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부르심에 맞는 삶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에베소서 5장은 대담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이들이 되십시오.에베소서 5:1 · 본디새김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그분과 같은 능력이나 지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 답은 바로 다음 절에 있습니다.

2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 내주신 그대로」 사랑 안에서 걸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흉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심으로 보여 주신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5장 전체를 읽는 출발점입니다.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거의 같은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25절은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신 그대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장의 처음에는 모든 성도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권하고, 마지막에는 그 사랑이 부부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 사이에는 어둠과 빛, 지혜와 어리석음, 술에 취하는 것과 영으로 채워지는 것, 그리고 서로 복종하는 일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권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따라 읽으면 하나의 질문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개인의 욕망에서 출발하여 말과 행동을 지나, 예배하는 공동체와 가장 가까운 가정의 관계에까지 도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라는, 이 장의 처음보다 더 큰 그림을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34분소단락 115장 본문 읽기 →

사랑받는 자녀가 하나님을 본받는 방법

에베소서 5:1–2 본문 →

5장 첫머리의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권면을 받습니다. 4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성도들을 용서하셨으므로 서로 용서하며 자애롭고 속이 따뜻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실을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이들이 되십시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본받는다

「사랑받는 자녀답게」라는 표현에는 순서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으면 사랑받는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사랑받는 자녀이므로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경쟁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사랑이 삶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본받는 이들」은 어떤 사람을 모방하거나 그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구체적으로 본받아야 하는지 길게 나열하지 않고, 곧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구체적인 형태가 예수님에게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시는 교사가 아니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몇 가지 규칙만 따라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신 방식에서 사랑의 본질을 배우는 일입니다.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왜 제사의 언어를 사용하는가

2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제사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걸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바침과 제물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도록 내주신 그대로 말입니다.에베소서 5:2 · 본디새김

「향기로운 냄새」는 구약의 제사 언어와 연결됩니다. 레위기 1:9, 1:13, 1:17에서는 번제물이 여호와야훼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화제라고 설명하고, 레위기 2:2에서도 곡식 제물을 불살라 드리는 일이 향기로운 냄새와 연결됩니다. 원래 제사 규정의 문맥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제사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언어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 언어가 예수님의 자기희생에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진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드려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 일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단지 강렬한 감정이나 상대방을 향한 호감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신 사건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관계에 적용할 때 조심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희생이 모든 사람에게 어떤 상황에서든 타인의 폭력이나 착취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주셨다는 사실을 사랑의 본으로 제시하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자신이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2절의 「사랑 안에서 걸으십시오」는 이 장의 첫 번째 걸음입니다. 바울은 4장에서 부르심에 걸맞게 걷는 삶을 설명했고, 이제 그 걸음이 어떤 성격을 지녀야 하는지 말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얻는 보상이 아니라, 길을 걷는 동안 머물러야 할 삶의 자리입니다.

그 사랑을 규정하는 기준은 성도의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 자기 자신을 … 내주신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명령의 근거이자 기준입니다.

이제부터 바울은 이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 삶을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 문제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사랑을 말한 직후 탐욕을 경계하는 이유

에베소서 5:3–7 본문 →

음행과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여러분 가운데서 이름조차 일컬어져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에게 마땅한 대로 말입니다.에베소서 5:3 · 본디새김

바울은 사랑 안에서 걸으라고 권한 직후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음행과 탐욕으로 대표되는 삶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대할 위험을 품고 있습니다.

본문이 모든 성적 욕망이나 물질을 소유하려는 마음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성적 부도덕과 더러움, 그리고 만족할 줄 모르고 더 가지려는 탐욕입니다.

이름조차 일컬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

「이름조차 일컬어져서는 안 됩니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이를 성적 부도덕이나 탐욕에 관하여 어떤 경우에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바울 자신이 바로 그 문제들을 이름 붙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그런 행동이 공동체의 정상적인 삶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성도들 가운데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는 강한 경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부끄러운 짓과 어리석은 말이나 상스러운 우스개도 그러합니다. 그런 것들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에베소서 5:4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은 행동에서 말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리고 이 목록의 마지막에 뜻밖의 대안이 등장합니다. 왜 상스러운 우스개의 반대가 감사일까요?

바울이 단순히 유머를 금지하고 엄숙한 말만 하라고 권한다고 생각하면 이 연결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말을 사용하는 두 가지 방향의 대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성적인 대상으로 만들거나 조롱하고 희롱하는 말이 있고, 반대로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며 사람과 사물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말이 있습니다.

탐욕이 더 많이 차지하려는 태도라면, 감사는 이미 받은 것을 선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인 이유

그도 그럴 것이, 여러분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 음행하는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곧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속한 나라에서 상속 몫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에베소서 5:5 · 본디새김

바울은 탐욕스러운 사람을 「곧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탐욕과 우상숭배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우상숭배는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자리에 올려놓는 일입니다. 탐욕은 자신이 얻고 소유하려는 것을 삶의 중심에 놓을 수 있습니다. 그 욕망이 모든 판단과 행동을 지배하게 되면, 사실상 하나님이 아닌 것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골로새서 3:5에서도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이 연결은 우상숭배를 단지 신상 앞에서 절하는 행위로만 좁혀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은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욕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상속 몫」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일과 탐욕스러운 삶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구원이 은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내용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며, 구원을 얻기 위해 일정한 도덕적 점수를 충족해야 한다는 설명도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의 삶과 예수님을 거스르는 삶 사이의 근본적인 불일치를 경고합니다.

또한 이 구절만으로 특정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회개와 용서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본문이 경고하는 것은 그러한 행동을 삶의 방식으로 삼고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다고 안심하는 태도입니다.

헛된 말은 왜 위험한가

6절은 「아무도 헛된 말로 여러분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경고합니다. 헛된 말이 정확히 어떤 가르침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앞뒤 문맥을 보면 죄와 탐욕의 심각성을 축소하거나, 그런 삶을 계속하면서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말이 염두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면서 그러한 삶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참여하는 이들이 되지 마십시오.에베소서 5:7 · 본디새김

바울은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말하기보다, 그들이 행하는 악에 「함께 참여하는」 이가 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이 차이는 곧이어 등장하는 빛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빛은 어둠을 피하여 영원히 숨는 존재가 아닙니다.

빛이기 때문에 어둠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상스러운 우스개」에 해당하는 유트라펠리아와 「감사」에 해당하는 유카리스티아는 어두에서 소리가 비슷합니다. 이 배열이 의도적인 언어유희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문장 안에서 부적절한 말과 감사가 날카롭게 대조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빛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빛이 된 사람들

에베소서 5:8–14 본문 →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걸으십시오.에베소서 5:8 · 본디새김

바울은 수신자들이 과거에 어둠 속에 있었다고만 말하지 않고 「어둠이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빛 속에 있다고만 하지 않고 「빛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삶의 환경이나 종교적인 소속만 바뀌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새롭게 규정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이 빛의 근원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주 안에서」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먼저 빛이 되었기 때문에 빛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에는 열매가 있다

(빛의 열매는 온갖 선함과 의와 진리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9 · 본디새김

우리는 보통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빛의 열매를 말합니다. 빛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실제 삶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선함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성품과 행동을, 의는 올바른 관계와 삶의 방향을, 진리는 거짓과 대조되는 참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개인의 내적인 밝음이나 신비로운 체험으로 설명되지 않고, 선하고 올바르고 참된 삶으로 드러납니다.

빛 가운데 걷는 사람은 무엇을 가려내는가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지 가려내면서 말입니다.에베소서 5:10 · 본디새김

「가려내다」는 시험하고 검토하여 무엇이 합당한지 판별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모든 상황에 적용할 행동 목록을 무한히 제시하지 않고,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지 분별하며 살아가도록 권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명백히 잘못된 행동뿐 아니라 여러 선택지 가운데 무엇이 더 합당한지 판단해야 하는 상황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2에서도 생각이 새로워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이 언급됩니다. 다만 여기서 판단의 기준은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드는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진리가 판단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빛이 어둠의 일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에 함께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일들을 들추어 드러내십시오.에베소서 5:11 · 본디새김

빛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그 일들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악한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 소극적인 구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들추어 드러내다」는 잘못을 드러내거나 책망하고,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밝혀내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모든 죄를 공개적으로 폭로하여 사람들을 망신 주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12절에서는 그들이 몰래 하는 일을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다고 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악한 행동을 선정적으로 자세히 소개하는 데 있지 않고, 빛을 통하여 그 행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빛에 의해 들추어져 드러납니다. 드러나는 것은 다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이여, 일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실 것이다.」에베소서 5:13–14 · 본디새김

「드러나는 것은 다 빛」이라는 말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모든 악한 것이 빛에 노출되는 순간 자동으로 선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빛이 사물을 보이게 만든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빛이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연결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지는 논의되지만, 이어지는 문장은 단순한 폭로보다 더 큰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빛

14절의 인용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서십시오.

예수님께서 너를 비추실 것입니다.

앞의 두 표현은 명령이고,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빛은 잘못을 폭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고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빛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26:19와 60:1–2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26:19에는 죽은 이들이 살아나고 일어나는 장면이 있고, 이사야 60:1–2에서는 시온이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요청과 함께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그 위에 나타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에베소서는 그 언어를 예수님께서 사람을 비추시는 사건과 연결합니다.

다만 5:14의 세 문장은 구약의 어느 한 절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이나 세례 전승을 인용했다는 해석, 이사야의 여러 표현을 예수님 중심으로 결합했다는 해석, 이사야 본문의 문맥을 활용한 창의적인 인용이라는 해석이 있어, 이 문구의 정확한 유래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말을 지금 여기에 둔 이유는 분명합니다.

빛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계속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하고, 그 깨어남은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빛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의 빛은 악이 무엇인지 드러낼 뿐 아니라, 그 빛을 받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릅니다.

이제 바울은 깨어 있는 사람들의 걸음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에는 사본상의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는 「영의 열매」라고 되어 있지만, 본문은 「빛의 열매」를 읽습니다. 「빛」은 바로 앞뒤의 어둠과 빛이라는 반복적인 대조에 잘 어울립니다.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서 5:22의 열매 목록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 문맥에 맞추어 설명합니다. 14절이 떠올리게 하는 이사야 60장의 본래 배경은 어둠 가운데 있는 시온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민족들이 그 빛으로 나아오는 회복의 전망입니다.

때를 사들이는 사람 — 지혜롭게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베소서 5:15–17 본문 →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떻게 걷는지 꼼꼼히 살피십시오 — 지혜롭지 못한 이처럼 말고 지혜로운 이처럼 걷는지 말입니다.에베소서 5:15 · 본디새김

여기서 세 번째 걸음이 등장합니다.

2절에서는 사랑 안에서 걸으라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빛의 자녀답게 걸으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지혜롭게 걸으라고 합니다.

사랑과 빛과 지혜는 서로 별개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빛 가운데 살아가며, 그 삶을 실제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왜 시간을 사들여야 하는가

때를 사들이면서 말입니다. 날이 악하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16 · 본디새김

「때를 사들이다」(ἐξαγοράζω)라는 독특한 표현은 기회를 사들이거나 주어진 때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하루의 모든 시간을 빈틈없이 일정표에 채워 넣으라는 생산성의 명령으로 이해하면 핵심을 놓칩니다. 바울은 악한 시대 속에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지혜롭게 활용하라고 권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무엇이 예수님의 뜻인지 깨닫는 일이 바로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때를 사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절약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예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날이 악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날이 악하기 때문입니다」는 특정한 날짜를 계산하여 미래의 재난을 예언하는 표현이 아니라, 성도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악의 영향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지혜로운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도 있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용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꼼꼼히 살피라고 권합니다.

이 때문에 어리석은 이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에베소서 5:17 · 본디새김

여기서 지혜의 기준은 예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예수님의 뜻인지 깨달아 주어진 기회를 바르게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로운 삶의 설명은 곧이어 포도주와 영이라는 뜻밖의 대조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때」로 옮긴 카이로스는 단순히 시계로 측정하는 시간의 길이보다 어떤 일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나 기회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5에서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는데, 거기서는 외부 사람들을 향해 지혜롭게 행동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술에 취하는 것과 영으로 채워지는 것

에베소서 5:18–21 본문 →

그리고 포도주에 취하지 마십시오 — 거기에는 방종이 있습니다 — 도리어 영으로 채워지십시오.에베소서 5:18 · 본디새김

바울이 분명히 제시하는 대조는 취함에 따르는 방종과 영으로 채워지는 삶입니다.

왜 포도주와 영을 대조하는가

술에 취하는 일은 사람의 판단력과 행동을 흐리게 만들 수 있고, 바울은 그 결과를 「방종」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에서 지혜롭게 걷고 예수님의 뜻을 깨달으라고 했으므로, 18절은 앞의 권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방종에 내맡기는 대신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으로 채워지십시오」는 현재형 명령으로, 지속되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동태 형태이므로 스스로 영을 만들어 내어 자신을 채운다는 뜻이 아니라, 채워짐을 받는 것입니다.

다만 「영으로」라는 표현이 영을 채움의 수단으로 가리키는지, 채워지는 영역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문맥상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형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으로 채워진 공동체는 무엇을 하는가

19–21절에는 여러 분사가 이어집니다. 서로에게 말하며, 노래하며, 가락을 연주하며, 감사하며, 서로 복종하면서. 그리스어에서 이 표현들은 18절의 「영으로 채워지십시오」(πληρόω)라는 명령에 문법적으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영으로 채워지는 삶은 뒤에 이어지는 행위들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시와 찬송과 영에 속한 노래」로 서로에게 말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가락을 연주합니다. 찬양이 하나님을 향할 뿐 아니라 공동체 안의 사람들을 세우는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으로」라는 표현은 찬양이 단순히 외적인 소리만을 내는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감사는 무엇을 바꾸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에 대해 언제나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하며,에베소서 5:20 · 본디새김

4절의 「감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탐욕과 부적절한 말 대신 있어야 한다던 감사가, 이제는 영으로 채워진 공동체의 지속적인 태도로 나타납니다.

이는 모든 사건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선언하거나, 악과 고통을 좋은 일이라고 부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 무관한 현실로만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 살아가면서 감사할 근거를 찾습니다.

그러나 18절의 명령에서 이어지는 분사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면서 말입니다.에베소서 5:21 · 본디새김

영으로 채워지는 일은 서로 복종하는 일과 연결된다

우리는 영으로 채워지는 삶을 생각할 때 찬양과 기도와 특별한 종교적 경험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목록의 마지막에 서로 복종하는 일을 놓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복종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일정한 질서 아래 두거나 따르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서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서로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뜻인지, 공동체 구성원들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지위나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섬기는 태도를 뜻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문맥상 적어도 후자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신 방식으로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영으로 채워진 사람들의 삶도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복종하는 방식으로 설명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장이 다음 단락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바울은 이제 가정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대상은 아내입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을 읽으면 당시 에베소에 있었던 디오니소스 숭배나 특정한 종교 의식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는 그런 의식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어떤 지역 종교의 취한 의식을 직접 겨냥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19절에서 바울은 특정한 음악 형식이나 악기의 종류를 규정하지 않으며, 시와 찬송과 영에 속한 노래를 완전히 다른 세 가지 음악 장르로 구별해야 한다는 근거도 본문에는 없습니다.

아내에게 주어진 권면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에베소서 5:22–24 본문 →

아내 여러분은 자기 남편에게 주님께 하듯 복종하면서 말입니다.에베소서 5:22 · 본디새김

에베소서 5장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 시작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아내가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보다 앞에 놓인 문장의 구조입니다.

22절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22절은 아내와 남편, 그리고 주님께 하듯이라는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고, 독립적인 「복종하라」는 동사가 없습니다. 복종이라는 동작은 21절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면서」에서 이어받습니다. 일부 다른 사본들에는 22절에 복종을 나타내는 동사가 명시되어 있지만, 본문에서는 앞 절의 동사를 이어받아 읽어야 합니다.

이 사실이 곧바로 결혼 관계의 모든 신학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22절을 21절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명령으로 읽을 수 없게 합니다.

당시의 가정은 어떤 구조였는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가정에는 부부와 자녀뿐 아니라 노예와 그 밖의 부양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고대의 가정 관리에 관한 논의에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를 구분하여 설명했고, 『정치학』 1권에도 이러한 구분이 나타납니다. 에베소서 역시 5:22에서 6:9까지 이 세 관계를 차례로 다룹니다. 이런 유형의 권면을 흔히 가정 규범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가 당시의 가정 구조를 언급한다는 사실과 그 구조의 모든 특징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으로 선언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그 권면이 당시의 위계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인지, 예수님의 사랑을 기준으로 기존 관계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이해하게 하는 것인지가 중요한 해석상의 쟁점이 됩니다.

서로 복종한다는 말과 아내의 복종은 어떤 관계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해석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21절의 서로 복종함을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겸손과 섬김의 일반 원리로 보면서도, 결혼 관계에서는 남편에게 구별되는 책임과 권위가 주어진다고 읽는 견해입니다. 이 경우 22–24절은 아내에게 주어진 특정한 관계적 책임을 설명합니다.

다른 하나는 21절의 서로 복종함을 뒤에 나오는 가정 관계 전체의 지배적인 원리로 읽는 견해입니다. 이 경우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자기희생적 사랑은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의 서로 다른 표현입니다.

두 견해는 21절과 22절의 연결이 결혼 안의 권위와 책임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서 결론이 달라집니다. 문법만으로 어느 한 해석이 완전히 입증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 자체가 제공하는 한계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 사이의 보편적인 지배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자기 남편」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말이 남편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경외한다는 기준은 가정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말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분이 친히 그 몸의 구원자이십니다.에베소서 5:23 · 본디새김

「머리」의 비유적 의미를 두고는 오래된 해석 논쟁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권위나 지도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하고, 다른 쪽에서는 근원이나 생명의 공급, 몸과의 유기적인 결합이라는 의미에 무게를 둡니다.

에베소서 안에서도 두 측면이 모두 나타납니다. 1:22에서는 예수님께서 만물 위의 머리로 소개되시며 권위와 통치의 의미가 강하게 나타나고, 4:15–16에서는 머리이신 예수님에게서 몸 전체가 공급받고 자라는 생명과 성장의 관계가 두드러집니다. 따라서 5:23의 「머리」를 단 하나의 의미로 고정한 뒤 그 의미만으로 전체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절에는 머리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이 친히 그 몸의 구원자이십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해서 남편이 아내의 구원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비교하지만, 두 관계가 모든 점에서 완전히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예수님의 모든 지위와 권한을 대신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24절에서는 교회가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을 아내의 복종과 비교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뒤에 나오는 남편의 명령까지 읽기 전에는 이 비교의 전체적인 방향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남편에게도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본받으라고 제시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명령하시고 지배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명령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에베소서 5:25–27 본문 →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신 그대로 말입니다.에베소서 5:25 · 본디새김

여기서 장의 처음과 마지막이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

2절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2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자기 자신을 내주셨다」(παραδίδωμι)는 표현이 두 절에 동일한 동사와 구조로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모든 성도가 본받아야 할 사랑을 설명했고, 이제는 그 사랑을 남편에게 직접 적용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방법을 배우라는 요청을 받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남편에게 주어진 권리를 강화하는 장치가 아니라, 남편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하여 교회를 사랑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교회를 씻으신다는 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친히 자기 앞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얼룩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을 하나도 지니지 않고, 도리어 거룩하고 흠 없게 되도록 말입니다.에베소서 5:26–27 · 본디새김

26절의 물로 씻는 일은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연결해서 읽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세례에서 물을 사용하는 행위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일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으로」가 세례와 함께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인지, 세례와 연결된 신앙고백이나 선언인지, 더 넓게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말씀인지를 두고는 견해가 갈립니다.

그러나 이 절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동의 주체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그 목적은 교회를 자기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정결하게 만들어 예수님께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주신 결과로 거룩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얼룩도 주름도 없는 교회

27절은 얼룩과 주름이 없고 영광스럽게 단장된 신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명시하는 목적은 「거룩하고 흠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얼룩과 주름이라는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거룩함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드러내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에는 1:4와의 분명한 연결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택하신 목적을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5:27에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자신을 내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님의 사랑과 자기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두 구절 사이에서 선명해집니다.

26–27절의 행동 주체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본으로 사용되지만,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의 일까지 남편에게 이전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구원 사역에 종속된 대상으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제 자기희생이라는 큰 사건에서 일상의 돌봄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에서는 씻음과 말씀의 문법적 연결 방식도 해석의 대상입니다. 물로 씻음을 세례와 연결하면서 「말씀」의 역할을 별도로 검토할 수 있습니다.

먹이고 품어 돌보시는 예수님 — 사랑은 일상의 돌봄이 됩니다

에베소서 5:28–30 본문 →

그렇게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28 · 본디새김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큰 사건을 말한 뒤 매우 일상적인 비유를 사용합니다. 자기 몸을 돌보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몸이 굶주리거나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 합니다. 바울은 이 일반적인 경험을 부부 관계에 적용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취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 절을 읽으면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도 자기 육을 미워한 적이 없고 도리어 먹이고 품어 돌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먹이고 품어 돌보시는 것처럼 말입니다.에베소서 5:29 · 본디새김

예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두 가지 동작

29절의 두 동사는 먹이고 기르며 양육하는 일, 그리고 따뜻하게 해 주고 정성껏 돌보는 일을 가리킵니다. 추상적인 사랑의 감정보다 구체적인 돌봄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 행동을 예수님께서 교회를 대하시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자신의 몸인 교회를 먹이고 품어 돌보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큰 희생을 할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실제 삶에서 아내에게 필요한 것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과 연결됩니다. 사랑의 크기는 말로 주장하는 희생의 규모에 의해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3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교회를 돌보시는 것은 자신과 무관한 외부 집단을 돌보시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돌보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비유는 단순히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을 받는 조직이라는 뜻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에게 속해 있고, 예수님께서 교회를 돌보시며, 교회가 예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제 바울은 바로 그 몸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류 최초의 결혼에 관한 창세기 말씀을 가져옵니다.

둘이 한 육이 되는 신비 — 창세기에서 예수님과 교회까지

에베소서 5:31–32 본문 →

「이 때문에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에게 붙을 것이고, 둘이 한 육이 될 것이다.」에베소서 5:3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창세기 2:24를 인용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와 함께할 배필을 주십니다. 남자는 여자를 보고 자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고,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붙어 둘이 한 육이 된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둘은 서로 구별되는 존재이지만, 결혼을 통하여 새로운 연합을 이룹니다.

한 육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육」은 단지 신체적인 결합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축소하기 어렵습니다. 창세기의 문맥에서 사람은 부모를 떠나 배우자에게 붙고,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삶이 시작됩니다. 신체적인 결합도 이 관계에 포함되지만, 본문이 말하는 것은 더 넓은 결혼의 연합입니다.

이 구절은 5:28–30에서 자기 몸을 사랑하는 일과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표현이 이어진 직후 등장합니다. 바울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 육을 이루는 관계를,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은 단순한 비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신비는 위대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말합니다.에베소서 5:32 · 본디새김

바울은 지금 결혼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과 교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창세기의 결혼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직접 예언했을까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구약의 본래 의미와 신약에서 발전된 의미를 구별해야 합니다. 창세기 2:24의 본래 문맥은 인간의 결혼 관계에 관한 말씀이며, 그 구절 자체가 미래의 메시아와 교회를 명시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에베소서는 그 결혼의 연합을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이 연결을 유형론적인 읽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조 때부터 주어진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는 관계가 예수님과 교회의 연합을 이해하도록 돕는 모형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는 인간의 결혼 관계를 훨씬 넘어서며, 비유는 두 관계의 깊은 연합을 설명하면서도 예수님의 독특한 지위를 유지합니다.

왜 이것을 신비라고 부르는가

「신비」는 에베소서에서 감추어져 있다가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표현을 결혼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제도라는 말로만 받아들이면 32절의 후반부를 놓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교회에 관하여 말한다고 명시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대한 신비일까요? 예수님과 교회가 깊이 결합된 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주셨으며,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먹이고 품어 돌보십니다.

이 관계는 단순히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과 깊이 결합된 공동체를 사랑하시는 관계입니다.

한편 「신비」라는 말이 여기서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구절이 후대에 정리된 모든 혼인성사 교리를 직접 가르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신학적 발전과 본문의 직접적인 의미는 구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32의 중심은 혼인의 제도적 지위를 체계화하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 결합인지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결혼에 관한 설명이 예수님에게 이르는 이유

5장은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명령으로 시작했고, 그 명령의 구체적인 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결혼 관계를 설명하다가 마침내 다시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에 도달했습니다. 바울은 단지 예수님의 사랑을 인간의 결혼에 적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혼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처음에 제시한 사랑의 본이 마지막에 더욱 깊이 설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절에서 다시 현실의 부부 관계로 돌아옵니다.

사랑과 경외 — 마지막 권면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에베소서 5:33 본문 →

아무튼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처럼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두려워해야 합니다.에베소서 5:33 · 본디새김

「아무튼」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교회의 신비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부부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권면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라는 표현은 현대 한국어 독자에게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겁을 먹는다는 뜻인가

「두려워해야 합니다」(φοβέομαι)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문맥에 따라 공포를 느끼거나, 두려워하거나, 경외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같은 장의 21절에서도 예수님을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33절의 표현도 단순히 남편에게 겁을 먹으라는 뜻보다, 남편을 존중하거나 경외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새김 본문은 5:33의 동사를 「두려워해야 합니다」로 옮깁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바울이 당시 부부 관계의 권위와 복종에 관한 모든 전통적 전제를 버렸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는 분명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머리 됨이라는 표현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락을 현대적인 상호 존중의 이상으로만 바꾸어 원문의 긴장을 없애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이 구절을 남편이 아내에게 두려움을 강요할 권리를 부여한 말씀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위협과 폭력, 강압으로 배우자를 두렵게 만드는 행위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시고 교회를 먹이고 품어 돌보신다는 본문의 사랑의 기준과 충돌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두 사람의 책임입니다

바울은 결혼 관계에 관한 권면을 마치면서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말을 건넵니다. 본문은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고,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을 강제하는 방법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예수님과의 관계에 근거한 책임을 제시합니다.

맺으며 — 교회를 먹이고 품어 돌보시는 예수님

에베소서 5:1–33 본문 →

에베소서 5장은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명령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기준이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사랑 안에서 걷고, 빛의 자녀답게 살며, 지혜롭게 판단하고, 영으로 채워져 서로를 존중하며 섬기는 일은 결혼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며, 그 길은 가장 가까운 부부 관계에까지 이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본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나 편리함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일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생명과 성장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사용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사랑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로 부름받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걷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말합니다」라고 하며 그 관계를 설명하는 동안 더 깊은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교회가 스스로 완전하기 때문에 주어진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세우시려고 자신을 내주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교회를 버려두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먹이고 품어 돌보십니다.

마지막에 우리 앞에 남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남편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먹이고 품어 돌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