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부르심에 맞는 삶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에베소서 5장은 대담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으십시오.에베소서 5:1 · 두루새김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그분과 같은 능력이나 지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 답은 바로 다음 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보여 주신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5장 전체를 읽는 출발점입니다.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거의 같은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2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어 주셨다고 말하고, 25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분은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장의 처음에는 모든 성도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권하고, 마지막에는 그 사랑이 부부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어둠과 빛, 지혜와 어리석음,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 그리고 서로 복종하는 일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권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따라 읽으면 하나의 질문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개인의 욕망에서 출발하여 말과 행동을 지나, 예배하는 공동체와 가장 가까운 가정의 관계에까지 도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라는, 이 장의 처음보다 더 큰 그림을 보여 줍니다.
사랑받는 자녀가 하나님을 본받는 방법
5장 첫머리의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권면을 받습니다. 4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성도들을 용서하셨으므로 서로 용서하며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실을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본받으십시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본받는다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으면 사랑받는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사랑받는 자녀이므로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경쟁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사랑이 삶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본받으십시오」는 어떤 사람을 따라 하거나 그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본받아야 하는지 길게 나열하지 않고, 곧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시는 교사가 아니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몇 가지 규칙만 따라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방식에서 사랑의 본질을 배우는 일입니다.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왜 제사의 언어를 사용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에베소서 5:2 · 두루새김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은 구약의 제사 언어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제사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 언어가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신 일에 적용됩니다.
여기에는 두 방향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드려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 일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5장에서 말하는 사랑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바울은 사랑을 강렬한 감정이나 호감으로 정의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사건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본문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사랑의 본으로 제시하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자신이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원문에서는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περιπατέω)의 살아가는 일을 걷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이 장의 첫 번째 걸음입니다. 바울은 4장에서 부르심에 걸맞게 걷는 삶을 설명했고, 이제 그 걸음이 어떤 성격을 지녀야 하는지 말합니다.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얻는 보상이 아니라, 길을 걷는 동안 머물러야 할 삶의 자리입니다. 그 사랑을 규정하는 기준은 성도의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명령의 근거이자 기준입니다.
이제부터 바울은 이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 삶을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 문제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사랑을 말한 직후 탐욕을 경계하는 이유
여러분 가운데서는 음행과 온갖 더러움과 탐욕이 있다는 말조차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성도에게 어울립니다.에베소서 5:3 · 두루새김
바울은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권한 직후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음행과 탐욕으로 대표되는 삶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대할 위험을 품고 있습니다.
본문이 모든 성적 욕망이나 물질을 소유하려는 마음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성적 부도덕과 더러움, 그리고 만족할 줄 모르고 더 가지려는 탐욕입니다.
이름조차 일컬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
「있다는 말조차 나와서는 안 됩니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를 그런 문제에 관하여 어떤 경우에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바울 자신이 바로 그 문제들을 이름 붙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그런 행동이 공동체의 정상적인 삶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성도들 가운데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는 강한 경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부끄러운 행동이나 어리석은 말, 더러운 농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십시오.에베소서 5:4 · 두루새김
바울은 행동에서 말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리고 이 목록의 마지막에 뜻밖의 대안을 내놓습니다.
왜 더러운 농담의 반대가 감사일까요?
바울이 단순히 유머를 금지하고 엄숙한 말만 하라고 권한다고 생각하면 이 연결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말을 사용하는 두 가지 방향의 대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성적인 대상으로 만들거나 조롱하고 희롱하는 말이 있고,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며 사람과 사물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말이 있습니다.
탐욕이 더 많이 차지하려는 태도라면, 감사는 이미 받은 것을 선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인 이유
여러분도 분명히 알고 있듯이, 음행하는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물려받을 몫이 없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곧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에베소서 5:5 · 두루새김
탐욕과 우상숭배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우상숭배는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자리에 올려놓는 일입니다. 탐욕은 자신이 얻고 소유하려는 것을 삶의 중심에 놓을 수 있습니다. 그 욕망이 모든 판단과 행동을 지배하게 되면, 사실상 하나님이 아닌 것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골로새서 3:5에서도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이 연결은 우상숭배를 신상 앞에서 절하는 행위로만 좁혀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은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욕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물려받을 몫」과 연결합니다. 이는 앞서 구원이 은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내용을 취소하는 것도, 구원을 얻기 위해 도덕적 점수를 채워야 한다는 설명도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의 삶과 예수님을 거스르는 삶이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경고입니다.
또한 이 구절만으로 특정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회개와 용서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본문이 경고하는 것은 그러한 행동을 삶의 방식으로 삼고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다고 안심하는 태도입니다.
헛된 말은 왜 위험한가
6절은 「아무도 헛된 말로 여러분을 속이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경고합니다. 그 헛된 말이 정확히 어떤 가르침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앞뒤 문맥을 보면 죄와 탐욕의 심각성을 줄여 말하거나 그런 삶을 계속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말이 염두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분노를 언급하면서 그러한 삶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그런 일에 참여하지 마십시오.에베소서 5:7 · 두루새김
바울은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말하기보다, 그들이 행하는 악에 참여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이 차이는 곧이어 등장하는 빛의 비유를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빛은 어둠을 피하여 영원히 숨는 존재가 아닙니다.
빛이기 때문에 어둠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더러운 농담」과 「감사」는 그리스어로 유트라펠리아와 유카리스티아인데, 첫머리의 소리가 비슷합니다. 이 배열이 의도적인 말놀음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문장 안에서 부적절한 말과 감사가 뚜렷하게 대조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빛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빛이 된 사람들
여러분은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베소서 5:8 · 두루새김
바울은 수신자들이 과거에 어둠 속에 있었다고만 말하지 않고 「어둠이었지만」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빛 속에 있다고만 하지 않고 「빛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삶의 환경이나 종교적인 소속만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자체가 새롭게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빛의 근원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주 안에서」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빛입니다.
먼저 빛이 되었기 때문에 빛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에는 열매가 있다
빛의 열매는 온갖 선함과 바름과 진실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9 · 두루새김
우리는 보통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빛의 열매를 말합니다. 빛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실제 삶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선함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성품과 행동을, 바름은 올바른 관계와 삶의 방향을, 진실함은 거짓과 대조되는 참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개인의 마음속 밝음이나 신비로운 체험이 아니라, 선하고 올바르고 참된 삶으로 드러납니다.
빛 가운데 걷는 사람은 무엇을 가려내는가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가려내십시오.에베소서 5:10 · 두루새김
「가려내십시오」는 시험하고 검토하여 무엇이 알맞은지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모든 상황에 적용할 행동 목록을 끝없이 제시하지 않고, 성도들이 무엇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가려내며 살아가도록 권합니다.
이것은 선과 악에 관한 규칙을 외우는 일보다 넓습니다. 실제 삶에서는 명백히 잘못된 행동뿐 아니라 여러 선택지 가운데 무엇이 더 알맞은지 판단해야 하는 상황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2에서도 생각이 새로워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이 언급됩니다.
다만 판단의 기준은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진리가 판단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빛이 어둠의 일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함께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일이 잘못임을 드러내십시오.에베소서 5:11 · 두루새김
빛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일들이 잘못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드러내십시오」는 잘못을 드러내거나 꾸짖고,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밝혀내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모든 죄를 공개적으로 폭로하여 사람들을 망신 주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는 그들이 몰래 하는 일을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악한 행동을 선정적으로 자세히 소개하는 데 있지 않고, 빛을 통하여 그 행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드러낸 것은 모두 환히 보이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실 것이다.」에베소서 5:13–14 · 두루새김
14절 앞부분의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모든 악한 것이 빛에 노출되는 순간 자동으로 선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빛이 사물을 보이게 만든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빛이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연결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지는 논의되지만, 이어지는 문장은 단순한 폭로보다 더 큰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빛
이 말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실 것이다.」
앞의 두 표현은 명령이고,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빛은 잘못을 폭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고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빛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26:19와 60:1–2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26:19에는 죽은 이들이 살아나고 일어나는 장면이 있고, 이사야 60:1–2에서는 시온이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요청과 함께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그 위에 나타납니다. 에베소서는 그 언어를 예수님께서 사람을 비추시는 사건과 연결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지금 여기에 둔 이유는 분명합니다. 빛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계속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하고, 그 깨어남은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빛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의 빛은 악이 무엇인지 드러낼 뿐 아니라, 그 빛을 받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릅니다.
이제 바울은 깨어 있는 사람들의 걸음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에서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는 「영의 열매」라고 되어 있지만, 본문은 「빛의 열매」를 읽습니다. 「빛」은 앞뒤의 어둠과 빛이라는 반복적인 대조에 잘 어울립니다.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서 5:22의 열매 목록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 문맥에 맞추어 설명합니다. 또 이사야 60장의 본래 배경은 어둠 가운데 있는 시온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민족들이 그 빛으로 나아오는 회복의 전망입니다. 다만 5:14의 세 문장은 구약의 어느 한 절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던 찬송이나 세례와 관련되어 전해 내려온 말을 인용했다는 해석, 이사야의 여러 표현을 결합하여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구의 정확한 유래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때를 사들이는 사람 — 지혜롭게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떻게 사는지 주의 깊이 살피십시오. 지혜 없는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사십시오.에베소서 5:15 · 두루새김
여기서 세 번째 걸음이 등장합니다.
2절에서는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지혜로운 사람처럼 살라고 합니다.
사랑과 빛과 지혜는 서로 별개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빛 가운데 살아가며, 그 삶을 실제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왜 시간을 사들여야 하는가
기회를 최대한 살리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16 · 두루새김
「기회를 최대한 살리십시오」(ἐξαγοράζω)는 원문에서 때(καιρός)를 사들이라고 표현한 자리입니다. 여기서 「때」는 시계로 재는 시간의 길이보다 어떤 일을 하기에 알맞은 시기나 기회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하루의 모든 시간을 빈틈없이 일정표에 채워 넣으라는 생산성의 명령으로 이해하면 핵심을 놓칩니다. 바울은 악한 시대 속에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지혜롭게 살리라고 권합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예수님의 뜻에 맞는 일을 가려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날이 악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은 악한 때이기 때문입니다」는 특정한 날짜를 계산하여 미래의 재난을 예언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악의 영향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는 주어진 기회를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도 있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용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의 깊이 살피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에베소서 5:17 · 두루새김
지혜의 기준은 예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세상과 단절되어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무엇이 예수님의 뜻인지 깨달아 주어진 기회를 바르게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로운 삶의 설명은 곧이어 포도주와 성령이라는 뜻밖의 대조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골로새서 4:5에서도 원문에 「때를 사들이라」는 같은 표현이 사용되는데, 거기서는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향해 지혜롭게 행동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무엇이 예수님의 뜻인지 깨닫는 일이 바로 뒤따릅니다.
술에 취하는 것과 영으로 채워지는 것
포도주에 취하지 마십시오. 술 취함은 제멋대로 사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에베소서 5:18 · 두루새김
바울이 분명히 제시하는 대조는 취함에 따라 제멋대로 사는 삶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삶입니다.
왜 포도주와 영을 대조하는가
술에 취하는 일은 사람의 판단력과 행동을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처럼 살고 예수님의 뜻을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제멋대로 사는 삶에 내맡기는 대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는 현재형 명령으로, 지속되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동태이므로 스스로 성령을 만들어 내어 자신을 채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채워짐을 받는 것입니다.
영으로 채워진 공동체는 무엇을 하는가
19–21절에는 원문에서 「서로에게 말하며, 노래하며, 찬양하며, 감사하며, 서로 복종하면서」라는 여러 분사가 이어지고, 이 표현들은 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πληρόω)에 문법적으로 연결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일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바울이 바로 다음 절들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8절은 뒤에 이어지는 행위들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에게 말하고, 마음으로 예수님께 노래하고 찬양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향할 뿐 아니라 공동체 안의 사람들을 세우는 역할도 합니다. 「마음으로」라는 표현은 찬양이 겉으로 소리만 내는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특정한 음악 형식이나 악기의 종류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를 완전히 다른 세 가지 음악 장르로 구별해야 한다는 근거도 본문에는 없습니다.
감사는 무엇을 바꾸는가
언제나 모든 일에 대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에베소서 5:20 · 두루새김
4절의 「감사하는 말을 하십시오」에 이어 다시 감사가 등장합니다. 탐욕과 부적절한 말을 대신하던 감사가, 이제는 성령으로 충만해진 공동체의 지속적인 태도로 나타납니다.
이는 모든 사건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선언하거나, 악과 고통을 좋은 일이라고 부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과 무관한 현실로만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 살아가면서 감사할 근거를 찾습니다.
그러나 18절의 명령에 이어지는 분사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서로 복종하십시오.에베소서 5:21 · 두루새김
영으로 채워지는 일은 서로 복종하는 일과 연결된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삶을 생각할 때 찬양과 기도와 특별한 종교적 경험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목록의 마지막에 서로 복종하는 일을 놓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복종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일정한 질서 아래 두거나 따르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서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서로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뜻인지, 공동체 구성원들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 지위나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섬기는 태도를 뜻하는지가 물음입니다. 문맥상 적어도 뒤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방식으로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의 삶도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복종하는 방식으로 설명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장이 다음 단락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바울은 이제 가정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첫 번째 대상은 아내입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에 대해 당시 에베소에 있었던 디오니소스 숭배나 특정한 종교 의식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본문 자체는 그런 의식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지역 종교의 취한 의식을 직접 겨냥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원문의 「영으로」가 영을 채움의 수단으로 가리키는지, 채워지는 영역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성령으로」 옮겼습니다. 문맥상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삶이 성령에 의하여 형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내에게 주어진 권면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아내 여러분, 주님께 하듯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에베소서 5:22 · 두루새김
에베소서 5장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 시작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아내가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보다 앞에 놓인 문장의 구조입니다.
22절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22절은 아내와 남편, 그리고 주님께 하듯이라는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고, 독립적인 「복종하라」는 동사가 없습니다. 복종이라는 동작은 바로 앞의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서로 복종하십시오」에서 이어받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연결을 풀어 「복종하십시오」라고 옮겼습니다.
이 사실이 결혼 관계의 모든 신학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22절을 21절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명령으로 읽을 수 없게 합니다.
당시의 가정은 어떤 구조였는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가정에는 부부와 자녀뿐 아니라 노예와 그 밖의 부양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역시 5:22에서 6:9까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의 세 관계를 차례로 다룹니다. 이런 유형의 권면을 흔히 가정 규범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가 당시의 가정 구조를 언급한다는 사실과 그 구조의 모든 특징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으로 선언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권면이 당시의 위계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인지, 예수님의 사랑을 기준으로 기존 관계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이해하게 하는 것인지가 중요한 해석상의 쟁점이 됩니다.
서로 복종한다는 말과 아내의 복종은 어떤 관계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해석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21절의 서로 복종함을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겸손과 섬김의 일반 원리로 보면서도, 결혼 관계에서는 남편에게 구별되는 책임과 권위가 주어진다고 읽는 견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21절을 뒤에 나오는 가정 관계 전체를 이끄는 원리로 읽어,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의 서로 다른 표현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문법만으로 어느 한 해석이 완전히 입증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 자체가 제공하는 한계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 사이의 보편적인 지배 관계를 말하지 않고, 아내와 「자기 남편」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말이 남편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경외한다는 기준은 가정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말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의 구원자이십니다.에베소서 5:23 · 두루새김
「머리」(케팔레)의 비유적 의미를 두고는 오래된 해석 논쟁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권위나 지도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하고, 다른 쪽에서는 근원이나 생명의 공급, 몸과의 긴밀한 결합에 무게를 둡니다. 에베소서 안에서도 1:22에서는 권위와 통치의 의미가, 4:15–16에서는 몸 전체가 머리에게서 공급받고 자라는 생명의 관계가 두드러집니다. 따라서 5:23의 「머리」를 단 하나의 의미로 고정한 뒤 그 의미만으로 전체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절에는 머리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의 구원자이십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해서 남편이 아내의 구원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비교하지만, 두 관계가 모든 점에서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24절에서는 교회가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을 아내의 복종과 비교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뒤에 나오는 남편의 명령까지 읽기 전에는 이 비교의 방향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남편에게도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본받으라고 제시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명령하시고 지배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다른 사본들에는 22절에 복종을 나타내는 동사가 명시되어 있어, 모든 그리스어 사본이 같은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따르는 원문은 앞 절의 동사를 이어받아 읽어야 합니다. 또 고대의 가정 관리에 관한 논의에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를 구분하여 설명했으며, 『정치학』 1권에도 이러한 구분이 나타납니다. 두 해석 방향은 모두 21절과 22절의 연결, 그리고 뒤에 나오는 남편의 사랑에 관한 권면을 다루어야 하지만, 그 연결이 결혼 안의 권위와 책임을 어떻게 정하는지에서는 결론이 달라집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명령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분은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에베소서 5:25 · 두루새김
여기서 장의 처음과 마지막이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
2절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2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도 「자신을 내어 주셨다」(παραδίδωμι)는 같은 동사와 구조가 두 절에 쓰였습니다. 앞에서 모든 성도가 본받아야 할 사랑을, 이제 남편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는 방법을 배우라는 요청을 받지 않습니다. 아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남편의 권리를 강화하는 장치가 아니라, 남편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하여 교회를 사랑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교회를 씻으신다는 말
이는 말씀과 함께 물로 씻어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친히 자신의 앞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얼룩이나 주름이나 그와 같은 것이 전혀 없이 거룩하고 흠 없는 교회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26–27 · 두루새김
26절의 물로 씻는 일은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연결해서 읽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말씀과 함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견해가 갈리지만, 이 절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동의 주체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깨끗하게 만들어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어 주신 결과로 거룩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얼룩도 주름도 없는 교회
바울은 여기서 얼룩과 주름이 없고 영광스럽게 단장된 신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교회의 겉모습이나 결혼식의 화려함으로 좁혀 읽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거룩하고 흠 없는 교회」라는 목적을 드러냅니다.
1:4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택하신 목적을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5:27에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자신을 내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님의 사랑과 자기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26–27절의 행동 주체는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만들거나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사실은 남편의 사랑을 판단하는 기준이지만, 남편은 예수님과 같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신이 구원해야 하는 대상으로 다루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말씀과 함께」는 세례와 함께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인지, 세례와 연결된 신앙고백이나 선언인지, 더 넓게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말씀인지를 두고 견해가 갈립니다. 그리스어에서 씻음과 말씀의 문법적 연결 방식도 해석의 대상이어서, 물로 씻음을 세례와 연결하면서 「말씀」의 역할을 별도로 검토할 수 있습니다.
먹이고 따뜻하게 돌보시는 예수님 — 사랑은 일상의 돌봄이 됩니다
이처럼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28 · 두루새김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큰 사건을 말한 뒤 매우 일상적인 비유를 사용합니다. 자기 몸을 돌보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 굶주리거나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취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음 절을 읽으면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한 적이 없고, 오히려 먹이고 따뜻하게 돌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그렇게 돌보십니다.에베소서 5:29 · 두루새김
예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두 가지 동작
29절의 두 동사는 먹이고 기르며 양육하는 일, 그리고 따뜻하게 해 주고 정성껏 돌보는 일을 가리킵니다. 추상적인 사랑의 감정보다 구체적인 돌봄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행동을 예수님께서 교회를 대하시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몸인 교회를 먹이고 따뜻하게 돌보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큰 희생을 할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실제 삶에서 아내에게 필요한 것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과 연결됩니다. 사랑의 크기는 말로 주장하는 희생의 규모만이 아니라, 날마다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부분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부분들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30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교회를 돌보시는 것은 자신과 무관한 외부 집단을 돌보시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돌보시는 일입니다. 몸이라는 비유는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을 받는 조직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교회가 예수님에게 속해 있고 예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깊어집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인류 최초의 결혼에 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둘이 한 몸이 되는 신비 — 창세기에서 예수님과 교회까지
「이 때문에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굳게 결합하고, 둘은 한 몸이 될 것이다.」에베소서 5:3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창세기 2:24를 인용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와 함께할 짝을 주시며, 남자는 여자를 보고 자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문맥은 남자와 여자가 맺는 결혼 관계의 깊은 결합을 설명합니다. 둘은 서로 구별되는 존재이지만, 결혼을 통하여 새롭게 하나로 이어집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몸」은 신체적인 결합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축소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부모를 떠나 배우자와 굳게 결합하고, 새로운 관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시작됩니다. 신체적인 결합도 이 관계에 포함되지만, 본문이 말하는 것은 더 넓은 결혼의 연합입니다.
이 구절은 자기 몸을 사랑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부분들」이라는 표현이 이어진 직후에 등장합니다. 바울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관계를,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은 단순한 비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것은 큰 신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32 · 두루새김
바울은 지금 결혼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과 교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창세기의 결혼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직접 예언했을까
창세기 2:24의 본래 문맥은 인간의 결혼 관계에 관한 말씀이며, 그 구절 자체가 미래의 메시아와 교회를 명시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에베소서는 창조 때부터 주어진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예수님과 교회의 연합을 이해하도록 돕는 모형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는 인간의 결혼 관계를 훨씬 넘어섭니다. 앞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구원자이시라고 했고, 남편은 그런 의미에서 아내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비유는 두 관계의 깊은 연합을 설명하면서도 예수님의 독특한 지위를 유지합니다.
왜 이것을 신비라고 부르는가
「신비」는 에베소서에서 감추어져 있다가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표현을 결혼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제도라는 말로만 받아들이면,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라는 32절 후반부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큰 신비일까요?
예수님과 교회가 깊이 결합된 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어 주셨으며,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먹이고 따뜻하게 돌보십니다. 이 관계는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를 넘어, 예수님께서 자신과 깊이 결합된 공동체를 사랑하시는 관계입니다.
한편 「신비」라는 낱말이 쓰였다는 사실만으로 이 구절이 후대에 정리된 모든 혼인성사 교리를 직접 가르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신학적 발전과 본문의 직접적인 의미는 구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32의 중심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 결합인지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결혼에 관한 설명이 예수님에게 이르는 이유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명령의 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결혼 관계를 설명하다가 마침내 다시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에 도달합니다. 처음에 제시한 사랑의 본이 마지막에 더욱 깊이 설명된 것입니다.
바울은 단지 예수님의 사랑을 인간의 결혼에 적용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결혼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절에서 다시 현실의 부부 관계로 돌아옵니다.
사랑과 경외 — 마지막 권면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어쨌든 남편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중해야 합니다.에베소서 5:33 · 두루새김
「어쨌든」은 예수님과 교회의 신비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고, 부부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권면으로 돌아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겁을 먹는다는 뜻인가
「존중해야 합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포베오마이(φοβέομαι)입니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공포를 느끼거나, 두려워하거나, 경외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같은 장의 21절에서도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서로 복종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33절도 남편에게 겁을 먹으라는 뜻이 아니라, 남편을 존중하는 태도로 읽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두루새김이 「존중해야 합니다」로 옮긴 까닭입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바울이 당시 부부 관계의 권위와 복종에 관한 모든 전통적 전제를 버렸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는 분명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머리 됨이라는 표현이 존재하므로, 이 단락을 현대적인 상호 존중의 이상으로만 바꾸어 원문의 긴장을 없애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이 구절을 남편이 아내에게 두려움을 강요할 권리를 부여한 말씀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위협과 폭력, 강압으로 배우자를 두렵게 만드는 행위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교회를 먹이고 따뜻하게 돌보신다는 본문의 사랑의 기준과 충돌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두 사람의 책임입니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말을 건넵니다. 본문은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방법도,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을 강제하는 방법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예수님과의 관계에 근거한 책임을 제시합니다.
교회를 먹이고 따뜻하게 돌보시는 예수님
교회를 먹이고 따뜻하게 돌보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처음에는 떨어져 보였던 이 장의 여러 권면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랑하며 살라는 명령 뒤에 탐욕을 경계한 것은 탐욕이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과 반대 방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빛의 자녀는 선함과 바름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고, 지혜로운 사람은 악한 때에 주님의 뜻을 가려내며,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은 노래하고 감사하며 서로 복종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가장 가까운 부부 관계에까지 이릅니다.
그래서 처음의 질문, 사랑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이 기준이므로, 그 사랑을 본받는다는 말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아내에게 주어진 권면도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서로 복종하십시오」에서 시작되므로, 그 관계를 하나님께 대한 순종보다 우위에 있는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남편은 그 사랑을 본받아야 할 사람이지,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권위를 대신 행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결혼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를 향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사랑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로 부름받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이야기하다가 「이것은 큰 신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독자의 시선은 다시 예수님께 향합니다. 그 사랑은 교회가 스스로 완전하기 때문에 주어진 사랑이 아니라,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세우시려고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교회를 버려두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우리 앞에 남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남편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먹이고 따뜻하게 돌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