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룩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예루살렘을 위로하는 말

자녀를 떠나보낸 어머니가 다시 동쪽을 바라보다

바룩서 4장 한가운데에는 자녀를 빼앗긴 어머니의 절망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느냐?」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예루살렘입니다. 성읍이 한 사람의 어머니처럼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자기 자녀들을 기쁨으로 길렀지만, 이제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예루살렘은 전혀 다른 말을 듣습니다.

「예루살렘아, 동쪽을 바라보아라. 하나님에게서 네게 오는 기쁨을 보아라.」 이 두 장면 사이에는 아직 자녀들이 실제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재건되었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바라보는 방향입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심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심판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이라고 여기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지혜는 멀리 있는 비밀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이다

바룩서 4:1–4 본문 →

지혜의 정체가 밝혀지다

앞 장에서 시인은 지혜가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권력자와 부자와 상인들, 옛날의 거인들도 지혜의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그 길을 아시고 자신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이 지혜가 하나님의 명령의 책이며, 영원히 있는 율법이다. 이를 붙드는 이들은 모두 생명으로 나아가지만, 이를 버리는 이들은 죽을 것이다.바룩서 4:1 · 본디새김

여기서 지혜는 단순한 철학적 통찰이나 뛰어난 판단력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으로 구체화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지혜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오랜 탐구 끝에 얻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룩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을 통해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집회서 24:23과 가까운 사상이 나타납니다. 집회서에서도 지혜의 찬가가 절정에 이르면 그 지혜가 모세를 통해 명령된 율법과 연결됩니다.

두 본문은 지혜와 율법을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행동을 제한하는 규칙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는 지혜의 구체적인 형태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4:5–8과도 연결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다른 민족들이 그들의 지혜와 슬기를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지혜는 다른 민족들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삶의 길을 알려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지혜를 버린 백성에게 주어지는 첫 명령

돌아오너라, 야곱아, 이를 붙들어라. 그 빛을 마주하며 그 광채를 향해 걸어가라.바룩서 4:2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돌아온다는 말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일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먼저 돌아와야 하는 대상은 장소가 아닙니다.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바룩서는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과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을 서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나라를 되찾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생명의 길을 회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삶의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사람이 걸어갈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잠언 6:23은 계명이 등불이고 가르침이 빛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119:105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발에 등이 되고 길에 빛이 됩니다.

지혜를 안다는 것은 결국 그 지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네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마라」

3절은 자칫 배타적인 민족주의 선언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네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말고, 네게 유익한 것들을 낯선 민족에게 주지 마라.바룩서 4:3 · 본디새김

이 구절을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려 주지 말라는 명령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앞뒤 문맥을 보면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붙들라고 명령합니다. 뒤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복으로 선포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네 영광」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 곧 하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된 특권과 연결됩니다. 그것을 다른 민족에게 넘겨주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버리고 다른 민족의 신들과 삶의 방식을 의지하지 말라는 권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읽기는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는 바로 뒤의 책망(4:7)과도 연결됩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는 분명히 이스라엘과 낯선 민족을 구별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그 구별 자체를 없애서도 안 됩니다. 시인은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정체성을 지키도록 강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금지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4:6–8이 다른 민족들도 이스라엘의 지혜를 보게 된다고 말한다는 점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이 있다」

4절에서 말하는 방식이 미묘하게 바뀝니다.

이스라엘아, 우리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들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바룩서 4:4 · 본디새김

시인은 앞에서는 이스라엘을 「너」라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우리」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밖에서 그들을 심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도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 함께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부유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전히 「우리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이미 그 뜻대로 살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선 죄 고백을 생각하면 그들은 알고도 순종하지 않은 백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었지만, 다시 살아가야 할 길까지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닙니다.

백성을 기르신 하나님과 그들을 길러 낸 예루살렘

바룩서 4:5–8 본문 →

팔렸지만 멸망하도록 버려진 것은 아니다

용기를 내라, 내 백성아, 이스라엘을 기억하게 하는 이들아.바룩서 4:5 · 본디새김

시인은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포로가 되었다고 설명하기 직전에 용기를 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권고는 그들의 잘못을 모른 척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장 듣기 어려운 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민족들에게 팔린 것은 멸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성나게 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에게 넘겨진 것이다.바룩서 4:6 · 본디새김

「팔렸다」는 표현은 포로로 끌려가고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 처지를 나타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공동체는 파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포로 생활의 목적이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을 완전히 없애는 데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실제적이지만, 그 심판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운명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창조주를 잊고 다른 존재에게 제사를 바치다

7절은 백성이 무엇으로 하나님을 성나게 했는지 밝힙니다.

곧 너희는 하나님께가 아니라 귀신들에게 제물을 바쳐, 너희를 만든 이를 성나게 한 것이다.바룩서 4: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신명기 32:17과 가까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귀신들에게 제사를 바쳤다고 책망합니다. 바룩서에서도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친 일을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한 행동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귀신들」이라는 표현을 모든 이방 종교의 존재들에 대한 세밀한 분류로 읽기보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존재들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시인은 특히 하나님을 「너희를 만든 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긴 것은 단순히 예배의 장소나 대상을 바꾼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존재하게 하신 분과의 관계를 저버린 것입니다.

두 분의 양육자가 등장하다

8절은 이 죄를 더욱 감정적으로 표현합니다.

너희는 너희를 먹여 기른 영원한 하나님을 잊었고, 참으로 너희를 길러 낸 예루살렘도 슬프게 했다.바룩서 4:8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드시고 돌보신 분으로 묘사되시고, 예루살렘은 그 백성이 자라난 어머니처럼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근원이시고, 예루살렘은 그분의 백성이 살아온 공동체적 터전입니다. 그러나 두 관계 모두 양육의 이미지로 설명됩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설명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예루살렘이 직접 입을 엽니다. 그동안 포로 생활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자녀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자기 슬픔을 말하기 시작하다

바룩서 4:9–16 본문 →

성읍이 말을 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에게서 너희에게 닥친 진노를 보고 말했다. 「들어라, 시온의 이웃 도성들아. 하나님이 내게 큰 슬픔을 불러왔다.」바룩서 4:9 · 본디새김

성읍을 사람처럼 말하게 하는 문학적 표현은 구약의 예언서와 애가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특히 애가 1장은 한때 많은 사람이 살던 예루살렘이 과부처럼 되었다고 묘사합니다. 바룩서 4장도 예루살렘을 과부이자 어머니로 그립니다.

예루살렘은 자기 슬픔을 자신과 자녀들만의 비밀로 간직하지 않습니다. 시온의 이웃 도성들을 불러 자기 이야기를 들으라고 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고통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자기 상실을 증언하기 위해 부르는 청중입니다.

기쁨으로 길렀지만 울음으로 떠나보냈다

「나는 그들을 기쁨으로 길렀지만, 울음과 슬픔으로 떠나보낸 것이다.」바룩서 4:11 · 본디새김

어머니에게 자녀를 기르는 시간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아이가 자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다음 세대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 자기 삶을 시작하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닙니다.

원수의 손에 끌려갔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길렀던 기쁨이 이별의 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나라의 멸망을 말할 때 우리는 왕과 군대와 성벽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자기 성벽이 무너진 것보다 먼저 자녀들이 끌려간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녀에게 성읍의 생명은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단순히 도시의 건축물이 복구되는 일이 아닙니다. 떠나간 자녀들이 돌아오는 일입니다.

과부가 된 성읍

「아무도 과부이며 많은 이에게 버림받은 나를 보고 고소해하지 마라. 내 자녀들의 죄 때문에 나는 황폐해졌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나」바룩서 4:12 · 본디새김

과부라는 표현은 보호와 의지의 관계를 잃어버린 사람의 처지를 나타냅니다. 예루살렘이 경험하는 상실과 고립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녀들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는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 잘못 때문에 자녀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슬퍼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버린 결과

13절은 자녀들이 걸어가지 않았던 길을 여러 표현으로 말합니다.

「그의 의로운 규정들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계명들의 길을 걷지도 않았고, 그의 의 안에서 가르침의 오솔길들을 밟지도 않았기 때문이다.」바룩서 4:13 · 본디새김

여기에는 ‘규정’, ‘계명’, ‘가르침’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걸어가야 할 길과 오솔길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단지 지켜야 할 조항이 아니라, 사람이 그 길을 걷도록 배우고 익혀야 할 가르침입니다. 바룩서의 시인은 이스라엘이 그 길을 배우지 않았고, 실제로 걷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웃 도성들을 증인으로 부르다

14절에서 예루살렘은 다시 이웃 도성들을 부릅니다.

이번에는 자녀들의 포로 생활을 기억하라고 요청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증언하려 합니다.

「그가 먼 곳에서 한 민족을 그들에게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뻔뻔하고 다른 말을 쓰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노인을 존중하지도 않고, 아이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으며,」바룩서 4:15 · 본디새김

이는 전쟁의 폭력이 가장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유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 민족을 불러들이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민족이 저지른 잔혹한 행동이 도덕적으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뒤의 31–35절에서 예루살렘을 해친 도시들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이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유다의 죄에 대한 심판과 정복자들의 폭력에 대한 책임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어머니에게서 자녀를 빼앗다

16절은 다시 예루살렘의 개인적인 상실로 돌아옵니다.

「과부가 사랑하는 이들을 끌고 갔고, 홀로 남은 여인에게서 딸들을 빼앗아 황폐하게 했다.」바룩서 4:16 · 본디새김

여기서 「과부」와 「홀로 남은 여인」은 예루살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은 바로 성읍에서 살던 백성입니다.

자녀들을 길러 낸 장소가 이제 그들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성벽과 문은 무너지고, 아이들은 끌려가며, 어머니는 홀로 남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은 스스로에게 가장 잔인한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15절에는 신명기 28:49–50과의 분명한 연결이 있습니다. 모세의 경고에는 이스라엘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먼 민족이 와서,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바룩서는 그 경고를 예루살렘의 입에서 다시 들려줍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머니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

바룩서 4:17–20 본문 →

「내가 너희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느냐?」

「그런데 내가 너희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느냐?」바룩서 4:17 · 본디새김

어머니는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을 되찾을 군대가 없습니다. 원수에게 명령할 권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절망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재앙들을 불러온 이가 너희를 너희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4:18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재앙을 불러오신 분과 자녀들을 건져 내실 분을 서로 다른 존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분의 자비를 기대하는 기도입니다.

평화의 옷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다

「가거라, 자녀들아, 가거라. 나는 홀로 버려진 채 남았기 때문이다.」바룩서 4:19 · 본디새김

「가거라」라는 말은 어머니가 자녀들을 기꺼이 내보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원수의 손에 끌려가는 자녀들을 붙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는 작별의 말입니다.

「나는 평화의 긴 옷을 벗고, 내 간구의 굵은 베옷을 입었다. 내가 사는 날 동안 영원한 이에게 부르짖겠다.」바룩서 4:20 · 본디새김

평화의 옷은 성읍이 이전에 누리던 안정과 기쁨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끌려간 지금, 그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을 수 없습니다.

굵은 베옷은 슬픔과 회개, 탄원의 표시입니다. 구약에서는 재난과 깊은 슬픔을 겪는 사람들이 굵은 베옷을 입는 모습이 자주 나타납니다(요나 3:5–8; 에스더 4:1–3). 그런데 바룩서에서는 이 옷을 특별히 「내 간구의 굵은 베옷」이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히 슬픔을 표시하려고 베옷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기 위해 입습니다.

자녀들을 구할 힘은 없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잠깐의 의식으로 마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내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 부르짖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붙잡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까지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울음으로 떠나보낸 자녀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리라

바룩서 4:21–29 본문 →

슬픔을 말하던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로하다

21절에서 예루살렘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용기를 내라, 자녀들아. 하나님께 외쳐라. 그러면 그가 너희를 압제에서,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낼 것이다.」바룩서 4:21 · 본디새김

그녀가 말하는 용기의 근거는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 내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나는 영원한 이에게 너희의 구원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또 너희의 영원한 구원자에게서 곧 너희에게 자비가 이를 것이기에, 거룩한 이에게서 내게 기쁨이 왔다.」바룩서 4:22 · 본디새김

구원은 아직 미래의 일로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미 자신에게 기쁨이 왔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기뻐하는 것은 자녀들이 이미 돌아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약속 때문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굵은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슬픔 한가운데서 미래의 기쁨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떠나보냄과 돌아옴의 정확한 대조

23절은 앞서 11절에서 들었던 말을 다시 가져옵니다.

「나는 너희를 슬픔과 울음으로 내보냈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즐거움과 기쁨으로 내게 영원히 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4:23 · 본디새김

11절에서 어머니는 자녀들을 기쁨으로 길렀지만 울음으로 떠나보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에서 슬픔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제는 슬픔에서 기쁨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 두 문장의 차이는 단지 감정의 변화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내보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돌려주실 분입니다. 예루살렘은 자녀들을 잃어버릴 때 자기 힘으로 막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다시 되찾는 일도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슬픔의 목격자들이 구원의 목격자가 되다

24절에서 다시 시온의 이웃 도성들이 등장합니다.

「시온의 이웃 도성들이 지금 너희의 포로살이를 보았듯이, 곧 너희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구원은 영원한 이의 큰 영광과 광채와 함께 너희에게 닥쳐올 것이다.」바룩서 4:24 · 본디새김

예루살렘의 파괴는 감출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도 그만큼 공개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개인의 마음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위로에 그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변화가 약속됩니다.

원수의 목을 밟으리라는 말

「자녀들아, 하나님에게서 너희에게 닥친 진노를 오래 참아라. 원수가 너를 뒤쫓았으나, 너는 곧 그의 멸망을 보고, 그들의 목을 밟을 것이다.」바룩서 4:25 · 본디새김

「목을 밟는다」는 표현은 고대 전쟁의 승리와 적의 굴복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여호수아 10:24에서도 승리한 이스라엘의 지휘관들이 패배한 왕들의 목을 밟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룩서의 이 표현도 원수의 권세가 꺾이고, 이전의 승자와 패자의 처지가 뒤집힐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오늘의 독자에게 원수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라는 명령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포로가 된 백성에게 정복자의 권력이 영원하지 않다고 말하는 승리의 이미지입니다.

또한 25절은 단순히 적의 멸망을 즐기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닥친 진노를 오래 참으라는 권고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난을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 되고,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운명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곱게 자란 아이들이 험한 길을 걷다

26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집니다.

「곱게 자란 내 아이들이 험한 길들을 걸었고, 원수들에게 빼앗긴 양 떼처럼 끌려갔다.」바룩서 4:26 · 본디새김

여기서 13절의 표현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의 길을 걷지 않았고 가르침의 오솔길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원수에게 끌려가는 험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본문이 이 두 길을 직접 같은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 전체를 읽을 때 의미 있는 대조가 형성됩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들이 험한 길을 걷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내 아이들」입니다.

열 배로 하나님을 찾아라

27–28절은 다시 자녀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권합니다.

「용기를 내라, 자녀들아. 그리고 하나님께 외쳐라. 재앙을 불러오는 이가 너희를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4:27 · 본디새김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헤맬 생각을 품었던 것처럼, 돌아서서 그를 찾는 데 열 배로 힘써라.」바룩서 4:28 · 본디새김

이 수를 문자적인 비율이나 회개의 양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이전에 하나님을 떠나려는 마음을 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라는 강조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은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뒤집어 하나님을 찾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열 배로 노력하면 그만큼의 구원을 받을 자격을 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기억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고, 이어지는 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가져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백성의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매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응답입니다.

「너희에게 재앙들을 불러온 이가 너희의 구원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너희에게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4:29 · 본디새김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예루살렘의 긴 발언이 마무리됩니다. 이제 시인은 다시 예루살렘 자신을 향해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곧」이라는 말 역시 역사적인 날짜나 귀환까지의 정확한 기간을 계산하도록 주어진 표현은 아닙니다. 시는 약속된 구원을 확신하며 미래를 가까운 일처럼 선포합니다.

자녀들을 위로하던 어머니가 위로를 받다

바룩서 4:30–35 본문 →

「너를 이름 지어 부른 이」

용기를 내라, 예루살렘아. 너를 이름 지어 부른 이가 너를 위로할 것이다.바룩서 4:3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예루살렘이 자기 자녀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시인이 예루살렘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합니다.

위로하던 어머니가 위로를 받는 자리에 놓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너를 이름 지어 부른 이」로 소개되십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과 예루살렘의 관계를 개인적인 부름의 이미지로 나타냅니다.

이사야서 43:1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름으로 부르셨으며 그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 62:2에서도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받습니다. 바룩서의 표현이 어느 한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성읍을 알고 부르신다는 약속의 세계와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은 자기 이름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황폐한 성읍이 되었고, 자녀들을 빼앗긴 어머니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지어 부르신 분은 여전히 그녀를 알고 계십니다.

자녀들의 죄와 정복자의 죄를 함께 판단하다

31–33절에서는 예루살렘을 해치고 그 멸망을 기뻐한 도시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너를 해치고 네가 무너진 것을 고소해한 이들은 비참하다.바룩서 4:31 · 본디새김

특히 시인은 예루살렘의 몰락을 즐거워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태도 자체가 비판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오바댜서 12–14절과도 연결됩니다. 오바댜는 에돔을 향해 형제 유다가 재난을 당한 날에 기뻐하거나 그 멸망을 보고 크게 말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책망합니다.

한 공동체가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그 공동체의 비참함을 즐거워할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뽐내던 도성이 슬픔의 도성이 되다

33절은 예루살렘과 정복자의 도시 사이에 역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네가 무너진 것을 기뻐하고 네가 쓰러진 것을 즐거워했듯이, 그 도성은 자기가 황폐해진 것을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4:33 · 본디새김

이어지는 34절에서 말하는 이가 갑자기 바뀝니다.

그리고 내가 그 도성에서 많은 무리의 환호를 거두고, 그 도성의 뽐냄을 슬픔으로 바꾸겠다.바룩서 4:34 · 본디새김

예루살렘의 기쁨은 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슬픔이 다시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하던 도시는 자기의 기쁨을 잃고 슬퍼하게 됩니다.

두 도성의 운명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35절은 심판받는 도성이 불에 휩싸이고 귀신들이 사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13:19–22와 34:9–15에서 볼 수 있는 황폐한 땅의 이미지와 가깝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어 기이한 존재들의 거처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게는 정반대의 광경이 약속됩니다.

사람들이 떠나 황폐해졌던 도성에 다시 자녀들이 돌아옵니다. 이제 시인은 예루살렘에게 눈을 들어 그 광경을 보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32–33절의 도성은 문맥상 바벨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32–33절에서 특정 도시 이름이 직접 명시되지는 않으므로, 그 대상을 문법적으로 바벨론 하나에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34절의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별도의 도입 없이 일인칭 「내가」가 등장합니다. 문맥상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을 선언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언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자의 말이 뚜렷한 인용 표시 없이 이어지는 경우를 떠올리게 합니다.

동쪽을 바라보아라

바룩서 4:36–37 본문 →

예루살렘의 시선이 바뀌다

예루살렘아, 동쪽을 바라보아라. 하나님에게서 네게 오는 기쁨을 보아라.바룩서 4:36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그동안 자신의 슬픔을 바라보았습니다. 끌려간 자녀들을 생각했고, 폐허가 된 자기 모습을 보았으며, 원수들의 잔혹함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예루살렘에게 다른 방향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자녀들을 빼앗긴 과거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기쁨을 바라보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녀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떠나간 자녀들이 돌아온다

보아라, 네가 떠나보낸 네 아들들이 오고 있다. 거룩한 이의 말로 동쪽에서 서쪽까지 모인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오고 있다.바룩서 4:37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이 귀환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밝힙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불러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으로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십니다.

또한 36절에서는 동쪽을 바라보라고 했지만, 37절에서는 동쪽에서 서쪽까지 모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바벨론 한 지역에서 돌아오는 한 무리의 사람만을 묘사하기보다,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모이는 광대한 회복의 이미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바벨론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에 있는 제국입니다. 유배된 사람들의 처지와 연결하면 동쪽을 바라보라는 명령은 그들이 끌려간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9:18–22와 60:4에서도 시온은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멀리 떠나 있던 아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바룩서의 약속은 이러한 시온 회복의 예언 전통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어느 역사적 귀환 사건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미래의 회복을 시적인 언어로 선포하고 있으며, 그 약속의 범위와 최종적인 실현은 이 한 장의 문면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자녀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

바룩서 4:1–37 본문 →

예루살렘은 자녀들이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분께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자녀들을 구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녀는 한때 자기 자녀들이 원수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같은 방향에서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자녀들이 오고 있습니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거룩한 이의 말씀으로 모입니다. 그들은 끌려가는 포로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돌아오는 사람들로 그려집니다.

울음으로 자녀들을 떠나보낸 어머니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그 자녀들을 보여 주십니다.

그녀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루살렘아, 동쪽을 바라보아라.」 그녀가 기다리던 자녀들이 그곳에서 오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