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7–11장 · 지혜가 닿지 못하는 곳
왕의 말에는 권력이 있지만
왕은 명령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불러들이고 내보낼 수 있으며,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왕조차 자기에게 남은 하루를 더 달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서 8장은 이 단순하면서도 날카로운 대조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권력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곧 어떤 권력도 지배하지 못하는 영역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죽는 날을 결정하지 못하며,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도록 만들지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8장은 이 질문을 처음과 마지막에 배치합니다. 첫 절은 누가 일의 풀이를 아는지 묻고, 지혜가 얼굴을 밝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일을 알아낼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의 말을 뒤집는 모순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도자가 이 장 전체를 통해 밝혀 가는 지혜의 본질입니다.
지혜는 모든 것을 알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것이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별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 분별은 네 가지 현실을 통과합니다. 왕의 권력, 인간의 죽음,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 그리고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기쁨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얼굴이 밝아진다
누가 지혜로운 이와 같으며, 누가 일의 풀이를 아는가?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을 밝히고, 그 얼굴의 굳은 기색은 바뀐다.전도서 8:1 · 본디새김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의 지식을 먼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얼굴부터 보여 줍니다.
지혜가 사람의 얼굴을 밝힌다는 말은 단순히 지혜로운 사람이 항상 즐겁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지혜는 얼굴의 굳은 기색을 바꿉니다. ‘굳은 기색(עֹז)’으로 옮긴 표현은 얼굴의 강함이나 완고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지혜가 사람의 태도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왕 앞에서는 얼굴 표정 하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조건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적절한 때와 행동을 분별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일의 풀이’는 어떤 일의 의미나 해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혜는 단순히 많은 사실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지혜가 가장 필요한 장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합니다. 권력이 집중된 왕의 궁정입니다.
나는 말한다. 하나님을 두고 한 맹세 때문에 왕의 말을 지켜라.전도서 8:2 · 본디새김
고대 왕정에서 왕의 말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왕은 통치와 재판, 처벌에 큰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고 한 맹세가 정확히 어떤 맹세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한 충성 맹세로 읽을 수 있으며, 그 경우 왕에 대한 의무가 단순한 정치적 편의를 넘어 맹세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왕의 권력이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왕은 강력한 존재이지만, 이 문장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권위의 자리를 차지하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그 앞에서 서둘러 떠나지 마라. 나쁜 일을 고집하지 마라.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기 때문이다.전도서 8:3 · 본디새김
전도자는 왕 앞에서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왕의 면전에서 갑자기 자리를 떠나는 행동은 상황에 따라 불복종이나 항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경계하는 것은 자신이 처한 권력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경솔함입니다.
이어지는 ‘나쁜 일을 고집하지 마라’는 말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왕에게 반대하는 잘못된 일에 가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궁정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에 굳게 서 있지 말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에는 무모한 행동을 경계하는 권고가 있습니다. 왕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실행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말에는 권력이 있으니, 누가 그에게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말하겠는가?전도서 8:4 · 본디새김
이것은 왕의 모든 행동이 옳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권력의 비대칭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왕은 명령할 수 있지만, 신하는 왕에게 설명을 요구하기 어렵습니다. 결정하는 사람과 그 결정의 결과를 감당하는 사람이 반드시 같지 않은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이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명령을 지키는 이는 나쁜 일을 겪지 않고, 지혜로운 마음은 때와 절차를 안다.전도서 8:5 · 본디새김
‘때와 절차’가 이 단락의 중심입니다.
‘절차(מִשְׁפָּט)’로 옮긴 말은 재판이나 판단을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일을 해야 할 적절한 시점뿐 아니라, 그 일을 다루는 바른 방식에 대한 분별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도 생각합니다.
다만 ‘명령을 지키는 이는 나쁜 일을 겪지 않는다’는 말을 언제나 성립하는 보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14절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악인에게 어울릴 법한 결과를 겪는 현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위험을 분별하게 하지만,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바로 그 한계가 다음 단락의 주제가 됩니다.
왕도 죽는 날에는 권력이 없다
모든 일에는 때와 절차가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람에게 닥친 불행은 크다.전도서 8:6 · 본디새김
전도서 3장에서는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가 있습니다(3:1–2). 세상의 일이 아무런 질서도 없이 벌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가 있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때를 안다는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8장에서는 바로 이 차이가 문제가 됩니다. 두 사실을 나란히 놓고 읽으면, 때와 절차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인간은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긴장이 선명해집니다. 그 이유는 다음 절에 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지 누가 그에게 알려 주겠는가?전도서 8:7 · 본디새김
사람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하게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자신이 기다리는 기회가 언제 올지, 오늘의 결정이 내일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미래를 알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미래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이제 미래에 대한 무지보다 더 근본적인 한계를 제시합니다.
숨을 다스려 그 숨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죽는 날을 다스릴 권력도 없다. 전쟁 중에는 제대가 없고, 악은 그것을 지닌 이들을 구해 내지 못한다.전도서 8:8 · 본디새김
4절에서는 왕의 말에 권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죽는 날을 다스릴 권력이 없다고 합니다. 두 구절에서 ‘권력(שִׁלְטוֹן)’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같은 말입니다.
왕은 다른 사람에게 명령할 권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는 날에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왕은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의 삶을 크게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생명의 마지막 날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숨’을 바람으로 읽든 생명의 숨으로 읽든, 사람이 완전히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전도자는 마지막에 악의 한계까지 덧붙입니다.
악은 그것을 지닌 사람을 구해 내지 못합니다.
사람은 악한 방법으로 권력을 얻거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왕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멈춘다고 했듯이, 악도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 자신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한계가 있다고 해서 권력의 폐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고,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마음을 쏟았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여 그에게 해를 끼치는 때가 있다.전도서 8:9 · 본디새김
이 문장에서는 왕이라는 특별한 인물이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이 등장합니다. 권력의 문제는 왕궁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모든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에게 해를 끼치는’이라는 표현의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배받는 사람이라면 권력에 의한 억압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배하는 사람이라면 남을 지배하는 행위가 결국 그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뜻이 됩니다. 문맥상 다른 사람에게 가해지는 해악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히브리어 문장은 대상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분명한 것은 인간의 권력이 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자는 권력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권력이 언제나 선하게 사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17:18–20에서는 왕도 율법의 말씀을 읽고 지켜야 하며, 자기 형제들 위에 마음을 높여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전도서 8장은 그 이상이 현실에서 언제나 구현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바라봅니다.
이제 전도자의 시선은 권력의 행사에서 그 결과로 옮겨 갑니다. 악한 사람이 죽고, 장례가 치러지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거나 잊히는 세계입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을 뜻할 수도 있고, 생명의 숨이나 영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바람으로 읽으면 누구도 바람을 붙잡아 둘 수 없다는 자연의 이미지가 되고, 생명의 숨으로 읽으면 누구도 자기 생명의 숨을 마음대로 붙잡아 둘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바로 뒤에 죽는 날을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 나오므로 생명의 숨이라는 읽기가 문맥에 잘 어울리지만, 바람이라는 뜻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전쟁 중에는 제대가 없다’는 말도 실제 전쟁에서 병사가 마음대로 복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격언일 수도 있고, 죽음과의 싸움에서는 누구도 면제받지 못한다는 비유일 수도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오래 살고, 판결은 늦어진다
그런 가운데 나는 악한 이들이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거룩한 곳에 들어갔다 나오곤 했으며, 그렇게 행했던 성읍에서 잊혔다. 이것도 입김이다.전도서 8:10 · 본디새김
여기서 전도자는 구체적인 광경을 회상합니다.
그러나 이 절은 히브리어 문장의 연결이 매우 어려운 구절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잊혔다는 읽기를 뒷받침하지만, 고대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은 그들이 성읍에서 칭송받았다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잊혔다고 읽는다면 한때 거룩한 곳에 출입하던 악한 사람들도 죽은 뒤에는 기억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칭송받았다고 읽는다면 악한 사람이 죽어서까지 좋은 평가를 받는 불합리한 현실을 보여 줍니다. 본디새김 번역은 첫 번째 읽기를 따릅니다.
전도자가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이러한 광경을 보았으며, 그것을 ‘입김’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했든, 종교적으로 어떤 장소에 출입했든, 장례가 치러졌든, 그 모든 것만으로는 그의 삶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악한 행위에 대한 판결이 빨리 집행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악을 행할 생각으로 가득 찬다.전도서 8:11 · 본디새김
전도자는 여기서 악의 문제가 단순히 악한 사람 개인에게만 있지 않다고 봅니다. 잘못이 바로잡히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악을 더욱 쉽게 생각하게 됩니다. 악행의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악을 행해도 괜찮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이것이 인간 법정의 판결만을 가리키는지, 하나님의 심판까지 염두에 둔 말인지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실제 사회의 정의가 지연되는 문제와 악행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가 드러나지 않는 문제 모두가 이어지는 문맥과 연결됩니다.
왕의 말에는 즉시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행위에 대한 판결은 빨리 집행되지 않습니다.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정의가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제 전도자는 더욱 어려운 현실을 말합니다.
죄짓는 이가 백 번 악을 행하고 오래 산다 해도, 나는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 곧 그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들은 잘될 것임을 안다.전도서 8:12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두 가지 목소리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관찰에서 나오는 목소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확신에서 나오는 목소리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목격한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 때문에 악인이 오래 사는 현실을 지워 버리지도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한 번의 실수로 곧바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거듭 악을 행하면서도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잠언 10:27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면 장수하고 악인의 수명은 짧아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현실을 살펴보면 언제나 그런 결과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욥도 비슷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욥기 21:7에서 그는 어째서 악인들이 살아남아 늙고 더욱 강해지는지를 묻습니다. 전도서 8장은 이 질문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질문을 품은 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가치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긴장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나 악한 이는 잘되지 않을 것이며, 그림자 같은 자기 날들을 늘리지 못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전도서 8:13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는 죄짓는 사람이 오래 산다고 했습니다. 이 두 문장을 단순한 수명에 관한 예측으로만 이해하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이 긴장을 없애기 위해 12절은 현재를, 13절은 죽음 이후를 말한다고 구분하는 해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시간적 구분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구분을 유일한 해답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따라 읽으면, 전도자는 현실에서 확인한 사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한 확신을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그는 악인이 오래 산다는 사실을 압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참으로 좋은 삶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잘된다’는 말의 의미를 단순히 수명의 길이로만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본문에 수명이 등장하는 만큼 장수의 문제를 제외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좋음’에 대한 전도자의 판단이 눈에 보이는 생존 기간만으로 완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일어나는 입김 같은 일이 있다. 악한 이들이 한 일에 걸맞은 일을 겪는 의로운 이들이 있고, 의로운 이들이 한 일에 걸맞은 일을 겪는 악한 이들이 있다. 나는 이것도 입김이라고 말했다.전도서 8:14 · 본디새김
이 절은 12–13절의 긴장을 해결하지 않고 더욱 분명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단순히 보상이 늦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행한 일과 그에게 돌아오는 결과가 서로 뒤바뀐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입김’은 원래 숨이나 수증기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전도서에서는 덧없음뿐 아니라 사람이 붙잡거나 명쾌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14절에서 전도자는 의인의 고난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형통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선과 악에 관한 우리의 도덕적 판단과 실제로 벌어지는 일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것이 입김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지만, 세상의 일이 언제나 그 분별에 맞게 이루어지는 이유와 과정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왜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 일을 허용하실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왜 악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에게 어울리는 결과를 누릴까요?
전도자는 그 질문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일을 이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전도서 3:14에서도 전도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더하거나 덜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인간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로 나타납니다.
전도자는 그것을 감추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에서는 거룩한 곳을 드나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문장의 주체가 계속 같은 사람인지도 해석상 논점입니다. 다만 이 구절이 악인은 반드시 잊힌다는 보편적인 법칙을 가르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12절의 ‘백 번’이라는 숫자는 죄의 횟수를 정확히 세려는 표현이라기보다, 악행이 반복되어도 그 사람이 오래 사는 상황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13절의 그림자 비유도 그림자처럼 길어지는 날들을 갖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그림자 같은 인간 생애의 덧없음을 강조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12절에 등장한 악인의 장수와 긴장을 이루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기쁨을 칭찬한다
그리고 나는 기쁨을 칭찬했다. 해 아래에서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기뻐하는 것 말고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그에게 준 삶의 날들 동안, 이것이 그의 수고 가운데 그와 함께할 것이다.전도서 8:1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처음 읽을 때 뜻밖의 전환처럼 느껴집니다.
앞에서는 권력의 횡포를 말했습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무력하고, 악한 사람이 오래 살며, 의로운 사람이 부당한 결과를 겪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먹고 마시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인생이 불공평하니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는 말로 읽으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15절은 삶의 기쁨을 하나님의 선물과 연결합니다.
사람은 미래를 모르고, 죽는 날을 결정하지 못하며, 세상의 불공평을 모두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날들입니다.
그날들에는 수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순간도 있습니다. 기쁨은 사람의 수고 가운데 ‘그와 함께할 것’입니다.
기쁨은 수고가 모두 끝난 뒤에만 얻는 보상이 아닙니다. 수고하는 삶 속에서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인간에게 수고가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고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기쁨이 동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3:12–13에서도 전도자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기뻐하며 좋은 일을 하는 것, 먹고 마시며 자기 수고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5:18–19에서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재물과 그것을 누릴 능력을 주시며, 자기 몫을 받아 수고 가운데 기뻐하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8:15의 기쁨은 새로운 도피처가 아닙니다. 전도자가 계속해서 발견해 온 인간 삶의 좋은 몫입니다.
우리는 때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억울한 일이 바로잡히고, 미래가 확실해지고, 모든 수고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에야 만족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쁨을 칭찬한다는 말은 불의를 무시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앞서 전도자가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을 ‘입김’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기쁨이 그 불공평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이해하고 바로잡는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 삶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쁨은 모든 것을 해결한 사람이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일을 다 알아낼 수 없다
내가 지혜를 알고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살펴보려고 마음을 쏟았을 때(사람은 낮에도 밤에도 눈을 붙이지 못한다),전도서 8:16 · 본디새김
전도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탐구를 돌아봅니다.
그는 세상의 일을 대충 살펴본 사람이 아닙니다. 지혜를 알고자 했고,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하려고 마음을 쏟았습니다.
괄호 안의 문장은 전도자 자신의 연구를 설명하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인간이 겪는 끝없는 수고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진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 번역은 후자의 방향을 따릅니다. 어느 쪽이든 이 문장은 인간의 활동과 탐구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노력하면 결국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요?
나는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을 보고서, 사람이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 찾으려고 아무리 수고해도 알아내지 못하며, 지혜로운 이가 안다고 말해도 알아낼 수 없다.전도서 8:17 · 본디새김
여기서 보는 것과 알아내는 것이 구별됩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 것도 보고, 악한 사람이 오래 사는 것도 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왜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하나님의 일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끝까지 알아내지는 못합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이나 지혜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1절에서는 지혜가 사람의 얼굴을 밝힌다고 했고, 5절에서는 지혜로운 마음이 때와 절차를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모든 일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8장은 ‘누가 일의 풀이를 아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선언으로 마칩니다.
처음에 말한 지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구체적인 상황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마지막에 말하는 한계는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도자는 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지혜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가 자기 한계를 아는 자리까지 독자를 데려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질서하게 일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모두 파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판단이 하나님의 일 전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 인정은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와 다릅니다. 전도자는 끝까지 관찰하고 질문하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이 발견한 것만으로 하나님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전도서 3:11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때에 맞게 아름답게 하셨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낼 수 없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욥기 38–42장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난에 대해 질문하고, 하나님은 욥에게 세상의 창조와 운행에 관해 물으시며, 인간이 온 세상의 질서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욥기와 전도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인간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겪었다고 해서 자신이 세상 전체의 의미를 판단할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함께 보여 줍니다.
지혜는 어디까지 우리를 데려가는가
전도서 8장에서 하나님은 왕의 권력을 직접 무너뜨리지 않으십니다. 악인에게 즉시 형벌을 내리시는 장면도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억울함이 해결되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간이 당장 이해할 수 있는 결과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자는 불의를 불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권력 앞에서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합니다. 악한 사람의 형통을 보고도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좋은 것을 누리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과 불의에 동조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현실의 불공평을 인정하는 것과 정의를 포기하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전도서 8장의 마지막에서 독자는 여전히 완전한 설명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런 독자에게서 삶의 기쁨까지 빼앗지 않습니다.
왕도 죽는 날을 명령할 수 없고, 지혜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일을 다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람은 오늘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자기 수고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립니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주신 오늘의 삶은 여전히 살아갈 만한 선물입니다.
전도자는 그 말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던 사람이 잠시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모습을 남깁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알아낸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수고 속에서 기쁨이 그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