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신으로 떠받들다가 돌로 치다

사도행전 14장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급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자, 사람들은 그를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나바는 제우스,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부르며 황소를 끌고 와 제사까지 지내려 합니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그들을 말립니다.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집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끌어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누가는 군중의 마음이 바뀌는 모든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들은 바울이 행한 놀라운 일을 보았지만, 그 일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을 알아보게 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신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놀라운 일을 목격하는 것과 그 일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바울이 돌에 맞은 곳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나 다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있는 지역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자신들이 떠난 뒤에도 그 지역의 제자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사도행전 14장은 기적과 박해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읽는 시간 32분소단락 814장 본문 읽기 →

도시가 갈라져도 은혜의 말씀은 전해진다

사도행전 14:1–7 본문 →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쫓겨난 뒤 이고니온에 도착합니다.

이고니온에서도 그들은 똑같이 유대 사람들의 회당에 들어가 말했다. 그래서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었다.사도행전 14:1 · 본디새김

「똑같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앞선 도시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일부 유대인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이방 사람들에게로 돌아서겠다고 선언했습니다(13:46). 그런데 다음 도시에 도착하자 다시 유대 사람들의 회당으로 들어갑니다. 앞선 선언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영구적인 결별 선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의 관계를 전하려 합니다. 동시에 이방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에게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누가는 어느 쪽이 더 많이 믿었는지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말씀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믿기를 거부한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겨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다.사도행전 14:2 · 본디새김

유대인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었고, 그리스인 가운데도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반면 믿기를 거부한 일부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을 부추겨 신자들에게 적대감을 품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갈등을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같은 도시 안에서 출신과 신앙적 반응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곧장 떠나지는 않습니다.

한편 두 사람은 오랫동안 거기 머물며 주를 힘입어 거리낌 없이 말했다. 주는 그들의 손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해 주어 자기 은혜의 말씀에 대해 증언했다.사도행전 14:3 · 본디새김

앞선 도시에서 박해를 받아 쫓겨났고 이고니온에서도 적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데, 그들은 오히려 오랫동안 머뭅니다. 누가는 그들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거리낌 없이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다음 문장에서 누가가 주어로 세우는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은혜의 말씀에 대해 증언하셨고, 그 증언은 바울과 바나바의 손을 통해 일어난 표징과 놀라운 일로 나타났습니다. 표징은 전도자들의 대단함을 보여 주기 위한 독립적인 공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누가는 그 말씀을 「은혜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민족적 지위나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운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전해지고 있고, 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한 도시가 둘로 갈라지다

그러나 표징이 일어났다고 해서 갈등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도시 사람들이 갈라졌다. 한쪽은 유대 사람들 편에 섰고 다른 쪽은 사도들 편에 섰다.사도행전 14:4 · 본디새김

말씀이 전해지고 표징이 일어났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결론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기적을 보이면 누구나 믿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고 갈등 자체가 복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는 갈등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는 사실을 함께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바나바와 바울을 「사도들」이라고 부릅니다. 누가는 일반적으로 이 명칭을 열두 사도에게 쓰는데, 두 사람은 그 열두 사람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확실하게 확인되는 것은 두 사람이 성령의 부르심을 따라 보냄받았고, 예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도시의 갈등이 위험한 행동으로 발전합니다.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지도자들과 함께 바울과 바나바를 욕보이고 돌로 치려 하자, 두 사람은 그 움직임을 알아채고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합니다. 앞에서는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이제는 떠납니다. 그들은 반대가 생길 때마다 무조건 도망가지도 않고, 어떤 위협 앞에서도 반드시 그 자리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이 그 판단 기준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실제 상황에 따라 머물거나 이동합니다.

그런데 이동의 목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14:7).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갔지만, 말씀을 전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루스드라에서 이 장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장 21–22절은 유다를 대신할 사람의 자격으로 예수님의 사역에 처음부터 함께하고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14장 4절과 14절에서 그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바나바와 바울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이 두 구절을 사도행전의 사도 개념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제로 보는 읽기가 있고, 누가가 열두 사도의 특별한 위치를 유지하면서도 바울의 사도적 지위를 서술 안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칭이 열두 사도와 동일한 자격을 뜻하는지, 특별한 사명을 위해 보냄받은 사람이라는 넓은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

사도행전 14:8–10 본문 →

루스드라에는 발에 힘이 없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의 상태를 세 가지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루스드라에는 발에 힘이 없는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고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사도행전 14:8 · 본디새김

그는 현재 발에 힘이 없고,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상태였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걸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잠시 병을 앓다가 회복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 묘사는 3장 2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만난,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가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걷기 시작했습니다(3:6–8). 누가는 두 사건에서 「태어날 때부터」라는 같은 표현을 쓰고, 사도가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 일어나라는 명령, 그 사람이 뛰며 걷는 모습까지 서로 대응하도록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역사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는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명시하여 말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그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고쳤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누가는 주님께서 사도들의 손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고 설명했습니다.

바울이 본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람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바울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가 나으리라는 믿음을 지닌 것을 보고사도행전 14:9 · 본디새김

그가 어떤 말씀을 얼마나 들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사람을 고치기 전에 그 사람이 말씀을 듣고 있었고, 바울이 그에게서 믿음을 보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믿음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었는지,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모든 병자가 충분한 믿음을 가지면 반드시 낫는다는 원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한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큰 소리로 말했다. 「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그가 뛰어올라 걸어 다녔다.사도행전 14:10 · 본디새김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던 사람이 뛰어오릅니다.

누가는 그가 어떻게 첫걸음을 배웠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사람이 이제 걸어 다닙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바울이 기대했을 법한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나으리라는」의 그리스어는 소테나이(σῴζω)입니다. 동사 소조의 수동형으로, 문맥에 따라 구원받다, 위험에서 건짐받다, 병에서 낫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자리에서는 신체적인 치유가 직접적인 의미이지만, 같은 동사가 죄와 죽음에서의 구원을 말할 때도 사용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병의 치유가 곧 영원한 구원을 의미한다거나, 병이 낫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구원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삶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사람을 신으로 만들다

사도행전 14:11–13 본문 →

무리는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신들이 사람 모습이 되어 우리에게 내려왔다.」사도행전 14:11 · 본디새김

사람들은 그 사건을 자신들이 알고 있던 신들의 세계 안에서 이해합니다. 누가는 그들이 두 사람을 어떻게 불렀는지, 그리고 바울이 헤르메스라고 불린 이유를 밝힙니다.

그리고 바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을 헤르메스라 부르고 있었다. 바울이 앞장서서 말을 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4:12 · 본디새김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전령으로 알려져 있으며, 말을 전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과 관련됩니다. 바나바가 왜 제우스라고 불렸는지는 누가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나바가 나이가 많거나 외모가 위엄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본문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아닙니다.

다만 제우스가 그리스 신들의 세계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신이었다는 점과, 바울에게 전령인 헤르메스의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하면 사람들이 두 사람을 서로 짝을 이루는 신적인 방문자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종교 문화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자 신들이 자신들에게 찾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의 제사장이 황소와 화관을 가져옵니다. 그들은 실제로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루가오니아 말이라는 작은 단서

군중은 「루가오니아 말로」 외쳤습니다. 루가오니아는 오늘날 튀르키예 중남부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내륙 지역으로, 지역 고유의 언어가 있었고 그리스어도 넓은 지역의 의사소통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바울이 사용하던 언어와 사람들이 흥분하여 외친 언어가 달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언어의 차이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행한 일을 자신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신앙과 문화의 틀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을 통역하면 해결되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신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로마 시대 소아시아에는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 8권에서 제우스와 헤르메스에 해당하는 유피테르와 메르쿠리우스가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가난한 노부부 바우키스와 필레몬은 그들을 환대해 보상을 받고, 그들을 거절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당시의 종교적 상상력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인접한 프리기아 지역을 배경으로 하며, 그것이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때문에 제사를 지내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아시아에서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함께 숭배되었다는 비문과 조각 자료도 있지만, 그것들이 루스드라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을 어느 정도까지 설명하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언어에 관해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들이 자신들을 신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에 제사 준비를 즉시 막지 못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군중은 이미 신들이 내려왔다고 외쳤고 제사장은 황소까지 준비했는데, 두 사람은 14절에 이르러서야 뛰어들어 말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두 사람이 루가오니아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언어 차이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4:14–18 본문 →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나바와 바울은 겉옷을 찢고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외칩니다.

그리고 말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 헛된 것들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사도행전 14:15 · 본디새김

옷을 찢는 행동은 고대 유대 사회에서 슬픔과 충격, 신성모독에 대한 격렬한 반응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신적인 영광을 돌리려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중심이 무너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행한 사람이 왜 신이 아닌가?

「같은 성정을 지닌」은 같은 본성이나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뜻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군중과 같은 인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겸손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아니라, 사람을 고치는 일을 행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 일을 통해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도구로 쓰였지만, 그 때문에 하나님이 된 것은 아닙니다.

3장에서 베드로는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친 뒤 자신들의 힘이나 경건으로 그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자신들을 바라보느냐고 물었습니다(3:12). 10장 26절에서는 자신에게 엎드린 고넬료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 자신도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 장면은 서로 다른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같은 점을 보여 줍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사람들이 실제로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부르고 제사를 지내려 합니다.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자신들에게 모이는 영광을 조금 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이 향해야 할 대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 뒤 곧바로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이 헛된 것들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이 선포는 앞 장의 회당 설교와 상당히 다릅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바울은 조상들의 선택, 출애굽, 광야,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루스드라에서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성경을 직접 인용하지도 않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청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는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선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이 자신들이 섬기던 신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여호와야훼를 말하는 출애굽기 20장 11절과 시편 146편 6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그 성경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창조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소개하지만,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선포합니다. 복음의 내용을 바꾼 것이 아니라, 청중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복음을 설명하는 출발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회당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시작했고, 루스드라에서는 창조 세계에서 시작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지 진지하게 고려하는 일입니다.

왜 「살아 계신 하나님」인가?

이 표현은 구약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10장 10절은 여호와야훼를 참 하나님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그 앞뒤에서는 사람들이 만든 우상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제우스의 제사장이 황소와 화관을 가져온 자리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제사를 받을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적인 이미지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으신 분이며 지금도 세상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 돌보심이 다음 구절에서 설명됩니다.

비와 열매 맺는 철이 증언하는 것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지난 여러 세대 동안 민족들이 저마다 자기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잇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증언 없이 두지는 않으셨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며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철을 여러분에게 주시고, 먹을 것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4:17 · 본디새김

「그러면서도」라는 말이 가리키듯, 하나님은 여러 민족이 자기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들이 매일 경험하는 세계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연결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비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적절한 시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곡식이 자라지 못하고,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기 어려워집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하나님은 여러 신 가운데 더 큰 능력을 가진 한 신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비와 열매 맺는 철도 그분이 지으신 세계 안에서 베푸시는 선하심의 표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단지 굶주리지 않고 살아남을 만큼의 음식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먹을 것과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단순히 의무를 요구하거나 심판을 내리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이해를 넓혀 줍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죄의 용서에 관한 복음을 모두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이 짧은 연설에 예수님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7절에서 누가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15절에서도 두 사람은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연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청중이 먼저 알아야 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먼 곳의 신이 아닙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지으시고, 오랫동안 그들에게 비와 먹을 것을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사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이 말을 하며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사도행전 14:18 · 본디새김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즉시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을 자신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람을 고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그 일을 통해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운 사건을 인정하거나 종교적인 열정을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건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매우 높이 평가했지만, 그 높은 평가는 정작 두 사람이 전하려는 복음을 가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영광을 거절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자신들이 높아지는 것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가는 루스드라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반응이 일어나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바울을 신으로 높이지 않습니다.

그를 돌로 칩니다.

조금 더 깊이

비와 열매 맺는 철의 언급에는 당시 사람들이 제우스에게 기대했던 역할과 관련된 배경도 있습니다. 제우스는 하늘과 날씨를 다스리는 신으로 여겨졌고, 소아시아의 지역 신앙에서는 비와 풍요를 베푸는 신적인 존재와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과 바나바의 말은 청중이 신들에게 기대하던 은혜의 실제 근원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제우스보다 하나님이 더 뛰어난 비의 신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돌에 맞다

사도행전 14:19–20 본문 →

그런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 사람들이 왔다. 그리고 무리를 설득하여 바울을 돌로 치고 도시 밖으로 끌어냈다. 그가 죽은 줄로 여겼던 것이다.사도행전 14:19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고 제사를 지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죽었다고 생각될 만큼 심하게 공격당합니다.

다만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누가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 사람들이 무리를 설득했다고 기록하므로, 루스드라 사람들이 처음부터 바울을 죽이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처음 두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려 했던 사람들과 나중에 바울을 돌로 친 사람들이 정확히 얼마나 겹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극적인 대조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같은 도시에서 신적인 존재로 높여지기도 하고, 죽임당할 만큼 미움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두 상황에서 전한 복음이 달라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신이라고 부를 때 그 영광을 거부했던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에도 자신이 전한 복음을 철회했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사람들의 찬사와 적대감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근거가 사람들의 평가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일까?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서자 그는 일어나 도시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다.사도행전 14:20 · 본디새김

본문은 바울이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여겼다」고 말할 뿐, 바울이 실제로 죽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예수님의 부활이나 다비다의 소생과 같은 사건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죽었다고 여겨질 정도의 심각한 폭력을 당했고, 다시 일어나 도시로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바울이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에게 명령했던 말도 「일어서라」였습니다(14:10). 앞에서는 바울이 다른 사람을 일으켰습니다. 이제는 바울 자신이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큰 능력의 통로로 쓰였지만, 그 자신은 돌에 맞아 쓰러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행한 치유의 기적이 그를 모든 고통에서 보호하는 힘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앞서 두 사람이 말한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의 현실이 이제 바울의 몸에 드러납니다.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이 그가 전하는 복음을 무효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바울을 둘러선 제자들

무리가 바울을 공격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냈는데, 이제 제자들이 그를 둘러섭니다. 누가는 그들이 기도했는지, 몸을 돌보았는지, 그가 죽었는지 확인하려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루스드라에도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오해하고 돌로 친 사건들만 있었다면, 루스드라에는 아무런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이 그곳에서도 사람들의 삶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 짧은 장면을 통해 알려 줍니다.

바울은 다시 도시로 들어갔고, 다음 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습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복음을 전하는 여정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선택을 들려줍니다. 그들은 더베에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뒤, 다시 루스드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일어서라」와 20절의 「일어나」에 사용된 그리스어가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10절은 아나스테티(ἀνίστημι)이고, 20절은 아나스타스로, 같은 동사의 다른 형태입니다. 누가가 이 반복을 의도적인 문학적 대응으로 만들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장면이 같은 이야기 안에 놓이면서 드러나는 대비는 인상적입니다.

왜 자신을 돌로 친 도시로 돌아갔을까?

사도행전 14:21–23 본문 →

두 사람은 그 도시에 복음을 전해 많은 이를 제자로 삼은 뒤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갔다.사도행전 14:21 · 본디새김

더베에서의 복음 전도는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더 안전한 길을 찾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왔던 길을 되짚습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는 박해를 받아 쫓겨났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돌로 치려는 움직임 때문에 피신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실제로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 도시들로 다시 돌아갑니다.

누가는 그 목적을 곧바로 설명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하고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며 말했다. 「우리는 많은 고난을 거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사도행전 14:22 · 본디새김

그들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을 위해 돌아갔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믿게 하는 일만이 그들의 사명은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자신들이 떠난 뒤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따르도록 돕는 일도 중요했습니다.

「마음을 굳세게 하고」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믿음 안에서 굳게 서도록 돕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새롭게 믿는 사람들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온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약속과 다릅니다. 오히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현실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고난을 겪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 말씀을 잘못 읽으면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인 것처럼, 많이 고통받을수록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조금 전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14:3). 따라서 22절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고난이라는 공로를 추가한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실제로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와 박해를 받았고,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지기까지 했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제자들도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언제나 세상에서 환영받는 길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해야 합니다」는 어떤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9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울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보여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에 대해 아나니아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지만,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다만 이 말이 모든 신자가 반드시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돌에 맞거나 투옥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특정한 고난의 형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을 수 있다는 현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

이미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지 않은 것입니까?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가까이 왔으며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현실이면서, 동시에 장차 완전히 드러날 미래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은 이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미래적 전망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아직 완성된 영광의 상태가 아닙니다. 고난이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거짓이 되거나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님 자신도 고난받으시고 죽임당하셨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살리셨습니다. 바울이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고난의 길은 그리스도의 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하는 일은 권면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세우는 실제적인 일도 합니다.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우다

두 사람은 그들을 위해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어 온 주에게 그들을 맡겼다.사도행전 14:23 · 본디새김

바울과 바나바는 새로운 신자들을 개별적인 신자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여기서 장로는 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책임을 맡아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다만 이 장의 「장로」를 훗날 발전된 모든 교회 직제와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이 장로들이 정확히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지, 몇 명씩 세워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선출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떠나야 합니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제자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배우고 서로 돌보며, 어려움 가운데 믿음을 지키도록 도울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많은 신자의 집합이 아니라, 함께 믿고 배우고 서로를 돌보며 신앙의 삶을 이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장로들을 세운 뒤 금식하고 기도하며, 그들이 믿어 온 주님께 그들을 맡깁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도왔지만, 그 공동체를 자신들의 소유로 여기지 않습니다. 지도자를 세우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되, 그 공동체를 끝까지 지켜 주실 분은 자신들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이 그들의 신앙을 영원히 통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어 온 주님께 계속 속하여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목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일을 마친 뒤 다시 길을 떠납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말씀하시고, 누가복음 22장 18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미래를 바라보십니다. 또 23절의 「세우고」에 사용된 동사 케이로토네오(χειροτονέω)는 원래 손을 들어 투표하는 행위와 관련된 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한 절차와 관계없이 선택하거나 임명한다는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낱말만으로 장로들이 교인들의 투표로 선출되었는지, 바울과 바나바가 직접 임명했는지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의 문은 누가 열었는가?

사도행전 14:24–28 본문 →

두 사람은 비시디아를 지나 밤빌리아에 이릅니다.

버가에서 말씀을 전한 뒤 앗달리아로 내려가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이 아니라, 처음 두 사람을 떠나보냈던 시리아의 안디옥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처음 어디에서 떠났는지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갔다. 안디옥은 그들이 다 이룬 그 일을 하도록 앞서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져 떠난 곳이었다.사도행전 14:26 · 본디새김

13장 3절에서는 안디옥의 공동체가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떠나보냈습니다. 이제 누가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져 떠났던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들의 일을 맡기고 길을 나섰고, 이제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그들이 다 이루었다는 일은 여행하는 동안 경험한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성취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 반대에 부딪혔고, 도시에서 쫓겨났으며,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은 줄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어 새로운 교회들이 생겼으며, 돌아가는 길에는 그 교회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고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누가는 이런 일들을 그들이 맡았던 사역의 완수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일

그들은 이르러 교회를 모아 놓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행한 모든 일을 알렸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고 했다.사도행전 14:27 · 본디새김

실제로 여러 지역을 여행한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말씀을 전한 것도, 박해를 겪은 것도,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던 사람에게 일어서라고 말한 것도, 장로들을 세운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보고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일을 알립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행한 일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수고가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은혜의 말씀에 대해 증언하셨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두 사람이 자신들을 신으로 높이려는 사람들을 말리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안디옥에 돌아와서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일을 알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열린 문

누가는 두 사람이 전한 소식 가운데 「믿음의 문」을 특별히 기록합니다. 그 문은 누가 열었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겼다는 말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 돌아왔으며, 이제 그들 가운데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 표현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일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모든 사람이 환영하는 성공적인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거칠고 혼란스러웠지만, 결국 그곳에도 제자들이 생겼고 두 사람은 다시 돌아가 그들을 권면하고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모든 여정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합니다.

복음은 이미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를 지나 여러 지역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구원이 선포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열어 주신 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람들이 남긴 것

사도행전 14:1–28 본문 →

이 장에서 사람들의 평가는 빠르게 바뀌었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남긴 것은 그 평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전한 것은 자신들의 뛰어남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높이는 사람들에게 예배받기를 거부했고,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떠난 뒤에도 제자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돌아가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우고 그들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를 때는 엄청난 성공처럼, 바울이 돌에 맞아 쓰러졌을 때는 실패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사역의 의미는 사람들의 열광이나 적대감으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에게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듣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경험했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얼마나 높이느냐가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얼마나 바르게 알아보느냐입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누가는 다시 안디옥 교회를 보여 줍니다. 그곳은 바나바와 사울이 성령의 부르심을 따라 떠났던 자리입니다. 그들은 여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했을 것이지만, 누가는 그 보고 가운데 이것만은 남겨 놓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일.

그리고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일.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적지 않은 시간을 지냈다.사도행전 14:28 · 본디새김

그들은 다시 떠날 계획을 발표하지 않고, 새로운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습니다. 긴 여정을 마친 사람들이 자신들을 떠나보냈던 공동체로 돌아와, 이제는 그곳의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문은 열렸고, 말씀은 전해졌으며, 두 사람은 다시 제자들 곁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