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7–11장 · 지혜가 닿지 못하는 곳

바람을 다 알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

농부가 들판에 서 있습니다. 손에는 씨앗이 있습니다. 이제 땅에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바람이 붑니다.

농부는 바람의 방향을 살핍니다. 조금 더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구름이 보입니다. 비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다시 기다립니다.

전도자는 이 농부에게 뜻밖의 말을 건넵니다. 「바람을 살피는 이는 씨를 뿌리지 않고, 구름을 바라보는 이는 거두지 않는다」(11:4).

농부는 어리석은 선택을 피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적절한 때를 알아야 씨앗을 낭비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모든 조건을 확인하려는 그의 신중함은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 버렸습니다.

전도서 11장은 이러한 역설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일이 성공할지, 어떤 재앙이 닥칠지, 자신이 시작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은 모든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일까요?

전도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빵을 물 위로 보내고, 여러 사람에게 몫을 나누고, 아침에도 저녁에도 씨를 뿌리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고개를 들어 햇빛을 바라보게 합니다. 살아 있는 날들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아직 젊다면 젊음의 기쁨을 누리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두 권면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삶을 영원히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오늘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무조건 행동하고 마음대로 즐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고, 젊은이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711장 본문 읽기 →

물 위로 보내는 빵, 일곱과 여덟에게 나누는 몫

전도서 11:1–2 본문 →

네 빵을 물 위로 보내어라. 많은 날이 지난 뒤에 그것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전도서 11:1 · 본디새김

전도자는 빵을 먹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보내라고 합니다. 그것도 물 위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빵을 물에 던지면 젖거나 떠내려갈 텐데, 어떻게 많은 날이 지난 뒤에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이 표현에는 오래전부터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는 상업적인 활동에 관한 비유로 읽는 것입니다. 빵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음식 자체뿐 아니라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빵을 물 위로 보낸다’는 표현은 곡물이나 상품을 바다 건너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일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상품을 보내는 사람은 그것이 언제 돌아올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아무것도 보내지 않는다면 돌아올 것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관대하게 나누는 삶에 관한 비유로 읽는 것입니다. 빵은 생존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것을 자신이 붙잡고 있지 않고 밖으로 보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소유를 나누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많은 날이 지난 뒤에 그것을 찾을 것’이라는 말은 관대한 행동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좋은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지혜의 표현이 됩니다. 이 읽기는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에게 몫을 나누어 주라는 명령과 잘 어울립니다.

두 해석은 서로 다른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는 위험을 감수하며 재화를 보내는 사람을, 다른 하나는 자기 양식을 나누는 사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본문은 물 위로 보낸 빵이 정확히 어떤 거래나 나눔을 가리키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상업이나 자선 가운데 하나만을 유일한 의미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낸 뒤에는 기다려야 합니다.

빵을 보내는 행동과 그것을 다시 찾는 일 사이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행동의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곧바로 결과를 얻는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낸 것을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행동하라고 권합니다.

다만 이 구절을 모든 투자나 선행이 반드시 같은 형태의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무조건적인 약속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6절은 어떤 일이 잘될지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1절은 불확실한 결과를 안고도 시작하라는 권면입니다.

이제 전도자는 그 행동을 한 방향에만 집중하지 말고 넓혀 보라고 합니다.

일곱에게 몫을 주고, 여덟에게도 주어라. 땅 위에 어떤 재앙이 닥칠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전도서 11:2 · 본디새김

여기서 ‘몫’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나누어 받은 부분이나 할당된 몫을 나타냅니다. 앞서 9:9에서는 사람에게 주어진 삶과 수고의 몫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몫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동이 등장합니다.

일곱과 여덟은 반드시 정확히 일곱 명 또는 여덟 명을 세라는 숫자라기보다, 충분히 넓은 범위에서 거기에 더하여 나누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업의 맥락이라면 자신의 재산이나 활동을 여러 곳에 나누어 위험을 분산하라는 뜻이 됩니다. 한 곳에 재앙이 닥쳐도 다른 곳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남습니다.

나눔의 맥락이라면 자신의 몫을 소수에게만 제한하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넉넉하게 나누라는 권면이 됩니다. 어떤 재앙이 닥칠지 알 수 없으므로, 재앙이 오기 전부터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라는 의미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든 전도자는 재앙의 가능성을 이유로 자기 소유를 더 단단히 움켜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누라고 합니다.

앞날에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가진 것을 아끼고, 새로운 시도를 줄이고, 자신에게 돌아올 손실을 최소화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그 불확실성을 행동을 줄이는 이유로 삼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한 가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지 말고 자신의 행동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현실에 맞게 행동하는 지혜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하늘에 구름이 모이고 바람이 불 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전도자는 이제 시선을 물 위에서 하늘과 들판으로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바다를 통한 교역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9:26–28에는 솔로몬의 선박들이 오빌로 가서 금을 가져오는 이야기가 나오고, 시편 107:23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11:1을 읽으면, 물 위로 보낸 빵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찾는다는 말은 교역의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 2절의 일곱과 여덟에 관해서는, 구약의 시문학에 한 숫자를 제시하고 이어서 그보다 하나 큰 숫자를 제시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미가 5:5의 일곱 목자와 여덟 지도자가 그러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숫자의 정확한 합계보다 충분함과 확장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구름이 가득 차고 나무가 쓰러지는 세상

전도서 11:3–4 본문 →

구름에 비가 가득 차면 땅 위에 쏟아진다. 나무가 남쪽으로 쓰러지든 북쪽으로 쓰러지든, 그 나무는 쓰러진 자리, 바로 거기에 있게 된다.전도서 11:3 · 본디새김

이 절은 두 개의 자연 현상을 나란히 놓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당연한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가 가득 찬 구름이 비를 쏟고, 쓰러진 나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무엇이 특별할까요? 그러나 앞뒤 문맥 속에서 보면 이 당연한 말이 의미를 갖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일과 나무가 쓰러지는 일은 사람이 언제나 결정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단 나무가 쓰러지면 그 나무는 쓰러진 자리에 놓입니다. 여기서 나무가 남쪽으로 쓰러지는지 북쪽으로 쓰러지는지가 특별한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 쓰러지든 결과는 이미 발생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 강조점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자연에서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이 발생한 뒤에는 그 결과를 마음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강조점은 서로 배제되지 않습니다. 모두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사건과 이미 이루어진 결과를 바라보게 합니다.

전도자는 이 자연의 움직임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람을 살피는 이는 씨를 뿌리지 않고, 구름을 바라보는 이는 거두지 않는다.전도서 11:4 · 본디새김

농부에게 바람과 구름은 결코 사소한 요소가 아닙니다. 씨를 뿌릴 때에는 날씨가 중요합니다. 수확할 때에도 비가 언제 내릴지 살펴야 합니다.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이라면 날씨를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날씨를 관찰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관찰 자체가 아니라 관찰이 행동을 대신하는 상황입니다.

농부는 좋은 날씨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조건만 기다리면 씨를 뿌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수확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올 가능성을 지나치게 걱정하다 보면 결국 거두어야 할 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날씨를 고려하는 신중함과, 불확실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구별합니다. 지혜로운 준비는 실제 행동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준비가 끝없이 길어지고, 모든 위험이 사라지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준비가 오히려 행동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도자가 요구하는 것은 무모함이 아닙니다. 다만 바람과 구름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는 사람이 농사를 지으려면, 어느 순간에는 불확실성을 안고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조금 더 알게 되면 더 잘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대체로 타당합니다. 하지만 미래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모든 결과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지혜는 지식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식이 도달할 수 없는 경계를 인정합니다.

그 경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다음 절이 보여 줍니다.

어머니의 배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

전도서 11:5–6 본문 →

네가 바람의 길이 어떠한지, 임신한 여자의 배 속에서 뼈들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지 못하듯, 모든 것을 만드는 하나님의 일도 알지 못한다.전도서 11:5 · 본디새김

전도자는 다시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람의 방향을 살피는 농부가 아니라, 바람이 어떤 길로 움직이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 줍니다. 임신한 여자의 배 속에서 뼈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두 장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과정을 사람이 완전히 파악하거나 마음대로 지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바람’에 해당하는 루아흐(⁨רוּחַ⁩)는 바람뿐 아니라 숨이나 영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5절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디새김처럼 바람의 길과 태중에서 뼈가 형성되는 과정을 서로 다른 두 사례로 읽는 것입니다. 바람의 움직임도, 태아가 자라는 신비도 사람이 다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루아흐를 생명의 숨이나 영과 관련지어, 태중에서 생명이 형성되는 과정을 하나의 연결된 이미지로 읽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문장의 간결한 구조 때문에 해석이 갈리며, 어느 한쪽만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지식으로 다 파악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전도자는 배 속에서 생명이 자라는 모습을 하나님의 일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생물학적인 과정을 연구하거나 알아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당시 인간이 직접 관찰하기 어려웠던 생명의 형성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인간의 이해보다 크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생명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 전체를 그 관찰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자가 선택한 이 비유는 단지 인간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무지의 대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빈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어머니의 배 속에서 뼈가 형성됩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생명이 자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을 단순히 인간의 지식이 부족할 때 등장하는 설명으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과 이해할 수 없는 영역 모두에서 일하시는 창조주로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다 알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도자는 여기서 다시 농부에게 돌아갑니다.

아침에 네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네 손을 쉬게 하지 마라. 이것이 잘될지 저것이 잘될지, 아니면 둘 다 똑같이 좋을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전도서 11: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4절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4절의 농부는 바람을 살피다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6절의 농부에게는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쉬게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아침’과 ‘저녁’은 하루의 여러 때에 걸쳐 계속 행동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전도자는 한 번 씨를 뿌렸으니 이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계속 일하라고 합니다. 아침에 뿌린 씨가 잘될지, 저녁에 뿌린 씨가 잘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결과를 확실하게 알 때 행동할 자신감을 얻습니다. 어느 선택이 성공할지 알아야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반대 방향으로 말합니다. 어느 것이 잘될지 모르기 때문에 여러 기회를 활용하라고 합니다.

전도자는 이 가능성들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로 일어날지 확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불확실성이 농부의 행동을 멈추게 할 이유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1절의 빵과 2절의 여러 몫이 다시 떠오릅니다.

빵을 물 위로 보내는 사람도 결과를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몫을 나누는 사람도 어떤 재앙이 닥칠지 알지 못합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도 어느 씨앗이 잘 자랄지 알지 못합니다.

세 장면 모두 알지 못하는 미래를 향해 행동하는 사람을 보여 줍니다. 전도자는 모르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르기 때문에 나누고, 뿌리고, 계속 수고하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미래를 알 수 없을 때에도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분별하여 행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자신이 모든 결과를 지배한다는 확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이 자기 지식보다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전도자는 그 하나님이 각 씨앗에 어떤 결과를 주실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씨를 뿌릴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들판에서 일하던 독자의 시선을 전도자는 갑자기 위로 들어 올립니다. 이번에는 바람이나 구름을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 자체를 바라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39:13–16은 하나님이 어머니의 태에서 사람을 지으시고, 은밀한 곳에서 형성되는 생명을 아신다고 노래합니다. 두 본문은 태중의 생명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다만 시편은 하나님이 사람을 아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전도서는 그 일을 인간이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빛은 달콤하고, 어둠의 날들은 많습니다

전도서 11:7–8 본문 →

빛은 달콤하고, 해를 보는 것은 눈에 좋다.전도서 11: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의 농사에 관한 격언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앞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했습니다. 빵을 보내고, 몫을 나누고, 씨를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빛은 보통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맛을 느낄 때 사용하는 ‘달콤하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감각을 서로 겹쳐 놓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달콤한 음식이 입에 좋은 것처럼, 빛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햇빛의 물리적인 효능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 아래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의 좋음을 이야기합니다. 전도서에서 ‘해 아래’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가리키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해를 실제로 보는 일이 기쁨으로 묘사됩니다.

전도자는 지금까지 해 아래에서 벌어지는 불공평과 수고, 인간의 한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해 아래에서의 삶에는 고통과 불확실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을 보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는 그 기쁨을 삶의 시간 전체로 확장합니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산다면 그 모든 해 동안 즐거워하되, 어둠의 날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날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모든 것은 입김이다.전도서 11:8 · 본디새김

어떤 특별한 해에만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젊었을 때만도 아니고, 크게 성공했을 때만도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해 동안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권면에는 곧바로 중요한 말이 따라옵니다. 어둠의 날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어둠의 날들’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죽음의 날들이나 죽음에 가까워지는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9장에서 죽은 이들은 해 아래의 일에 더 이상 몫이 없다고 했으며, 11:7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해를 보는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 흐름에서 빛과 어둠은 생명과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편 어둠의 날들을 살아 있는 동안 겪는 고난과 어려움의 시기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서 어둠은 고통이나 불행의 이미지로도 사용되기 때문입니다(이사야 8:22 참조). 이어지는 12장의 노년과 죽음에 관한 묘사까지 고려하면, 어둠의 날들은 생명의 밝은 시기와 대비되는 쇠약함과 죽음의 현실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11:8 자체는 그 어둠을 하나의 상황으로만 정확히 한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쁨과 어둠이 같은 문장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자는 어둠이 있으니 기뻐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기뻐하려면 어둠을 잊으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기뻐하되 기억하라고 합니다.

어둠의 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빛의 달콤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달콤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둠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8절의 마지막 문장 「다가오는 모든 것은 입김이다」는 어떤 의미일까요? ‘입김’은 전도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앞날에 다가올 모든 것이 입김 같다고 말합니다. 입김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오래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전도자는 다가오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거나, 앞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주어질 날들이 인간의 손에 영원히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전도자에게 삶의 덧없음은 기쁨을 금지하는 이유가 아니라, 지금 주어진 기쁨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여러 해’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말하던 전도자는 이제 특별히 젊은이를 부릅니다.

네 마음의 길을 따라 걸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전도서 11:9 본문 →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거워하여라. 네 청춘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네 마음의 길들과 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따라 걸어라. 그리고 이 모든 일로 하나님이 너를 심판으로 이끌어 갈 줄 알아라.전도서 11:9 · 본디새김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는 마음과 눈을 따르는 행동을 경계하기도 합니다. 민수기 15:39에서 이스라엘은 자기 마음과 눈을 따라 빗나가지 말고 여호와야훼의 명령을 기억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젊은이에게 자신의 마음과 눈을 따라 걸으라고 합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전도자의 말을 지나치게 약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구절을 사실상 ‘젊을 때도 네 욕망을 따르지 말고 조심해서 살아라’라는 뜻으로만 바꾸면,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기쁨의 권면이 사라집니다. 전도자는 분명히 젊음의 기쁨을 긍정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길들’은 사람이 품은 관심과 의지, 바라는 방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자신이 실제로 마주하고 경험하는 세계와 연결됩니다. 전도자는 젊은이에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불행을 지나치게 염려하느라 젊은 날을 모두 보내지 말라는 뜻도 이 권면에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그 권면은 「그리고 이 모든 일로 하나님이 너를 심판으로 이끌어 갈 줄 알아라」라는 문장 없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앞의 기쁨을 허락하는 말은 반어였을까요? ‘마음대로 해 보아라. 결국 벌을 받을 테니’라는 식으로 젊은이를 비꼬는 말일까요? 그렇게 읽는 길을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의 흐름을 고려하면 기쁨의 권면을 단순한 조롱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도자는 앞에서도 여러 차례 삶의 기쁨을 긍정했습니다. 11:7–8에서도 여러 해 동안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9절의 기쁨 역시 실제적인 권면으로 읽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기쁨이 어떤 삶 속에 놓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기쁨과 심판을 서로 배제되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라는 명령과 심판을 기억하라는 명령을 함께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기쁨 자체가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쁨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눈을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심판’은 재판이나 판단을 뜻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실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심판의 구체적인 시기와 방식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절만으로 심판의 모든 내용을 확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젊은이의 삶이 하나님의 판단과 무관한 독립적인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젊음이라는 시기에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반드시 기쁨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바로 그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살아갈 날들과 기쁨을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두 사실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기쁨만 이야기하고 책임을 잊으면 자신의 욕망을 무조건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심판만 이야기하고 기쁨을 잊으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좋은 것들까지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도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판을 기억하라는 말을 젊은이의 모든 행동에 대한 위협으로만 받아들이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전도자는 삶이 입김 같다고 했습니다. 젊음도 잠깐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젊은 날에 무엇을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길을 걷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뻐하는지는 하나님 앞에서 중요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9절은 1–6절의 행동에 관한 권면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결과를 모르더라도 씨를 뿌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젊음의 날을 기뻐하며 살아가되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은 자신의 모든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젊음도 청춘도 입김입니다

전도서 11:10 본문 →

네 마음에서 괴로움을 없애고, 네 몸에서 고통을 물리쳐라. 젊음도 청춘도 입김이기 때문이다.전도서 11:10 · 본디새김

전도자는 젊은이를 향한 권면을 마지막 한 절로 마무리합니다.

여기서 마음과 몸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이 권면을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모든 괴로움과 질병을 없앨 수 있다는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자는 인간이 자기 몸과 삶에서 모든 고통을 제거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도서 전체에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고통과 한계를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권면의 핵심은 젊은 날의 삶을 괴로움과 해로움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마음의 번민과 몸에 해를 끼치는 일을 멀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좋은 것을 누리라는 흐름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마지막에 제시하는 이유는 다시 한번 뜻밖입니다. 「젊음도 청춘도 입김이기 때문이다.」

젊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청춘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첫 번째 표현은 젊은 시절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입니다. 두 번째 표현은 그 시기의 생기와 활력을 떠올리게 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뜻은 분명합니다. 젊은 생애의 시기 역시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젊음을 삶의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는 시간처럼 생각합니다. 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나중에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으며, 지금 누리지 못한 것을 언젠가 다시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젊음 자체도 입김이라고 말합니다. 젊은이에게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미래에도 불확실성이 있고, 그가 누리는 시기에도 끝이 있습니다. 이것이 젊음을 즐기라는 권면의 마지막에 놓인 이유입니다.

전도자는 젊음이 덧없으니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덧없기 때문에 그 시기를 귀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 점에서 11:10은 11:8과 대칭을 이룹니다. 8절에서는 여러 해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 모든 해 동안 즐거워하되 어둠의 날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젊은이에게 마음의 괴로움과 몸의 고통을 물리치라고 하면서 젊음과 청춘이 입김 같다고 말합니다.

오래 사는 사람도, 아직 젊은 사람도 삶의 유한함 앞에 서 있습니다. 전도자는 어느 나이에서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한히 소유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깨닫는 일이 삶을 더 어둡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빛은 여전히 달콤합니다.

해를 보는 것은 여전히 눈에 좋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젊은 시절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의 기쁨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기쁨을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괴로움’에 해당하는 카아스는 화나 분노, 번민과 괴로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고통’에 해당하는 라아는 악이나 해로움, 고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본디새김은 두 표현을 마음의 괴로움과 몸의 고통으로 옮겨 서로 대응하게 했습니다. 또 ‘청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하루트는 어원상 새벽과 연결하는 읽기와 검은 머리와 연결하는 읽기가 가능하여 세부적인 의미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씨앗을 뿌린 뒤에도 바람은 붑니다

전도서 11:1–10 본문 →

전도서 11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서로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뚜렷한 연결이 있습니다. 앞에서는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뒤에서는 삶을 영원히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행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기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행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행동할 수 있는 삶의 자리와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바람과 구름을 살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움직임을 완전히 이해해야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하늘을 그렇게만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구름을 살피느라 씨를 뿌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햇빛을 보며 살아 있다는 기쁨도 누리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바람이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구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뒤에도 내일 날씨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뿌린 씨가 어떤 열매를 맺을지도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도 씨는 땅에 들어갔습니다.

농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만드시는 세상에서는 일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도서 11장이 보여 주는 지혜는 바람이 멎기를 기다리는 삶이 아닙니다. 바람이 부는 세상에서 씨를 뿌리고, 해가 비치는 동안 그 빛을 누리는 삶입니다.

농부는 다시 하늘을 바라봅니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구름이 움직입니다. 그는 그 모든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손에는 씨앗이 없고, 씨앗은 땅에 뿌려져 있습니다. 그 위로 햇빛이 비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