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34장

이 장의 자리 · 31–34장 · 모세의 마지막 말

모세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약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34장은 한 노인이 산에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모세는 요단강 동쪽 모압 평원에서 느보산으로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 앞으로 차지할 땅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마지막 장면을 지배하는 역설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백성과 함께하며,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온 사람이 정작 그 목적지에 들어가지 못한 채 죽습니다.

모세의 삶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끝난 것입니까?

본문은 이 질문에 단순히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가 평생 섬긴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 줍니다. 또한 그의 생애를 땅의 정복이라는 결과만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그를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님과 맺었던 특별한 관계,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행하신 일입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534장 본문 읽기 →

느보산에서 바라본 땅 — 보게 하셨지만 건너가게 하지는 않으셨다

신명기 34:1–4 본문 →

하나님은 왜 땅 전체를 보여 주시는가? (1–3절)

모세는 모압 평원에서 느보산으로,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피스가 꼭대기로 올라갔다. 여호와야훼가 그에게 온 땅, 곧 단까지 이르는 길르앗과, 납달리 전체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과, 네게브와 그 평야, 곧 초아르까지 이르는 대추야자나무의 성읍 여리고의 넓은 골짜기를 보여 주었다.신명기 34:1–3 · 본디새김

신명기에서 모세는 오랫동안 백성에게 말하는 사람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는 과거를 설명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가르치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경고하고, 지파들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서는 더 이상 백성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고, 하나님이 그에게 땅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야 할 마지막 말씀 앞에 섭니다.

이 지명들은 땅의 여러 방향과 지역을 두루 가리킵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쪽과 관련되고, 단과 납달리는 북쪽,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중부 산지, 유다는 남부와 서쪽, 네게브는 남쪽의 건조 지역과 연결됩니다. 여리고의 넓은 골짜기와 초아르도 요단 계곡과 사해 주변의 지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직접 소유하지 못할 땅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땅은 단순히 눈앞에 펼쳐진 경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가 살아갈 장소이며,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무대입니다.

모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다 (4절)

여호와야훼가 그에게 말했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라고 맹세한 땅이다. 내가 네 눈으로 이 땅을 보게 했으나, 너는 그곳으로 건너가지 않을 것이다.」신명기 34:4 · 본디새김

창세기 12:7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6:3에서는 이삭에게, 28:13에서는 야곱에게도 땅에 관한 약속이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긴 여정은 모세가 만들어 낸 개인적인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역사 안에서 부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건너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땅을 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면서도, 그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판단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신명기 32:51에서 제시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므리바 물에서 하나님을 거룩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그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그 결정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의 후손이 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후손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지만, 약속의 모든 열매를 자신의 생애 안에서 누리도록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역사에 참여했지만, 그 약속의 최종적인 주인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백성을 약속의 땅 앞까지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이 섬겨 온 약속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느보산의 한 지점에서 본문에 열거된 모든 지역을 실제 육안으로 하나하나 식별할 수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특히 먼 북쪽 지역과 서쪽 바다까지 포함된 묘사를 현대적인 전망대의 시야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여호와야훼께서 모세에게 그 땅을 보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보여 주심이 자연적인 시야의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졌는지, 특별한 방식으로 주어진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문학적으로는 여러 지명을 이어 가며 땅 전체를 펼쳐 보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종 모세가 죽다

신명기 34:5–8 본문 →

왕도 정복자도 아닌, 「여호와야훼의 종」 (5절)

여호와야훼의 종 모세는 여호와야훼의 말에 따라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신명기 34:5 · 본디새김

모세의 죽음은 단 한 문장으로 기록됩니다.

그가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죽음을 앞두고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문장에는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두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야훼의 종」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훼의 말에 따라」입니다.

민수기 12:7에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자신의 온 집안에서 신실한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한 권위를 가진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의 근거는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달하고, 그분이 맡기신 일을 수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생애를 마음대로 연장하거나,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그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마지막 순간에 함께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모든 판단에서 벗어날 특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종으로 부름받았고, 자신의 생애 동안 맡겨진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 그의 이름 앞에 놓여 있습니다.

누가 모세를 묻었는가? (6절)

여호와야훼가 그를 모압 땅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묻었다.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신명기 34:6 · 본디새김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의 무덤을 찾아가 그곳에 머무는 것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건너가야 할 요단강이 있고, 들어가야 할 땅이 있으며,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삶은 끝났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찾아가 기념할 수 있는 유명한 무덤보다, 백성이 계속 듣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까지」라는 표현은 모세의 죽음을 전하는 서술자가 그 사건 이후의 시점에서 돌아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사실만으로 그 기록이 정확히 어느 시대에 누구에 의해 작성되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쇠약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7절)

모세는 죽을 때 백스무 살이었다. 그의 눈은 흐려지지 않았고 그의 생기도 사라지지 않았다.신명기 34: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31:2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백스무 살이 되어 더 이상 나가고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단순히 모세가 너무 늙어서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는 뜻으로만 읽었다면, 34:7과 긴장이 생깁니다. 여기서는 그의 눈이 흐려지지 않았고 생기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더 이상 나가고 들어올 수 없다고 한 것은 단순한 신체적 무능력이라기보다,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으며 요단을 건널 수 없다는 사실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에게 더 살 힘이 남아 있었는지를 따지기보다,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생애와 사명이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삼십 일 동안 울고, 애도의 날들이 끝나다 (8절)

이스라엘 자손은 모압 평원에서 모세를 위해 삼십 일 동안 울었다. 그렇게 모세를 애도하며 울던 날들이 끝났다.신명기 34:8 · 본디새김

민수기 20:29에서도 아론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 온 집안이 삼십 일 동안 애도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기간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지도자를 잃은 슬픔을 공동체적으로 표현하는 시간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무덤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죽음이 기억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자신들과 함께 걸었던 시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그들을 이끌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며, 위험과 불순종의 순간마다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모세를 애도하는 일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었습니다. 슬픔이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지만, 애도의 기간은 끝났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그 슬픔이 이스라엘의 미래를 멈추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와야훼의 말에 따라」의 히브리어는 알 피 여호와야훼로,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야훼의 입에 따라’라는 뜻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에 따라 어떤 일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모세가 하나님의 입맞춤으로 죽었다는 특정한 죽음의 방식에 대한 묘사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후대의 해석 전통과 구별하여, 본문의 직접적인 의미는 모세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6절의 히브리어는 ‘그를 묻었다’라는 남성 단수 동사를 사용하지만, 그 문장 안에 묻은 사람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하시고 모세의 죽음을 정하신 분이 여호와야훼이므로, 본디새김처럼 여호와야훼를 주어로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주체를 특정하지 않고 ‘그가 묻혔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일부 고대 전승에서도 매장 행위의 주체를 다르게 표현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직접 모세를 묻으셨다는 해석에는 문맥상의 근거가 있지만, 그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까지 본문에서 알 수는 없습니다. 왜 모세의 무덤은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무덤을 특별한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하면 그러한 해석에는 나름의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이유를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덤을 숨기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손은 여호수아에게 남아 있다

신명기 34:9 본문 →

여호수아는 무엇을 이어받았는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했다. 모세가 그에게 두 손을 얹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행했다.신명기 34:9 · 본디새김

9절은 모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민수기 27:18–23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서 여호수아에게 손을 얹어 그를 세웠습니다. 신명기 31장에서도 모세는 여호수아를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격려했고, 여호와야훼께서도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제 34:9는 그 준비가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지혜의 영」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갖고 있거나 머리가 좋다는 의미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혜와 관련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앞으로 백성을 이끌며 여러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 사명을 수행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지혜의 영입니다.

민수기 27장에서 여호수아를 세우도록 먼저 명령하신 분은 여호와야훼였습니다. 모세의 안수는 그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권위는 모세 개인의 소유였던 힘을 물려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말을 듣는다

백성은 여호수아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여호와야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새롭게 교체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을 이끌지만, 그가 자기 뜻대로 완전히 새로운 언약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신명기 31장에서 기록하고 맡긴 율법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모세가 죽더라도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백성을 이끌 지도자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1:1–2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모세가 죽은 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너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1:7–8에서는 모세가 명령한 율법에서 벗어나지 말고 그것을 묵상하며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여호수아 24:29에서는 훗날 여호수아 역시 「여호와야훼의 종」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죽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사명이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지면서도, 각 지도자의 생애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가 뒤를 이었지만,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사명은 이어지지만, 모세라는 사람의 독특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에게 맡겨진 일이 있었고,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둘을 부르신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지만, 두 사람의 역할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신명기 34:10–12 본문 →

모세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10절)

신명기의 마지막 세 절은 모세에 대한 평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여호와야훼가 얼굴을 마주하여 알던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신명기 34:10 · 본디새김

민수기 12:6–8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인 예언자에게 환상이나 꿈을 통해 자신을 알리실 수 있지만, 모세에게는 그와 달리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1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34:10은 한 걸음 더 특별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얼굴을 마주하여 알았다고 말하는 대신, 여호와야훼께서 모세를 얼굴을 마주하여 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특별한 관계 안에서 아시고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알다’는 말은 때때로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 관계적으로 알고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다만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표현을 모세가 하나님의 육체적인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33:20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얼굴을 마주한다는 표현은 이 문맥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소통을 나타내는 관계적 언어로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그의 독립적인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를 부르시고 말씀하시며 사명을 맡기신 여호와야훼와의 특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은 모세가 죽은 이후의 역사를 돌아보는 평가입니다. 앞서 6절의 「오늘날까지」라는 표현처럼, 여기서도 서술자는 모세의 죽음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그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앞으로 영원히 어떤 예언자도 모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미래 예언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명기 18장에서는 하나님이 앞으로 말씀을 전달할 예언자를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반면 34장에서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모세와 같은 특별한 예언자가 없었다는 평가가 내려집니다.

더욱이 34장에서는 모세의 독특함을 단순히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했다는 사실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얼굴을 마주하여 아셨다는 관계와, 그를 통해 행하신 출애굽의 놀라운 일들이 함께 언급됩니다.

신약의 사도행전 3:22–23에서는 신명기 18장의 모세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이는 신명기 34장의 마지막 평가 자체가 예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세의 예언자적 역할을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다시 읽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셨다 (11절)

여호와야훼가 그를 보내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종과 그의 온 땅을 상대로 행하게 한 모든 표징과 이적에서나,신명기 34:11 · 본디새김

모세는 보냄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4장에서 시작된 모세의 부르심과 연결됩니다. 가시덤불 가운데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기 위해 파라오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겠느냐고 물었고, 말하는 데 능숙하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그를 보내셨습니다.

신명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모세의 위대함은 바로 그 부르심에서 출발합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12절)

신명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행한 강한 손의 모든 일과 큰 두려움을 일으킨 모든 일에서도 그와 같은 예언자는 없었다.신명기 34:12 · 본디새김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서」라는 표현은 신명기 34장의 첫 장면과 독특한 대조를 이룹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자신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땅이었습니다.

백성이 본 것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강한 손이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능력을 나타낼 때 반복해서 등장합니다(출애굽기 13:3; 신명기 4:34). 그런데 34:12에서는 모세가 행한 강한 손의 일들이 언급됩니다.

이를 하나님과 모세가 동등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1절에서 분명히 밝힌 것처럼, 여호와야훼께서 모세를 보내어 표징과 이적을 행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이스라엘 앞에 드러내는 도구이자 대표자였습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여기서 예상 밖의 방식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이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모습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행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며 끝납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시선은 모세가 차지하지 못한 땅보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미 이루신 구원의 역사에 머뭅니다.

끝맺으며 — 마지막으로 본 땅, 마지막으로 기억된 사람

신명기 34:1–12 본문 →

모세는 자신이 본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았습니다. 모세의 생애를 마지막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가 얻지 못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루신 일입니다. 이 장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 지도자를 사용하시면서도, 그 약속을 특정 지도자의 생애 안에 가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충실한 사람에게는 끝까지 모든 것을 이루게 해 주신다는 단순한 성공 이야기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실제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느보산에는 이제 모세가 없습니다.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말씀을 들은 백성이 남아 있고, 그들을 이끌 여호수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이 펼쳐져 있습니다.

모세는 그 땅을 보았습니다.

건너가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여호와야훼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는 바로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