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신으로 떠받들다가 돌로 치다
사도행전 14장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급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자, 사람들은 그를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나바는 제우스,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부르며 황소를 끌고 와 제사까지 지내려 합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외치며 가까스로 그들을 말립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집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끌어냅니다. 조금 전까지 신이라고 떠받들던 사람을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할 만큼 심하게 공격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누가는 군중의 마음이 바뀌는 모든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들은 바울이 행한 놀라운 일을 보았지만, 그 일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을 알아보게 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신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놀라운 일을 목격하는 것과 그 일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바울이 돌에 맞은 곳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나고, 다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있는 지역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 새로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도 있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떠난 뒤에도 그 지역의 제자들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돌아갑니다.
사도행전 14장은 기적과 박해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일은 중요한 시작이지만, 그들이 계속 믿음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도시가 갈라져도 은혜의 말씀은 전해진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뒤 이고니온에 도착합니다.
이고니온에서도 두 사람은 함께 유대 사람들의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많은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4:1 · 두루새김
앞선 도시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일부 유대 사람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로 돌아서겠다고 선언했습니다(13:46). 그런데 다음 도시에 도착하자 다시 유대 사람들의 회당으로 들어갑니다. 앞선 선언이 유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영구적인 결별 선언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의 관계를 전하려 합니다. 동시에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는 어느 쪽이 더 많이 믿었는지 비교하지 않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 두 집단 모두에서 많은 사람이 믿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말씀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 사람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을 부추겨 믿는 사람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했습니다.사도행전 14:2 · 두루새김
이 장의 갈등을 유대 사람과 다른 민족 사람의 대립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유대 사람 가운데도, 그리스 사람 가운데도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반대한 것은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부 유대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도시 안에서 출신과 믿음에 대한 반응이 복잡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곧장 떠나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주님을 의지하여 거리낌 없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하여, 자신의 은혜에 관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사도행전 14:3 · 두루새김
앞선 도시에서 쫓겨났고 이고니온에서도 적대적인 분위기가 생겨나는데, 오히려 오랫동안 머뭅니다. 누가는 그들의 속마음을 설명하지 않고, 다만 주님을 의지하여 거리낌 없이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누가가 누구를 주어로 세우는지 보아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은혜에 관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셨고, 그것이 두 사람을 통해 일어난 표징과 놀라운 일들로 나타났습니다. 표징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대단함을 보여 주기 위한 별도의 공연이 아닙니다.
누가는 그 말씀을 「은혜에 관한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민족적 지위나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운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도시가 둘로 갈라지다
그러나 표징이 일어났다고 해서 갈등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라졌습니다. 한쪽은 유대 사람들 편에, 다른 쪽은 사도들 편에 섰습니다.사도행전 14:4 · 두루새김
이 장면은 기적을 보이면 누구나 믿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었고, 다른 사람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렇다고 갈등 자체가 복음의 진실성을 증명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반대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주장이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은 바나바와 바울을 「사도들」이라고 부릅니다. 두 사람은 성령의 부르심을 따라 보냄받았고, 주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도시의 갈등이 위험한 행동으로 발전합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지도자들과 함께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치려 하자, 두 사람은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합니다. 앞에서는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이제는 떠납니다. 그들은 반대가 생길 때마다 무조건 도망가지도 않고, 어떤 위협 앞에서도 반드시 그 자리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이 그 판단 기준을 분명히 밝히지는 않지만, 그들은 실제 상황에 따라 머물거나 이동합니다.
그런데 이동의 목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들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14:7). 그들은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갔지만, 말씀을 전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루스드라에서 이 장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일반적으로 열두 사도를 「사도」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 베드로는 유다를 대신할 사람의 자격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처음부터 함께하고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는데, 바나바와 바울은 그 열두 사람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누가는 14장 4절과 14절에서 이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누가가 열두 사도의 특별한 위치를 유지하면서도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이야기 안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열두 사도와 동일한 자격을 뜻하는지, 특별한 사명을 위해 보냄받은 사람이라는 넓은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
루스드라에는 두 발에 힘이 없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 두 발에 힘이 없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해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사도행전 14:8 · 두루새김
누가는 그의 상태를 세 가지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현재 두 발에 힘이 없고,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상태였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걸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잠시 병을 앓다가 회복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묘사는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만난,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3:2). 그 사람은 베드로가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자 뛰어 걷기 시작했습니다(3:6–8). 이제 바울을 통해 같은 종류의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두 이야기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그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고쳤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누가는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하셨다고 설명했습니다(14:3).
바울이 본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람은 바울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에게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사도행전 14:9 · 두루새김
그가 어떤 말을 얼마나 들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를 고치기 전에 그가 말을 듣고 있었고, 바울이 그에게 믿음이 있음을 보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나을 것이라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 소조(σῴζω)는 문맥에 따라 구원받다, 위험에서 건짐받다, 병에서 낫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자리에서는 몸의 병이 낫는 것이 직접적인 의미이지만, 같은 동사가 죄와 죽음에서의 구원을 말할 때도 사용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병의 회복이 곧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삶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 믿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모든 병자가 충분한 믿음을 가지면 반드시 낫는다는 원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한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세요!」 그 사람은 뛰어올라 걷기 시작했습니다.사도행전 14:10 · 두루새김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던 사람이 뛰어오릅니다.
누가는 그가 어떻게 첫걸음을 배웠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뛰어올라 걷기 시작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바울이 기대했을 법한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3장과 14장의 두 사건을 묘사하면서 「태어날 때부터」라는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 일어나라는 명령, 그 사람이 뛰며 걷는 모습까지 서로 대응하도록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사람을 신으로 만들다
무리는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말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신들이 사람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왔어!」사도행전 14:11 · 두루새김
사람들은 그 사건을 자신들이 알고 있던 신들의 세계 안에서 이해합니다.
그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앞장서서 말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4:12 · 두루새김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소식을 전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나바가 왜 제우스라고 불렸는지는 누가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거나 외모가 위엄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본문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아닙니다. 다만 높은 지위의 제우스와 소식을 전하는 헤르메스라는 이름을 함께 붙였다는 데서, 사람들이 두 사람을 짝을 이루어 찾아온 신들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종교 문화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도시 앞에 모셔진 제우스를 섬기는 제사장이 황소들과 화관을 가져와 실제로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루가오니아 말이라는 작은 단서
군중은 「루가오니아 말로」 외쳤습니다. 루가오니아는 오늘날 튀르키예 중남부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내륙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지역 고유의 언어가 있었고, 그리스어도 넓은 지역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사용하던 언어와 사람들이 흥분하여 외친 언어가 달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들이 자신들을 신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에 제사 준비를 즉시 막지 못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군중은 이미 외쳤고 제사장은 황소까지 준비했는데, 두 사람은 14절에 이르러서야 뛰어들어 말립니다. 그러나 누가는 두 사람이 루가오니아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언어 차이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언어의 차이는 더 깊은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행한 일을 자신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신앙과 문화의 틀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을 통역하면 해결되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신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 8권에서 제우스와 헤르메스에 해당하는 유피테르와 메르쿠리우스가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가난한 노부부 바우키스와 필레몬은 따뜻하게 맞이했고, 결국 노부부는 보상을 받고 거절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당시의 종교적 상상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웃한 프리기아 지역을 배경으로 하며,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 이야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아시아에서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함께 숭배되었다는 비문과 조각 자료도 있지만, 그것들이 루스드라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을 어느 정도까지 설명하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나바와 바울은 겉옷을 찢고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외칩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사도행전 14:15 · 두루새김
옷을 찢는 행동은 고대 유대 사회에서 슬픔과 충격,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대한 격렬한 반응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신의 영광을 돌리려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중심이 무너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행한 사람이 왜 신이 아닌가?
「여러분과 다르지 않은」은 같은 본성이나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군중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겸손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3장에서 베드로는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친 뒤 자신들의 힘이나 경건으로 그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자신들을 바라보느냐고 물었습니다(3:12). 10장 26절에서는 자신에게 엎드린 고넬료를 일으키며 자신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루스드라에서는 그 문제가 더욱 선명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해야 할 일은 자신들에게 모이는 영광을 조금 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이 향해야 할 대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로 시작했습니다. 조상들을 선택하신 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신 일, 광야,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루스드라에서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성경을 직접 인용하지도 않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청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는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듣고 있었습니다. 지금 눈앞의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선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이 자신들이 섬기던 신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의 내용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합니다. 다만 회당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시작했고, 루스드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서 시작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지 진지하게 고려하는 일입니다.
왜 「살아 계신 하나님」인가?
예레미야 10장 10절은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그 앞뒤에서 사람들이 만든 우상과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제우스를 섬기는 제사장이 황소들과 화관을 가져온 자리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제사를 받을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의 모습에 갇혀 계시지 않고, 지금도 세상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비와 곡식과 열매가 맺히는 철이 증언하는 것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지난 여러 세대 동안 모든 민족이 저마다 자기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말합니다(14:16).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베푸셔서 자신을 알 수 있는 증거를 남기셨습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고 곡식과 열매가 맺히는 철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먹을 것을 넉넉히 주시고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셨습니다.」사도행전 14:17 · 두루새김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을 내버려 두셨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 증거는 비와 곡식과 열매가 맺히는 철, 먹을 것과 기쁨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비는 생존과 바로 연결된 문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비와 곡식과 열매가 맺히는 철이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단지 제우스보다 하나님이 더 뛰어난 비의 신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은 여러 신 가운데 더 큰 능력을 가진 한 신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아남을 만큼의 음식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먹을 것을 넉넉히 주시고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의 선한 것들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죄의 용서에 관한 복음을 모두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는 그들이 루스드라에서 전한 복음의 모든 내용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 짧은 연설에 예수님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7절에서 누가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15절에서도 두 사람은 「우리는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사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서야 무리를 겨우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습니다.사도행전 14:18 · 두루새김
그들은 겨우 제사를 막았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운 일을 자신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방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그 일을 통해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운 사건을 인정하거나 종교적인 열정을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건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높은 평가는 정작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려는 복음을 가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영광을 거절해야 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바울을 신으로 높이지 않습니다.
그를 돌로 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0장 11절과 시편 146편 6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사도행전 14장은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는 성경의 믿음을 바탕으로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출발합니다. 또 제우스는 하늘과 날씨를 다스리는 신으로 여겨졌고, 소아시아의 지역 신앙에서는 비와 풍요를 베푸는 신적인 존재와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와 곡식을 언급한 것은 청중이 신들에게 기대하던 은혜의 실제 근원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돌에 맞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 사람들이 와서 무리를 설득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돌로 친 뒤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끌어냈습니다.사도행전 14:19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신으로 여겨지던 바울이 돌에 맞아 쓰러집니다.
누가는 다른 도시에서 온 유대 사람들이 무리를 설득했다고 기록합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처음부터 바울을 죽이려 했던 것은 아니며, 제사를 지내려 했던 사람들과 돌을 던진 사람들이 얼마나 겹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같은 도시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높여지기도 하고, 죽임당할 만큼 미움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두 상황에서 전한 복음이 달라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이라고 부를 때 그 영광을 거부했고,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에도 복음을 거두어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사람들의 칭찬과 적대감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일까?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서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 날에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습니다.사도행전 14:20 · 두루새김
본문은 그렇게 단정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끌어냈다고 말할 뿐, 바울이 실제로 죽었다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예수님의 부활이나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일과 같은 사건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죽었다고 여겨질 정도의 폭력을 당했고, 다시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바울이 걷지 못하던 사람에게 한 말도 「일어서세요」였습니다(14:10). 앞에서는 바울이 다른 사람을 일으켰고, 이제는 바울 자신이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는 큰 능력의 통로로 쓰였지만, 그 자신은 돌에 맞아 쓰러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의 현실이 이제 바울의 몸에 드러납니다.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이 그가 전하는 복음을 무효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바울을 둘러선 제자들
앞에서는 무리가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바울 곁에 모여 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기도했는지, 몸을 돌보았는지 기록하지 않지만, 그들이 바울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루스드라에도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오해하고 돌로 친 사건들만 있었다면, 그곳에는 아무런 공동체도 생기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있고, 그들이 바울을 둘러서 있습니다.
바울은 일어나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다음 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납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복음을 전하는 여정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선택을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일어서세요」와 20절의 「일어나」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의 다른 형태입니다. 누가가 두 장면이 서로 맞물리도록 일부러 이런 표현을 썼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두 장면이 같은 이야기 안에 놓이면서 드러나는 대비는 인상적입니다.
왜 자신을 돌로 친 도시로 돌아갔을까?
두 사람은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사도행전 14:21 · 두루새김
더베에서는 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안전한 길을 찾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들은 왔던 길을 되짚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박해를 받아 쫓겨났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돌로 치려는 움직임 때문에 피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 도시들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하고 계속 믿음을 지키라고 권했습니다.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고난을 거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사도행전 14:22 · 두루새김
그들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을 위해 돌아갔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믿게 하는 일만이 그들의 사명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굳세게 하고」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믿음 안에서 굳게 서도록 돕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평온한 삶을 약속하지 않고,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현실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고난을 겪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 말씀을 잘못 읽으면 많이 고통받을수록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거나, 충분한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조금 전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14:3). 따라서 22절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고난이라는 공로를 추가한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실제로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제자들 역시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언제나 세상에서 환영받는 길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은 것입니다.
9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울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보여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로 넓어집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신자가 반드시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돌에 맞거나 감옥에 갇혀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특정한 고난의 형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을 수 있다는 현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
이미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지 않은 것일까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일하는 현실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완전히 드러날 미래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22절은 이 가운데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아직 완성된 영광의 상태가 아닙니다. 고난이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거짓이 되거나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님께서도 고난받으시고 죽임당하셨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살리셨습니다.
바울이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고난의 길은 그리스도의 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우다
두 사람은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기도한 뒤, 그곳의 믿는 사람들을 그들이 믿어 온 주님께 맡겼습니다.사도행전 14:23 · 두루새김
바울과 바나바는 새 신자들을 각자 믿는 사람으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여기서 장로는 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책임을 맡아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다만 이 장의 「장로」를 훗날 발전된 교회의 모든 직분과 그대로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그들이 어떤 권한을 가졌는지, 몇 명씩, 어떤 방식으로 뽑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필요했던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가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제자들이 말씀을 배우고 서로 돌보며, 어려움 가운데 믿음을 지키도록 도울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많은 신자가 모인 집단이 아니라, 함께 믿고 배우고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공동체를 자신들의 소유로 여기지 않습니다. 지도자를 세우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한 뒤 그들이 믿어 온 주님께 그들을 맡깁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만, 그 공동체를 끝까지 지켜 주실 분은 자신들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의 목적은 그들의 삶을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어 온 주님께 계속 속하여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일을 마친 뒤 다시 길을 떠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의 「야 합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어떤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나타내는 말로, 9장 16절의 「받아야 하는지」에도 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두 면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시고, 누가복음 22장 18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미래를 바라보십니다. 또 23절의 「세웠습니다」에 사용된 동사 케이로토네오는 원래 손을 들어 투표하는 행위와 관련된 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한 절차와 관계없이 선택하거나 임명한다는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낱말만으로 장로들이 교인들의 투표로 뽑혔는지, 바울과 바나바가 직접 임명했는지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의 문은 누가 열었는가?
두 사람은 비시디아를 지나 밤빌리아에 도착합니다. 버가에서 말씀을 전한 뒤 앗달리아로 내려가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이 아니라, 처음 두 사람을 떠나보냈던 시리아의 안디옥입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이곳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져 그 일을 하러 떠났고, 이제 그 일을 마쳤습니다.사도행전 14:26 · 두루새김
13장 3절에서 안디옥의 공동체는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떠나보냈습니다. 이제 누가는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져 떠났던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 반대에 부딪혔고, 도시에서 쫓겨났으며,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은 줄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보냄받아 행해야 했던 복음 전도와 제자를 세우는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일
두 사람은 도착하자 교회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일도 전했습니다.사도행전 14:27 · 두루새김
실제로 길을 걸은 사람, 말씀을 전하고 박해를 겪은 사람, 걷지 못하던 사람에게 일어서라고 말한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일을 알립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서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하셨기 때문에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은혜에 관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자신들을 신으로 높이려는 사람들을 말리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선포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열린 문
「믿음의 문」. 그 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겼다는 말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 돌아왔으며, 그들 가운데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합니다. 루스드라에서처럼 사람들의 반응이 거칠고 혼란스러웠지만, 결국 그곳에도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모든 사람이 환영하는 성공적인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믿는 사람들이 생기며, 공동체가 세워지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여정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람들이 남긴 것
사람의 평가와 권력은 빠르게 바뀝니다. 루스드라의 무리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높이려 하다가,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설득되자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들을 높이는 사람들에게 예배받기를 거부했고,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떠난 뒤에도 제자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돌아가,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우고 그들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안디옥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에게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듣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경험했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얼마나 높이느냐가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얼마나 바르게 알아보느냐입니다.
안디옥은 바나바와 사울이 성령의 부르심을 따라 떠났던 자리입니다. 누가는 그들의 보고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일, 그리고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일을 남겨 놓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지냈습니다.사도행전 14:28 · 두루새김
그들은 다시 떠날 계획을 발표하지 않습니다. 긴 여정을 마친 사람들이 자신들을 떠나보냈던 공동체로 돌아와, 이제는 그곳의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문은 열렸고, 말씀은 전해졌으며, 두 사람은 다시 제자들 곁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