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7–11장 · 지혜가 닿지 못하는 곳
향기로운 기름을 망치는 작은 파리
향료 만드는 사람이 정성껏 기름을 만들었습니다. 좋은 재료를 모으고, 향을 배합하고, 오랜 시간 손질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름에는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 속에 파리 몇 마리가 죽어 있습니다.
파리는 작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파리들이 기름을 상하게 합니다. 향기롭던 기름에서 악취가 나고, 내용물이 변질됩니다.
전도서는 10장을 이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죽은 파리들이 향료 만드는 이의 기름을 악취 나게 하고 부글거리게 한다.」
전도자는 왜 하필 향료와 죽은 파리를 이야기할까요?
앞 장에서는 지혜로운 한 사람이 자기 지혜로 성읍을 구했지만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10장은 그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살펴봅니다. 사람이 오랜 시간 쌓아 온 지혜와 명예가 아주 작은 어리석음 때문에 손상될 수 있습니다.
이 장은 하나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지 않습니다. 짧은 격언과 관찰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격언들을 자세히 보면 하나의 공통된 문제가 떠오릅니다.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악이나 극적인 재앙만이 아닙니다. 작아 보이는 어리석음 하나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이런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전도자는 큰소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지혜를 말하지 않습니다. 화가 난 권력자 앞에서 자리를 지키는 차분함, 무뎌진 쇠를 알아보고 날을 가는 판단, 말을 해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아는 분별, 그리고 자기 책임 아래 있는 집을 무너지지 않도록 돌보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그것들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습니다.
지혜와 명예보다 무거운 작은 어리석음
죽은 파리들이 향료 만드는 이의 기름을 악취 나게 하고 부글거리게 한다. 조금의 어리석음이 지혜와 명예보다 더 무겁다.전도서 10:1 · 본디새김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파리의 크기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 사이의 불균형입니다. 향료는 여러 재료를 적절하게 다루어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완성된 결과물을 망치는 데에는 그만한 수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파리 몇 마리면 충분합니다.
전도자는 여기서 어리석음이 언제나 지혜보다 강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작은 어리석음이 큰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더 무겁다’는 표현에는 흥미로운 언어적 특징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야카르(יָקָר)는 귀중하다, 값지다는 의미를 나타내지만, 무겁거나 중대한 것을 가리키는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본디새김은 이 문맥에서 조금의 어리석음이 많은 지혜와 명예를 압도하는 모습을 ‘더 무겁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저울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한쪽에는 오랫동안 쌓아 온 지혜와 명예가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조금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양으로 보면 지혜와 명예가 훨씬 커 보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어리석음이 저울을 기울게 합니다.
사람은 한 번의 경솔한 판단으로 신뢰를 잃을 수 있습니다. 오래 준비한 일도 사소한 부주의 때문에 손상될 수 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작은 어리석음은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이의 마음은 그의 오른쪽으로 향하고, 어리석은 이의 마음은 그의 왼쪽으로 향한다.전도서 10:2 · 본디새김
오늘날 이 표현을 읽으면 오른쪽과 왼쪽이 어떤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성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는 본문에 없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여러 표현에서 오른쪽은 힘과 유리한 위치, 능숙한 행동을 연상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됩니다. 반대로 왼쪽이 언제나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생각과 판단, 의지까지 포함하는 인간 내면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감정적인 성향보다 행동을 이끄는 판단의 방향에 관한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에게 세상의 조건이 완전히 다르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그 조건 속에서의 삶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는 길을 걸을 때에도 분별이 모자라, 모두에게 자기가 어리석다고 말한다.전도서 10:3 · 본디새김
길을 걷는 일은 누구나 하는 평범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때에도 분별이 부족합니다.
마지막 표현은 두 가지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모두에게 어리석음을 드러낸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부른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한 가지 역설이 생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드러냅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평범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도 드러납니다.
다스리는 이가 네게 화를 내더라도 네 자리를 떠나지 마라. 차분함이 큰 잘못들도 가라앉히기 때문이다.전도서 10:4 · 본디새김
그 앞에 있는 사람은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을 수 있습니다. 맞서서 화를 내거나, 당장 관계를 끊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차분함’은 치유나 완화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문맥에서는 격한 반응을 가라앉히는 온화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큰 잘못을 예방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이미 생긴 잘못의 결과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전도자가 강조하는 것은 분노에 분노로 대응하는 일이 언제나 지혜로운 선택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권력자가 무슨 일을 하든 참고 따르라는 명령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전도자는 통치자의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비판합니다. 따라서 4절은 권력자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말이 아니라, 분노한 권력자를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위험이 왕의 자리에서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요?
어리석음이 높은 자리에 앉을 때
해 아래에서 내가 본 나쁜 일이 있다. 통치자에게서 나오는 실수 같은 것이다.전도서 10:5 · 본디새김
‘내가 본 나쁜 일이 있다’는 표현은 단순한 가능성이나 가정이 아니라, 실제 세상에 대한 관찰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는 문제의 출발점을 통치자에게서 찾습니다.
여기서 ‘실수’는 잘못이나 과오를 뜻합니다. 반드시 계획적인 악행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잘못된 판단이나 부주의에서 생긴 과오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1절의 작은 어리석음과 잘 어울립니다.
통치자는 반드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만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 판단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사람을 높은 자리에 세우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결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아주 높은 자리에 놓였고, 부자들은 낮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전도서 10:6 · 본디새김
여기서 높은 자리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보다 사회적 지위와 권한을 나타냅니다. 문제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부유한 사람은 본래 높은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도덕적 가르침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재산이 많다는 사실이 반드시 지혜롭거나 의롭다는 증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사람의 지위가 낮아졌다는 것 자체보다, 통치자의 판단으로 권한과 책임이 적절하지 않은 곳에 주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중심에 있습니다.
나는 종들이 말을 타고, 고관들이 종처럼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전도서 10:7 · 본디새김
고대 왕정에서 말은 군사력이나 높은 지위와 관련된 동물이었습니다. 반면 땅 위를 걸어 다니는 종의 모습은 낮은 사회적 지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전도자가 본 장면에서는 이 관계가 뒤집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신분질서의 절대적인 선언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 실제로 종들이 어떤 능력을 갖추었는지, 고관들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5–6절과 연결하면, 전도자는 통치자의 실수로 인해 어리석음이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잘못된 판단은 그 자신에게 큰 손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치자의 잘못된 판단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꿉니다. 누가 높은 자리에 앉고, 누가 낮은 자리에 놓이는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한 사람의 어리석음을 많은 사람의 문제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전도자는 갑자기 구덩이와 담, 돌과 나무, 무뎌진 쇠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무뎌진 쇠를 갈지 않고 힘만 더 쓰는 사람
구덩이를 파는 이는 그 안에 떨어지고, 담을 허무는 이는 뱀에게 물린다.전도서 10:8 · 본디새김
구덩이를 파는 사람은 자신이 만든 구덩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담을 허무는 사람은 그곳에 있던 뱀에게 물릴 수 있습니다.
‘구덩이를 파는 사람이 그 안에 떨어진다’는 표현은 다른 성경 본문에서 악한 계략이 그것을 꾸민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8절을 해를 끼치려는 사람이 자기 계략에 걸린다는 경고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9절을 보면 일반적인 작업에 따르는 위험을 묘사하는 읽기도 자연스럽습니다.
돌을 옮기는 이는 그 돌에 다치고, 나무를 쪼개는 이는 그 나무 때문에 위험에 빠진다.전도서 10:9 · 본디새김
돌을 옮기는 일이나 나무를 쪼개는 일은 반드시 악한 행동이 아닙니다. 집을 짓거나 생활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기 위한 정상적인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칠 위험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위험한 결과가 발생했다고 해서 그 일을 행한 사람이 반드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담을 허물고, 돌을 옮기고, 나무를 쪼개는 행위는 주변 환경을 바꾸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그 작업은 일하는 사람 자신에게 예상하지 못한 위험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쇠가 무뎌졌는데도 날을 갈지 않으면, 힘을 더 들여야 한다. 지혜는 일을 잘되게 하는 데 이롭다.전도서 10:10 · 본디새김
이때 사람에게는 적어도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있는 힘을 더 쓰는 것입니다. 날이 무뎌졌으니 더 세게 내려치고,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은 힘을 쏟습니다. 다른 하나는 작업을 잠시 멈추고 쇠의 날을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단순히 노력하는 사람의 성실함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고, 일을 수행하는 방법을 바로잡는 능력입니다.
힘을 많이 들이는 것과 일을 잘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때로는 힘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용하고 있는 도구나 방법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이롭다(יִתְרוֹן)’는 표현은 지혜의 실제적인 유익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절을 무슨 일이든 올바른 방법만 찾으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9장에서 전도자는 빠른 사람이 반드시 경주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9:11). 10:10도 그런 한계를 뒤집지 않습니다. 다만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어리석은 방법을 계속 사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의 모든 결과를 지배할 수 없지만, 무뎌진 날을 알아보고 갈 수는 있습니다.
주문을 걸기 전에 뱀이 물면, 주문을 거는 이에게는 이익이 없다.전도서 10:11 · 본디새김
전도자는 뱀을 다루는 주문의 관행이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를 평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보여 주는 것은 간단한 시간적 관계입니다. 일이 이미 벌어진 뒤에는 그 기술이 아무 이익을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절에서는 그 방법을 적절한 때에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날을 가는 방법을 알더라도 실제로 갈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뱀을 다루는 기술이 있더라도 사용할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뱀을 다루는 사람은 말이나 주문을 사용합니다. 다음 단락에서는 바로 인간의 입과 말이 주제가 됩니다.
다만 말은 쇠나 나무와 다릅니다.
무뎌진 도구는 사용하기 어렵게 만들지만, 어리석은 말은 말하는 사람 자신을 삼킬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만 길을 모른다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얻고, 어리석은 이의 입술은 그를 삼킨다.전도서 10:12 · 본디새김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언제나 듣기 좋은 말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의 내용과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롭고 유익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입은 음식을 삼키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 자신을 삼킵니다. 말하는 사람이 자기 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내뱉은 말이 도리어 그 사람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해로운 광기다.전도서 10:13 · 본디새김
어리석은 말이 단순한 판단 착오로 끝나지 않고 더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는 모습입니다. ‘광기’는 여기서 의학적인 질병을 진단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절제와 분별을 잃은 어리석음의 극단적인 모습을 가리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말을 통해 스스로를 더욱 깊은 어리석음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는 말을 늘어놓는다.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그의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그에게 알려 주겠는가?전도서 10:14 · 본디새김
그는 미래에 대해 확신에 찬 말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미래를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앞날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음의 핵심은 단순히 모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말하는 데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의 수고는 그를 지치게 한다. 그는 성읍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전도서 10:15 · 본디새김
여기서 성읍으로 가는 길은 당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했을 법한 길입니다. 전도자는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성읍으로 가는 길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실제 지리적 무지에 대한 격언으로 읽을 수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 삶의 기본적인 방향조차 분별하지 못한다는 풍자적인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을 늘어놓는 어리석은 사람이 등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번째 읽기는 특히 의미가 있습니다.
먼 미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눈앞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든 일에 대해 설명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닙니다. 지금 주어진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고, 해야 할 일을 적절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능력입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혼자 길을 잃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방향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조금 더 깊이
잠언 15:28에서는 의로운 사람의 마음이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신약의 야고보서 3:5–6은 작은 혀가 큰일을 일으키고,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우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전도서 10장의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작은 것이 큰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아침부터 먹고 즐기는 고관들
네 왕이 아이이고 네 고관들이 아침에 먹는 나라야, 아, 너는 불행하다.전도서 10:16 · 본디새김
이 말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나라의 상태를 향한 탄식입니다.
‘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נַעַר)는 어린아이나 젊은 사람을 가리킬 수 있지만, 시종이나 젊은 종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왕을 문자적으로 어린 왕으로 읽을 수도 있고, 통치자로서 미숙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왕의 나이를 나타내는 읽기를 따릅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만으로 그 왕이 반드시 무능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열왕기하 22:1–2에서 요시야는 여덟 살에 왕이 되었지만, 성경은 그가 여호와야훼의 눈에 올바른 일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아침에 식사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문제는 하루의 첫 식사 자체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과 대조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 왕이 귀족의 아들이고 네 고관들이 술을 마시려고가 아니라 힘을 얻으려고 제때 먹는 나라야, 너는 행복하다.전도서 10:17 · 본디새김
이 대조는 앞의 고관들이 이른 시간부터 먹고 마시는 즐거움에 빠져 있는 모습을 암시합니다. 반대로 좋은 나라의 고관들은 적절한 때에 필요한 만큼 먹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일을 자기 역할을 감당할 힘을 얻는 일과 연결합니다.
앞 장에서 전도자는 사람에게 기쁘게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습니다(9:7). 그런데 10장에서는 아침부터 먹고 마시는 고관들을 비판합니다.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아닙니다. 두 장면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가 차지하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9장에서 식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몫을 기뻐하며 누리는 일입니다. 10장에서 문제 되는 식사는 통치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절제와 적절한 때를 잃어버린 채 즐거움에 몰두하는 모습입니다.
전도자는 기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을 버린 즐거움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좋은 왕을 가리키는 ‘귀족의 아들’은 자유인이나 귀한 신분의 사람에게 속한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높은 신분과 통치에 어울리는 교육이나 품위를 연상시키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족 출신은 반드시 지혜롭고, 낮은 신분 출신은 반드시 어리석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통치와 나쁜 통치의 차이는 높은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가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사용하는가에서도 드러납니다.
게으름 때문에 들보가 내려앉고, 늘어진 두 손 때문에 집에 물이 샌다.전도서 10:18 · 본디새김
전도자는 갑작스러운 폭풍이나 지진 때문에 집이 무너지는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집을 돌보지 않는 태도 때문에 생기는 손상을 말합니다.
이 장면은 앞에서 무뎌진 쇠를 갈지 않는 사람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쇠가 무뎌졌는데도 손질하지 않으면 힘을 더 써야 합니다. 집도 제때 손질하지 않으면 더 큰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문제는 단순히 무언가가 낡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 집을 문자적인 가옥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앞의 왕과 고관들에 관한 말씀과 연결하여 국가나 통치 체계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집을 명시적으로 국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지도자들의 절제 부족을 이야기한 바로 다음에 집의 부실한 관리가 등장한다는 점은 의미 있습니다.
사람들은 웃고 즐기려고 음식을 차리고, 포도주는 삶을 즐겁게 하며, 돈은 모든 것에 답이 된다.전도서 10:19 · 본디새김
전도자가 정말 돈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돈(כֶּסֶף)’은 본래 은을 뜻하는 말이며, ‘응답하다(עָנָה)’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따라서 돈이 여러 요구에 대응하거나 필요한 것을 마련하게 해 준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문장의 의도와 범위입니다.
한 가지 읽기는 이것을 사회의 현실에 관한 관찰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음식과 포도주를 마련하는 데에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 현실에서 돈은 많은 요구를 해결하는 수단이 됩니다.
다른 읽기는 이것을 앞에 등장한 무책임한 지도자들의 태도를 드러내는 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가 이 말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것이 명백한 반어라고 표시하는 표현이 없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풍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자는 돈의 실제적인 힘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답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집을 돌볼 사람에게 자원이 있어도 그가 손을 놓고 있다면 집에는 물이 샐 수 있습니다. 왕과 고관들이 먹고 마실 재원을 가지고 있더라도 적절한 때와 목적을 잃으면 그 나라에 불행이 닥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7:12에서는 지혜와 돈이 모두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다고 말하면서도, 지혜에는 그것을 가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유익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5:10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돈으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진술을 고려하면 10:19를 돈이 인간 삶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한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은 전도서 전체의 흐름과 잘 맞지 않습니다. 또 전도서 7:13은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묻는 반면, 10장은 사람이 자기 책임 아래 있는 일에서 얼마나 지혜롭거나 어리석게 행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인간이 자기 뜻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침실에서 한 말도 새가 옮긴다
네 생각 속에서라도 왕을 저주하지 마라. 네 침실 안에서도 부자를 저주하지 마라. 하늘의 새가 그 소리를 옮기고, 날개 달린 것이 그 말을 전하기 때문이다.전도서 10:20 · 본디새김
전도서는 10장을 다소 뜻밖의 경고로 마칩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자기 침실 안에서조차 조심하라고 합니다. 전도자는 비밀이라고 생각한 말조차 예기치 않은 경로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새는 사람이 붙잡기 어렵고, 어디로 날아갈지 알기 어렵습니다.
한 말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내 통제 아래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왕정에서 왕을 향한 저주나 모욕은 중대한 정치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도자의 경고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말의 위험을 고려하라는 실제적인 지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왕을 저주하지 말라는 것과 왕의 잘못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이미 이 장에서 통치자의 실수가 사회에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절을 모든 정치적 비판과 정당한 문제 제기를 금지하는 명령으로 해석하면 앞의 내용과 충돌합니다.
전도자가 직접 말하는 것은 저주의 위험입니다. 그는 왕과 부자의 권력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권력자를 향한 분노가 경솔한 말로 표현될 때 자신에게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합니다.
앞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입술이 자신을 삼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는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지혜는 큰일을 말하기 전에 작은 일을 살핀다
전도서 10장을 처음 읽으면 서로 관계없는 짧은 격언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모두 인간이 어떤 일을 얼마나 잘 다루고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도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지혜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 영역을 보여 줍니다.
전도서 10장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모든 사건에 대해 하나님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다고 해설자가 대신 확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이 장을 하나님과 관계없는 처세술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이 다른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어리석음이 큰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면, 작아 보이는 지혜로운 행동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4의 차분함은 큰 잘못들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10:10의 날을 가는 행동은 불필요한 수고를 줄일 수 있습니다. 10:17의 절제는 지도자들이 자기 역할을 감당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지혜는 언제나 극적인 승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문제를 더 크게 만들지 않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늘의 새 한 마리를 남겨 둡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침실의 말이 새의 날개를 타고 멀리 전해집니다. 말한 사람은 그 새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 말이 어디까지 전해질지도 알지 못합니다.
전도자는 그런 세상을 보여 주면서 인간에게 모든 일을 통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자기 입 안에 있는 말을 신중하게 다루라고 권합니다.
향료를 망치는 파리도 작고,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작습니다.
그러나 향료의 작은 파리가 기름 전체를 상하게 하듯, 가볍게 여긴 말 한마디도 생각보다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큰일을 이루는 능력일 뿐 아니라, 작은 어리석음이 큰 해악이 되지 않도록 살피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전도서 10장은 향기로운 기름 속의 작은 파리로 시작하여, 침실에서 나온 말을 옮기는 날개 달린 새로 끝납니다. 두 장면 사이에는 왕의 자리와 일터, 식탁과 집이 놓여 있습니다. 그 모든 곳에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얼마나 신중하게 다루는지 드러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