미 한 번 등장했습니다. 페니키아와 사마리아의 형제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듣고 기뻐했습니다(15:3). 이제 안디옥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도착한 편지를 읽고 기뻐합니다. 의무가 줄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들이 주 예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예루살렘 공동체가 인정하고, 형제라고 부르며 문안한다는 사실이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위로」라는 말은 사람을 격려하고 굳세게 하는 뜻을 지닙니다. 이어서 유다와 실라가 많은 말로 형제들을 권하고 굳세게 합니다. 초대 교회는 결론만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보냈고, 그 사람들이 공동체와 함께 머무르며 이야기했습니다.

누가는 안디옥 공동체가 이후 모세의 율법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보여 주는 것은 이방 출신 신자들이 구원의 부족한 조건이 있다고 가르치던 말에서 벗어나, 교회의 형제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의 「구원받을 수 없다」라는 말과 지금의 「위로에 기뻐했다」라는 말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던 말이, 같은 사람들을 굳세게 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는 33절 다음에 35절이 나옵니다. 34절은 번역의 바탕인 비평 본문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본에는 실라가 그곳에 남기로 했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으나, 오래된 주요 사본들에는 없으며 40절에서 실라가 다시 등장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도 서로 부딪친다

사도행전 15:36–41 본문 →

이제 모든 문제가 정리된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머물며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먼저 제안합니다.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알린 도시마다 형제들을 찾아보고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보자.」사도행전 15:36 · 본디새김

야고보는 14절에서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을 「찾아오신」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를 찾아가 살피고 돌본다는 뜻의 이 동사가, 바울이 형제들을 「찾아보고」 싶다고 말할 때에도 쓰입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을 찾아오셨고, 이제 사도들은 그렇게 세워진 공동체를 다시 찾아가 살피려 합니다.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인지까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같은 낱말이 두 자리에 놓이면서 사역의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뜻밖의 갈등이 발생합니다.

바나바는 마가라고 불리는 요한을 다시 데려가고 싶어 하고, 바울은 반대합니다. 바울 일행이 밤빌리아에 이르렀을 때 요한은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13:13). 누가는 그가 왜 떠났는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바울이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은 데려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사도행전 15:38 · 본디새김

흔히 바울은 원칙을, 바나바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이해할 여지는 있지만, 본문 자체는 두 사람의 내면적인 동기를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바나바의 지난 행적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특별한 울림을 지닙니다.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회심한 바울을 두려워했을 때 그를 사도들에게 데려간 사람이 바나바였고(9:26–27), 다소로 가서 바울을 찾아 안디옥으로 데려온 사람도 바나바였습니다(11:25–26). 한때 사람들의 불신 속에 있던 바울을 공동체로 연결해 주었던 바나바가, 이제는 바울이 거부하는 마가를 데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 대조가 그가 이번에도 반드시 옳았다고 판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누가는 두 사람의 갈등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심한 다툼이 일어나 두 사람이 서로 갈라섰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났다.사도행전 15:39 · 본디새김

정말로 심하게 부딪쳤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많은 논쟁 끝에 공동체가 함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에서는 두 사람이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다투다가 끝내 갈라섭니다. 두 사람 모두 방금 전에 이방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함께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를 함께 증언했다는 사실이 모든 실제적인 판단에서 의견 일치를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루어진 것은 구원의 근거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마가를 둘러싼 갈등은 누구를 동역자로 데려갈 것인지에 관한 판단이었고, 같은 신학을 고백하면서도 그 판단은 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다툼이 사소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은 서로 갈라섰습니다.

누가는 누가 옳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형제들에 의해 주의 은혜에 맡겨졌다고 기록하지만, 이것만으로 바나바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바나바는 여기서 사도행전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두 사람의 갈등이 해결되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가며 교회들을 굳세게 했다.사도행전 15:41 · 본디새김
조금 더 깊이

「심한 다툼」으로 옮긴 말은 강한 자극이나 격렬한 충돌을 나타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평화롭게 사역을 나누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가가 왜 떠났는지—두려워서였는지, 건강이나 개인적 사정이 있었는지, 사역의 방향에 동의하지 않았는지—는 본문만으로 알 수 없으며, 마가를 다시 데려가는 일이 현명했는지, 바울의 우려가 어느 정도 타당했는지도 여기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길로 떠나는 두 사람

사도행전 15:1–41 본문 →

이 장에서 교회가 한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구원의 조건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누구를 받아들이셨는지 살펴보고, 그 사실에 합당하게 자신의 판단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은 그들이 먼저 이스라엘의 관습을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들이 곧바로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된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사도들을 갈등 없는 이상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고, 편지와 기쁨이 따른 첫 번째 갈등과 결별이 따른 두 번째 갈등을 모두 남겨 둡니다.

사도행전 15장이 끝날 무렵, 안디옥에는 하나의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방 출신 형제들에게 더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편지를 읽은 사람들은 기뻐했고, 유다와 실라는 그들을 굳세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있던 도시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툽니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배에 올라 키프로스로 향합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합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을 찾아오신 일을 인정한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를 다시 찾아보려는 사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함께 걷던 두 사람은 이제 나란히 서 있지 않습니다.

안디옥에서 출발하는 두 길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보낸 편지의 선언이 남아 있습니다. 「거룩한 영과 우리는 꼭 필요한 이것들 말고는 여러분에게 더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15:28)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