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룩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장 · 예레미야의 편지
어깨에 메여 가는 신을 왜 두려워하는가
바룩서 6장에는 기묘한 광경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신을 어깨에 메고 거리를 지나갑니다. 신의 머리에는 금으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고, 몸에는 화려한 옷이 둘러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러나 그 신은 스스로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입니다.
그들 역시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힘도 없습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력과 종교 의식을 마주하면 두려워할 만한 처지입니다.
바벨론의 신상은 사람들이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닦고, 옷을 입히고, 등에 메고, 도둑에게서 지켜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사람의 보호가 있어야 존재하는 신과, 사람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 바룩서 6장은 이 둘을 구별하라고 요청합니다.
이 장의 저자는 긴 논증을 펼치면서도 같은 결론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그것들이 신이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단순한 말을 일흔두 절이나 반복해야 하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포로들에게 바벨론의 신들은 단순히 잘못된 종교적 사상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자신들을 정복한 제국의 거리와 신전과 축제에서 마주하게 될 존재들입니다. 막강한 권력과 부, 많은 사람의 경배가 그 신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지는 철학적인 정의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 신들을 가까이 가서 살펴보라고 합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습니까? 누가 움직입니까? 누가 누구를 지킵니까? 약한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까?
질문이 이어질수록 금빛은 벗겨지고, 남는 것은 사람이 만든 나무와 금속입니다.
예레미야의 편지 — 오래 머물러야 할 땅에서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다른 형식의 말씀이 시작되다
바룩서 6장은 앞의 다섯 장과 형식이 다릅니다.
앞부분에는 바룩의 책과 포로 공동체의 기도, 지혜에 관한 시, 예루살렘의 슬픔과 회복의 약속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포로로 끌려갈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편지가 등장합니다.
이 글은 그리스어 성경 전승에서 별도의 「예레미야의 편지」로도 전해졌습니다. 전해지는 그리스어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끌려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반면 본디새김은 이 글을 바룩서 6장으로 배열하고, 그 표제를 1절의 본문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독자적인 형식을 지닌 우상숭배 반대 권고문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실제로 역사적 예레미야가 직접 집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레미야서 29장에 나오는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의 상황을 떠올리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29장에서 포로들은 바벨론에 오래 머물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바룩서 6장에서는 바로 그 낯선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충성을 지켜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일곱 세대라는 긴 시간
그러므로 너희는 바벨론에 들어가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일곱 세대에 이르는 오랜 시간을 머물 것이다. 그 뒤에는 내가 너희를 그곳에서 평화롭게 이끌어 내겠다.바룩서 6:2 · 본디새김
「일곱 세대」라는 표현을 예레미야서 29:10의 칠십 년과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한 세대를 몇 년으로 계산하는지 이 구절이 명시하지 않으며, 두 표현은 문자적으로도 다릅니다.
일곱 세대를 상징적인 긴 기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실제로 매우 오랜 포로 생활을 상정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본래 의도였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의 종교와 문화를 잠깐 구경하다가 떠날 여행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야 합니다.
그 기간에 자녀들이 태어나고,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며, 바벨론의 종교 의식이 일상적인 광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지가 경고하는 위험은 당장 한 번 우상 앞에 절하는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위험입니다.
그들을 포로로 넘기신 하나님이 다시 이끌어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포로들이 눈앞의 바벨론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합니다.
화려한 행렬 앞에서 마음속으로 해야 할 말
이제 너희는 바벨론에서 은으로 된 신들과 금으로 된 신들과 나무로 된 신들이 사람들의 어깨에 들려 다니며 민족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을 볼 것이다.바룩서 6:3 · 본디새김
고대 바벨론에서는 신상들이 신전과 종교 행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신상을 장식하고 이동시키는 행위는 그 신의 존귀함과 제의적 지위를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포로들이 이런 행렬을 보면 위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들 앞뒤에서 무리가 그것들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볼 때에 말이다. 오히려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여라. 「주인님, 당신께 엎드려 절해야 합니다.」바룩서 6:5 · 본디새김
여기에는 눈에 보이는 행동과 마음속의 충성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의 거리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포로들은 그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다른 분을 향해야 합니다.
이 권고는 신명기 6:13의 명령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고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다른 민족들의 신앙을 접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배교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신들을 자신도 경배해야 할 존재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포로의 땅에도 함께 있다
내 천사가 너희와 함께 있고, 바로 그가 너희 목숨을 돌보기 때문이다.바룩서 6:6 · 본디새김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성전도, 자신들의 왕도 가까이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까지 예루살렘에 남겨 두고 온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23:20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길에서 지키시고 준비된 곳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룩서의 약속도 하나님의 보호가 특정한 장소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근거로 포로들이 아무 위험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오랜 포로 생활 자체를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안정한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돌보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부터 편지는 바벨론의 신상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화려하게 꾸민 신상은 왜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가
말할 수 없는 혀와 사용할 수 없는 무기
사실 그것들의 혀는 목수가 깎아 다듬은 것이다. 그것들은 금과 은을 입힌 것들이지만 가짜이며, 말을 할 수 없다.바룩서 6:7 · 본디새김
편지는 신상의 겉모습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부터 살펴봅니다.
말씀을 주어야 할 신의 혀를 인간이 만들어 줍니다. 인간이 신에게 말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 주었지만, 정작 그 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이 논증은 시편 115:4–8과 가깝습니다. 그곳에서도 우상은 은과 금으로 만든 사람의 손의 작품이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신상은 지방의 재판관처럼 홀을 쥐고 있고, 오른손에는 단검과 도끼도 들려 있습니다(6:13–14). 홀은 통치권을, 무기는 힘을 나타냅니다.
오른손에 단검과 도끼를 쥐고 있지만, 전쟁이나 강도들에게서 자신을 건져 내지 못할 것이다. 이로써 그것들이 신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바룩서 6:14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이 겨냥하는 것은 신상에 담긴 상징과 실제 능력 사이의 차이입니다. 그 신상은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다스리지 못합니다.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몸을 방어할 수도 없습니다.
고대 바벨론에서 신상은 일반적으로 신의 현존을 나타내는 제의적 형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이 바벨론 사람들이 모두 나무와 금속 자체를 신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편지는 신상을 만드는 재료와 유지하는 행동을 전면에 내세워, 그 신상이 주장하는 신적 권위에 도전합니다. 이것은 상대 종교의 신학을 중립적으로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거부하도록 설득하는 풍자적 논증입니다.
신의 금을 훔쳐 가는 제사장들
8–12절은 신상을 돌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신상에게 금관을 씌우고 옷을 입힙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신상에서 금과 은을 몰래 떼어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 일부를 창녀들에게 주기도 한다고 비난합니다.
하나는 신상 자체의 무능함입니다. 자신을 섬기는 제사장이 자기 몸에 붙어 있는 금과 은을 훔쳐 가도 막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 신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 제도의 도덕적 실패입니다. 신을 위해 바쳐진 재물이 실제로는 그 신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권위를 주장하는 종교 제도가 실제로는 인간의 탐욕을 가리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과 은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 제도가 의롭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신을 지키기 위해 문을 잠그다
신전의 신상에는 먼지가 쌓입니다. 그 안쪽은 벌레에게 갉아 먹히고, 얼굴은 연기로 검게 그을립니다. 몸과 머리에는 박쥐와 제비와 다른 새들이 앉고, 고양이까지 올라갑니다.
왕에게 잘못을 저질러 죽임당하러 끌려간 사람을 가두려고 뜰을 둘러막듯이, 제사장들은 강도들에게 털리지 않도록 그것들의 집을 문짝과 자물쇠와 빗장으로 단단히 막는다.바룩서 6:17 · 본디새김
신전은 신이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소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신전의 문을 잠그는 이유는 신상을 도둑에게서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호해야 할 존재가 보호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신상을 위해 수많은 등불을 밝히지만, 신상은 그 등불 가운데 하나도 보지 못합니다. 그 앞에는 빛이 있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은 없습니다.
이로써 너희는 그것들이 신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바룩서 6:22 · 본디새김
편지는 포로들에게 이유 없이 우상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대상이 실제로 무엇인지 살피고 판단하라고 합니다.
두려움은 때로 대상을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합니다. 편지는 그 대상의 금빛 표면을 지나, 사람이 만든 물건으로서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신은 약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가
누가 누구를 업어야 하는가
23–26절에서 신상은 이제 움직임의 관점에서 평가됩니다.
발이 없어 사람들의 어깨에 실려 다니며 사람들에게 제 수치를 드러낸다. 그것들을 섬기는 사람들도 부끄러워하는데,바룩서 6:25 · 본디새김
그것이 혹시라도 땅에 넘어지면 그 사람들의 손으로 일으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것을 똑바로 세워 놓아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기울어져도 결코 바로 서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죽은 사람들에게 하듯 그것들 앞에 예물을 차려 놓는다.바룩서 6:26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이사야서 46:1–4와 매우 가깝습니다. 이사야서는 바벨론의 신 벨과 느보를 언급하며, 그 신상들이 짐승의 등에 실려 운반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품으셨으며, 늙어서도 자신이 지고 품고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은 사람이 운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품으시고 구원하십니다.
포로들은 바벨론에서 신상들이 어깨에 메여 움직이는 모습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그 신들의 권능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살려야 할 제물이 사람을 돕지 못한다
27–28절에서는 제사장들과 제물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것들의 제사장들은 그것들에 바친 제물을 팔아 그 값을 마음껏 써 버린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그 제물 가운데 일부를 절여 두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힘없는 사람에게도 전혀 나누어 주지 않는다.바룩서 6:27 · 본디새김
편지는 신상을 섬기는 행위가 어떤 열매를 맺는지 살펴봅니다. 여기서 본문은 종교 제도의 부패를 비판합니다.
월경 중인 여자와 아이를 낳은 여자도 그것들의 제물에 손을 댄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로 그것들이 신이 아님을 알고,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바룩서 6:28 · 본디새김
레위기 12장과 15장에는 출산과 월경에 따른 의례적 부정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바룩서의 저자는 그러한 정결 규정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의 제의 관행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월경이나 출산이 도덕적인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의 의례적 부정과 도덕적 악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또한 이 구절만으로 바벨론의 실제 신전에서 어떤 정결 규칙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정확히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편지는 유대적 정결 관념을 기준으로 상대 종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장례 잔치처럼
29–32절에서는 종교 의식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제사장들은 머리와 수염을 밀고 찢어진 속옷을 입습니다. 신상 앞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죽은 사람의 장례 잔치에 비유합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신을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편지는 그들의 모습을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이들처럼 묘사합니다. 신상을 생명 없는 대상으로 드러내려는 풍자가 제의의 장면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과부와 고아를 돌볼 수 없는 신
33–37절에서는 질문의 성격이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신상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신상이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묻습니다.
사람을 죽음에서 결코 건져 내지 못하고, 약한 사람을 강한 사람에게서도 건져 내지 못한다.바룩서 6:35 · 본디새김
눈먼 사람이 볼 수 있게 결코 해 주지 못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결코 건져 내지 못한다.바룩서 6:36 · 본디새김
과부를 결코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고아에게도 잘해 주지 않을 것이다.바룩서 6:37 · 본디새김
여기서 출애굽기 22:22–24, 신명기 10:17–18, 시편 146:7–9가 떠오릅니다. 여호와야훼는 약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억눌린 사람에게 공의를 행하시며, 과부와 고아를 돌보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특히 4장에서 예루살렘이 자신을 과부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4:12). 예루살렘은 자녀들을 잃어버린 과부 같은 성읍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자녀들을 구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6장은 바벨론의 신상들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지도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바룩서에서 참된 하나님의 권능은 단순히 적을 무너뜨리는 힘에 있지 않습니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을 돌보는 일에서도 나타납니다. 신성함을 주장하는 대상이 얼마나 화려한가보다, 그 존재에게서 어떤 구원과 정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편지는 단지 나무가 말을 못 한다는 이유로 우상을 조롱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에게 생명과 구원을 맡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만든 신과 그 신을 위해 만들어 낸 관습
말 못 하는 사람을 말 못 하는 신에게 데려가다
40–41절에는 바벨론의 신 벨이 등장합니다.
벨은 바벨론의 대표적인 신 마르둑을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레미야서 50:2에도 벨과 므로닥이 바벨론의 신들로 언급됩니다.
게다가 갈대아 사람들 자신도 그것들을 욕보인다. 그들은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를 보면 벨을 가져와 그 신에게 소리를 내라고 요구한다. 벨이 알아들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바룩서 6:40 · 본디새김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벨에게 데려가 그를 고쳐 달라고 요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벨 자신에게 말을 해 보라고 요구하는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뒤의 읽기를 택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풍자의 중심은 신상에게 언어를 이해하거나 사람을 도울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보고도 그 신들을 버리지 못합니까?
본문은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이 말은 앞의 신상 비판을 인간의 판단 문제로 옮겨 놓습니다. 신상은 스스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신상을 섬기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고 비판받습니다.
풍자의 대상이 나무와 금속에서 인간의 마음으로 이동하는 순간입니다.
노끈을 두른 여자들의 이야기는 무엇을 뜻하는가
여자들은 몸에 노끈을 두르고 길에 자리 잡고 앉아 겨를 태워 분향한다.바룩서 6:42 · 본디새김
이어지는 43절에서는 지나가는 사람과 잠자리를 함께한 여자가 선택받지 못한 다른 여자를 조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구절은 고대 바벨론에서 특정한 성적 행위가 종교 의식과 연결되었다는 이야기로 읽혀 왔습니다.
따라서 42–43절을 근거로 바벨론의 모든 여성이 그러한 의식에 참여했다거나, 고대 바벨론에 어떤 형태의 성적 제의가 일반적으로 존재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우상숭배의 허망함을 비판하는 일련의 풍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43절에서 선택받지 못한 여자를 모욕하는 장면은 종교적인 행위가 사람들 사이의 경쟁과 수치로 바뀌는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이러한 묘사는 우상숭배가 인간의 생각과 사회적 행동까지 왜곡한다는 편지의 주장을 강화합니다.
만든 사람보다 오래 살지 못할 신
45절에서는 편지가 다시 신상을 만드는 장인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그것들은 목수들과 금장이들이 만든 것이다. 장인들이 그것들을 만들려는 대로 될 뿐, 그 밖의 다른 것은 결코 될 수 없다.바룩서 6:45 · 본디새김
이 말에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뒤집히는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인간이 만듭니다.
그 신상을 만든 사람들조차 오래 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든 것이 어떻게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편지의 논증은 나무와 금속이 물리적으로 얼마나 오래 보존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깊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물건에 영원한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가 타당한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4:9–20에도 비슷한 풍자가 있습니다. 목수가 나무를 베어 일부는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하면서, 남은 부분으로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립니다. 같은 재료가 한편으로는 연료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바룩서의 관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48–50절에서는 전쟁과 재앙이 닥칠 때 제사장들이 신상과 함께 어디로 숨어야 할지 의논한다고 말합니다. 전쟁과 재앙이 닥쳤을 때 신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상을 가지고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편지가 드러내려는 모순입니다.
조금 더 깊이
40절은 문법적으로 해석이 갈립니다. 소리를 내야 하는 대상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인지, 벨 자신인지에 따라 장면의 세부적인 뜻이 달라집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1.199에도 바벨론 여자들이 여신의 성역에서 낯선 남성과 관계를 맺는 관습에 관한 서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습이 바벨론에서 실제로 어느 정도 시행되었는지, 종교 제도의 정식 일부였는지는 논쟁적입니다.
비를 내리지 못하는 신과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왕을 세우는 능력보다 더 근본적인 능력
51절부터 편지는 신상들이 신이 아니라는 증거를 다시 제시합니다.
그것들은 한 나라의 왕을 결코 세우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비도 결코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바룩서 6:52 · 본디새김
왕을 세우는 것은 정치적 권력의 문제입니다. 비를 내리는 것은 자연과 생명의 문제입니다. 고대 근동의 왕국에서 통치권과 농업의 풍요는 신적 권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왕들은 신들의 후원과 인정을 주장했고, 비와 풍요도 신들의 능력과 관련지어 해석되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니엘서 2:21은 하나님께서 왕들을 폐하시고 세우신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서 14:22는 민족들의 헛된 신들 가운데 비를 내릴 수 있는 이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누가 실제로 역사를 다스리고 생명을 유지합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금속으로 만든 왕홀이나 화려한 신상에 있지 않습니다.
부당한 일을 막지 못하는 신
53절은 다시 정의의 문제를 꺼냅니다.
또 자기들의 송사를 결코 판결하지 못하고, 부당한 일을 막아 내지도 못한다. 아무 힘이 없기 때문이다.바룩서 6:53 · 본디새김
이 절의 「부당한 일을 막아 내지도 못한다」는 표현은 그리스어의 목적어 관계 때문에 두 방향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부당한 행위 자체를 막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모두 앞에서 나타난 약한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는 비판과 어울립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구약의 묘사에서 정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편 146:7은 여호와야훼께서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바룩서는 신들의 능력을 평가할 때 이러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신전이 불타면 누가 살아남는가
54절은 다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그것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까마귀와 같기 때문이다. 또 나무로 된 신들이나 금을 입힌 신들이나 은을 입힌 신들의 집에 불이 나면, 그 제사장들은 도망쳐 살아남겠지만 그것들은 그 한가운데에서 들보처럼 타 버릴 것이다.바룩서 6:54 · 본디새김
여기서는 신상 자체가 사람이 만든 재료로 이루어져 있어서 스스로 움직이거나 불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별들과 구름은 명령에 순종한다
59–62절은 이 장의 논증을 새로운 방향으로 넓힙니다.
실제로 해와 달과 별들은 밝게 빛나고, 필요한 일을 하도록 보내져 순종한다.바룩서 6:59 · 본디새김
이어 번개와 바람, 구름과 불이 등장합니다. 자연 현상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이룹니다.
이 장면은 앞서 지혜의 시에서 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하던 모습과 연결됩니다(3:33–35). 앞에서는 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뻐하며 응답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맡겨진 일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우상들과 비교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창조 세계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 세계의 요소들조차 신상보다 더 실제적인 일을 합니다.
들짐승들이 더 낫다
67절은 이 논증을 더욱 낮은 자리로 끌어내립니다.
들짐승들이 그것들보다 낫다. 들짐승들은 숨을 곳으로 달아나 제 몸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바룩서 6:67 · 본디새김
이 비교에는 의도적인 가치의 역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금과 은으로 꾸민 신상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편지는 그 신상보다 평범한 들짐승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더 낫다」는 표현은 이 장의 마지막 결론을 준비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우상이 신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존재들보다 못하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루살렘의 성전도 불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두고도 바룩서는 여호와야훼가 불길 속에서 소멸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심판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건물의 파괴와 신의 존재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이밭의 허수아비와 우상을 지니지 않은 의로운 사람
무언가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단락에서 편지는 독특한 비유를 제시합니다.
오이밭에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허수아비처럼, 나무로 되고 금과 은을 입힌 그들의 신들도 그러하기 때문이다.바룩서 6:69 · 본디새김
오이밭의 허수아비는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내어 세워 놓은 물건입니다. 멀리서 보면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무것도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못합니다.
오이밭의 허수아비는 원래 무엇인가를 놀라게 하려고 세워 놓은 물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바벨론의 신상들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킨다고 말했던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6:3).
두려움을 일으키는 능력과 실제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다릅니다.
신의 머리에 새들이 앉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무로 되고 금과 은을 입힌 그들의 신들은 온갖 새가 올라앉는 뜰의 가시나무와 같다. 또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내던져진 시체와 같다.바룩서 6:70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앞서 박쥐와 제비와 고양이가 신상 위에 앉는 모습과 연결됩니다(6:21). 신성한 권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대상이지만, 새들에게는 그저 앉아 쉴 수 있는 물건입니다.
이어지는 시체의 비유는 신상의 생명 없음을 더욱 강조합니다. 어둠 속에 내던져진 시체는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신을 돌보지도 못합니다.
썩어 가는 화려한 옷
71절에서 신상의 옷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것들 위에서 썩어 가는 자주색 옷과 빛나는 옷감으로도 그것들이 신이 아님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들 자신도 나중에는 먹혀 없어질 것이며, 그 땅에 치욕이 있을 것이다.바룩서 6:71 · 본디새김
신상은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으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5:1). 그러나 6장의 신상들은 인간이 만들어 입힌 옷이 썩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두 장면이 똑같이 옷을 말하지만, 그 옷의 출처와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상을 지니지 않은 의로운 사람이 더 낫다. 그는 모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6:72 · 본디새김
여기서 「의로운」이라는 말은 단순히 우상을 소유하지 않는 외적인 상태만을 뜻한다고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편지 전체를 돌아보면 의로움에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배와 함께, 생명과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그 사람의 구체적인 행위를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어떤 특별한 선행을 했다고 덧붙일 수는 없습니다.
생명 없는 화려한 신상보다,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며 의롭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 더 낫습니다.
조금 더 깊이
「빛나는 옷감」으로 옮긴 그리스어 마르마로스(μάρμαρος)는 일반적으로 대리석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번역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자주색 옷과 나란히 놓이고 썩는 대상으로 묘사되므로 옷감으로 이해한 번역이 가능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려움에서 분별로, 분별에서 의로운 삶으로
그런데 편지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억지로 참으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 자세히 보라고 합니다. 신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바룩서 6장의 풍자를 그대로 모든 다른 종교의 실제 모습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포로 공동체의 신앙을 지키도록 권고하기 위해 상대 종교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합니다.
오이밭 한가운데 허수아비가 서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지키지 못합니다. 뜰의 가시나무에는 새들이 앉고, 화려한 옷을 입힌 신상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낡아 갑니다.
그 모든 물건들보다 한 사람이 낫다고 편지는 말합니다.
우상을 지니지 않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화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포로이기 때문에 힘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과 경배해야 할 분을 구별합니다.
그것이 이 편지가 포로들에게 가르치려는 자유입니다.
신상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유.
바룩서 6장은 금관을 쓴 신상의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신상보다 낫다고 선언된, 우상 없는 의로운 한 사람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