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밀쳐 낸 말씀, 열려 가는 길
사도행전 13장에는 눈먼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지 못하도록 막으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에게 주의 말씀을 선포하자 앞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조금 뒤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회당에 모여듭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더 듣고 싶어 하지만, 이튿주에는 일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거부하고 그를 도시 밖으로 쫓아냅니다.
이 두 사건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는 키프로스섬의 로마 총독 앞에서, 다른 하나는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벌어집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말씀을 가로막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장을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읽으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처음으로 긴 설교를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짚으며, 하나님이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뒤,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믿는 이는 누구나 이분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39절)라는 뜻밖의 선언에 이릅니다. 이것이 그가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전하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해지지만, 그들만을 위한 소식으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박해를 받아 도시에서 쫓겨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쁨과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은 사람들이 말씀의 길을 막으려 할 때마다 그 말씀이 어떻게 더 넓은 곳으로 전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길을 여시는 분이 누구인지 드러냅니다.
보내는 교회와 보내시는 성령
이야기는 안디옥 교회에서 시작합니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선생들이 있었다. 바나바, 니게르라 불리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과 함께 자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사도행전 13:1 · 본디새김
이 다섯 사람의 이름에서 안디옥 교회가 어떤 공동체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키프로스 출신으로 알려져 있고(4:36), 루기오는 북아프리카의 구레네 사람이며, 마나엔은 분봉왕 헤롯과 함께 자란 사람이고, 니게르라고 불리는 시므온도 있습니다. 출신 지역과 사회적 배경이 다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들이 그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를 받들며 금식하고 있을 때 거룩한 영이 말했다. 「자, 내가 그 일을 위해 부른 바나바와 사울을 나에게 따로 세워라.」사도행전 13:2 · 본디새김
이들은 새로운 선교 계획을 발표하거나 어떤 나라에 먼저 갈지 의논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금식과 함께 기록되어 있으므로, 공동체가 주님을 섬기는 예배와 기도 가운데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내가」와 「나에게」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성령은 공동체가 바나바와 사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겨 보라고 제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이 부른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따로 세우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바나바와 사울을 공동체와 무관하게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안디옥의 신자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금식하고 기도한 뒤 두 사람에게 손을 얹고 떠나보냅니다.
누가 실제로 바나바와 사울을 보냈는가?
3절에서는 안디옥의 사람들이 바나바와 사울을 떠나보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그 둘은 거룩한 영의 보냄을 받아 실루기아로 내려갔고, 거기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갔다.사도행전 13:4 · 본디새김
교회가 보냈습니다.
성령이 보내셨습니다.
두 표현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공동체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고, 안디옥의 신자들은 금식하고 기도하며 두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에 참여합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사명이 교회의 결정에서만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누가는 그들이 성령의 보냄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예루살렘의 열두 사도가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예언자들과 선생들의 공동체가 그들에게 손을 얹고 떠나보냅니다. 또한 본문은 이때 바나바와 사울이 처음으로 사도가 되었다거나 어떤 새로운 직책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미 그들 가운데 있었던 두 사람이 특별한 일을 위해 구별되어 보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아직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길을 시작하게 하신 분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힙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성공을 만들어 내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부르신 주님의 일을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목적지는 키프로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나엔과 함께 자란 분봉왕 헤롯은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니게르(Niger)는 라틴어로 「검은」이라는 뜻이지만, 이 별명만으로 그의 피부색이나 출신 지역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별명이 무엇을 가리켰는지 누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를 받들다」에 사용된 그리스어 레이투르게오는 섬기는 일, 특히 하나님을 향한 예배나 제의적 봉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장면들에서 손을 얹는 것은 기도와 축복, 성령과 관련된 사건에 등장합니다.
총독이 듣고 싶어 한 말씀을 막는 사람
바나바와 사울은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갑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항구 역할을 하던 곳이고, 키프로스는 지중해 동부의 큰 섬으로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섬 동쪽의 살라미스에 도착하여 유대 사람들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때 앞 장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데려왔던 요한 마가도 함께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를 「조력자」로 소개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맡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일행은 섬을 가로질러 서쪽의 파포스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총독 서기오 바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마술사 바예수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섬을 다스리는 로마 관리였고, 누가는 그를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슬기로운 사람인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었다. 그 총독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사도행전 13:7 · 본디새김
로마의 총독이라는 지위가 그를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그가 어떤 이유로 말씀에 관심을 가졌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스스로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말씀을 듣고자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그의 곁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술사 엘루마가 그들에게 맞섰다. 그의 이름을 옮기면 마술사라는 뜻이다. 그는 총독을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려 했다.사도행전 13:8 · 본디새김
여기서 사건의 중심은 누가 더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경쟁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가 믿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려 합니다.
이 대립 속에서 바울이 처음으로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사울, 곧 바울」
그런데 사울, 곧 바울이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져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사도행전 13:9 · 본디새김
사도행전 앞부분에서 계속 사울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이제 바울이라고 불립니다. 9절의 표현은 곧 「사울,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두 이름이 있었다는 뜻이지, 이 순간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가 이제 할 말은 자신의 감정이나 분노에서 나오는 말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거짓 예언자를 향해 말합니다.
누가 주의 곧은 길을 뒤트는가?
말했다. 「온갖 속임과 온갖 못된 짓으로 가득한 자야, 마귀의 아들아, 모든 의의 원수야, 주의 곧은 길을 뒤트는 일을 그치지 않겠느냐?」사도행전 13:10 · 본디새김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속한 신앙 운동은 이미 「그 길」이라고 불렸습니다(9:2). 그리고 이 장에서 엘루마는 주의 곧은 길을 뒤트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단지 바울과 의견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총독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에 이르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강한 표현은 그가 유대인 마술사라는 출신 때문에 주어진 비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려는 행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그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바울은 후자를 문제 삼습니다.
손을 잡아 줄 사람을 찾는 마술사
「이제 보아라, 주의 손이 네 위에 있다. 그리고 너는 눈이 멀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곧바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쳤고,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사도행전 13:11 · 본디새김
어디서 본 듯한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뒤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도시로 들어갔습니다(9:8). 이제 그 사울이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눈멀게 하는 심판을 선포합니다.
한때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야 했습니다. 이제 사람의 믿음을 가로막던 엘루마도 손을 잡아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놓입니다.
그러나 두 사건의 의미를 완전히 같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울은 이후 다시 보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엘루마에게는 「얼마 동안」이라는 제한이 주어지지만, 그가 이후 믿었는지 또는 회개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파포스 사건의 결말은 엘루마의 처벌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총독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때 총독이 일어난 일을 보고 주의 가르침에 크게 놀라 믿었다.사도행전 13:12 · 본디새김
총독은 일어난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크게 놀란 것은 「주의 가르침」입니다. 누가는 총독이 기적적인 현상만 보고 압도되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엘루마는 그 말씀이 총독에게 이르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지만, 결국 총독은 주의 가르침에 놀라 믿습니다.
마술사와 바울 사이의 능력 대결에서 누가 이겼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자 했던 사람이 마침내 그 말씀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가 서기오 바울에게 사용한 안튀파토스는 로마 원로원이 관할하는 속주의 총독을 가리키는 관직명으로, 이 시기의 키프로스가 원로원 관할 속주였다는 사실과 부합합니다. 누가는 엘루마라는 이름을 마술사라는 뜻으로 풀이하지만, 그 정확한 어원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예수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셈어식 이름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이름만으로 그가 어떤 신학적 주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이 그를 「마귀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데서 이 이름과의 대조를 누가가 의도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누가가 그 어원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므로 결정적인 논거로 삼기보다는 가능한 언어적 대조로 남겨 두는 편이 적절합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어 주셨다는 흔한 설명은 사도행전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셈어식 이름과 그리스·로마식 이름을 함께 사용하는 일은 낯설지 않았고, 사도행전에도 요셉과 바나바, 요한과 마가처럼 둘 이상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이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난 장면에서 등장하지만, 총독의 이름을 따서 새로 얻었다고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 이후 누가는 그를 대체로 바울이라고 부르므로, 이 전환을 이방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그가 등장하기 시작함을 드러내는 서술 장치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다만 이름을 이 지점에서 바꿔 부르는 이유를 누가가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돌아가고,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다
파포스를 떠난 일행은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 마가가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누가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여행의 어려움 때문에 돌아갔는지, 선교의 방향에 동의하지 않았는지,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15장 37–39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요한 마가를 다시 데려가는 문제로 갈라서게 된다는 사실은 그의 이탈이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뒤에 벌어진 갈등을 근거로 지금 마가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13절에서 누가는 그들을 「바울 일행」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는 바나바와 사울의 순서로 소개되던 사람들이 이제 바울을 중심으로 묘사되고, 이어지는 회당의 긴 설교도 바울이 맡습니다. 바나바의 지위가 낮아졌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에게 옮겨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버가를 떠나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갑니다. 이 안디옥은 그들을 파송한 시리아의 안디옥과 다른 도시로, 소아시아 내륙에 위치하며 비시디아와 인접한 지역의 안디옥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갑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낭독이 끝난 뒤 회당장들이 「여러분 가운데 백성에게 권할 말이 있는 분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15절) 하고 청합니다. 바울은 무작정 회당에 들어가 연설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회당장들의 요청을 받고 말합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 들으십시오.」사도행전 13:16 · 본디새김
이 부름은 그의 설교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곳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후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회당에 참여하던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두 부류의 청중을 향해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왜 이방인들이 함께 있는 회당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부터 이야기할까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분리해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의 창립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랫동안 이루어 오신 일의 결정적인 성취가 예수님에게서 일어났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역사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회당에서는 성경을 낭독하고 그 말씀에 관해 가르치거나 권면하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정확한 예배 순서와 관습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랐겠지만, 누가가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방문객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이루셨다
바울의 설교에서 처음 보아야 할 것은 사건의 순서가 아니라 문장의 주어입니다.
「이 백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땅에 나그네로 있는 동안 그 백성을 높이시고, 높이 든 팔로 그들을 거기서 이끌어 내셨습니다.」사도행전 13:17 · 본디새김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이집트에서 높이셨고, 그곳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광야에서 견디어 주셨습니다. 가나안의 땅을 유업으로 나누어 주셨고, 재판관들을 주셨으며, 왕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이루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가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며 민족의 영광을 높이는 연설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오셨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역사는 결국 예수님에게로 향합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견디어 주셨다
「그리고 마흔 해쯤 광야에서 그들을 견디어 주셨습니다.」사도행전 13:18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우리는 출애굽 이후의 광야 생활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돌보신 기간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견디어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어 사본에서 의미가 갈리는 자리입니다.
철자가 매우 비슷한 두 낱말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행동을 참거나 견디어 주셨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를 돌보듯 기르거나 보살피셨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거역했던 일이 떠오르고, 두 번째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듯 인도하신 모습이 강조됩니다.
「견디어 주셨습니다」를 따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돌보심만이 아니라 그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 줍니다. 바울은 곧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다는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 사건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올바른 반응만을 통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이것을 사람의 불순종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광야의 세대는 그 불순종으로 심각한 결과를 겪었습니다(민수기 14장).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백오십 년은 무엇을 가리킬까?
20절에서는 「이 모든 일에 사백오십 년쯤 걸렸습니다」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사본마다 어순이 달라, 사백오십 년이 이집트 체류부터 가나안 땅의 분배까지에 붙기도 하고 재판관 시대에 붙기도 합니다. 이 본문에서는 사백오십 년이 앞선 사건들의 기간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의 연설은 현대적인 역사 연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압축된 회고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각 시대의 정확한 연수보다 역사의 방향입니다.
그 방향은 왕의 등장과 다윗의 선택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울을 물러나게 하고 다윗을 세우시다
이스라엘은 왕을 달라고 청했고, 하나님은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왕 사울의 실패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그를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일으키셨습니다. 그를 두고 증언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고, 내 뜻을 다 이룰 사람이다.』」사도행전 13:22 · 본디새김
이 문장은 구약성경의 여러 표현을 결합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무엘기상 13장 14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셨다고 말하고, 시편 89편 20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종 다윗을 찾아내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연설에서는 이 두 주제가 하나의 증언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다윗이 평생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기하 11–12장에는 다윗의 심각한 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중요성은 그의 도덕적 완전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셨고 그의 후손을 통해 이루실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 가운데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자 예수를 데려오셨습니다.」사도행전 13:23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긴 역사는 이 한 문장에 이르기 위해 소개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역사 바깥에서 갑자기 나타나신 구원자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소개합니다.
요한은 누구를 가리켰는가?
바울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을 언급합니다. 그가 특별히 인용하는 것은 요한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는 말입니다.
「요한이 자기가 달릴 길을 다 마쳐 갈 때에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로 짐작하느냐? 나는 너희가 짐작하는 그 사람이 아니다. 도리어 보아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다. 나는 그분의 발에서 신을 풀 자격도 없다.』」사도행전 13:25 · 본디새김
바울은 요한의 겸손을 일반적인 도덕적 모범으로 소개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요한의 사역 자체가 예수님의 오심을 향하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로 오셨고, 요한은 그 오심을 앞서 알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청중에게 직접 말을 건넵니다.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자손 여러분과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이 우리에게 보내졌습니다.」사도행전 13:26 · 본디새김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청중에게 주어진 소식이 됩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행하셨던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말씀이 지금 그들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에서 갈리는 두 낱말은 ἐτροποφόρησεν(견디어 주셨다)과 ἐτροφοφόρησεν(돌보듯 기르셨다)입니다. 신명기 1장 31절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설명하는 자리에 돌봄과 관련된 표현이 등장합니다. 20절의 사백오십 년을 바탕으로 창세기부터 사무엘기까지의 연대를 정밀하게 계산하려는 시도는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자체가 기간의 연결을 모호하게 남기며, 「쯤」이라는 표현도 개략적인 수치임을 보여 줍니다. 21절에서 사울이 마흔 해 동안 왕으로 있었다는 기록 역시 구약성경의 서술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명시된 숫자는 아닙니다. 또 이 설교를 하는 사람 역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본문이 이 두 사울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는 명시적인 근거는 없으므로 이름이 같다는 사실만으로 이스라엘의 첫 왕과 바울의 생애를 의도적인 유형론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서를 읽으면서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하면서 뜻밖의 대조를 제시합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이분도, 안식일마다 읽히는 예언자들의 소리도 알아보지 못한 채 이분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그렇게 그 소리가 전한 것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3:27 · 본디새김
이 문장에서 가장 아픈 표현은 「안식일마다 읽히는 예언자들의 소리」입니다. 바울이 지금 설교하는 회당에서도 조금 전 율법과 예언서가 낭독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도 안식일마다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일과 그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알아보는 일은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이 꾸준히 예언서를 읽었다는 점을 오히려 강조합니다.
문제는 읽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읽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의 주장을 모든 유대인이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말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인이었으며, 바울 자신도 유대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람들과 그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내린 판결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들의 잘못을 유대 민족 전체의 본질적 성격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예언을 이루다
예수님의 죽음이 성경의 말씀을 이루었다면,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잘못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찾지 못했으면서도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정당한 행위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그들이 행한 일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너뜨리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악한 행동마저 자신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다루신다는 믿음과, 그 악한 행동 자체가 옳았다는 주장은 다릅니다. 바울의 설교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끝내지 못했음을 선포합니다.
29절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인간이 예수님에게 행한 일이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30절은 짧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사도행전 13:30 · 본디새김
「그러나 하나님이」
이 짧은 문장은 바울의 설교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죄목을 찾지 못하면서도 죽였고, 나무에 매달았고, 무덤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그동안 바울이 이야기해 온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가장 결정적인 행동,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살리신 일이 선포됩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에 하나를 더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내린 판결은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그 판결이 마지막 말이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중심입니다.
바울은 왜 자신을 부활의 증인으로 먼저 내세우지 않을까?
「그분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자기와 함께 올라온 이들에게 여러 날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입니다.」사도행전 13:31 · 본디새김
이들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동행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그들 가운데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 역시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9장), 지금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중심에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어진 그 약속을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합니다.」사도행전 13:32 · 본디새김
앞에서는 「그들이」 증인이라고 했고, 이제는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처음부터 동행했던 사람들과 동일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지 않지만, 그들이 증언하는 부활의 소식을 자신들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특정한 증인들이 경험한 사건이지만, 그 소식은 그 증인들의 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이 이스라엘의 성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여 주기 위해 다시 성경을 펼칩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예수에게서 이루시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한 뒤 시편 2편 7절, 이사야 55장 3절, 시편 16편 10절을 연이어 인용합니다. 세 인용문은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고,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일어나셔서 다시는 썩음을 겪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켜 그 약속을 조상들의 자녀인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둘째 편에도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사도행전 13:3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일까요? 그렇게만 해석하면 시편의 본래 문맥과 신약성경의 다른 증언을 함께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시편 2편은 본래 왕권과 관계된 시편입니다. 여러 민족과 왕들이 여호와야훼와 그분이 기름 부으신 이를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시온에 세우신 왕을 선언하십니다. 그 문맥에서 「너는 내 아들이다」는 다윗 왕조의 왕이 하나님과 맺는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왕권 언어이고,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도 왕의 즉위와 관련된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다고 이해합니다.
33절의 「일으켜」는 두 갈래로 읽힙니다. 이 동사는 어떤 사람을 일으켜(ἀνίστημι) 세워 사명을 맡긴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34절이 부활을 따로 명확히 말하므로, 33절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세워 보내셨다는 뜻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30절부터 시작된 논증 전체가 부활을 중심으로 진행되므로, 33절도 부활과 그에 따른 메시아의 왕권을 가리킨다고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약속하신 왕권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는 주장과 구별해야 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예수님의 신적 존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아의 통치가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
왜 이사야 55장을 인용할까?
「그리고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켜 다시는 썩음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셨다는 것을 두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 준 거룩하고 믿음직한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사도행전 13:34 · 본디새김
이사야 55장은 목마른 사람들을 초청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먹고 마시라고 부르며,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변함없는 사랑과 관련된 영원한 언약을 말합니다. 포로 생활과 회복의 전망 속에서, 다윗 왕조에 주어진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왕 한 사람의 특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왕조에 주어진 약속이 단지 죽어 사라지는 왕들의 연속으로만 끝났다면, 그 약속은 어떤 방식으로 영원하고 믿음직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통해 그 약속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썩음으로 돌아가지 않으시는 분으로 일으켜지셨고, 그러므로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확고한 성취를 얻습니다.
이 약속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바울은 시편 16편으로 넘어갑니다.
다윗은 썩음을 겪었지만
「그러므로 다른 데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거룩한 이가 썩음을 겪게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사도행전 13:35 · 본디새김
시편 16편은 본래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와 몫으로 삼는 사람의 신뢰를 노래합니다. 시편의 화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죽음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하며 한 가지 사실을 근거로 듭니다.
「다윗은 자기 세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긴 뒤에 잠들어 자기 조상들 곁에 놓였고 썩음을 겪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3:36 · 본디새김
그렇다면 「당신의 거룩한 이가 썩음을 겪게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다윗 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으키신 이는 썩음을 겪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13:37 · 본디새김
이것은 시편 16편의 원래 의미를 지워 버리는 읽기가 아닙니다. 시편은 본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 그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더욱 결정적인 의미를 얻었다고 이해했습니다. 다윗이 노래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다윗 개인의 생애를 넘어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차원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썩음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약속된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33절의 「일으켜」에 사용된 아나스테사스는 죽은 사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도, 어떤 사람을 일으켜 세워 사명을 맡긴다는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3장 22절과 7장 37절에서는 모세가 장차 하나님이 일으키실 예언자를 말할 때 이 동사가 사용됩니다. 시편 2편의 아들 선언을 부활과 높이심을 통한 예수님의 왕권이라는 맥락에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시편 16편을 근거로 한 바울의 논증은 사도행전 2장 25–32절에서 베드로가 오순절에 제시했던 논증과도 연결됩니다. 베드로는 다윗이 죽었고 그의 무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 시편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했고, 바울 역시 같은 방향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었던 모든 일에서
바울의 설교는 이제 역사적 설명에서 청중을 향한 직접적인 선언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이분을 통해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었던 모든 일에서,」사도행전 13:38 · 본디새김
바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했으며, 성경의 약속을 해설했습니다. 「그러므로」로 그 모든 이야기가 한 가지 소식으로 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이 선언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이분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사도행전 13:39 · 본디새김
용서와 의롭게 됨은 같은 말일까?
두 표현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낱말은 아닙니다. 「의롭게 됩니다」는 의롭다고 인정되거나, 법적 판단의 문맥에서는 무죄로 인정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었던 모든 일」과 함께 쓰였으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지위와 관계된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의 용서가 죄와 그 책임의 문제를 다룬다면, 의롭게 됨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떤 판단을 받는가 하는 문제까지 포함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사실까지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었다는 말은 율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하면 바울이 앞에서 길게 설명한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무가치하거나 악한 것이라고 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신 역사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또한 구약의 율법 안에도 속죄와 용서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레위기 4–5장). 따라서 바울이 이스라엘의 신앙에는 죄의 용서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율법의 한계를 구체적인 죄목 하나하나로 열거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의로움의 범위가 율법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데까지 미친다고 강조합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라는 말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의 구별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시작했지만 그 역사를 통해 전하는 구원의 소식을 이스라엘에게만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의 청중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 약속이 가져온 구원의 혜택은 민족적 경계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을 듣고도 믿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설교를 기쁜 소식만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예언서에 있는 말이 여러분에게 닥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40절) 하고 경고하며 하박국 1장 5절을 인용합니다.
「『업신여기는 자들아, 보아라. 놀라고 사라져 버려라. 내가 너희 날들에 한 가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너희에게 낱낱이 일러 주어도 너희가 도무지 믿지 않을 일이다.』」사도행전 13:41 · 본디새김
하박국은 유다 사회의 불의와 폭력을 보며 하나님께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갈대아 사람들, 곧 바빌로니아를 일으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하박국 1:5–11). 하나님이 불의를 심판하시기 위해 또 다른 강대국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은 하박국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자신의 시대에 닥칠 바빌로니아의 심판을 말하고 있었고, 바울은 그 말씀을 자신의 청중에게 적용합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모인 사람들이 곧 침략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지금 이루신 일을 듣고도 업신여기며 믿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안식일마다 예언서를 읽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 역시 예언서를 읽고 그 뜻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알아들을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들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일을 믿지 못하고 밀쳐 낼 것입니까?
바울의 설교는 바로 이 질문을 남기며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율법과 의롭게 됨의 문제는 바울이 다른 편지들에서 발전시키는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로마서 3장 20–26절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사람이 없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고, 갈라디아서 2장 16절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관련하여 의롭게 됨을 논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3장의 짧은 선언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모든 논의와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특히 바울 서신에서 논쟁되는 「율법의 행위」의 정확한 범위와 의미를 이 두 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박국 인용에서, 히브리어 전승에서는 「민족들 가운데서 보아라」라는 의미로 읽히는 부분이 그리스어에서는 「업신여기는 자들아, 보아라」로 나타나며, 사도행전의 인용은 이 그리스어 전승을 따릅니다.
말씀을 더 듣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갈 때에 사람들이 이 말이 다음 안식일에도 자기들에게 전해지기를 간청했다.사도행전 13:42 · 본디새김
우리는 사도행전 13장의 후반부를 흔히 유대인들의 반대와 이방인 선교의 시작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두가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약속된 구원자이시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였고, 더 듣기를 원했습니다.
회당 모임이 흩어진 뒤에 유대 사람들과 하나님을 받드는 유대교 개종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다. 두 사람은 그들에게 말을 건네며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다.사도행전 13:43 · 본디새김
따라서 이 회당에서 벌어진 일을 유대인은 모두 복음을 거부하고 이방인만 믿었다는 단순한 구도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굳게 먹고 주님 곁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11:23). 이제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합니다. 바울이 조금 전 선포한 것은 믿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은혜는 단지 복음을 처음 받아들이게 하는 출발점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자리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들은 복음을 새로운 지식으로 간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안식일이 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거의 온 도시가 모였을 때
다음 안식일에는 거의 온 도시가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다.사도행전 13:44 · 본디새김
처음에 바울이 말씀을 전한 곳은 회당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자 그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옵니다. 처음 회당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더 넓은 도시의 사람들이 주의 말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본 일부 유대 사람들은 시샘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유대 사람들은 무리를 보고 시샘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울이 하는 말에 맞섰다.사도행전 13:45 · 본디새김
여기서 「유대 사람들」은 도시의 모든 유대인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많은 유대인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다고 기록했으니, 본문 안에서도 유대인들의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왜 시샘했는지 속마음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회당 밖으로까지 바울의 영향력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고, 그의 가르침이 자신들이 이해하는 신앙과 충돌한다고 여겼을 수도 있지만, 그런 동기들은 가능한 해석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이 많은 무리를 보고 시샘했으며 바울의 말을 반박하고 모독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회당 바깥의 도시 전체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종교적 경계와 권위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먼저 전해져야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먼저 전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것을 밀쳐 내고 스스로를 영원한 생명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니, 보십시오, 우리는 이방 사람들에게로 돌아섭니다.」사도행전 13:46 · 본디새김
왜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 사람들에게 먼저 전해져야 했을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설교도 하나님이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다윗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따라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하는 것은 단순한 전도 전략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복음 자체의 역사적 성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건너뛰고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회당에 들어갔고, 이스라엘의 성경으로 예수님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거부하자 이제 이방 사람들에게로 돌아선다고 말합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앞으로 다시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4장 1절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도착하자 다시 유대 사람들의 회당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방 사람들에게로 돌아섭니다」라는 말은 이 지역에서 말씀을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구체적인 대응으로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 선언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복음이 이방 세계로 확대되는 흐름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스로를 영원한 생명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결정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밀쳐 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 행동을 자신들이 영원한 생명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도덕적 가치가 낮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용서와 의롭게 됨의 소식을 밀쳐 내는 것은 그 소식이 가져오는 생명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반대자들의 행동에 대한 판단입니다.
「내가 너를 이방 사람들의 빛으로 세웠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이방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이사야 49장 6절을 인용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이방 사람들의 빛으로 세웠다. 네가 땅끝까지 이르는 구원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사도행전 13:47 · 본디새김
이사야 49장에서 이 말씀은 본래 누구에게 주어진 것일까요?
이사야가 말한 종의 사명
이사야 49장에는 여호와야훼의 종이 등장합니다. 그 종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받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의 회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해야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49장 3절에서는 종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지만, 5–6절에서는 그 종이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명도 맡습니다. 따라서 이 종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연결되면서도 그 공동체를 대표하거나 회복시키는 특별한 인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가 말하는 종의 사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읽어 왔습니다. 누가복음 2장 32절에서도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두고 이방 사람들에게 계시를 가져올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사야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들이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 구원이 여러 민족에게 이르도록 예수님의 증인으로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서 자체에서 종과 공동체의 사명이 연결되는 방식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명을 함께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바울과 바나바가 지금 이방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일은 그 약속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대안으로 이방인들에게 간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의 약속을 근거로 듭니다. 이방 선교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차선책이 아닙니다. 이 장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말씀을 거부한 사건이 계기가 되지만, 그 방향 자체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약속이 품고 있던 구원의 범위가 드러나는 일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사람들
이방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며 주의 말씀을 찬양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이들은 다 믿었다.사도행전 13:48 · 본디새김
앞에서 바울의 말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방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기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이 그들에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기쁨 바로 뒤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이들은 다 믿었다」는 문장을 붙입니다. 이 구절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믿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할 때 자주 논의되어 왔기에,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과 그 구절을 바탕으로 발전된 신학적 설명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해진」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정해진」의 뜻은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하셨다는 읽기,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준비나 성향을 갖게 되었다는 읽기, 복음 선포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생명을 향해 배치되거나 준비되었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이 차이는 하나님의 구원 선택이 인간의 믿음에 앞서는가 하는 오랜 논쟁과 맞닿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하나님을 암묵적인 행위자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수동태 해석이 강한 근거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인간의 믿음과 자유로운 응답이 그 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는지까지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만으로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모든 논쟁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46절에서 바울은 말씀을 밀쳐 낸 사람들의 행동과 책임을 지적했고, 48절에서 누가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사람들이 믿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응답이 나란히 등장하지만, 누가는 이 둘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된 사건의 중심은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 자격을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 전체에 퍼져 나갔다.사도행전 13:49 · 본디새김
파포스에서는 한 사람이 총독을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려 했지만, 총독은 주의 가르침에 놀라 믿었습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도 일부 사람들이 바울의 말에 맞섰지만, 주의 말씀은 그 지방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누가는 복음의 확장을 전도자의 개인적인 설득력이나 정치적인 지원으로 설명하지 않고, 거부와 방해가 있었음에도 주의 말씀이 계속 전해졌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확장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안전한 환경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정해진」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테타그메노이입니다. 기본 동사 타소는 정렬하거나 배치하거나 정한다는 뜻을 가지며, 이 자리의 형태는 완료 수동태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사람들」 또는 「영원한 생명을 받도록 지정된 사람들」로 이해되고, 전통적인 예정론적 해석은 이 구절을 하나님의 구원 선택이 인간의 믿음에 앞선다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다른 해석들은 동사의 의미 범위와 문맥을 고려하여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준비나 성향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려 하지만, 「자기 마음을 스스로 정했다」는 식의 번역은 그리스어 동사의 일반적인 용법과 수동태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복음 선포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생명을 향해 배치되거나 준비된 것으로 보는 읽기는 널리 받아들여진 정설이 아니라 학술적인 대안입니다.
쫓겨난 전도자들, 기쁨으로 가득한 제자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받드는 지위 높은 여자들과 도시의 유력자들을 부추겼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를 일으켜 그들을 자기들의 지역에서 내쫓았다.사도행전 13:50 · 본디새김
박해는 회당 안의 말다툼에 머물지 않고, 도시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동원됩니다. 반대자들은 도시의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말씀의 확산을 막으려 했고, 그 결과 전도자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을 향해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사도행전 13:51 · 본디새김
이 행동은 갑작스러운 분노의 표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9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도시에서 나올 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10–11도 비슷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행동을 실천하여, 말씀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엄중한 증언을 남깁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들이 거부당한 뒤 이고니온으로 떠났다고 기록할 뿐, 그 도시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영원히 배제되었다고 판결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의 보냄을 받아 길을 떠났고, 이제 그들은 박해 때문에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기뻐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도행전 13장은 이런 문장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기쁨과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사도행전 13:52 · 본디새김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기뻐하며 도시를 떠났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제자들」, 곧 문맥상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뒤 그 지역에 남아 있던 신자들이 기쁨과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박해가 없던 평온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쫓겨났고, 도시의 유력자들이 반대에 나선 상황입니다.
그 기쁨을 단지 마음속의 긍정적인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예수님에게서 이루셨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으며,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와 의롭게 됨이 주어진다는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는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말씀을 듣고 두 사람을 떠나보냈습니다. 마지막에는 다른 안디옥에서 새로운 제자들이 성령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결말을 바울과 바나바의 추방이라는 실패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여러 도시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들이 종교적인 후원이나 공동체 활동에 영향을 ��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50절만으로 그 여성들이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떻게 설득당했는지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이 보여 주는 복음의 길
사도행전 13장은 성령의 보냄,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 거부 속에서도 넓어지는 말씀의 확장을 하나로 묶습니다. 그 세 흐름의 중심에는 같은 분이 계십니다.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일을 위해 보내시고, 바울은 성경의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합니다. 퍼져 나간 말씀은 어떤 종교 운동의 세력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고 예수님 안에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된다는 소식입니다. 그렇다고 복음이 결국 퍼져 나갔으므로 엘루마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방해한 일이나 바울과 바나바가 받은 박해가 옳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며, 전도자들이 거부당할 때마다 반드시 더 많은 사람이 믿게 된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누가는 사람들의 방해가 있었지만 주의 말씀이 계속 전해졌다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여 줍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은 원했던 대로 그들을 도시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한 주 전만 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자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남아 있습니다. 말씀을 전해 준 이들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지만, 버려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발걸음은 이고니온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는 이미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전도자들은 쫓겨났지만, 제자들은 기쁨과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