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주변 나라들의 죄
구해 내신 사람들이 사람을 팔다
아모스 2장에는 놀라운 반전이 두 번 일어납니다.
첫 번째는 심판의 대상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주변 나라들을 향하던 고발이 유다를 거쳐 마침내 이스라엘에 도착합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다른 나라의 죄를 듣는 청중이 아닙니다. 이제 자신들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두 번째 반전은 더욱 뜻밖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시던 여호와야훼가 갑자기 자신이 그들에게 해 주셨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십니다.
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가난한 사람들을 팔아넘겼다는 고발 한가운데서 출애굽을 이야기하실까요?
모압 — 죽은 왕의 뼈까지 불태운 나라
아모스 1장에서 시작된 민족들에 대한 심판 선언은 모압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모압을 고발하는 이유는 앞서 등장한 나라들과 조금 다릅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모압의 세 가지 범죄 때문에, 또 네 가지 때문에, 나는 그 벌을 거두지 않겠다.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석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아모스 2: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에돔 자신도 형제를 향한 잔혹한 폭력 때문에 심판을 선고받았습니다(1:11–12). 그런데 이제는 에돔 왕에게 가해진 모압의 행위가 심판의 이유가 됩니다.
에돔이 잘못한 나라라고 해서 에돔에게 가해지는 모든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자에게 가한 폭력이 왜 문제가 되는가
모압의 죄는 에돔 왕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뼈를 불태워 석회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압이 에돔 왕의 뼈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왕이 살아 있을 때 죽임을 당했는지, 이미 죽은 뒤 무덤이 훼손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뼈를 불살라 석회로 만들었다는 묘사는 단순한 장례 절차가 아니라 죽은 자의 유해를 심각하게 훼손한 행위를 나타냅니다. 이런 배경에서 모압의 행동은 적을 죽이는 데서도 끝나지 않는 적대감, 죽은 사람의 유해마저 모욕하고 파괴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피해자의 소속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판단하십니다.
불타는 성채와 사라지는 통치자
모압의 심판에서는 그리욧의 성채가 불타고, 전쟁의 함성과 뿔나팔 소리 속에서 나라가 무너집니다.
3절은 그 안의 통치자와 고관들이 함께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심판의 초점은 나라의 권력 구조 전체에 있습니다.
모압의 왕과 고관들이 누리던 정치적 안전은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행한 폭력을 가려 주지 못합니다.
이제 심판 선언은 중요한 경계를 넘어갑니다.
주변 나라들에 대한 고발이 끝나고, 여호와야훼와 언약을 맺은 백성에게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조상의 뼈와 무덤은 한 사람의 죽음 이후에도 그를 가족과 공동체의 역사 안에 남겨 두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창세기 50:25에서 요셉은 자신의 뼈를 약속의 땅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며, 여호수아 24:32는 그 뼈를 묻은 일을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3:16–20에서도 사람의 뼈를 무덤에서 꺼내 불태우는 행동은 제단을 더럽히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그리욧은 모압과 관련된 지명으로 이해되지만 정확한 위치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의 성채가 모압의 정치적·군사적 힘을 상징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다 —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을 거부하다
유다에 대한 선언도 익숙한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유다의 세 가지 범죄 때문에, 또 네 가지 때문에, 나는 그 벌을 거두지 않겠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그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들의 조상들이 뒤따랐던 그들의 거짓들이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아모스 2:4 · 본디새김
다마스쿠스와 모압 같은 주변 나라들에 대한 고발에서는 구체적인 전쟁 범죄가 중심이었습니다. 유다에 대해서는 여호와야훼의 가르침과 규정이 직접 등장합니다.
유다에게는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다는 그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거부했다」는 표현도 가볍지 않습니다. 모르거나 실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어진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그들의 조상들이 뒤따랐던 그들의 거짓들」이 나옵니다. 이 거짓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상이나 거짓 신앙을 가리킨다고 읽을 근거는 있습니다. 예레미야 10:14–15에서도 우상은 거짓되고 헛된 것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아모스 2:4만으로 특정한 우상이나 종교 행위를 지목할 수는 없습니다. 조상들이 행해 왔다는 사실이 그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조상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고, 그분의 행동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은 언약 공동체의 중요한 책임이었습니다(신명기 6:20–25). 그러나 아모스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도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거스른다면 거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오래되었다는 것이 곧 참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통의 권위도 여호와야훼의 말씀보다 높아질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유다에 대한 심판은 단 한 절로 끝납니다.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겠다. 그 불이 예루살렘의 성채들을 집어삼킬 것이다.」아모스 2:5 · 본디새김
1:2에서 여호와야훼는 시온에서 포효하시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그런데 2:5에서는 바로 그 예루살렘의 성채가 불길에 휩싸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에서 말씀하신다고 해서 예루살렘이 자동으로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의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면허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 말씀에 응답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아모스의 고발은 마지막 대상인 북이스라엘로 향합니다.
이스라엘 — 사람의 가치가 은과 신발로 바뀌다
2장 6절에 이르면 앞선 심판 선언들의 구조가 가진 의도가 분명해집니다.
아모스 1:3에서 시작된 선언은 다마스쿠스, 가자,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를 거쳐 이스라엘에 도착합니다. 이스라엘은 여덟 번째 심판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은 앞선 나라들보다 훨씬 깁니다. 다른 나라들의 죄가 대개 한두 가지 행동으로 대표되었다면, 이스라엘의 죄는 사회생활과 종교생활의 여러 장면을 통해 드러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범죄 때문에, 또 네 가지 때문에, 나는 그 벌을 거두지 않겠다. 그들이 의로운 이를 은을 받고 팔고, 궁핍한 이를 신 한 켤레에 팔았기 때문이다.」아모스 2:6 · 본디새김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 돈 때문에 넘겨졌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팔다」가 정확히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을 종으로 넘기는 행위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재판 과정에서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불리하게 처분하는 행위입니다.
어느 쪽이든 아모스가 고발하는 현실은 같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좌우하고 있습니다.
신 한 켤레가 말하는 것
「신 한 켤레」를 극히 적은 액수의 빚이나 대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으면,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하찮게 취급되었는지를 드러내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신 한 켤레를 거래나 권리 이전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모스 2:6에는 신발을 이용한 법적 절차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한쪽에는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은과 신발이 있습니다.
사람의 자유와 정당한 권리가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 희생됩니다.
앞서 가자와 두로는 포로들을 다른 나라에 넘긴 일로 고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 사회 안의 의로운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팔아넘기는 나라로 고발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설 자리도 잃는다
7절은 이들의 행동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머리를 땅의 먼지 속에서 짓밟고, 억눌린 이들의 길을 비틀어 놓는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려고 한 남자와 그의 아버지가 같은 젊은 여자에게로 간다.」아모스 2:7 · 본디새김
「가난한 이들의 머리를 땅의 먼지 속에서 짓밟는다」는 표현은 사람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몰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억눌린 이들의 길」은 실제로 걷는 길만이 아니라 사람이 나아갈 수 있는 길, 곧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정당한 삶을 살아갈 기회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모스 5:12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성문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 책 안에서 길을 비틀어 놓는다는 고발은 사회적 권력이 약한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현실과 잘 맞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재산과 자유를 잃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마저 빼앗깁니다.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
7절 후반부에서는 고발의 모습이 바뀝니다.
본문은 한 남자와 그의 아버지가 같은 젊은 여자에게로 간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성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종이나 하녀였는지,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이었는지, 특정한 종교 의식과 관련된 여성이었는지를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의 사회적 억압과 연결해서 권력 관계 속에서 착취당한 여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가능한 해석이지 명시된 사실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를 대상으로 삼는 행위가 심각한 잘못으로 고발된다는 사실입니다. 레위기 18장과 20장은 가족 관계와 성적인 경계에 관한 규정을 제시하며, 그러한 경계의 파괴가 공동체의 거룩함과 관련됨을 보여 줍니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려고」라는 말은 행위의 결과를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이름과 연결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불리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자신들을 구별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이름과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거룩함은 사람들이 예배할 때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몸과 존엄을 어떻게 대하는가에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팔다」를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을 종으로 넘기는 행위로 읽는 근거로, 고대 이스라엘에는 채무 때문에 노동의 자유를 잃거나 종속적인 처지에 놓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4:1에서는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한 가정의 두 아들을 데려가 종으로 삼으려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불리하게 처분하는 행위로 읽는 근거로, 아모스 5:12에서는 뇌물을 받고 가난한 사람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는 일이 고발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발을 벗어 건네는 행동은 토지나 권리의 양도와 관련되기도 했습니다(룻기 4:7). 7절 첫 표현의 히브리어 동사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원문에 사용된 말은 무언가를 탐내거나 헐떡이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고, 짓밟거나 으깨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후자의 의미를 택했습니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려고」라는 말에서 실제로 그들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려고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는 본문에서 알 수 없습니다. 목적을 나타내는 문장 형식이지만, 예언자의 고발 속에서는 그 행위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옷 위에서 드리는 예배
「그들은 모든 제단 곁에서 담보로 잡은 옷들 위에 몸을 누이고, 벌금을 문 이들의 포도주를 그들의 하나님의 집에서 마신다.」아모스 2:8 · 본디새김
출애굽기 22:26–27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그 옷이 가난한 사람의 몸을 덮는 유일한 덮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4:12–13도 가난한 사람의 담보물을 밤새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규정을 제시합니다.
채권자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가난한 사람의 기본적인 생존을 보호하려는 가르침입니다. 빚을 졌다는 이유로 사람이 밤의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에게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옷이, 다른 사람에게는 제단 곁에서 몸을 누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아모스는 먼저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예배 의식을 거행했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장소에서 그들이 무엇 위에 누워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장면에서 예배와 불의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회적 불의의 결과물이 예배의 자리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누가 그 포도주의 값을 치렀는가
두 번째 장면도 같은 구조입니다.
「벌금을 문 이들의 포도주」를 그들의 하나님의 집에서 마십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거두어들인 것을 자신의 종교적 향락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그들이 종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고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단과 하나님의 집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의 한복판에 놓습니다.
그들은 제단에 가까이 있지만, 여호와야훼의 가르침과는 멀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아모스 5:21–24에서 더욱 분명하게 발전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백성의 절기와 제물을 거부하시며 정의와 공의를 요구하십니다.
이제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현재에서 과거로 이동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벌금과 포도주의 관계를 언급하지만, 어떤 과정으로 포도주가 마련되었는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재산이 포도주를 마련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거래 과정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모스 2장은 예배와 사회적 정의를 서로 경쟁하는 가치로 만들지 않습니다. 이는 이사야 1:10–17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본문에서도 제사와 기도가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은 악행을 멈추고 억압받는 사람을 도우라고 요구하십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23에서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을 율법의 중요한 문제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모스 2장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과 이웃을 대하는 삶을 분리할 수 없다는 주제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나 아모스 2장의 메시지는 신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이 받은 토라와 출애굽의 역사 안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 이스라엘의 기억을 되돌리시는 하나님
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들 앞에서 아모리 사람을 멸절시켰다. 그의 키는 백향목의 높이와 같았고, 그는 참나무처럼 강했다. 내가 위로는 그의 열매를, 아래로는 그의 뿌리들을 멸절시켰다.」아모스 2:9 · 본디새김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했는지가 계속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호와야훼가 자신이 행하신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행동과 여호와야훼의 행동이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회상되는 것은 이집트에서의 구출이 아닙니다. 아모리 사람들을 물리치신 일입니다.
아모리 사람은 구약에서 가나안 지역의 여러 민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땅을 얻기 전에 그 땅에 있던 강한 세력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향목은 높이와 위엄을, 참나무는 굳건한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단순히 신체가 거대했다는 뜻에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이 상대하기 어려웠던 강력한 세력을 나무의 이미지로 그려 냅니다.
열매와 뿌리는 나무 전체를 포괄합니다. 이 표현은 그 세력이 철저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은 본래 자신들의 힘만으로 얻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신명기 9:4–6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들이 지금 가진 땅과 안전은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하는 기념물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역사 가운데 행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한때는 그들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10절에서 기억은 더 먼 과거로 돌아갑니다.
「또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렸고, 너희가 아모리 사람의 땅을 차지하도록 마흔 해 동안 광야에서 너희를 이끌었다.」아모스 2:10 · 본디새김
9절에서는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절시키셨다고 말씀하셨지만, 10절에서는 「너희를」 이끌어 올렸고 「너희를」 이끌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과거의 은혜를 물려받아 살아가는 당사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자기 나라의 주인으로 살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은 그들이 강제 노동과 억압을 겪었던 현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자유를 얻은 것은 스스로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7–8).
이스라엘은 스스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온전히 확보할 수 없는 곳에서 여호와야훼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가난한 이들의 머리를 짓밟고, 억눌린 이들의 길을 비틀어 놓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억압받던 이스라엘을 해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사회 안에서 억압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힘없는 이스라엘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 가운데 힘없는 사람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이끌어 살 곳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난한 사람의 삶의 기반을 빼앗고 있었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자격을 얻은 사건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어떤 하나님에 의해 구출되었는지를 영원히 기억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이 점은 출애굽기 22:21과 신명기 24:17–18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그네와 종이었던 자신의 처지를 기억하고, 사회의 약한 이들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과거의 은혜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현재의 삶을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지켰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구출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먼저 그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후에도 가르침을 주시고, 예언자들을 일으키시며,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순종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백성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이었습니다. 이 주제는 아모스 3:1–2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이집트에서 이끌어 올리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며, 특별한 관계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죄를 물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 사람들
여호와야훼의 회상은 출애굽과 광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 아들들 가운데서 예언자들을 일으키고, 너희 젊은이들 가운데서 나실인들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정녕 그러하지 않으냐?」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아모스 2:11 · 본디새김
이제 여호와야훼는 땅을 주신 과거뿐 아니라, 그들이 그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두 부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예언자
예언자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받아 공동체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이 자기들의 상황을 한쪽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을 때, 예언자는 그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살피도록 요청합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나단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직면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엘리야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을 고발했습니다.
아모스 자신도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삶으로 하나님께 구별됨을 드러내는 나실인
민수기 6:1–21은 나실인 서원에 관해 설명합니다. 나실인은 서원 기간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비롯한 포도나무의 산물을 멀리하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며, 시체에 가까이하지 않는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한 생활은 그 사람이 일정 기간 자신을 여호와야훼께 구별하여 드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일상적인 욕망과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사는 것 외에 다른 삶의 방식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예언자는 말씀을 통해 여호와야훼의 뜻을 전합니다.
나실인은 자신의 구별된 삶을 통해 여호와야훼께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말씀과 삶의 표지를 공동체 바깥에서만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아들들 가운데서」, 「너희 젊은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정녕 그러하지 않으냐?」는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부인할 수 없도록 하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가 하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자기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입을 막다
그런데 12절에서 이스라엘의 반응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실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했고, 예언자들에게 『예언하지 마라.』 하고 명령했다.」아모스 2:12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행위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이 아닙니다.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야훼께 구별되어 살아가는 표지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또 예언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행위입니다.
나실인에게는 남들과 다르게 살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예언자에게는 남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만 잘못된 길로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삶과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이 점은 아모스 7:12–13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그곳을 떠나 유다 땅에서 예언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실 성소에서는 더 이상 예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단 곁에 누워 있고 하나님의 집에서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으키신 나실인과 예언자들의 삶과 말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계속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막아 버리고 있었습니다.
가득 실린 수레 아래서 무너지는 확신
이제 여호와야훼의 심판 선언이 시작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아래를 흔들리게 하겠다. 곡식 단을 가득 실은 수레가 흔들리듯이.」아모스 2:13 · 본디새김
한 가지 읽기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짓누르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읽기는 가득 실린 수레가 무게 때문에 삐걱거리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짐 실린 수레처럼 짓눌리신다고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석을 따르든 바로 뒤의 14–16절이 그 결과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신이 의지하던 능력으로 안전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가진 것 위에 안정된 삶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힘과 경제적 재산, 군사적 능력이 그런 안정의 기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심판 앞에서는 그 기반이 더 이상 확실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가난한 사람의 길을 비틀어 놓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도망칠 길마저 잃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 사용된 동사 메이크(עוּק)는 압박하거나 짓누르는 의미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문장 전체가 정확히 어떤 동작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짓누르실 것이라는 읽기는 곡식 단을 가득 실은 수레가 무게로 아래를 누르듯 심판이 그들을 압박한다는 것입니다. 가득 실린 수레가 무게 때문에 삐걱거리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강조하는 경우 이스라엘이 서 있는 자리 자체가 불안정해지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짐 실린 수레처럼 짓눌리신다는 읽기는 하나님이 백성의 죄를 무거운 짐처럼 겪으신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읽기들은 문장의 주어와 동사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갈립니다. 본디새김은 흔들림의 이미지를 선택했지만, 그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날
마지막 세 절에는 일곱 가지 묘사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날쌘 사람, 힘센 사람, 용사, 활을 쥔 사람, 발 빠른 사람, 말을 탄 사람, 마음이 굳센 용사입니다. 이 표현들은 일부 겹치지만, 전쟁에서 자신을 보호하거나 살아남는 데 필요한 여러 능력을 포괄합니다.
「날쌘 이도 도망칠 길을 잃고, 힘센 이도 자기 힘을 내지 못하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건지지 못할 것이다.」아모스 2:14 · 본디새김
처음에는 사람의 신체적 능력이 무너집니다.
이어지는 15절에서는 전쟁의 구체적인 수단들이 등장합니다. 활과 빠른 발과 말입니다. 멀리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가졌든, 직접 달아날 수 있는 능력이 있든, 말을 타고 빠져나갈 수 있든 모두 소용없게 됩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구해 낼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수단이 무력해진다는 선언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벌거벗은 용사
「용사들 가운데 마음이 굳센 이도 그날에는 벌거벗고 달아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아모스 2:16 · 본디새김
아모스는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장 용감한 사람을 마지막에 등장시킵니다. 마음이 굳센 용사라면 마지막까지 싸울 수 있다고 기대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조차 벌거벗고 달아납니다.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기본적인 보호 수단이 빼앗겼습니다. 마지막에는 강한 사람마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약함을 이용하던 사회가, 이제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장면을 이스라엘 전체가 반드시 전멸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아모스는 여기서 구체적인 전쟁의 날짜나 전투의 경과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벌거벗고」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옷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고, 전투 장비나 자신을 보호할 물건을 버린 채 달아나는 모습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정확한 상황을 설명하지 않지만, 극도의 무력함과 수치를 전달합니다. 이스라엘의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서 담보로 잡은 옷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2:8). 두 장면의 옷을 직접적으로 대응시키려는 문학적 의도가 명시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에게는 의미 있는 대조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은 어떤 삶을 요구하는가
여호와야훼가 자신들에게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2장의 가장 깊은 비극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구해 내신 하나님의 행동과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아모스는 은혜의 기억이 불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바뀌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모스 2장은 그 모순을 끝까지 드러낸 뒤, 도망칠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에서 멈춥니다.
가득 실린 수레가 흔들리고, 힘센 사람들이 무너지고, 가장 용감한 사람마저 벌거벗고 달아납니다.
그들이 그토록 믿었던 힘은, 자신들이 짓밟았던 가난한 사람의 삶을 지켜 주지도 못했고 마침내 자기 자신도 지켜 주지 못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