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젊은 날과 마지막 말
은줄이 끊어지기 전에
집 한 채가 있습니다. 한때 그 집은 분주했을 것입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고, 힘센 사람들이 일을 했으며, 여자들은 맷돌을 돌렸습니다. 창가에서는 바깥을 내다보고, 거리에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집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떨기 시작합니다. 힘센 사람들은 몸을 굽힙니다. 맷돌질하는 여자들이 줄어들고, 창으로 내다보는 사람들의 시야도 어두워집니다. 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작아집니다. 노랫소리마저 낮아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리에는 애도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전도서는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한 집이 쇠약해지고 조용해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처음부터 죽음이 찾아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네 젊은 날에 너를 창조한 이를 기억하여라」라고 권합니다.
전도자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죽음을 피하라는 것도, 노년을 두려워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창조한 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 전도자는 삶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면서 창조의 처음을 떠올리게 할까요?
그 해답은 7절의 「흙먼지가 본래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준 하나님에게 돌아가기 전에」에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갑니까.
전도서는 마지막 장에서 이 질문을 다시 꺼냅니다. 수고와 기쁨, 지혜와 어리석음, 불공평과 죽음을 이야기해 온 책이 마침내 인간 존재의 시작과 끝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책은 7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코헬렛의 마지막 선언 뒤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그 목소리는 코헬렛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하고, 그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전도서 전체를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습니다.
12장은 그래서 두 개의 결말을 가진 것처럼 읽힙니다. 하나는 인간의 삶을 마무리하는 시적인 결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지 밝히는 지혜의 결말입니다.
인간은 흙먼지로 돌아가지만, 그가 살아온 삶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사실 사이에서 전도서의 마지막 말이 시작됩니다.
괴로운 날이 오기 전에 창조한 이를 기억하여라
네 젊은 날에 너를 창조한 이를 기억하여라. 괴로운 날들이 닥치고, 네가 「이 해들에는 내게 즐거움이 없다.」라고 말할 해들이 이르기 전에.전도서 12:1 · 본디새김
바로 앞 장에서는 젊은 시절에 즐거워하고, 마음의 길과 눈에 보이는 것들을 따라 걸으라고 권했습니다(11:9). 이제 그 젊은이가 자신의 삶을 어디에서 받았는지 기억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을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그분과의 관계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8:11–18에서 이스라엘은 풍요로워졌을 때 여호와야훼를 잊지 말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자신이 얻은 재산을 자기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얻을 힘을 주신 여호와야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12:1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젊음에는 힘이 있습니다. 몸은 움직일 수 있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도 많아 보입니다. 자신의 삶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 시기에 창조한 이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전도자는 ‘네가 늙으면’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네 젊은 날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긴 시간의 경고를 붙입니다. 괴로운 날들이 닥치고, 「이 해들에는 내게 즐거움이 없다.」라고 말할 해들이 이르기 전에. 이 말은 모든 노인이 삶의 기쁨을 잃는다는 보편적인 진술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노쇠와 고통이 깊어져 삶을 즐기기 어려워지는 시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1장에서는 살아 있는 동안 기뻐하라고 권했습니다. 특히 젊은 날에 마음이 기쁨을 누리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운 날들이 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도자가 젊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하는 것은 노년에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조주와의 관계를 삶의 마지막에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삶의 중심에 두라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괴로운 날들이 어떤 모습인지 곧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늘부터 어둡게 만듭니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린 뒤 구름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전도서 12:2 · 본디새김
이것은 실제로 천체가 빛을 잃는 사건을 예언하는 문장으로 읽기보다, 인간이 경험하는 삶의 밝음이 사라지는 모습을 그리는 시적인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앞 장의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빛은 달콤하고, 해를 보는 것은 눈에 좋다.’ (11:7) 11장에서 전도자는 햇빛을 보는 기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12장에서는 그 해와 빛이 어두워집니다.
살아 있는 동안 당연하게 누렸던 빛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한때 밝게 보던 세계를 점차 다른 모습으로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몸이 쇠약해지고, 삶의 기쁨이 줄어들며, 이전에는 자연스럽게 하던 일들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비가 내린 뒤 구름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비가 그치면 구름이 걷히고 날씨가 맑아지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전도자가 그리는 하늘에서는 비가 내린 뒤에도 구름이 돌아옵니다. 힘든 일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표현은 노년에 겪는 어려움이 연이어 찾아오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만 특정한 질병이나 신체 증상을 지칭한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제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서 한 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너를 창조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보르에카(בָּרָא)입니다. 형태상으로는 복수형이지만,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습니다. 이 복수형만으로 창조자가 여럿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54:5에서도 하나님을 가리키는 ‘너를 지으신 이’가 복수형으로 나타납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떨고, 노랫소리가 낮아진다
그날에는 집을 지키는 이들이 떨고, 힘센 남자들이 몸을 굽히며, 맷돌질하는 여자들이 몇 명 남지 않아 일을 멈추고, 창으로 내다보는 여자들이 어두워진다.전도서 12:3 · 본디새김
이 구절부터 전도서는 독자가 눈앞에 장면을 그릴 수 있도록 말합니다.
이 장면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오랫동안 이 구절은 인간의 몸이 늙어 가는 과정을 묘사한 비유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 읽기에서는 집을 인간의 몸으로 보고, 집을 지키는 사람들을 팔이나 손, 힘센 사람들을 다리, 맷돌질하는 여자들을 치아, 창으로 내다보는 여자들을 눈에 대응시킵니다.
이 해석은 전체 문맥과 잘 어울립니다. 1절에서 괴로운 날들이 찾아온다고 했고, 5절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영원한 집으로 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인물이 반드시 특정 신체 기관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집과 그 안의 사람들을 묘사할 뿐, 그들이 각각 팔이나 다리, 치아와 눈을 뜻한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쇠약해지는 한 집안의 모습을 통해 인간 삶 전체의 힘과 활동이 줄어드는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읽기에서는 사람과 사물의 변화가 반드시 하나하나 신체 기관에 대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집 전체가 쇠약해지는 모습 자체가 중요합니다.
두 읽기를 반드시 서로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체적인 노쇠를 나타내는 비유이면서 동시에 한때 활기차던 집안이 조용해지는 장면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도자가 왜 집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집에는 움직임과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하고, 드나들고, 바깥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활동이 줄어듭니다.
전도자는 늙어 가는 인간을 단순히 쇠약해지는 몸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 몸을 통해 이루어지던 일상 전체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다음 절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맷돌 소리가 낮아질 때 거리의 두 문짝이 닫히고, 새 소리에 일어나며, 노래의 딸들이 모두 낮아진다.전도서 12:4 · 본디새김
이번에는 소리가 중심이 됩니다.
3절에서는 집 안의 사람들을 보여 주었다면, 4절에서는 집 안팎을 오가던 소리와 활동이 줄어드는 모습을 들려줍니다. 한때 들리던 소리가 더 이상 예전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집은 점점 조용해집니다.
문은 닫히고, 일상의 소리는 낮아집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집에 이제 두려움까지 찾아옵니다.
또 사람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하고, 길에는 두려운 것들이 있다. 아몬드나무가 꽃을 피우고, 메뚜기가 제 몸을 끌고 가며, 케이퍼 열매가 제 구실을 못한다.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고, 애도하는 이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기 때문이다.전도서 12:5 · 본디새김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일은 몸의 균형이나 힘이 약해진 노년의 모습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길에 두려운 것들이 있다는 말도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이전보다 위험하게 느껴지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집 안에서 이루어지던 활동이 줄어든 데 이어, 집 밖으로 나가는 일도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세 장면은 더욱 수수께끼 같습니다. 아몬드나무와 메뚜기와 케이퍼 열매를 노쇠의 신체 묘사로 풀어 읽는 해석이 있지만, 아몬드나무의 개화와 메뚜기의 움직임, 케이퍼 열매의 기능이 정확히 어떤 신체 변화에 대응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이미지 전체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를 살피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자연과 생명의 다양한 모습이 한데 모여 인간 삶의 쇠약함과 마지막을 둘러싼 장면을 만듭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이 모든 이미지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마침내 밝힙니다.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고, 애도하는 이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이 명시적으로 등장합니다.
‘영원한 집’이라는 표현은 이 문맥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곳, 곧 무덤이나 죽음의 영속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 시작된 집의 장면이 여기서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은 떨었습니다.
맷돌 소리는 낮아졌습니다.
거리로 통하는 문은 닫혔습니다.
그리고 이제 거리에는 애도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닙니다.
처음에는 집 안의 활동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집의 사람이 죽었음을 알리는 애도의 행렬을 봅니다.
한 사람의 삶이 끝나는 일은 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가 살아온 집과 관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전도자는 죽음을 단순히 신체의 기능이 멈추는 사건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머물던 세상에서 떠나고, 그 빈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는 사건으로 보여 줍니다.
이제 전도자는 그 죽음을 더욱 짧고 결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맷돌은 곡식을 갈아 음식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도구였고, 고대의 집에서 맷돌질은 일상의 노동과 연결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5:10에서도 맷돌 소리와 등불의 빛이 사라지는 것은 일상의 삶이 중단되는 재앙의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새 소리에 일어난다’는 표현은 해석상 조금 어렵습니다.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깨는 노년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새 소리에 누가 일어나는지와 그 행동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본문만으로 분명하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노래의 딸들’도 노래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고, 노래의 소리나 음악을 시적으로 나타낸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청력이나 목소리의 약화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아몬드나무의 꽃은 옅은 색을 띠므로, 꽃이 피는 모습을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과 연결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메뚜기가 제 몸을 끌고 가는 모습은 한때 가볍게 움직이던 몸이 무거워지고 쇠약해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케이퍼 열매는 고대에 식용과 약용으로 쓰였으며 욕망이나 활력과 연결하여 해석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열매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표현은 인간의 욕망이나 생명력이 약해지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특정한 성적 기능의 상실만으로 확정하는 것은 본문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집’이라는 표현만으로 죽음 이후의 구체적인 거주 장소나 의식 상태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울며 슬픔을 표현했고, 전문적으로 애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9:17–20에는 애도하는 여자들을 부르고 슬픔의 노래를 배우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은줄이 끊어지고, 항아리가 부서진다
은줄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부서지며, 샘 곁에서 항아리가 깨지고, 바퀴가 우물로 부서져 내리고,전도서 12:6 · 본디새김
앞에서는 집 안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번에는 물건들이 하나씩 부서집니다.
은줄이 끊어지면 거기에 매달린 것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항아리가 깨지면 물을 온전히 담을 수 없습니다.
우물의 바퀴가 부서지면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 어려워집니다.
이러한 장면은 생명이 유지되던 구조가 마침내 무너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샘과 우물은 생존에 필수적인 물을 얻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항아리와 바퀴가 부서집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이 길어 올릴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한때 작동하던 것이 이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어져 있던 것이 끊어지고, 온전하던 것이 부서집니다. 전도자는 이 이미지들을 통해 생명의 마지막이 되돌리기 어려운 사건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사건을 창조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흙먼지가 본래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준 하나님에게 돌아가기 전에.전도서 12:7 · 본디새김
앞에서 전도자는 집이 조용해지고 물건들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 이미지들을 벗겨 내고 인간 존재 자체를 말합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창세기 3:19에서는 인간에게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도서 12:7은 이 두 장면과 분명한 주제적 연결을 갖습니다. 인간은 흙과 생명의 숨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전도서 12:7을 인간의 육체는 사라지지만 의식적인 영혼은 독립적으로 영원히 살아간다는 완성된 교리로 읽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숨이 하나님에게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숨이 돌아간 뒤 인간에게 어떤 의식이나 경험이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전도자의 관심은 생명의 근원과 인간의 마지막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처음부터 스스로 만들어 낸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그 받은 생명이 자기에게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드러냅니다.
이것은 1절의 명령 「네 젊은 날에 너를 창조한 이를 기억하여라」를 다시 이해하게 합니다. 왜 창조주를 기억해야 할까요? 자신의 존재가 그분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영원히 자기 손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1절에서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7절에서 숨이 그 창조주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1–7절은 하나의 긴 문장처럼 읽힙니다.
젊은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십시오.
빛이 어두워지고, 집이 쇠약해지고, 거리에는 애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며, 은줄이 끊어지고, 흙먼지가 땅으로 돌아가고, 숨이 하나님에게 돌아가기 전에.
이 시 전체를 움직이는 명령은 새로운 무언가를 성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억하여라’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은줄과 금그릇은 귀한 기물이나 매달린 등잔의 구조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항아리와 바퀴는 샘과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기구와 연결됩니다. 이 장면들이 모두 하나의 기계를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은줄이 정확히 무엇에 연결되었고, 금그릇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전통적으로 은줄과 금그릇을 인간의 특정한 신체 기관에 대응시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대응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7절의 ‘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רוּחַ)입니다. 이 말은 바람, 숨, 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7의 ‘생명의 숨’에 사용된 히브리어 표현과 정확히 같은 낱말은 아니지만, 생명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전도서 3:20–21에서도 사람과 짐승이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사람의 숨과 짐승의 숨이 향하는 곳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 질문을 던집니다. 12:7은 그보다 적극적으로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에게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진술 역시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를 세세하게 설명하려는 문장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입김이다 — 책의 첫 문장이 다시 울리다
「입김 중의 입김이다.」 코헬렛이 말했다. 「모든 것이 입김이다.」전도서 12:8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낯익습니다.
전도서 1:2에서 거의 같은 선언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책의 시작에서 코헬렛은 모든 것이 입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같은 말을 합니다. 이것은 전도서 전체를 둘러싸는 문학적 틀을 형성합니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지혜와 기쁨, 수고와 사랑이 결국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전도서 안에 반복되어 온 다른 진술들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전도자는 수고 가운데 기뻐하는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야기했습니다(3:12–13). 지혜가 실제로 유익하다고 말했고(7:11–12), 사람이 자신의 몫을 누리는 것이 좋다고도 했습니다(9:9). 그러므로 ‘모든 것이 입김이다’라는 말은 이 모든 가치를 취소하는 선언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입김은 붙잡기 어렵고,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인간이 자기 뜻대로 오래 유지할 수 없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방금 인간의 쇠약함과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들을 본 뒤에 ‘모든 것이 입김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이 말은 단순한 추상적 철학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오래 살아도 자기 생명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삶의 좋은 순간들이 거짓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빛은 실제로 달콤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 날들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은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인간 삶의 가치와 한계를 함께 말해 왔습니다. 마지막 선언은 그 한계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코헬렛 자신의 말은 사실상 끝납니다.
하지만 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코헬렛을 바라보는 다른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입김 중의 입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벨 하발림(הֶבֶל)입니다. 같은 종류의 말을 반복하여 그 성격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노래 중의 노래’처럼 어떤 특징을 강하게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지혜의 말은 막대기 같고, 박힌 못과 같다
코헬렛은 지혜로웠을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지식도 가르쳤다. 그는 많은 잠언을 저울질하고 탐구하고 정리했다.전도서 12:9 · 본디새김
9절부터는 말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코헬렛이 직접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 코헬렛을 소개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전도서가 단순히 코헬렛의 발언을 이어 놓은 책이 아니라, 그 발언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평가하는 문학적 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책의 첫머리에서도 코헬렛의 말이라는 소개가 등장합니다(1:1–2). 마지막에서는 코헬렛의 말이 끝난 뒤, 그의 가르침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설명하는 목소리가 나타납니다.
그는 단순히 떠오르는 생각을 말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울질하다’는 표현은 여러 말을 비교하고 그 가치를 분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탐구한다는 것은 충분히 살피고 묻는 일입니다. 정리한다는 것은 발견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배열하는 일입니다.
코헬렛은 자신의 생각을 무조건 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관찰하고, 비교하고, 탐구하며, 말들을 정리했습니다. 전도서 전체에서 그는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왜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습니까?
왜 악한 사람이 오래 삽니까?
왜 인간은 수고하면서도 모든 결과를 소유하지 못합니까?
왜 지혜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일을 다 알아낼 수 없습니까?
그는 이런 질문들을 쉽게 없애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목소리는 그런 코헬렛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코헬렛이 많은 의문을 품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그런 질문들을 진지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지혜로운 교사로 소개됩니다.
코헬렛은 기쁨을 주는 말들을 찾으려 했다. 참된 말들이 바르게 기록되었다.전도서 12:10 · 본디새김
코헬렛은 괴로운 현실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사실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기록하면서도 기쁨을 주는 말을 찾으려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죽음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말이 기쁨을 줄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 말들이 진실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서가 주는 기쁨은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삶의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데에서 나옵니다.
‘참된 말들이 바르게 기록되었다’는 표현은 원문의 문장 구조상 코헬렛이 참된 말을 바르게 기록하려 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본디새김처럼 참된 말들이 바르게 기록되었다는 결과를 나타내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여기에는 두 가지 기준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말은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되어야 합니다.
좋은 지혜의 말은 진실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듣는 사람이 그 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후기 화자는 지혜의 말이 언제나 부드럽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지혜로운 이들의 말은 가축을 모는 막대기 같고, 말을 모으는 이들의 말은 박힌 못과 같다. 이 말들은 한 목자에게서 주어졌다.전도서 12:11 · 본디새김
가축을 모는 막대기는 동물이 움직이도록 방향을 제시하거나 재촉하는 데 사용됩니다. 막대기는 가축을 그대로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움직이게 합니다. 반면 단단히 박힌 못은 무언가를 고정하고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합니다.
움직이게 하는 막대기와 고정하는 못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기능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두 가지를 모두 지혜의 말에 비유합니다.
어떤 말은 사람을 흔들어 깨웁니다.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을 다시 살펴보게 합니다.
어떤 말은 사람을 붙잡아 줍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기억하게 하고, 삶의 방향을 잃지 않게 합니다.
전도서에는 이러한 두 기능이 모두 있습니다. 코헬렛은 독자의 확신을 여러 번 흔듭니다.
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형통한다는 생각을 흔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흔듭니다.
수고하면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생각을 흔듭니다.
그런데 동시에 독자가 붙잡을 것도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자신의 몫을 누리는 일, 지혜를 추구하는 일, 주어진 삶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마지막 표현 「이 말들은 한 목자에게서 주어졌다」는 조금 어렵습니다. 이 목자가 누구인지는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목자로 자주 묘사되십니다(시편 23:1, 이사야 40:11). 이 경우 지혜로운 가르침의 궁극적인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른 가능성으로는 지혜의 말들을 모으고 가르치는 한 지도자나 교사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명시하지 않으므로, 목자가 반드시 하나님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지혜로운 말들이 하나의 근원이나 권위 아래 모여 있다는 점을 우선 살피는 것이 적절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그 말들은 흩어진 생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고 붙잡아 주는 가르침으로 제시됩니다.
이제 마지막 목소리는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기쁨을 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디브레 헤페츠(חֵפֶץ)입니다. ‘헤페츠’는 즐거움이나 기쁨, 바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12:1에서 ‘이 해들에는 내게 즐거움이 없다’고 할 때에도 같은 어근의 말이 사용됩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운 날들을 이야기하면서, 코헬렛이 기쁨을 주는 말들을 찾으려 했다고 평가합니다. 두 표현의 연결을 반드시 의도적인 언어유희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 안에서 즐거움의 상실과 기쁨을 주는 말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은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을 많이 만드는 일에는 끝이 없다
내 아들아, 이 말들을 넘어서는 것을 경계하여라. 책을 많이 만드는 일에는 끝이 없고, 많은 공부는 몸을 지치게 한다.전도서 12: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자칫 지식과 연구를 부정하는 말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공부를 그만하라는 것일까요? 바로 앞의 9–10절을 생각하면 그렇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거기서는 코헬렛이 많은 잠언을 탐구하고 저울질하며 정리한 일을 칭찬했습니다. 따라서 12절이 모든 연구와 책의 저술을 무가치한 일이라고 선언한다면, 바로 앞의 평가와 충돌하게 됩니다.
문제는 지식을 추구하는 일 자체가 아닙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식의 추구가 무엇을 위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말들을 넘어서는 것’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이 표현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에서 제시된 지혜의 가르침에 무분별하게 다른 말들을 덧붙이는 일을 경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끝없이 많은 책과 가르침을 추구하는 데 몰두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을 경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을 특정한 수의 책만 읽어야 한다거나 새로운 지식을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명령으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전도자는 지식의 양과 지혜로운 삶을 구별합니다.
책은 끝없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연구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동으로 삶의 올바른 방향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많은 공부는 몸을 지치게 한다’는 말도 의미가 있습니다. 전도자는 지적인 활동조차 인간의 신체적 한계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은 계속 공부할 수 있지만, 지치지 않는 존재는 아닙니다. 모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모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배우고, 어떤 지혜를 붙잡아야 할까요? 전도자는 마침내 가장 중요한 것을 짧게 말합니다.
말의 끝 —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명령을 지켜라
말의 끝이다. 모든 것이 들렸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의 명령들을 지켜라.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기 때문이다.전도서 12:13 · 본디새김
전도서의 마지막 권면은 놀랄 만큼 간결합니다.
이 책은 인간의 삶에 관해 수많은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수고의 의미를 물었고, 지혜의 한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통을 이야기했고,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은 모든 질문에 각각 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질문을 거쳐 살아가야 할 인간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단순히 무서운 존재로 여긴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인정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신명기 10:12–13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를 경외하고,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이 권면을 전도서 앞부분의 질문들을 모두 무효화하는 문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자가 관찰했던 불공평은 여전히 현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미래를 다 알지 못합니다. 의로운 사람도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해서 그 모든 문제가 즉시 해결된다는 말은 여기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인간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같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첫 번째 문제에 완전한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모든 것을 알게 된 뒤에야 가능한 삶이 아닙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경외는 단순한 감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명령들을 지켜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는 실제 행동과 연결됩니다.
13절 끝의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기 때문이다」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이것이 사람의 전부다’ 또는 ‘이것이 모든 사람이다’에 가깝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이것이 인간의 모든 의무라는 뜻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라는 가르침이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후자의 방향을 따릅니다. 이는 본문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의무’라는 말을 보충하지 않으면서, 마지막 권면의 보편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번역입니다. 전도자는 특정한 계층이나 나이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지혜를 말하지 않습니다. 왕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젊은이에게도, 노인에게도 적용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켜야 할까요? 전도자는 마지막 절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이 감추어진 모든 것까지 포함하여 모든 행위를 좋든 나쁘든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전도서 12:14 · 본디새김
이것이 전도서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이 말은 전도서 전체의 여러 질문과 연결됩니다. 전도자는 악한 사람들이 오래 살고, 의로운 사람들이 부당한 일을 겪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행한 일과 그들에게 돌아오는 결과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인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행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잊은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으로는 어떤 사람의 행동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악한 행동에 대한 경고일 뿐 아니라, 인간의 평가가 지닌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도서 9장에서 한 가난한 지혜자는 자기 지혜로 성읍을 구했지만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의 지혜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12:14는 그러한 인간의 기억과 평가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더 넓은 영역에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 마지막 절이 그 가난한 지혜자의 구체적인 운명을 설명하거나 어떤 보상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에 놓인다고 말할 뿐, 그 심판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본문에 없는 구체적인 심판의 시기나 절차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마지막 기준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인정하는 정도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감추어진 것까지 판단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전도서의 결론을 단순한 처세술과 구별합니다.
지혜롭게 살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의롭게 살면 세상에서 언제나 인정받는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그 대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한계를 끝까지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삶을 권합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 끝의 히브리어 표현은 키 제 콜 하아담입니다.
은줄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
전도서 12장의 시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처음에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아직 해를 볼 수 있고,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그 젊은이에게 먼 훗날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빛이 어두워집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떨고, 힘센 사람들은 몸을 굽힙니다. 맷돌 소리가 낮아지고 거리의 문이 닫힙니다. 마침내 은줄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부서집니다. 그리고 흙먼지는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에게 돌아갑니다.
인간이 입김 같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그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평가됩니다. 전도자는 인간의 삶이 입김 같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입김 같은 삶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의 장면을 보여 주기 전에 한 가지 명령을 남겼습니다. 「네 젊은 날에 너를 창조한 이를 기억하여라.」 그 명령이 이 시 전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아직 해가 빛나고 있을 때입니다.
아직 집 안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을 때입니다.
아직 은줄이 끊어지지 않고, 샘 곁의 항아리가 부서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전도자는 그때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알아낸 뒤가 아닙니다.
모든 계획을 완성한 뒤도 아닙니다.
삶의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 뒤도 아닙니다.
지금 살아 있는 동안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알지 못하지만, 그 생명을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그 기억을 마지막에 남겨 둡니다. 한 집이 조용해지고, 빛이 어두워지며, 은줄이 끊어지는 장면 앞에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들려오는 말입니다.
네 젊은 날에 너를 창조한 이를 기억하여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