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장 · 가정과 영의 갑옷

우리의 싸움 상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마지막 장에는 뜻밖의 전환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녀와 부모,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전쟁터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온 갑옷을 입으십시오」라는 명령과 함께 허리띠와 가슴막이, 신발과 방패, 투구와 칼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으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모두 갖추라고 하면서도 적을 향해 진격하라거나 공격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요구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12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씨름 상대는 피와 육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싸움을 이야기하면서 먼저 사람을 적의 자리에서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바로 앞 단락과 이어집니다. 그는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처럼 권력과 지위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명했고, 특히 당시의 노예제라는 심각한 불평등의 현실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싸움 상대가 「피와 육」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사람을 향한 적대감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 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렇게 6장은 매우 현실적인 가정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과의 싸움으로 시야를 넓힙니다.

그런데 그 전투 장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끝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석방이나 안전을 위해 먼저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거리낌 없이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며, 자신을 「쇠사슬에 매인 채 사절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자신을 보낸 분을 대표하여 말하는 사절이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마지막 장은 바로 이 긴장을 품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 위에 계시는데 그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악과 싸워야 할까요?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본문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읽는 시간 37분소단락 116장 본문 읽기 →

자녀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편지

에베소서 6:1–3 본문 →

자녀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의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6:1 · 본디새김

5장 후반부에서 부부 관계를 다루던 바울은 이제 자녀에게 말을 건넵니다.

바울은 부모에게 자녀를 순종시키라고 말하는 대신, 자녀에게 직접 말합니다. 그는 자녀들을 단순히 부모가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취급하지 않고, 편지의 권면을 듣고 응답할 수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대합니다.

물론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아버지는 가정 안에서 상당한 권위를 지녔고, 자녀의 지위는 부모의 권위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는 자녀도 「주 안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 직접 호명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이 왜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주 안에서」라는 말은 순종의 이유와 성격을 설명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은 단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의무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의 일부입니다.

여기에는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표현을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한정으로 읽을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지만, 문맥상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의미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부모의 권위는 예수님의 권위와 독립적으로 절대화되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부름받지만, 그 순종은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의 명령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충돌하거나 학대와 불의에 가담하도록 요구할 때에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결론을 이 구절에서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순종을 요청하면서 그 근거를 「의로운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의로운 일입니까?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십계명을 가져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 그 약속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이것은 약속이 딸린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게 하려는 것이다.」에베소서 6:2–3 · 본디새김

이것은 출애굽기 20:12와 신명기 5:16의 말씀입니다. 1절은 「순종」을 말하지만, 인용된 계명은 「공경」을 말합니다. 순종은 부모의 말에 따르는 행동을 가리키고, 공경은 부모를 존중하고 귀하게 대하는 더 넓은 태도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 계명을 어린 자녀가 부모의 지시를 따르는 문제에만 한정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성장한 이후에도 부모를 존중하고 돌보는 일은 공경이라는 계명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 계명이 「약속이 딸린 첫째 계명」이라고 말할까요? 부모 공경은 십계명의 구분 전통에 따라 넷째나 다섯째 계명이고, 앞선 계명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에 관한 약속의 성격을 가진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복의 약속이 직접 붙어 있는 계명 가운데 첫째라는 뜻으로 읽는 견해가 있고, 중요한 위치를 지닌 계명이라는 뜻에 무게를 두는 견해도 있습니다.

문법만으로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이 계명을 언급하면서 그 계명에 약속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래 산다는 약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원래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문맥에서 이 약속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게 되리라는 약속으로, 이스라엘의 땅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먼저 이스라엘이 언약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그 계명을 예수님 안에 있는 수신자들에게 적용합니다. 인용에는 「땅에서 오래 살게」라는 표현이 나타날 뿐 특정한 약속의 땅을 직접 명시하지 않으므로,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계명의 약속을 더 넓은 수신자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부모에게 잘 순종하는 자녀는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개인별 수명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런 통계적인 인과관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계명의 본래 의미는 부모 공경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그 삶에 복의 약속이 따른다는 데 있습니다.

자녀에게 순종을 요구했다면, 이제 부모에게도 요청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청은 부모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가 자녀를 해치지 않도록 제한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에는 「주 안에서」라는 표현을 포함하는 사본과 그렇지 않은 사본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이 표현을 포함하는 본문을 따릅니다.

자녀를 길러 내되 노엽게 하지 말라

에베소서 6:4 본문 →

그리고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도리어 주님의 훈육과 훈계로 길러 내십시오.에베소서 6:4 · 본디새김

바울은 아버지들에게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 것.

그리고 예수님의 훈육과 훈계로 길러 낼 것.

자녀를 가르치고 훈육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녀를 분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자녀가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이 바로 이어서 훈육과 훈계를 요청하며,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는 책임 자체를 없애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훈육과 훈계는 무엇이 다른가

「훈육」은 아이를 기르고 교육하며 훈련하는 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문맥에 따라 교정이나 징계의 의미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훈계」는 생각과 판단에 영향을 주도록 타이르고 일깨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두 낱말이 완전히 분리된 교육 방법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울은 자녀를 기르는 일을 지속적인 교육과 바로잡는 가르침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표현은 「주님의」입니다. 훈육과 훈계는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의 감정이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녀를 억누르는 것을 예수님의 훈육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화가 났다는 이유로 자녀에게 고함을 치거나, 수치심을 주거나,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두려움을 이용하는 방식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경고와 긴장 관계에 놓입니다. 물론 본문은 구체적인 양육 방법을 세세하게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기준은 있습니다. 자녀를 올바르게 기르는 책임과 자녀를 부당하게 자극하거나 해치지 않을 책임이 함께 주어집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절제

여기에는 앞의 아내와 남편에 관한 권면과 이어지는 구조가 있습니다. 바울은 관계 안에서 순종해야 하는 사람에게 말을 건넨 뒤, 그 관계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도 별도의 책임을 부여합니다. 부모에게는 자녀를 훈육할 책임이 있지만, 그 권위는 무제한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따라 행사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녀를 예수님 안에서 길러 내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길러 내십시오」(ἐκτρέφω)라는 표현은 자녀가 성장하도록 돌보는 일을 가리킵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성장하고 배워야 할 사람입니다. 부모의 권위는 그 성장에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훨씬 더 심각한 권력의 불평등을 다룹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서는 적어도 가족이라는 공통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법적으로 자유를 빼앗긴 노예와 그 노예를 소유한 주인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노예와 주인 — 하늘의 주인에게는 편파적인 대우가 없다

에베소서 6:5–9 본문 →

노예 여러분, 육으로는 주인인 이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순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하십시오.에베소서 6: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현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바울은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노예들에게 주인을 섬기라고 권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임금노동자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노예는 단순한 고용인이 아니었다

6:5의 「노예」는 둘로이입니다. 이 단어는 자유로운 계약에 따라 노동력을 제공하는 고용인보다, 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로마 제국의 노예들은 가정의 허드렛일부터 농업, 생산, 교육과 행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담당했습니다. 일부 노예들은 상당한 기술과 책임을 지닐 수도 있었지만, 그러한 차이가 노예라는 법적 지위를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주인의 권력과 노예의 예속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현대 회사의 직원과 상사 사이에 직접 대응시키면 노예제가 지닌 비자유와 강제성을 흐리게 됩니다. 둘로이를 단순한 자유로운 고용인으로 번역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현실 속에 있는 노예들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주인을 섬기라고 권합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두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첫째, 바울은 당시의 노예제 질서를 이 단락에서 직접 폐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노예들의 순종을 권합니다. 이 사실을 없었던 일처럼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그는 노예들을 단지 주인의 소유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아시고 갚아 주시는 존재로 다룹니다.

이 두 사실 사이에 있는 긴장을 그대로 유지해야 합니다.

「육으로는 주인」이라는 말의 한계

5절에서 주인들은 「육으로는 주인인 이들」이라고 불립니다. 이 표현은 인간 사회 안에서 그들이 가진 주인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그 지위가 전부는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관계에서 주인이지만,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주인은 아닙니다.

바울은 노예들에게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남이 보는 앞에서만 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노예처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남이 보는 앞에서만 일하는 것」(ὀφθαλμοδουλία)에 해당하는 말은 눈을 뜻하는 표현과 노예로 섬기는 일을 뜻하는 표현이 결합된 말로, 누군가 지켜볼 때에만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려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노예들이 자신의 행동을 인간 주인의 시선에만 맞추지 말고 예수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권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인이 부당한 명령을 내리더라도 무조건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순종은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주인에게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노예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무엇이든 선한 일을 하면 그것을 주님께로부터 되받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6:8 · 본디새김

여기서 문장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당시 사회에서 노예와 자유인의 법적 지위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평가받는 문제에서는 그 차이가 최종적인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따라 선한 일을 다르게 평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노예의 노동을 미화하는 말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노예라는 지위가 그 사람의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주인의 평가만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주인들에게도 「똑같이 하십시오」

그리고 주인 여러분, 그들의 주인이자 여러분의 주인이신 분이 하늘에 계시고 그분께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위협을 그만두고 그들에게도 똑같이 하십시오.에베소서 6:9 · 본디새김

「그들에게도 똑같이 하십시오」는 문자적으로 같은 것들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노예에게 똑같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노예가 주인에게 순종하듯 주인도 노예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정확한 대칭을 명령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주인과 노예 사이의 법적 관계를 완전히 뒤집는 별도의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주인 역시 노예에게 선한 뜻과 성실한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주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명령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도 누군가의 권위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주인도 하늘에 계시고, 그 주인께는 편파적인 대우가 없습니다.

주인의 사회적 지위가 그를 하나님의 심판과 평가에서 제외해 주지 않습니다.

「위협을 그만두고」라는 구체적인 요구

여기서 바울은 추상적인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위협을 그만두고」라고 말합니다. 당시 노예제에서 주인은 노예에게 강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위협은 그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위협을 중단하라고 요청하며, 주인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행동의 차원에서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노예제 자체를 폐지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노예들의 해방을 직접 명령하지 않고, 그 제도의 근본적인 법적 구조를 해체하는 방법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에베소서 6장이 노예제를 이미 폐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반대로 이 구절을 노예제가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합당한 제도임을 승인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노예제 현실 속에서 노예와 주인 모두가 예수님께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특히 주인의 위협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이 본문이 제도 전체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과, 그 제도 안의 권력에 어떤 신학적 제한을 가하는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의 직접적인 선언은 이것입니다. 땅에서 주인인 사람도 하늘에서는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며, 예수님께서는 노예와 자유인을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바울은 가정 안의 여러 관계에 대한 권면을 마치고, 「끝으로」라는 말과 함께 새로운 장면을 엽니다. 하지만 인간의 권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맞서 싸워야 할 궁극적인 상대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할 수 없다는 논리는 갈라디아서 3:28과 빌레몬서 15–16절에서도 중요한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각 본문이 노예제의 폐지 문제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결되는지는 별도의 역사적·신학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주어지는 명령

에베소서 6:10–12 본문 →

끝으로, 주 안에서 또 그분의 굳센 위력 안에서 힘을 얻으십시오.에베소서 6:10 · 본디새김

바울은 이제 편지의 마지막 권면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전쟁을 이야기하기 전에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성도들의 힘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힘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힘을 얻으십시오」는 수동태 형태로, 자신의 힘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보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굳세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충분히 강한 사람들이므로 악한 세력과 싸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곧이어 인간의 힘만으로 상대할 수 없는 악한 영적 세력을 언급하기에, 예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야 그 싸움에 맞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귀의 힘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마귀의 술책이다

마귀의 술책에 맞서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온 갑옷을 입으십시오.에베소서 6:11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은 마귀의 강한 힘만을 강조하지 않고 「술책」을 언급합니다. 이 낱말은 교묘하게 계획된 속임수나 술책(μεθοδεία)을 가리킬 수 있으며, 에베소서 4:14에서도 사람들을 잘못된 가르침으로 이끄는 간교한 술책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악의 활동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속임수와 거짓된 가르침, 잘못된 판단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이에 맞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마귀의 술책보다 더 교묘한 술책을 만들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온 갑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온 갑옷」은 전투에 필요한 무장 전체를 가리키는데, 핵심은 갑옷의 세부적인 모양보다 그 갑옷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갑옷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 내는 무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씨름 상대는 피와 육이 아니다

우리의 씨름 상대는 피와 육이 아니라 통치들, 권세들, 세상을 쥔 이 어둠의 지배자들, 하늘에 속한 곳에 있는 악한 영적 세력들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6:12 · 본디새김

이 절에서 바울은 적을 다시 규정합니다. 「피와 육」은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이므로, 성도들의 궁극적인 싸움은 다른 인간을 상대로 벌어지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 싸움에 관한 말씀을 해석할 때 결정적인 한계가 됩니다. 성도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르거나 자신들을 적대하는 사람들을 곧바로 마귀와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악한 영적 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의 행동에 실제로 죄와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잘못을 분명히 판단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과, 그 사람 자체를 악의 본질이나 마귀와 동일시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에서 6장의 갑옷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한 장비가 아니라 적대적인 현실 속에서 굳게 서기 위한 장비로 읽어야 합니다.

통치들과 권세들은 어떤 존재인가

바울이 나열하는 통치와 권세, 어둠의 지배자들, 악한 영적 세력들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초인간적인 영적 세력들을 가리킵니다. 다만 각각의 표현이 정확히 어떤 존재들의 계급이나 조직을 가리키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목록으로 악한 영들의 상세한 위계질서를 만들거나, 각 세력에게 고유한 이름과 담당 영역을 부여하는 것은 본문이 제공하는 정보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하늘에 속한 곳」은 에베소서에 다섯 번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성도들의 복과 예수님의 높아지심을 말하던 이 표현이, 마지막 사용인 6:12에서는 바로 그곳에 악한 영적 세력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 위에 계시지만, 그분의 백성은 여전히 악한 세력에 맞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을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자체가 악한 세력에게 점령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속한 곳」은 단순한 공간적 위치로만 설명하기보다, 초자연적인 영역 또는 성도들의 삶과 하나님의 통치에 관계된 영적 현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악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의 권위를 약화하지 않습니다. 악한 세력들은 현실적인 위협이지만, 예수님보다 높은 권위를 지닌 존재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들의 힘을 두려워하는 데 사로잡혀 있을 필요 없이, 예수님의 힘을 입고 맞서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싸움의 목표를 의외로 소박하게 표현합니다.

서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늘에 속한 곳」은 1:3에서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과 연결되고, 1:20에서는 예수님의 높아지심과 연결됩니다. 2:6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진 성도들의 새로운 지위를 설명하며, 3:10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되는 통치들과 권세들이 등장합니다.

네 번 반복되는 「서다」 —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베소서 6:13–14 본문 →

이 때문에 악한 날에는 맞서고 모든 것을 해낸 뒤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온 갑옷을 집어 드십시오.에베소서 6:13 · 본디새김

11절부터 14절에는 서 있는 동작이 집요하게 반복됩니다.

11절에서는 「맞서 설 수 있도록」이라고 말합니다.

13절에서는 「맞서고」라고 한 뒤 「서 있을 수 있도록」이라고 합니다.

14절에서는 마침내 「그러므로 서십시오」라고 명령합니다.

같은 어근을 지닌 동사들이 이 짧은 단락에서 네 번 등장합니다. 바울은 전투에 관한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앞으로 얼마나 멀리 진격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서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서다」는 수동적으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서다」와 「맞서다」는 악한 세력이 공격할 때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요청하는 것은 도피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악에 저항하면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켜야 할 자리는 무엇일까요? 본문이 특정한 땅이나 물리적인 거점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앞의 문맥을 생각하면 예수님 안에서 받은 믿음과 진리, 평화와 하나 됨의 삶을 악의 공격 속에서도 잃지 않는 것이 그 자리를 지키는 삶의 중요한 모습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진리와 의와 믿음과 구원을 갑옷으로 설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해낸 뒤에 서 있다는 것

13절의 「모든 것을 해낸 뒤」는 해석이 갈리는 표현입니다.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친 뒤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악한 날에 맞닥뜨린 모든 공격을 이겨 낸 뒤라고 읽기도 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감당한 뒤에도 굳게 서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원문은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지 않으므로 하나의 해석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무엇을 마쳤든 마지막에 성도들은 서 있어야 합니다.

싸움의 결과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서 있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이제 바울은 그 모습을 군인의 차림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갑옷의 출처를 이해하려면 로마 군인보다 먼저 구약의 한 장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갑옷 — 원래 이 무장을 입으신 분은 누구인가

에베소서 6:14–16 본문 →

그러므로 서십시오. 진리로 여러분의 허리를 두르고 의의 가슴막이를 입고, 평화의 복음의 채비를 신발 삼아 발에 신고,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집어 든 채로 말입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은 악한 자의 불화살을 다 끌 수 있을 것입니다.에베소서 6:14–16 · 본디새김

허리띠와 가슴막이, 신발과 방패가 등장하니 자연스럽게 당시 로마 군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미지의 더 깊은 배경은 구약에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갑옷을 입으신 하나님

이사야 59:17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의를 가슴막이처럼 입으시고 구원을 투구처럼 쓰십니다. 이사야 59장의 본래 문맥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정의와 의가 무너진 현실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진실과 정의가 사라지고 바르게 판단하며 구원할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의와 구원으로 무장하시고 불의에 맞서십니다.

이사야 11:5에서도 의와 신실함이 허리띠에 비유됩니다. 그곳의 본래 문맥은 여호와야훼의 영을 받아 의롭게 판단하는 이새의 후손에 관한 예언입니다. 또한 이사야 52:7에서는 평화를 알리고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이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성도들이 입으라는 하나님의 갑옷은 구약에서 하나님 자신이 불의와 악에 맞서 행동하실 때 사용된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싸움을 이해하는 방향을 바꿉니다. 바울은 인간이 더 강력한 힘을 획득하여 자기 뜻대로 세상을 지배하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진리와 의와 구원으로 무장하라고 말합니다. 전투의 이미지가 지닌 공격적인 인상과 달리, 그 내용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에 근거합니다.

진리로 허리를 두르다

14절의 첫 번째 무장은 진리입니다. 허리띠는 옷을 정돈하고 몸을 움직일 준비를 갖추게 하는 장비인데, 바울은 그 허리띠에 진리를 연결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정직함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진리는 복음의 내용과도 연결되며, 예수님을 배우는 일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따라서 진리로 허리를 두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드러내신 진리 위에 굳게 서고, 그 진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술책이 속임수라면, 진리는 그 속임수에 대응하는 무장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예수님을 떠난 개인의 확신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강하게 믿는 것과 진리 안에 서 있는 것은 다릅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리는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근거합니다.

의의 가슴막이

두 번째 무장은 의입니다. 바울은 몸의 중요한 부분을 보호하는 가슴막이를 의와 연결합니다. 이 의를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새로운 지위와 관계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성도들이 실제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의로운 삶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4:24에서는 새사람이 「진리의 의와 거룩함으로 지어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문맥을 고려하면 의는 단순히 법적인 선언이나 도덕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만으로 좁히기 어렵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으신 사람에게 주어진 의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의는 자기 자신을 자랑할 근거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입는 것은 자기 의로움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무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삶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갑옷입니다.

평화의 복음이 신발이 되는 이유

15절에서는 전쟁의 이미지와 평화라는 말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군인은 전투를 위해 신발을 신는데, 성도들이 발에 신는 것은 「평화의 복음의 채비」입니다. 바울은 악에 맞서는 싸움을 설명하면서 전쟁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한 공격 기술이 아니라 평화의 복음을 말합니다.

「채비」는 준비나 갖추어짐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고, 평화의 복음이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준비와 견고함을 제공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문맥에서 반복되는 「서다」라는 동사는 뒤의 읽기를 뒷받침하지만, 복음 선포를 위한 준비라는 의미도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경우든 그것은 평화의 복음입니다. 이사야 52:7에서 평화를 전하는 사람의 발이 아름답다고 노래했다면, 에베소서에서는 평화의 복음이 성도들이 악에 맞서 서기 위한 신발이 됩니다.

성도들은 싸움에 참여하지만, 그들이 붙드는 복음은 평화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화를 지키는 것이 악에 맞서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를 사람들 사이에 적대감과 폭력을 퍼뜨리는 행동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이 이미지의 중심을 거스릅니다.

믿음의 방패와 불화살

이제 방패가 등장합니다. 16절의 「방패」는 몸의 상당 부분을 보호할 수 있는 큰 방패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큰 방패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불화살 역시 실제 고대 전투에서 사용되던 무기였으므로, 바울의 독자들은 불화살이 날아올 때 방패로 자신을 보호하는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악한 자의 불화살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이나 유혹, 두려움과 낙심 등 악의 공격을 이 이미지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불화살을 특정한 감정이나 사건에 대응시키는 상세한 목록은 본문에 없습니다. 바울의 초점은 공격의 종류보다 그것을 막아 내는 수단, 곧 믿음에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자신의 의지를 굳게 믿는 정신력이 아닙니다. 이 편지에서 믿음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방패를 든다는 것은 자신의 강함을 신뢰한다는 뜻보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악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악한 자의 불화살이 날아와도 성도들이 끝까지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들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의지하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투구와 영의 칼 —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

에베소서 6:17 본문 →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영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에베소서 6:17 · 본디새김

이제 무장의 마지막 부분인 구원의 투구와 영의 칼이 등장합니다. 먼저 동사를 보면, 바울은 투구와 칼을 직접 만들어 내라고 하지 않고 「받으십시오」(δέχομαι)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갑옷이라는 표현과 어울립니다. 성도들은 자기 힘으로 구원을 생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이 머리를 보호한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장비이고, 바울은 여기에 구원을 연결합니다. 이 표현 역시 이사야 59:17의 하나님의 무장과 연결되며, 데살로니가전서 5:8에서도 구원의 소망이 투구와 연결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구원 자체가 투구로 제시됩니다.

이것을 구원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만 좁히기 어렵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고, 그 구원의 완성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구원의 현실이 악의 공격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근거가 됩니다.

자신의 상황이 불안정하고 외적인 힘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투구는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와 연결됩니다.

영의 칼은 무엇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칼이 등장합니다. 「영의 칼」을 두고는 해석이 갈립니다. 영께서 주시는 칼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고, 영 자체가 칼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가능성도 논의됩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해석의 방향을 좁혀, 본문의 흐름에서는 영께서 주시는 칼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말해진 내용이나 발화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에베소서의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선포하는 복음의 말씀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의 각 구절을 상대방에게 공격적으로 내세워 논쟁에서 승리하는 기술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의 싸움 상대가 피와 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의 칼은 사람을 해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진리를 붙들고 악과 거짓에 맞서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바울의 갑옷 목록이 끝납니다. 그러나 영적 싸움에 관한 권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갑자기 기도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갑옷 옆에 별도로 놓인 새로운 활동이 아니라, 갑옷을 입고 서 있는 성도들의 삶 전체와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영의 칼」은 마카이라 투 프뉴마토스입니다. 그리스어 속격은 여러 관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해석이 갈립니다. 또한 「곧」에 해당하는 관계대명사 호는 중성이고 「칼」은 여성 명사입니다. 이를 뒤의 중성 명사 「말씀」(ῥῆμα)과 일치하는 설명적 구조로 보는 해석이 있는 반면, 앞의 중성 명사 「영」을 받는 것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문법적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칼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해석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하신 사건(마태복음 4:1–11)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가 직접 인용하는 사건은 아니지만, 악의 유혹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주제적 연결입니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

에베소서 6:18–20 본문 →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영 안에서 기도하고,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온갖 끈기를 가지고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면서,에베소서 6:18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는 「온갖」과 「언제나」와 「모든」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온갖 기도와 간구.

언제나 영 안에서.

온갖 끈기를 가지고.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의 범위가 매우 넓게 펼쳐집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갑옷을 설명한 뒤 기도를 강조할까요? 그 답은 문장의 구조에 있습니다.

기도는 갑옷과 분리된 별개의 명령인가

14–16절의 「두르고」, 「입고」, 「신고」, 「들고」는 모두 분사로, 14절의 「서십시오」라는 명령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17절에는 「받으십시오」라는 또 하나의 명령이 나타나고, 18절의 「기도하고」(προσεύχομαι)와 「깨어 있으면서」(ἀγρυπνέω) 역시 그리스어에서는 분사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바울은 18절에서 앞의 무장에 관한 설명을 완전히 끝내고 새로운 주제를 시작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무장으로 맞서 서는 삶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갑옷 목록의 일곱 번째 장비로 단순하게 계산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기도는 앞에서 설명한 모든 무장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태도로 제시됩니다.

성도들은 진리와 의와 믿음과 구원과 말씀으로 무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자신들의 능력만을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합니다.

왜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바울은 단지 각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교회를 한 몸으로 묘사한 말씀과 어울립니다. 한 지체가 싸움을 겪을 때 다른 지체들이 아무 관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싸움도 완전히 고립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은 믿음의 방패를 설명했지만, 자기 혼자 모든 공격을 막아 내는 고독한 영웅의 모습을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성도가 서로를 위하여 간구하는 공동체를 보여 줍니다.

또한 그는 「깨어 있으면서」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이 깨어 있음은 악의 위협을 과도하게 두려워하며 모든 사건에서 악한 영의 흔적을 찾으라는 요청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떤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는지 기억하면서 악의 속임수에 무감각해지지 않는 태도입니다. 기도는 현실을 회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며 분별력을 유지하는 삶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 뒤 한 사람을 추가합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바울이 요청한 기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내가 입을 열 때에 할 말이 나에게 주어져 거리낌 없이 복음의 신비를 알리도록 간구하면서 말입니다.에베소서 6:19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법한 요청, 곧 빨리 풀려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부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 바로 복음의 신비를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신비를 알리는 데 필요한 것은 자신의 뛰어난 언변이나 개인적인 용기만이 아니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할 말을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여기서 사도의 권위와 연약함이 함께 나타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지만, 자신이 언제나 충분한 용기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는 위치에만 서 있지 않고, 그 역시 공동체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도 다른 성도들의 도움 없이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쇠사슬에 매인 사절의 역설

나는 그 복음을 위하여 쇠사슬에 매인 채 사절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 안에서 내가 마땅히 말해야 하는 대로 거리낌 없이 말하도록 간구해 달라는 것입니다.에베소서 6:20 · 본디새김

사절은 자신을 보낸 사람이나 국가를 대표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사절이라는 말은 위임받은 권위와 대표성을 떠올리게 하고, 쇠사슬은 자유의 제한과 무력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이 두 모습을 한 문장에 함께 놓습니다.

그는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이지만, 세상의 권력 앞에서는 갇힌 사람입니다. 그는 실제로 자유를 제한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고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지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이제 6장 전체에서 반복되었던 「서다」라는 말의 의미가 한층 깊어집니다.

바울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신비를 전하는 일에서 물러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몸은 쇠사슬에 매여 있지만, 복음을 전할 때에는 거리낌 없이 말하고 싶어 합니다.

이 장의 영적 싸움은 단순히 악한 세력을 이기는 힘을 과시하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갇힌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끝까지 전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기도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무장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필요합니다. 거짓과 두려움 앞에서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일, 자신의 처지 때문에 복음의 소망을 잃지 않는 일, 악을 사람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꾸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자신이 갇혀 있는 현실 속에서도 공동체와 어떻게 관계를 이어 가는지 보여 줍니다.

두기고가 전하는 것은 소식만이 아니다

에베소서 6:21–22 본문 →

내 사정이 어떤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도 알게 하려고, 두기고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형제이며 주 안에서 믿음직한 섬기는 이입니다.에베소서 6:21 · 본디새김

에베소서의 마지막에 한 사람, 두기고가 등장합니다.

그는 편지의 앞부분에서 소개된 거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늘의 권세들에 관한 설명에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에서 바울의 사정을 수신자들에게 알려 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바울은 두기고의 사회적 지위나 특별한 능력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사랑하는 형제」이며 「주 안에서 믿음직한 섬기는 이」라고 말합니다. 두기고는 바울이 신뢰하는 사람이고, 수신자들과도 형제로 연결된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히 소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왜 바울의 사정을 알아야 하는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내가 그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사정을 알게 되고 그가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6:22 · 본디새김

여기서 소식과 위로가 연결됩니다. 바울의 사정이 알려진다는 것은 단지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수신자들이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게 되고 그의 상황 때문에 품고 있던 염려를 덜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앞에서는 성도들에게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기도하며 염려하던 사람의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사람을 보냅니다.

공동체의 관계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기도합니다. 수신자들은 바울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두기고는 그 사이를 오가며 소식과 위로를 전달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에 두기고라는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행정적인 부록이 아니라, 에베소서가 계속 말해 온 공동체의 삶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던 편지는 한 형제가 다른 형제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마음을 위로하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 거대한 신학이 구체적인 사람들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20:4에는 아시아 출신 두기고가 바울의 동행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골로새서 4:7–8에서도 두기고는 바울의 사정을 알려 주고 수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두 본문의 표현은 매우 가까우므로, 두기고가 이 편지와 골로새서를 전달하는 데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두 편지가 반드시 같은 날, 같은 경로로 전달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인사 — 평화와 사랑과 믿음과 은혜

에베소서 6:23–24 본문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화와 아울러 믿음과 함께하는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기를 빕니다.에베소서 6:23 · 본디새김

바울은 마지막으로 평화와 사랑과 믿음을 빕니다. 이 단어들은 편지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여기서 바울은 그 의미를 다시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것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님께로부터 수신자들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인사에서 세 가지는 서로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평화가 주어지고, 사랑에는 믿음이 함께합니다. 「믿음과 함께하는 사랑」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공동체의 사랑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누리는 평화도 단순히 갈등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상태보다 깊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해에 근거한 평화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축복은 새로운 주제를 추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설명해 온 복음의 열매들이 수신자들 가운데 계속 있기를 구합니다.

「썩지 않음 안에서」 사랑한다는 뜻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썩지 않음 안에서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에베소서 6:24 · 본디새김

마지막 절에는 해석하기 쉽지 않은 표현 「썩지 않음 안에서」가 등장합니다. 그리스어 엔 아프타르시아(ἀφθαρσία)는 썩지 않음, 부패하지 않음, 사라지지 않음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표현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지속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마지막 축복은 주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썩지 않음」을 사랑의 지속성으로만 제한하지 않고, 예수님과 관계된 썩지 않는 생명이나 구원의 상태와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리스어 표현이 무엇을 수식하는지를 명시적으로 고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음 안에서 사랑하는」은 이 표현이 지닌 다소 낯선 성격을 보존합니다.

앞에서는 악의 공격을 견디며 끝까지 서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쉽게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를 이 축복과 연결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의 근거는 인간의 변함없는 의지력에만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중심은 여전히 은혜입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끝까지 사랑해야만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조건을 내세우는 문장으로 편지를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 편지가 하나님의 은혜를 비는 말로 끝납니다.

맺으며 — 쇠사슬에 매인 사절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에베소서 6:1–24 본문 →

에베소서 6장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오래 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온 갑옷을 입고 굳게 서 있는 성도입니다. 그는 진리와 의로 무장하고, 평화의 복음을 신발 삼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영의 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싸움 상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쇠사슬에 매인 바울입니다. 그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자신을 복음의 사절이라고 소개하고, 자신에게 할 말이 주어지기를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더 큰 개인적 권세가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말씀을 마땅히 전할 수 있는 힘입니다.

바울은 부모와 주인의 권위를 무조건 강화하지 않았고, 성도들에게 자기 힘으로 만든 무기를 들려 주지 않았으며, 사도 자신도 홀로 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굳세어진다는 것은 모든 외적인 제약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계속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성도들 가운데 한 형제가 바울의 소식을 가지고 갑니다. 전쟁의 이미지는 어느새 형제의 방문과 위로의 장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려는 복음은 아직 그의 입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은 악한 날에도 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군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승전의 함성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입니다.

바울의 손에는 쇠사슬이 있지만, 그의 마지막 말에는 평화와 은혜가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