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7–11장 · 지혜가 닿지 못하는 곳

성읍을 구하고도 잊힌 사람

작은 성읍이 포위되었습니다. 성읍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공격해 온 왕은 강력했습니다. 왕은 성읍을 에워싸고 커다란 포위 시설까지 세웠습니다. 성읍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읍에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힘이나 무기가 아니라 자신의 지혜로 성읍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의 결말은 승리의 환호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았다」(9:15).

성읍은 살아남았지만, 성읍을 구한 사람은 잊혔습니다.

왜 전도자는 이 이야기를 9장의 마지막에 배치했을까요?

앞부분을 읽으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전도자는 사람이 아무리 의롭고 지혜롭더라도 자기 삶의 결과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같은 죽음이 닥칩니다. 빠른 사람이 반드시 경주에서 이기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이 반드시 풍족하게 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이런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지혜가 무가치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가 전쟁 무기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성읍을 구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지혜는 실제로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린 지혜가 반드시 인정받거나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에는 세 가지 인상적인 광경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개와 죽은 사자, 식탁에 앉아 빵과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그리고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가난한 지혜자입니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 장면들은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삶의 결과를 보장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의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지만, 자기 앞날을 알지 못한다

전도서 9:1–3 본문 →

나는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밝히려 했기 때문이다. 곧 의로운 이들과 지혜로운 이들과 그들의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사랑도 미움도 사람은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그들 앞에 있다.전도서 9:1 · 본디새김

8장의 마지막에서 전도자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알아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9장은 그 문제를 의로운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삶에 집중시킵니다.

전도자는 의로운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하나님의 손 밖에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일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9:1에서는 이 표현이 의로운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이 우리의 예상을 벗어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사랑과 미움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과 미움이 누구의 것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으로 읽는다면,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만 보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지 미워하시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과 미움으로 읽는다면, 사람은 앞으로 어떤 사랑이나 미움을 만나게 될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뒤이어 나오는 ‘모든 것이 그들 앞에 있다’는 표현은 이처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앞에 놓여 있다는 읽기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두 읽기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문법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변 문맥은 적어도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롭고 지혜롭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손이 무력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과 그 손이 어떻게 일하실지를 인간이 안다는 사실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다음 절에서 놀랄 만큼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일이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의로운 이와 악한 이에게, 선한 이와 정결한 이와 부정한 이에게, 제물을 바치는 이와 제물을 바치지 않는 이에게 같은 일이 닥친다. 선한 이나 죄짓는 이나 마찬가지이고, 맹세하는 이나 맹세를 두려워하는 이나 마찬가지다.전도서 9:2 · 본디새김

여기서 구별들은 모두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의로움과 악함은 도덕적인 구별입니다. 정결함과 부정함은 이스라엘 율법의 의례적인 구별과 관련됩니다. 정결하지 않은 사람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과 바치지 않는 사람의 구별은 제의적 행위와 관련됩니다. 맹세하는 사람과 맹세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구별은 맹세에 대한 태도와 관련됩니다.

전도자는 이렇게 서로 다른 범주의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읍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같은 일이 닥친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일’이 무엇인지는 3절을 읽으면 명확해집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의로움과 악함, 정결함과 부정함이 아무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구별들이 인간에게 닥치는 죽음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의롭기 때문에 죽음을 면제받지 않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도 제의적인 행위 때문에 죽지 않는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사람들이 쌓아 온 여러 구별을 가로질러 찾아옵니다.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가운데 나쁜 것은 이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일이 닥친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하고, 그들이 사는 동안 그 마음에는 광기가 있다. 그 뒤에는 그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로 간다.전도서 9:3 · 본디새김

전도자는 죽음의 보편성을 단순히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나쁜 것’이라고 부릅니다. 해 아래의 삶을 관찰하는 전도자에게 이 보편적인 죽음은 인간의 기대와 도덕적 질서를 흔드는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살았는데도 같은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여기에 인간 마음의 악과 광기까지 덧붙입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악으로 가득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광기’는 정신 질환에 관한 진단이 아니라, 전도서가 어리석고 무절제한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강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도 결국 죽은 이들 가운데로 갑니다.

전도자는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이 동일하게 죽는다는 사실에서 의와 악의 차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끌어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닥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어두운 관찰 바로 다음에 예상 밖의 말을 꺼냅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아직 희망이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과 행동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신명기 2:15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손이 심판을 실행하는 능력으로 등장하고, 에스라 7:6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와 함께하신다는 말로 나타납니다. 레위기 11–15장은 일상적인 신체 상태나 접촉으로도 부정하게 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전도서 3:19에서는 사람과 짐승이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9장에서는 인간 사회 안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나란히 놓고 같은 현실을 보여 줍니다.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전도서 9:4–6 본문 →

살아 있는 모든 이의 무리에 속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다.전도서 9:4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여러 본문에서 개는 낮고 비천한 처지를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쫓는 사울에게 자신이 죽은 개와 벼룩처럼 하찮은 존재가 아니냐고 말합니다(사무엘상 24:14). 므비보셋도 다윗 앞에서 자신을 죽은 개라고 표현합니다(사무엘하 9:8). 반대로 사자는 힘과 위엄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잠언 30:30에서는 사자가 짐승 가운데 강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이러한 위계질서를 뒤집습니다.

강한 사자라도 죽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개라도 살아 있다면 여전히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여기서 명예나 힘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를 비교합니다.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차이보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다만 이 희망을 삶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자가 다음에 제시하는 희망의 근거는 오히려 기묘합니다.

살아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이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들에게는 더 이상 보상도 없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잊혔기 때문이다.전도서 9:5 · 본디새김

이것이 왜 이점이 될까요?

죽음을 아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안다는 것은 아직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면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처럼 해 아래의 일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말을 신약까지 포함한 성경 전체의 사후 세계에 대한 완결된 설명으로 읽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지금 죽은 이들의 사후 상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를 해 아래에서의 활동과 참여라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도 그들의 미움도 그들의 질투도 이미 사라졌다.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가운데 그들에게는 더 이상 영원히 몫이 없다.전도서 9:6 · 본디새김

마지막 문장의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가운데’라는 표현이 앞의 진술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범위가 됩니다. 죽은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이상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맺었던 관계와 감정이 해 아래의 삶에서 더 이상 작용하지 않습니다.

‘몫’이라는 말은 전도서 9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6절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더 이상 몫이 없다고 말하고, 9절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 삶과 수고 가운데 누릴 몫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두 절 모두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나누어 받은 부분이나 자기에게 돌아온 몫을 뜻합니다.

죽은 이들은 해 아래에서 더 이상 자신의 몫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아직 누릴 몫이 있습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말은 단순히 오래 살아야 한다는 충고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때에만 누릴 수 있는 몫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죽은 이들에 관한 설명에 한 가지를 더 보탰습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잊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 장 마지막에 나오는 가난한 지혜자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전도자는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망각을 말한 뒤, 살아 있는 동안 놀라운 일을 했던 사람조차 세상에서 잊힐 수 있다는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그 희망은 반드시 유명해지거나 기억되리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삶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남이 나를 얼마나 오래 기억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며, 누구와 살아가고, 어떤 몫을 누리는가에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에는 작은 본문상의 차이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자음 본문은 ‘선택받다’에 가까운 형태로 읽을 수 있지만, 전통적인 낭독 형태는 ‘연결되다’ 또는 ‘속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본디새김은 후자를 따라 살아 있는 무리에 속한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고 번역했습니다. 이어지는 개와 사자의 대조를 고려하면,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가서 네 빵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삶을 누려라

전도서 9:7–10 본문 →

가서 기쁘게 네 빵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셔라. 하나님이 이미 네가 하는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전도서 9:7 · 본디새김

전도자는 여기서 말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앞에서는 자신이 관찰한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독자에게 직접 명령합니다. 6절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해 아래의 일에 참여할 몫이 더 이상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7절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몫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전도자는 ‘네 빵’과 ‘네 포도주’를 말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값비싼 음식을 마련하거나 거창한 잔치를 벌이라는 권유가 아닙니다. 자신의 일상에 이미 주어진 음식을 즐겁게 먹으라는 말입니다. 빵은 생계를 위한 기본적인 음식이고, 포도주는 식사의 기쁨과 잔치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전도자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증명했기 때문에 이제 기뻐할 자격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가 하는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고 말합니다. 원문의 동사는 기꺼이 받아들이다, 호의를 보이다, 만족스럽게 여기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전도서 9:7에서는 그 말이 일상의 식탁을 즐기라는 권면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미 네가 하는 일들을 받아들이셨다는 말을 사람의 모든 행동을 도덕적으로 승인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전도자는 인간 마음의 악과 광기를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아가고 일하며 자신의 몫을 누리는 삶을 허락하셨다는 확신 위에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기쁨은 반드시 먼 미래의 성공이나 보상을 기다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 가운데 이미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자는 ‘언젠가’ 기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네 옷은 언제나 희게 하고, 네 머리에 기름이 모자라지 않게 하여라.전도서 9:8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향유나 기름을 몸에 바르는 일은 몸을 단장하고 기쁨을 표현하는 일과 연결되었습니다. 반대로 슬픔이나 애도의 상황에서는 평상시의 단장을 멈추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9:8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계속 애도하는 모습으로만 지내지 말라고 권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전도자는 죽음을 잊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기억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야말로, 지금 누릴 수 있는 기쁨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흰옷과 머리의 기름은 그런 삶의 태도를 눈에 보이게 합니다.

그가 해 아래에서 네게 준 네 입김 같은 삶의 모든 날, 곧 네 입김 같은 모든 날 동안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삶을 누려라. 이것이 네 삶과 해 아래에서 네가 애쓰는 수고 가운데 네 몫이기 때문이다.전도서 9:9 · 본디새김

전도자는 이제 혼자 식탁에 앉은 사람의 모습에서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삶을 누려라(⁨רָאָה⁩)’라는 말의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삶을 보아라’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표현은 단순히 눈으로 관찰하는 것뿐 아니라 경험하거나 누리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삶을 실제로 경험하고 누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성공한 삶의 조건을 길게 나열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명예도, 재산의 규모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을 인간에게 주어진 좋은 몫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전도자는 기념할 만한 며칠이나 인생의 절정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함께 보내는 평범한 날들까지 포함합니다.

삶이 입김 같다는 말은 흔히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금방 사라지고, 손에 붙잡을 수 없고,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바로 그 입김 같은 삶을 누리라고 합니다.

삶이 덧없다는 사실이 삶을 누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붙잡아 둘 수 없기 때문에 지금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합니다.

꽃이 영원히 피어 있지 않다고 해서 그 꽃이 피어 있는 순간에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비유처럼, 전도자가 말하는 덧없음은 현재의 경험을 반드시 무가치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꽃의 아름다움 같은 추상적인 정서가 아니라 실제로 함께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여기서 아내를 가리키는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의 가정과 혼인이라는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본문 그대로 읽어도 충분히 중요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하나님께 받은 삶의 몫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손이 찾아내는 할 일은 무엇이든 네 힘을 다해 하여라. 네가 가고 있는 스올에는 일도 계산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전도서 9:10 · 본디새김

먹고 마시며 기뻐하라고 했던 전도자가 이번에는 힘을 다해 일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권면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기쁨을 수고와 분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네 손이 찾아내는 할 일’이라는 표현은 눈앞에 주어진 구체적인 일을 가리킵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할 수 없는 모든 일까지 책임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손에 닿는 일을 힘을 다해 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영원히 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절은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모든 문제를 설명하기보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 있는 동안의 일과 계획과 지적 활동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죽음이 확실하다는 사실은 오늘의 일을 하찮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영원히 미루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자기 손에 주어진 일을 힘껏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까요?

조금 더 깊이

라차라는 동사는 구약의 제의 문맥에서 하나님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는 것을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레위기 1:4 참조). 룻기 3:3에서 나오미는 룻에게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며 옷을 입으라고 권합니다. 시편 23:5에서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일이 풍성한 대접의 이미지로 등장하고, 사무엘하 14:2에서는 애도하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기름을 바르지 말라고 합니다. 시편 6:5와 이사야 38:18–19에서도 죽은 이들의 상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활동과 대조됩니다. 전도서 9:10은 그러한 구약의 언어와 연결됩니다.

빠른 사람이 반드시 경주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전도서 9:11–12 본문 →

나는 해 아래에서 다시 보았다. 경주의 승리가 반드시 빠른 이들에게 돌아가지는 않고, 전쟁의 승리가 반드시 힘센 이들에게 돌아가지는 않으며, 빵 또한 반드시 지혜로운 이들에게 돌아가지는 않고, 재물 또한 반드시 분별 있는 이들에게 돌아가지는 않으며, 호의 또한 반드시 지식 있는 이들에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때와 우연이 그들 모두에게 닥치기 때문이다.전도서 9:11 · 본디새김

| 사람이 가진 능력 | 기대하는 결과 | | --- | --- | | 빠르게 달리는 능력 | 경주의 승리 | | 강한 힘 | 전쟁의 승리 | | 지혜 | 먹고살 양식 | | 분별력 | 재물 | | 지식 | 사람들의 호의 |

어떤 능력이 있으면 그 능력에 어울리는 결과를 기대하게 됩니다. 전도자는 이처럼 능력과 결과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언제나 예외 없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전도자는 바로 앞에서 힘을 다해 일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전도자가 노력의 가치를 부정하려 했다면 10절의 명령은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노력 자체가 아닙니다. 노력과 능력이 결과를 반드시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때와 우연’에서 ‘우연’이라는 말은 마주침이나 우연한 사건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를 현대적인 의미의 확률적 무작위성이나 하나님과 무관한 사건의 발생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관찰하는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예측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사건의 발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능력을 갖추고도 뜻밖의 사건 때문에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특별히 유리해 보이지 않았는데도 예상하지 못한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인간의 계획을 가로지릅니다.

전도자는 사람이 모르는 영역을 그대로 남겨 둡니다.

사람은 자기 때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로운 그물에 붙잡히는 물고기들처럼, 덫에 잡힌 새들처럼, 사람들도 재앙의 때가 자기들에게 갑자기 덮칠 때 덫에 걸린다.전도서 9:12 · 본디새김

물고기는 물속을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자신의 눈앞에 그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새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처럼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덫에 걸립니다.

물고기와 새가 붙잡히는 일은 덫을 놓은 사람에게는 계획된 일이지만, 붙잡히는 동물의 입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사람은 자기 일을 계획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어떤 사건이 언제 닥칠지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11절은 능력과 성취의 관계를 다룹니다. 12절은 시간과 사건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다룹니다. 그렇다고 전도자는 능력을 쌓거나 준비하는 일이 무가치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오히려 지혜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때와 우연’의 히브리어는 에트 와페가입니다. 전도자는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과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잠언 16:9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 길을 계획하지만 여호와야훼가 그의 걸음을 이끄신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두 본문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잠언은 인간의 계획을 넘어서는 여호와야훼의 인도를 말합니다. 전도서 9:11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결과를 확보할 수 없는 현실을 관찰합니다. 따라서 전도서의 ‘우연’을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말로 읽을 근거도 없고, 모든 구체적인 우연의 이유를 우리가 안다는 말로 바꾸어 읽을 근거도 없습니다.

성읍을 구한 지혜로운 사람은 왜 잊혔을까?

전도서 9:13–16 본문 →

나는 해 아래에서 이런 지혜도 보았다. 그것은 내게 크게 여겨졌다.전도서 9: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반드시 양식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혜가 얼마나 큰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놀랄 만큼 짧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없고, 성읍의 위치도 없으며, 사건이 일어난 시기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사건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지만, 지혜의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한 사례적 이야기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작은 성읍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 사는 사람은 적었다. 큰 왕이 그곳으로 와서 성읍을 에워싸고, 그 성읍을 공격할 큰 포위 시설들을 세웠다.전도서 9:14 · 본디새김

작은 성읍과 큰 왕입니다.

고대의 성읍을 포위하는 전쟁에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출입과 보급을 차단하고, 공격을 위한 시설을 세워 방어선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본문도 왕이 단순히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포위 시설까지 세웠다고 말합니다. 이는 공격이 일시적인 위협이 아니라 성읍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임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이야기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 성읍에서 가난하고 지혜로운 한 사람이 발견되었고, 바로 그가 자기 지혜로 그 성읍을 구해 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았다.전도서 9:15 · 본디새김

큰 왕에게는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작은 성읍에는 그것에 맞설 만한 힘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성읍을 구한 것은 더 큰 군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지혜였습니다.

전도자는 그 지혜가 어떤 방식으로 성읍을 구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가 실제로 성읍을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성읍은 살아남았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살린 사람은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15절에서 ‘가난한’이라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가난하고 지혜롭다고 소개됩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 가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전도자는 그의 지혜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의 가난함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물론 본문이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않은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음 절에서 그의 지혜가 업신여김을 받았다고 말하므로, 가난과 사회적 무시를 연결하는 읽기는 충분한 근거를 갖습니다.

앞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잊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읍을 구한 사람조차 기억되지 않습니다.

죽음만이 인간의 업적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우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인 무관심과 불공평한 평가도 어떤 사람의 중요한 일을 잊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9:11은 뛰어난 능력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9:15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뛰어난 능력으로 실제로 좋은 결과를 이루었다 해도, 그 일을 행한 사람이 반드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과 결과를 이루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서로 다른 고통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지혜가 힘보다 낫다. 그러나 가난한 이의 지혜는 업신여김을 받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전도서 9:16 · 본디새김

전도자는 첫 번째 판단을 두 번째 판단 때문에 취소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실제로 성읍을 구했기 때문에 힘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사람들은 그 가치를 반드시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지혜의 가치와 지혜가 받는 대우가 구별됩니다.

사람들이 존중하지 않는 지혜도 참된 지혜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권력이 지혜보다 언제나 더 가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결과를 통해 능력을 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보여 준 성읍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린 결과를 경험하고도 그 일을 행한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에서 어떤 사람의 말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그 말의 참됨이나 유익함 외에 다른 요소들도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재산과 지위, 명성과 힘이 그런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지혜는 모든 일을 성공시키는 기술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반드시 인정받는 사회적 능력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혜에는 실제로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역설은 성읍이 구원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성읍이 구원받았는데도 그 일을 행한 사람이 잊혔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가난하다는 것과 지혜롭다는 것은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성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거나 공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잠언 14:20은 가난한 사람이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왕과 협상했는지, 군사적인 계책을 세웠는지, 다른 방법을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특정한 사건으로 재구성할 근거도 없습니다. 잠언 21:22도 지혜로운 사람이 용사들의 성읍에 올라가 그들이 의지하는 견고한 힘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전도서의 이야기를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지혜가 물리적인 힘을 능가할 수 있다는 공통된 주제를 보여 줍니다.

조용한 지혜의 말과 통치자의 외침

전도서 9:17–18 본문 →

지혜로운 이들의 말은 조용한 가운데 어리석은 이들을 다스리는 자의 외침보다 더 잘 받아들여진다.전도서 9:17 · 본디새김

16절에서는 가난한 지혜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말이 통치자의 외침보다 더 잘 받아들여진다고 말합니다. 두 문장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이 연결이 드러납니다. 16절의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와 17절의 ‘지혜로운 이들의 말은 ... 더 잘 받아들여진다’에는 모두 ‘듣다(⁨שָׁמַע⁩)’를 뜻하는 같은 동사의 수동형이 사용됩니다. 앞에서는 지혜자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지혜자들의 말이 들립니다.

17절을 앞의 이야기와 구별되는 독립적인 지혜 격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도 16절에서 전도자의 직접 발언을 마치고, 17절부터 별도의 격언을 제시합니다. 16절은 가난한 지혜자의 말이 무시당하는 실제 상황을 말합니다. 17절은 조용한 지혜의 말이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서 외치는 통치자의 말보다 낫다는 일반적인 지혜의 판단을 나타냅니다.

‘조용한 가운데’라는 표현은 지혜로운 사람이 조용하게 말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말이 조용한 가운데 들린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끄러운 외침과 조용한 지혜 사이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왕이나 통치자는 자신의 말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권한과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더 나은 판단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외적인 권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판단은 큰 소리로 내려지는 명령보다 가치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17절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언제나 잘 받아들여진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이야기가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전도자가 무엇을 더 가치 있게 평가하는지 보여 주는 문장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말의 가치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 크기나 권력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지혜가 전쟁 무기보다 낫다. 그러나 죄짓는 이 하나가 많은 좋은 것을 망친다.전도서 9:18 · 본디새김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큰 왕의 포위 공격에서 성읍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또 다른 현실을 보여 줍니다.

‘죄짓는 이’는 죄를 범하는 사람을 뜻하며, 문맥에 따라 잘못을 저지르거나 실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앞에서 악과 어리석음을 이야기한 문맥을 고려하면 도덕적인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라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특정한 악행 하나를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을 세우는 데에는 많은 지혜와 수고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망가뜨리는 데에는 한 사람의 잘못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지만, 인간 공동체의 취약성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 한 사람의 불순종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 사건은 이러한 주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본문 사이에 직접적인 인용 관계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죄가 공동체의 선한 일을 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잊힌 사람의 지혜는 사라졌는가

전도서 9:1–18 본문 →

처음에는 의로운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 그리고 그들의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한 지혜로운 사람이 성읍을 구했지만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이 장이 명확하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삶의 날들을 주셨으며, 그 삶 가운데 누릴 몫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빵과 포도주,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 자기 손에 주어진 일도 그 몫에 포함됩니다.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수고를 포기할 이유가 아니며, 결과가 영원히 남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 수고의 가치를 없애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앞날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먹을 빵이 있고, 함께 살아갈 사람이 있으며, 자기 손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은 가난한 지혜자가 무슨 동기로 행동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희생을 자랑스럽게 감수했다거나, 사람들에게 감사받기를 기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작은 성읍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큰 왕이 왔습니다. 성읍을 에워쌌고, 포위 시설을 세웠습니다. 성읍에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가난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지혜로 성읍을 구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본문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어떻게 성읍을 구했는지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이 모든 사실을 말하면서도 「지혜가 힘보다 낫다」는 판단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가 없다고 해서 성읍이 구원받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지혜가 지혜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성읍을 구한 사람은 잊혔습니다.

그러나 성읍은 살아남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가 지혜로 구해 낸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전도서 9장은 그 작은 성읍을 남겨 둡니다. 힘 있는 왕의 포위 시설보다 한 사람의 지혜가 더 큰 일을 해냈던 곳, 그리고 그 지혜로운 사람의 이름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곳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