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주변 나라들의 죄
국경을 넘는 여호와야훼의 포효
아모스서는 뜻밖의 방향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가 정작 처음 입을 열어 심판을 선고하는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다마스쿠스, 가자, 두로, 에돔, 암몬입니다.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이 차례로 불려 나옵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겼다는 말도, 이스라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전쟁에서 저지른 잔혹 행위, 사람을 사로잡아 넘긴 일, 형제에게 품은 끝없는 증오가 고발됩니다.
아모스 1장에서 여호와야훼가 문제 삼으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앞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입니다.
아모스의 말은 분명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습니다(1:1).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먼저 들어야 합니까?
그 물음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아모스는 서둘러 대답하지 않고, 여호와야훼의 목소리가 주변 세계를 차례로 지나가게 합니다.
양을 기르던 사람에게 들려온 사자의 소리
아모스는 자신을 왕궁이나 성전의 인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첫 구절은 그가 드고아에서 양을 기르는 이들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 유다 산지에 있는 지역입니다. 아모스가 활동한 시기는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통치 시절, 대체로 기원전 8세기에 해당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흔히 여로보암 2세라고 부르는 왕입니다. 열왕기하 14:25–27에 따르면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잃었던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성공이 곧 그 사회의 올바름을 증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모스서가 앞으로 드러낼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모스 자신도 나중에 자신이 양을 기르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사람이며, 여호와야훼가 자신을 데려다가 예언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7:14–15). 그런데 1:1은 아모스가 전한 내용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먼저 「아모스의 말」이라고 하고, 이어서 그가 이스라엘에 관해 「본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계시를 말로 전합니다. 보았던 것을 말한다는 이 표현은, 독자가 앞으로 듣게 될 메시지가 아모스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지진보다 먼저 울린 소리
첫 구절은 이 모든 일이 「지진이 나기 두 해 전에」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어지는 2절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진동을 묘사합니다.
그가 말했다. 「여호와야훼가 시온에서 포효하고 예루살렘에서 그 목소리를 낼 것이다. 목자들의 풀밭이 애통하고 갈멜산 꼭대기가 말라 버릴 것이다.」아모스 1:2 · 본디새김
아모스 3:8은 사자의 포효와 예언자가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나란히 놓습니다. 그러므로 1:2의 포효는 단순히 큰 목소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듣는 이가 자신의 안전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게 만드는 소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유다와 정치적으로 분리된 왕국이며, 벧엘과 단에 독자적인 종교 중심지를 두고 있었습니다(열왕기상 12:26–30). 하지만 아모스가 전하는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는 북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 왕이 세운 정치적·종교적 경계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갈멜산은 비옥함과 풍요로움을 떠올리게 하는 곳입니다(이사야 35:2). 그런 산마저 마른다는 것은 가장 풍요로운 곳도 여호와야훼의 심판 앞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의 삶과 가까운 풍경이 여호와야훼의 말씀 앞에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제 그 포효가 구체적인 나라들을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1:1에서 양을 기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노케드(נֹקֵד)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들판에서 양 몇 마리를 돌보는 가난한 목동을 뜻한다고 한정할 수 없습니다. 열왕기하 3:4에서는 많은 양을 소유하고 공급하던 모압 왕 메사를 묘사할 때 같은 계열의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아모스의 직업만으로 그의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적 신분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훨씬 뒤의 스가랴 14:5도 웃시야 시대의 지진을 사람들이 피했던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모스 1장은 그 지진이 아모스의 예언을 입증하기 위해 특별히 일어났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선 예언의 시점을 표시하는 역사적 기억입니다.
다마스쿠스 — 사람을 곡식처럼 타작한 나라
첫 번째 심판 대상은 이스라엘 북동쪽의 아람 왕국입니다. 수도 다마스쿠스가 나라 전체를 대표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다마스쿠스의 세 가지 범죄 때문에, 또 네 가지 때문에, 나는 그 벌을 거두지 않겠다. 그들이 쇠 타작기로 길르앗을 타작했기 때문이다.」아모스 1:3 · 본디새김
「세 가지 범죄 때문에, 또 네 가지 때문에」라는 표현은 실제 범죄의 수가 정확히 네 개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 가지에서 네 가지로 넘어가는 순간, 독자는 범죄가 더해져 이제 더는 지나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각 나라의 잘못 네 가지를 모두 열거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하나의 대표적인 범죄를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길르앗입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지역으로, 아람과 이스라엘이 충돌하던 곳입니다. 열왕기하 10:32–33은 하사엘이 요단 동쪽의 이스라엘 영토를 공격했다고 기록하며 길르앗을 언급합니다. 아모스의 고발은 이러한 역사적 전쟁 상황과 맞닿아 있습니다.
타작은 수확한 곡식의 낟알을 분리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작업입니다. 쇠 타작기는 곡식을 강하게 눌러 부수는 도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타작의 대상은 곡식이 아니라 길르앗입니다.
아람은 전쟁에서 상대방을 물리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과 땅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곡식을 처리하듯 인간을 다루는 행위가 심판의 이유로 제시됩니다.
타작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불
4–5절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하사엘의 집, 벤하닷의 성채, 다마스쿠스의 빗장으로 이어집니다.
하사엘은 아람의 왕이었고, 벤하닷이라는 이름도 아람의 왕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열왕기하 8:7–15; 13:3, 24). 따라서 하사엘의 집과 벤하닷의 성채는 개인의 주택이라기보다 아람 왕조와 그 권력을 나타냅니다.
다마스쿠스의 빗장은 성문을 지키는 방어 장치입니다. 여호와야훼가 그 빗장을 부수신다는 것은 왕국의 안전을 보장하던 방어력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전쟁의 잔혹함을 통해 권력을 넓히고 유지하던 체제가 바로 그 권력의 기반부터 무너집니다.
마지막에는 아람 백성이 기르로 유배된다고 말합니다.
이 악행들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그저 승자의 성공담으로 남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것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일반적인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아모스 1장은 특정한 나라들의 반복된 폭력에 대해 내려지는 심판을 말합니다. 그 심판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인간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지혜문학에는 숫자를 하나씩 늘리면서 강조하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잠언 30:18–19에서는 세 가지와 네 가지를 연결하고, 잠언 30:21–23에서도 같은 형식을 사용합니다. 히브리어 표현 로 아시베누는 직역하면 「내가 그것을 돌이키지 않겠다」에 가깝습니다. 무엇을 돌이키지 않는가 하는 목적어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뒤따르는 심판의 결정을 가리킨다고 이해하지만, 해당 나라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의 「그 벌을 거두지 않겠다」는 문맥상 자연스러운 번역입니다. 문제는 「쇠 타작기로 길르앗을 타작했다」는 표현이 실제로 사람들을 쇠 도구로 학살한 행위를 묘사하는지, 아니면 군사적 공격의 극심한 잔혹성을 비유하는지입니다. 두 읽기가 모두 가능합니다. 본문은 정확한 도구의 구조도, 구체적인 처형 방식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웬 골짜기와 벳에덴은 아람과 연관된 지명으로 등장합니다. 정확한 위치와 지칭 대상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특히 원어에서 아웬은 사악함이나 헛됨을, 에덴은 즐거움을 연상시킬 수 있으므로 지명에 풍자적 의미가 겹쳐 있다고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 지명인지 의도적인 별칭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아모스 9:7은 여호와야훼가 아람 사람들을 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말합니다.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아람이 기르로 끌려가는 심판은 그들의 역사적 이동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들립니다. 다만 아모스 1:5 자체는 기르를 목적지로 제시할 뿐 그 의미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자 — 사람을 통째로 빼앗아 넘긴 나라
두 번째 심판은 남서쪽의 가자에 내려집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가자의 세 가지 범죄 때문에, 또 네 가지 때문에, 나는 그 벌을 거두지 않겠다. 그들이 에돔에 넘기려고 포로 무리를 통째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아모스 1:6 · 본디새김
「포로 무리를 통째로」라는 표현은 포로로 잡힌 집단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느 도시의 주민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붙잡혔다는 의미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포로들이 어느 민족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고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고통을 문제 삼으시는 이유는 그들이 어느 민족이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포로로 등장하지만, 그들에게 가해진 일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이름 없는 죄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포로를 거래하거나 타국에 인도하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가가 오갔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모든 경우를 확정적인 상업 거래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자기 삶의 자리에서 강제로 떼어 내어 다른 권력에 넘겼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결과 가자에는 불이 선언됩니다. 그런데 심판은 가자 한 도시에 그치지 않습니다.
8절은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을 차례로 언급합니다. 이들은 가자와 함께 블레셋의 주요 도시들입니다. 하나의 성읍을 대표로 시작한 고발이 블레셋의 정치적 중심지들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특히 「왕홀을 쥔 자」는 통치 권한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야훼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여겼던 권력자들에게 그들의 권력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선고하십니다.
여기서 심판의 불은 성벽과 성채를 향합니다. 가자의 권력을 보호하던 시설들이 오히려 불길의 대상이 됩니다.
두로 — 형제의 약속을 잊은 나라
세 번째로 등장하는 두로는 지중해 연안의 해상 교역 중심지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에서 두로는 전쟁 상대뿐 아니라 교역과 협력의 상대이기도 했습니다.
다윗 시대에 두로 왕 히람은 건축 자재와 기술자를 보냈고(사무엘하 5:11), 솔로몬 시대에는 두 왕 사이에 협력 관계와 언약이 있었습니다(열왕기상 5:12).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두로의 세 가지 범죄 때문에, 또 네 가지 때문에, 나는 그 벌을 거두지 않겠다. 그들이 포로 무리를 통째로 에돔에 넘기고 형제들 사이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아모스 1:9 · 본디새김
두로는 자신들이 맺었던 관계적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사람들을 넘기는 행위가 이미 문제인데, 그 행동은 기존의 신뢰와 약속까지 깨뜨린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은 단순한 건망증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언약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약속이 요구하는 행동을 지속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약속을 알고도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그것을 잊은 것과 같습니다.
두로가 사람을 넘길 때, 그 사람들은 더 이상 언약과 신뢰가 보호하는 이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심판의 기준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공격했는가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져야 하는 책임을 어떻게 저버렸는가로 깊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나라는 가자와 두로가 포로들을 넘긴 목적지였던 에돔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형제는 반드시 혈연관계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고대 왕들 사이의 외교적 관계에서도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9:13에서 히람이 솔로몬을 형제라고 부르는 표현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두로가 저버린 언약은 이스라엘과 맺은 우호 관계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언약의 당사자와 체결 시점을 밝히지 않습니다. 솔로몬과 히람의 언약을 직접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우호 관계나 협약을 뜻할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에돔 — 끝내 놓지 않은 형제에 대한 분노
에돔에 대한 선언은 앞선 나라들과 다르게 들립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에돔의 세 가지 범죄 때문에, 또 네 가지 때문에, 나는 그 벌을 거두지 않겠다. 그가 칼로 자기 형제를 뒤쫓고 자신의 동정심을 없애 버렸으며, 그의 분노가 끝없이 찢어 댔고 그가 자기 격노를 영원히 간직했기 때문이다.」아모스 1:1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과 에돔의 조상 에서는 형제였습니다(창세기 25:24–26; 36:1). 신명기 23:8은 형제인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에돔의 폭력은 단순히 두 적대 국가 사이의 전쟁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형제 관계에 있는 민족이 다른 형제를 칼로 추격한 일입니다.
에돔은 형제를 향해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연민마저 없애 버린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다음에는 분노가 살아 있는 짐승처럼 그려집니다. 「그의 분노가 끝없이 찢어 댔다」는 표현에서 찢는다는 동사는 먹잇감을 찢는 맹수의 행동을 연상시킵니다.
여호와야훼는 사자처럼 포효하시고, 에돔의 분노는 짐승처럼 찢어 댑니다. 여호와야훼의 포효는 폭력을 심판하는 선언인 반면, 에돔의 분노는 형제를 향해 지속되는 파괴적인 행동입니다.
더욱이 에돔은 자기 격노를 「영원히 간직했다」.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고 지켜 온 것으로 묘사됩니다. 마치 잃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을 간직하듯 적개심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에돔의 죄는 화를 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분노가 멈출 수 있는 자리를 스스로 없애 버린 데 있습니다.
에돔을 향한 심판은 데만과 보스라의 성채를 태우는 불로 표현됩니다(1:12). 형제를 끝없이 추격하던 나라에 여호와야훼는 그 나라의 권력도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물론 이것이 어떤 특정 전투나 학살을 가리키는지는 1:11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발은 에돔과 이스라엘 사이의 오래된 관계를 배경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33장의 야곱과 에서의 만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랜 갈등 끝에 에서는 야곱을 만나 달려가 껴안습니다(창세기 33:4). 아모스 1장은 창세기 33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정경 안에서 함께 읽으면, 형제를 만나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달려가 껴안고, 다른 쪽에서는 칼을 들고 뒤쫓습니다.
암몬 — 영토를 넓히기 위해 미래의 생명을 짓밟은 나라
마지막 심판은 암몬을 향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암몬 자손의 세 가지 범죄 때문에, 또 네 가지 때문에, 나는 그 벌을 거두지 않겠다. 그들이 자기 영토를 넓히려고 길르앗의 임신한 여자들을 찢어 갈랐기 때문이다.」아모스 1:13 · 본디새김
다마스쿠스에 대한 고발에서 길르앗은 쇠 타작기로 짓밟힌 지역이었습니다. 이제 암몬의 고발에서도 길르앗이 폭력의 현장으로 등장합니다.
아모스는 하나의 지역이 여러 나라의 확장 욕망 속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모스는 정치적·군사적 목적과 인간의 몸에 가해진 극단적인 폭력을 한 문장 안에 연결합니다. 영토를 넓히려는 목적과 결부된 행위로 고발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국경의 확장은 왕의 힘과 성공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성공을 평가하는 관점을 완전히 바꿉니다.
아모스는 정복한 영토의 넓이가 아니라, 그 영토를 얻기 위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묻습니다.
특히 임신한 여성을 향한 폭력은 현재 살아 있는 사람뿐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까지 공격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미래 세대를 없애려는 의도가 별도로 있었다고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모스가 밝히는 직접적인 목적은 영토 확장입니다. 그러나 임신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그 공격이 인간 생명을 얼마나 철저하게 짓밟았는지를 드러냅니다.
전쟁의 함성 속에서 무너지는 왕의 성읍
암몬에 대한 심판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불로 시작됩니다.
「내가 랍바의 성벽에 불을 붙이겠다. 전쟁의 날에 함성 속에서, 폭풍의 날에 광풍 속에서, 그 불이 그 성채들을 집어삼킬 것이다.」아모스 1:14 · 본디새김
랍바는 암몬의 중심 성읍입니다. 본문은 전쟁과 폭풍의 이미지를 병치하여 성벽이 무너지는 심판의 격렬함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왕 자신이 자기 고관들과 함께 유배되어 갈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아모스 1:15 · 본디새김
다른 사람들의 땅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였던 나라의 왕이 이제 자기 땅을 떠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며 권력을 넓히려 했던 통치자가 자기 권력의 중심지에서 쫓겨납니다.
권력이 크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했던 자도 여호와야훼의 심판 아래서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자기 영토를 넓히려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목적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임신한 여성을 향한 이 잔혹 행위는 열왕기하 8:12에서도 전쟁의 참상으로 언급됩니다. 이 점은 창세기 9:5–6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그 이유로 제시하십니다. 아모스가 창세기의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생명을 대하는 하나님의 관심은 두 본문에서 서로 통합니다. 히브리어 말캄은 「그들의 왕」으로 읽을 수 있지만, 암몬의 신인 밀곰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암몬의 신 밀곰은 열왕기상 11:5에 등장합니다. 다만 1:15에서는 「자기 고관들과 함께」라는 표현이 이어지므로 인간 통치자를 가리킨다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두 해석은 왕권의 몰락이라는 장면과 관련되지만, 신의 유배까지 명시하는지는 읽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왜 이 말씀을 먼저 들어야 했는가
이스라엘은 처음에 심판받는 피고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듣는 청중이 됩니다. 여호와야훼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일을 미워하신다면, 그 기준은 이스라엘 안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행동에도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모스 1장이 명시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열거하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방향으로 읽을 근거를 마련합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의 죄를 듣는 동안, 자신이 서 있는 자리도 돌아보도록 이끌립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보여 주는 하나님의 판단은 민족의 이름이나 권력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행한 폭력이라고 해서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해서 악행이 정당해지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모스 1장을 개인적인 다툼이나 일상의 모든 갈등에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은 우선 나라들이 저지른 전쟁의 폭력과 강제 이주, 언약의 배반과 정치적 잔혹 행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모스 1장은 마지막까지 여호와야훼의 자비나 회복에 대한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왕이 자기 고관들과 함께 유배되는 장면에서 멈춥니다.
처음에는 목자들의 풀밭이 애통하고 갈멜산 꼭대기가 말랐습니다. 그다음에는 나라들의 성벽과 성채가 차례로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마침내 자기 나라의 국경을 넓히려던 왕이 그 국경 밖으로 끌려갑니다.
그 모든 장면의 시작에는 시온에서 들려온 하나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포효 앞에서는 어떤 나라의 성벽도, 어떤 왕의 권력도, 다른 사람에게 가한 폭력을 영원히 감추어 주지 못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