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부르심에 맞는 삶

한 몸을 자라게 하는 서로 다른 지체

에베소서 4장에는 흥미로운 긴장이 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성령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힘써 지키십시오」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조금 뒤 13절에서는 「우리 모두가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에서 하나가 되고」 성숙해질 때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미 있는 하나 됨을 지키라고 하고, 뒤에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하나 됨에 이르러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 됨은 이미 주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앞으로 이루어야 할 것일까요?

바울에게 교회의 하나 됨은 사람들이 서로 잘 지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한 분의 예수님, 한 분의 성령, 한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라는 사실과 하나 된 몸답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한 몸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할 지체들이 오히려 서로를 해칠 수도 있고, 진리를 말해야 할 입에서 거짓과 헐뜯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공동체에 하나가 되라고 권하면서, 그 하나 됨을 만들어 내신 분이 누구인지 먼저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 됨을 이루시는 방법은 모든 사람을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선물을 주십니다.

한 분의 예수님에게서 여러 선물이 나오고, 그 선물을 받은 지체들이 각자 자기 몫을 감당할 때 하나의 몸이 자랍니다. 이렇게 에베소서 4장은 하나 됨에서 다양성으로, 다양성에서 성장으로, 성장에서 일상의 말과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자기 손으로 번 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지,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의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읽는 시간 38분소단락 134장 본문 읽기 →

부르심에 걸맞게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베소서 4:1–3 본문 →

그러므로 주님 때문에 갇힌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으니, 그 부르심에 어울리게 살아가십시오.에베소서 4:1 · 두루새김

바울은 다시 자신을 갇힌 사람으로 소개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지 않고 그가 권하는 내용에 시선을 모읍니다. 문장의 중심은 「그 부르심에 어울리게 살아가십시오」라는 요청입니다.

걸음의 기준은 이미 받은 부르심입니다

「살아가십시오」(περιπατέω)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걷는다는 말로, 일상생활 전체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순서가 반대입니다.

이미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어울리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어울리게」는 어떤 가치나 지위에 맞게, 그것과 어울리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요청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자격을 갖추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부르심과 실제 삶 사이에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먼저 권하는 것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나 놀라운 능력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겸손하고 온화하게 행동하며, 오래 참고 사랑으로 서로 받아 주십시오. 평화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성령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힘써 지키십시오.에베소서 4:2–3 · 두루새김

겸손, 온화한 행동, 오래 참음, 서로 받아 줌.

이것들은 개인의 성품을 아름답게 만드는 덕목이기도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태도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판단을 하고, 같은 속도로 성장하며,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서로를 오래 참아야 할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래 참고 서로 받아 주라는 요청은 공동체 안에 실제적인 차이와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하나 됨은 차이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차이가 존재하는 가운데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겸손과 온유는 왜 필요한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겸손을 나타내는 일부 표현은 낮은 신분이나 비굴함과 연결되어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설명하는 중요한 덕목으로 등장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겸손은 자신이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다른 지체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온화하게 행동하는 것도 힘이 없어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의 힘이나 권리를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태도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받아 주십시오」는 그 태도가 실제 관계 속에서 나타나야 함을 보여 줍니다.

바울이 공동체의 성숙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은, 뒤에서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 성장하려면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장하려면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를 참지 못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연결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갇힌 사람이 말하는 「끈」

3절의 「끈」(σύνδεσμος)은 묶고 연결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1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갇힌 사람이라고 소개할 때 사용한 단어와 어근상 연결됩니다. 이 대조가 의도적인 말놀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두 표현을 나란히 놓으면 뜻깊은 차이가 보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묶어 두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지만,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연결은 강제로 묶이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들을 묶는 것은 평화입니다.

또한 바울은 성령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만들어 내라고 하지 않고 「힘써 지키십시오」라고 합니다. 지키고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만들어 내지 않은 하나 됨을 성도들이 지켜야 합니다.

교회의 하나 됨이 사람들의 합의에만 근거한다면, 합의가 깨지는 순간 하나 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미 한 분의 하나님께 속하고 한 분의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그 관계를 해치지 않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근거를 바울은 곧이어 일곱 번의 「하나」로 설명합니다.

일곱 번의 「하나」 — 교회의 하나 됨은 어디에서 오는가

에베소서 4:4–6 본문 →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주신 소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며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일하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에베소서 4:4–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마치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를 뜻하는 표현이 일곱 번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몸과 성령과 소망을, 그다음에는 예수님과 믿음과 세례를, 마지막에는 모두의 아버지이신 한 분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성령과 예수님과 아버지가 차례로 등장하기 때문에 훗날 삼위일체 신앙고백에서 발전될 구조를 발견할 수 있지만, 바울이 여기서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관심은 교회가 하나인 근거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한 몸이라는 말은 먼저 한 영이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4절에서 교회가 한 몸이라는 선언은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와 이어집니다. 이것은 단지 여러 사람이 비슷한 믿음을 공유한다는 의미보다 깊습니다. 한 분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그 관계 때문에 한 몸을 이루고, 같은 소망을 가집니다. 과거의 배경이나 현재의 형편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 됨은 모든 사람이 같은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부르심과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한 예수님, 한 믿음, 한 세례

「주님도 한 분이시고」라는 선언은 신앙 공동체를 결정적으로 규정합니다. 성도들에게 각자 별도의 충성을 요구하는 여러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의 예수님께 속합니다. 「믿음도 하나이며」는 모든 신자가 신앙의 세부 사항을 완전히 똑같이 이해한다는 뜻으로 좁히기 어렵고, 예수님을 향한 공통의 믿음과 그 믿음의 내용을 함께 가리킬 수 있습니다.

「세례도 하나입니다」는 믿음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일이 공개적으로 표시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세례는 공동체의 소속과 관계된 중요한 행위였고,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한 분의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 세례와 연결됩니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근거는 누가 더 뛰어난가가 아니라, 그들 모두가 한 분의 예수님께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하나님, 모두의 아버지

마지막은 한 분의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십니다. 그러나 세상과 아무 관계 없이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해 일하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공동체의 하나 됨에 대한 최종적인 근거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그러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라는 말을 일곱 번 반복한 바울이 이제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 됨과 서로 다름은 충돌하지 않을까요?

조금 더 깊이

6절의 「모든 것」의 범위를 정확히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는 문맥과 사본의 차이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바로 앞에서 한 몸을 이루는 성도들에 관하여 말했으므로, 공동체 안에 계시며 일하시는 하나님께 직접적인 초점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을 하나님이 모든 존재 안에 같은 방식으로 계신다는 철학적 주장으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 단락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신명기 6:4의 이스라엘 신앙고백을 떠올리게 합니다.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그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한 분의 예수님과 한 분의 성령 안에서 한 몸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주제적 연결입니다.

한 몸이지만 선물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에베소서 4:7–10 본문 →

그러나 우리 각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에 따라 은혜가 주어졌습니다.에베소서 4:7 · 두루새김

7절에서 시선이 공동체 전체에서 각각의 사람에게로 이동합니다. 바울은 하나 됨을 이야기한 다음 개인의 차이를 지워 버리지 않고, 오히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 기준인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은 어떤 사람이 더 가치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한 선물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모두가 같은 예수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역할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지체가 같은 일을 할 때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지체가 같은 예수님께 속하여 각자의 일을 할 때 드러납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예수님께서 선물을 주시는 분이신지 설명하기 위해 갑자기 시편을 인용할까요?

높이 올라가신 승리자가 선물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포로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에베소서 4:8 · 두루새김

이 구절의 출처는 시편 68:18입니다(히브리어 성경의 절 번호로는 68:19). 시편 68편은 하나님이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시로,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왕처럼 올라가시고 포로들과 예물을 받으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원래 시편의 장면에서는 높이 올라간 승리자가 선물을 받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에서는 선물을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상 차이가 아니라 동작의 방향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인용되었는지는 논의가 있지만, 에베소서가 이 시편을 사용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높이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선물을 주시는 분은 단순히 공동체에 필요한 일을 나누어 맡기는 관리자가 아니십니다. 죽음과 악한 권세를 이기시고 높아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에 필요한 선물을 주십니다.

올라가신 분이 먼저 내려가셨습니다

그런데 「올라가셨다」는 말은 그분이 아래에 있는 이 땅으로 내려오시기도 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에베소서 4:9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유명한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이 땅」으로 옮긴 원문의 표현이 어디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일과 이 땅에서의 삶을 가리킨다는 해석으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가 모든 하늘보다 더 높이 올라가셨다고 봅니다. 두루새김의 「아래에 있는 이 땅」은 높은 하늘과 대비되는 이 땅으로 읽는 이 해석을 따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내려가신 일을 가리킨다는 해석으로, 원문의 표현을 땅 아래의 깊은 영역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어의 속격 구조가 「땅에 속한 낮은 곳」과 「낮은 곳 곧 땅」을 모두 허용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두 해석 모두 지지를 받아 왔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바울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내려오신 분과 올라가신 분이 같은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내려오신 그분이 바로 모든 하늘보다 더 높이 올라가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가득 채우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10 · 두루새김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동하신 길을 상세하게 그리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높아지심이 「모든 것을 가득 채우시려는」 예수님의 일과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교회에 주어진 선물로 돌아옵니다. 모든 것을 가득 채우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들을 주셨습니다.

이 연결을 놓치면 다음의 직분 목록을 교회 조직에 관한 독립적인 규정으로만 읽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 목록은 높아지신 예수님께서 지금 자신의 몸을 어떻게 세우시는지 보여 주는 설명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의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에는 선물을 받았다는 표현이 있지만, 에베소서 4:8은 「선물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승리자가 조공을 받은 뒤 그것을 백성에게 나누어 준다는 시편 전체의 의미를 바탕으로 해석했다는 견해가 있고, 선물을 받는 표현을 주는 표현으로 바꾸어 설명하던 유대교 해석 전통과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다만 어느 설명이 인용이 만들어진 과정을 정확히 밝혀 주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것은 직책만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4:11–12 본문 →

그분은 어떤 사람들을 사도로, 어떤 사람들을 예언자로, 어떤 사람들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또 어떤 사람들을 목자와 교사로 주셨습니다.에베소서 4:11 · 두루새김

사람들을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문장은 사도라는 직책이나 예언의 능력 같은 추상적인 기능만 나열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을」이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는 7절에서 각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졌다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선물은 개인의 소유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사용되도록 주어집니다.

사도, 예언자, 복음을 전하는 사람, 목자와 교사

사도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의 기초를 놓는 일과 연결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공동체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며, 앞의 2:20과 3:5에서 언급한 예언자들과의 연결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널리 선포하는 사람들로, 사도행전 21:8에서 빌립도 그렇게 불립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목자와 교사」는 원문에서 특별히 가까운 관계로 묶여 있습니다. 목자는 단순히 공동체의 행정을 관리하거나 사람들을 통제하는 존재로만 소개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돌보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록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사람들을 주셨을까요?

지도자들이 모든 일을 하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성도들을 준비시켜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12 · 두루새김

사도와 예언자와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목자와 교사가 주어진 목적은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몇몇 사람에게 역할을 주시고 나머지 성도들이 그들의 활동을 구경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도들을 준비시켜 몸 전체가 섬김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교회의 성장은 소수의 뛰어난 지도자만이 감당하는 일이 아니라, 각 지체가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 몸 전체가 자라는 일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역할을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역할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 필요한 섬김을 감당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성공은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일이 집중되는가가 아니라,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고 자기 몫의 섬김을 감당하게 되는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앞의 역할들이 각각 관사를 가지고 등장하는 반면, 「목자」와 「교사」는 하나의 관사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두 표현을 사실상 하나의 집단으로 보는 해석이 있고,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완전히 같은 범주일 필요는 없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문법만으로 두 역할이 모든 경우에 같은 사람들에게 속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둘이 특별히 가깝게 제시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 12절의 그리스어 문장에는 목적을 나타내는 세 표현이 이어지며 그 문법적 관계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지만, 성도들을 준비시켜 섬김에 참여하게 한다는 읽기가 문맥과 잘 어울립니다.

교회의 목표는 어린아이를 벗어나 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16 본문 →

이 일은 우리 모두가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에서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걸맞게 성숙해질 때까지 이어집니다.에베소서 4:13 · 두루새김

여기서 3절의 질문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미 하나 된 공동체가 왜 다시 하나 됨에 이르러야 할까요?

두 절은 같은 표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의 하나 됨은 성도들이 이미 공유하는 영적 현실이고, 13절의 하나 됨은 그 현실 안에서 공동체가 도달해야 할 성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미 한 몸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함께 알고 믿으며 그 몸에 어울리게 자라나는 일은 계속됩니다.

「온전한 사람」은 누구인가

「온전한 사람」(ἀνήρ)의 「사람」은 원문에서 단수로, 성숙한 한 사람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완벽한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만 읽으면 문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합니다. 앞뒤에서 예수님의 몸 전체가 자라는 일을 이야기하므로, 공동체 전체가 예수님 안에서 성숙한 하나의 존재로 자라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2:15의 하나의 새사람과도 연결됩니다. 2:15에서는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두 집단을 하나의 새사람으로 지으시는 일이 강조되고, 여기서는 그렇게 이루어진 공동체가 성숙한 사람의 상태에 이르는 일이 강조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아직 성장해야 합니다.

성숙의 기준은 예수님의 충만함입니다

「성숙해질」로 풀어 옮긴 원문의 헬리키아(ἡλικία)는 문맥에 따라 신체의 키나 연령, 성숙의 정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몸의 성장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원문은 키가 자라는 모습을 통하여 공동체의 성숙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기만 커지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성장의 기준이 「그리스도의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을 기준으로 성숙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시고 무엇을 이루셨는지가 그 기준입니다.

왜 어린아이처럼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이런 사람들을 주신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온갖 가르침의 바람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임수와 잘못된 길로 이끄는 교묘한 꾀에 넘어가지 않고,에베소서 4:14 · 두루새김

바울은 어린아이와 배의 모습을 결합합니다. 원문에는 물결에 흔들리는 모습도 함께 나타납니다. 「어린아이」는 실제 어린이들의 가치가 낮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분별력이 충분히 자라지 못한 상태를 비유합니다.

바울은 모든 새로운 가르침을 무조건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와 교묘한 꾀를 경계합니다. 「속임수」(κυβεία)로 옮긴 말은 주사위 놀이와 관련된 말로, 문맥에서는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의 교활한 수단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자라야 하는 이유는 지식이 많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짓 가르침에 대응하는 방법에 또 하나의 요소를 붙입니다. 사랑입니다.

진리를 말하되 사랑 안에서

오히려 사랑 안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며 모든 면에서 자라,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15 · 두루새김

「진실하게 살아가며」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알레테우온테스(ἀληθεύω)입니다. 참된 내용을 말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진실하게 행동하고 진리를 실천한다는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6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의미가 뚜렷하지만, 여기서는 바로 앞의 속임수와 교묘한 꾀에 대조되는 진실한 삶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의 「진실하게 살아가며」는 넓은 의미를 담으며, 그 안에는 25절과 29절로 이어질 말의 진실성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진실한 삶은 반드시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모욕하거나 해치는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방치하거나 참된 것을 감출 수도 없습니다.

바울에게 진리는 사랑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하고, 사랑 역시 진리를 떠나서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몸이 어떻게 자라는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몸이 마디마디를 통해 필요한 것을 공급받으며 서로 맞물려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하여 각 부분이 제 역할을 하는 대로 몸이 자라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에베소서 4:16 · 두루새김

이 절은 에베소서 4장 전반부의 결론입니다. 여기에는 머리이신 예수님, 각 부분을 연결하는 마디들, 그리고 제 역할을 하는 각 지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몸은 머리이신 예수님에게서 자라지만, 그 성장은 각 지체가 자기 몫을 감당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몸의 모든 부분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 부분은 몸 전체의 성장에 참여합니다. 7절에서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선물을 주신 이유도 경쟁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면서 몸 전체가 자라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는 교회가 예수님 없이 스스로 성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몸을 세우시는 방식이 각 지체의 참여를 통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외부에서 완성된 물건처럼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고 함께 일하면서 성장하는 몸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몸에 속한 사람들이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부터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충만함」은 이 편지에서 거듭 나오는 말입니다. 1:23에서는 교회가 예수님의 충만함으로 묘사되었고, 3:19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에 이르도록 채워지기를 구했습니다. 4:13에서는 예수님의 충만함이 공동체의 성숙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나타납니다. 세 구절의 문법과 강조점은 같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교회의 생명과 완성에 결정적인 분이시라는 사실은 일관됩니다.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것은 이전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다

에베소서 4:17–24 본문 →

그러므로 나는 주 안에서 엄숙히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헛된 생각을 따라 사는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에베소서 4:17 · 두루새김

1절에서는 부르심에 어울리게 살아가라고 권했고, 17절에서는 이전과 같이 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자리에 모두 「걷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4장의 앞뒤를 묶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상당 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방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민족적 정체성과 삶의 방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자신의 민족적 배경을 부정하고 유대인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의 방식, 곧 「헛된 생각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어지는 절의 어두워진 생각과 굳은 마음에 대한 표현들을 모든 비유대인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전에 속했던 삶의 질서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배우게 된 새로운 삶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 대비의 중심은 민족적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그들은 생각이 어두워져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4:18 · 두루새김

생각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잘못된 삶을 단순히 규칙을 어기는 행동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그 행동을 만들어 내는 생각과 욕망의 상태까지 살펴봅니다. 생각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높은 교육 수준을 가졌더라도 하나님과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라는 말도 아직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고, 마음이 굳어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19절은 그런 상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제멋대로 사는 데 자신을 내맡겼고, 욕심을 부리며 온갖 더러운 일을 일삼고 있습니다.에베소서 4:19 · 두루새김

본문은 사람들이 외부의 힘에 의해 수동적으로 끌려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죄는 잘못된 행동의 결과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어떤 욕망에 내맡기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20절에서 바울은 이 설명을 갑자기 중단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에베소서 4:20 · 두루새김

그리스도에 관하여 배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웠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언제 살았고 무엇을 했으며 어떤 가르침을 전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에서도 그리스도가 배움의 직접적인 대상입니다. 성도들이 배운 것은 추상적인 윤리 체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말입니다. 그 가르침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따른 것입니다.에베소서 4:21 · 두루새김

「그분의 말씀을 듣고」는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실 때 직접 찾아가 말씀을 들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자주 등장하는 이 편지에서 바울은 여기서 「예수 안에 있는 진리」라고 말합니다. 진리가 막연한 종교적 이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진리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사실과 이전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일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다

그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속한 옛사람을 벗어 버리십시오. 옛사람은 여러분을 속이는 욕심을 따라 썩어 갑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된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새사람은 진리에 따른 바름과 거룩함을 지닌 사람입니다.에베소서 4:22–24 · 두루새김

옷을 벗고 입는 이 이미지를 나쁜 습관 몇 가지를 버리고 좋은 습관 몇 가지를 갖는 일로만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대비합니다. 한쪽은 속임과 썩어 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닮은 바름과 거룩함으로 설명됩니다.

새사람이 「창조된」 존재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존재에 어울리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세 동사는 모두 가르침에 매달려 있다

「벗어 버리십시오」, 「새로워져야 합니다」, 「입으십시오」에 해당하는 원문의 세 동사는 각각 독립적인 명령이 아니라, 21절의 「가르침을 받았다면」에 연결되어 성도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설명합니다. 그래서 두루새김은 「그 가르침은 이렇습니다」라고 먼저 밝힌 뒤 그 내용을 따라야 할 삶의 방향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이 동사들이 이전에 받은 가르침의 요청을 전하는지, 이미 일어난 변화를 설명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상의 차이가 있지만, 두 읽기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배우게 된 삶이 이전의 삶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새로워지는 곳은 생각과 마음이다

23절의 「생각과 마음」은 원문의 다소 낯선 「생각의 영」을 풀어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영」이 사람의 내적인 성향을 가리키는지, 성령과 관련된 새로움의 영역을 가리키는지에 관해 견해가 갈리고, 원문은 이 표현만으로 그 의미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삶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고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각의 방식 자체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옛사람을 벗는 것과 새사람을 입는 것 사이에 놓인 「새로워져야 합니다」는 원문에서 지속되는 새로움의 과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과거 어느 시점에 신분만 바뀌었다는 말로 끝나지 않고, 그 변화가 현재의 생각과 삶에서 계속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새사람은 창조 이야기와 연결된다

24절의 「하나님을 닮도록」은 창세기 1:26–27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베소서는 창조의 언어를 새로운 삶에 적용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는 독립적인 이상형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바름과 거룩함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 모습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울은 다음 절부터 거짓말, 분노, 도둑질, 말, 헐뜯음, 용서라는 일상적인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새로운 창조는 일상의 가장 구체적인 자리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2–24절의 세 동사는 원문에서 모두 부정사이며, 그중 「새로워져야」는 현재형 부정사입니다. 그래서 세 동사를 각각 독립적인 명령으로 분리하면 문장 구조가 달라집니다. 23절은 로마서 12:2에서 생각이 새로워짐으로써 변화된다는 표현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또 창세기의 본래 문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특별한 지위와 책임을 부여받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이유 — 우리는 서로 한 몸을 이루는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25 본문 →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을 이루는 부분들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4:25 · 두루새김

25절에서는 원문에도 실제 명령형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거짓말을 하면 벌을 받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거짓말이 개인의 품격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몸의 이미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명령의 근거가 됩니다.

몸의 부분들이 서로를 속인다면

몸의 각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서로 연결된 부분들이 거짓된 정보를 주고받는다면 몸 전체가 올바르게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이유는 개인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진실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동체를 해치는 것은 거짓말만이 아닙니다.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노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음 절에서 분노를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절은 스가랴 8:16의 표현을 직접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서에서 하나님은 포로 생활 이후 회복될 공동체에 서로 진실을 말하고 성문에서 진실하고 평화로운 재판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에베소서 4:25는 그 명령의 언어를 가져오면서, 서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로 설명합니다. 구약에서 회복된 공동체에 요구되었던 진실함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운 근거를 얻습니다.

화가 났을 때 죄짓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베소서 4:26–27 본문 →

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기 전에 화를 푸십시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에베소서 4:26–2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분노를 무조건 금지하는 말씀처럼 읽히기도 하고, 어떤 분노는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말씀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는 시편에서 온 말이다

이 표현은 시편 4:4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처음부터 분노를 권장하려고 이 말을 사용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4:26의 직접적인 관심은 분노의 정당성을 일반적으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죄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 해가 지기 전에 노여움을 다루어야 하는가

「해가 지기 전에 화를 푸십시오」는 분노를 오래 붙들고 있지 말라는 요청입니다. 모든 갈등을 반드시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는 문자적인 시간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잡한 갈등은 하루 만에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분노를 계속 품고 있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관계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는 태도입니다.

분노는 처음에는 어떤 사건에 대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노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 상대방의 모든 행동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과거의 잘못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마저 차단할 수 있습니다.

「틈」은 장소나 기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분노를 계속 품고 있는 것이 악한 세력에게 활동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 반드시 악한 영이 그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분노가 공동체를 해치는 죄로 발전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몸의 부분들이 서로를 해치기 시작하면 몸 전체가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분노를 다루는 일은 단순한 감정 조절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지키는 일과 관련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시편 4:4에서는 떨거나 동요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가 사용되었지만, 칠십인역에서는 분노를 나타내는 동사로 번역되었고 에베소서의 그리스어 표현은 그 언어를 따릅니다. 어떤 분노가 정당한지는 다른 본문들과 함께 더 넓게 논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보시고 노여워하신 마가복음 3:5가 한 예입니다.

도둑질하던 손이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 되다

에베소서 4:28 본문 →

도둑질하는 사람은 더 이상 도둑질하지 말고, 오히려 자기 손으로 좋은 일을 하며 수고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에베소서 4:28 · 두루새김

도둑질하던 사람에게 도둑질을 멈추라는 데까지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뜻밖입니다.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을 마련하기 위해 수고하라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가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멈추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행동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손의 목적이 달라진다

이 구절을 단순히 성실하게 일하라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읽으면 중요한 점을 놓칩니다. 일의 의미가 개인의 생존과 소득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보는 일과 연결됩니다. 4장 앞부분에서 각 부분이 몸 전체를 위해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 내용이 구체적인 일상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새사람의 삶은 단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윤리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멈추는 것과 함께, 그 자리를 새로운 선한 행동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해로운 말과 세우는 말 — 입으로 몸을 자라게 할 수 있는가

에베소서 4:29 본문 →

어떤 해로운 말도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때의 필요에 맞게 사람을 세워 주는 좋은 말을 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십시오.에베소서 4:29 · 두루새김

「해로운 말」(σαπρός)에 쓰인 그리스어는 썩거나 부패하여 쓸모없어진 것을 가리키는 말로, 마태복음 7:17–18에서는 썩은 나무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그 표현이 말에 적용됩니다. 말도 썩을 수 있다는 이미지입니다.

말이 해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해로운 말은 욕설이나 노골적으로 저속한 표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문맥에서 반대되는 말이 「사람을 세워 주는 좋은 말」이므로, 다른 사람을 해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말은 해로운 말의 범위 안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중한 말이라도 사람을 속이거나 헐뜯거나 모욕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공동체를 세우는 목적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좋은 말은 무조건 듣기 좋은 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사랑 안에서 진실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했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때로 상대방에게 불편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상대방을 세우기 위한 것인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말이 유익을 줄 수 있다는 놀라운 표현

「유익이 되게 하십시오」(χάρις)의 자리에는 원문에서 「은혜」라는 표현이 쓰이며, 두루새김은 이를 듣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말로 풀어 옮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제 성도들이 하는 말도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말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와 동일한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 부분이 서로 공급하는 것에는 물질적인 도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을 낙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실하고 적절한 말은 다른 사람이 다시 일어서고 자라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몸은 각 부분이 필요한 것을 공급할 때 자라고, 그 공급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통로 가운데 하나가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들 사이의 말을 다루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성령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이유

에베소서 4:30 본문 →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해 성령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를 받았습니다.에베소서 4:30 · 두루새김

바울은 지금까지 거짓말과 분노와 도둑질과 해로운 말을 경계했습니다. 이제 이런 삶이 단지 사람들 사이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슬퍼하신다는 말

「슬프게 하지」(λυπέω)에 쓰인 동사는 슬픔이나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단순히 인격이 없는 능력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성령과 성도들의 삶 사이에 관계적인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표현 하나만으로 성령의 감정이 인간의 감정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도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성령과의 관계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속량의 날을 위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를 받았다

30절 후반부는 성도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들인지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를 받았고, 그 표시는 「속량의 날」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완성될 구원을 향해 살아가도록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잘못된 말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즉시 떠나가 버리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 먼저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그 관계에 어울리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관계는 혼자만의 마음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뒤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는 삶은 다른 사람을 향한 말과 행동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단락을 마무리하면서 버려야 할 것과 갖추어야 할 것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절은 이사야 63:10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사야 63장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돌보신 일을 회상하지만, 이스라엘은 반역했고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는 구원을 받은 백성이 그 은혜에 어울리게 응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에베소서 4:30에는 직접적인 인용 표시가 없지만,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과 그분의 성령 사이의 관계라는 점에서 분명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독한 마음을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기다

에베소서 4:31–32 본문 →

독한 마음과 격한 분노와 노여움, 고함과 헐뜯음, 그리고 온갖 악한 마음을 모두 버리십시오.에베소서 4:31 · 두루새김

이 목록에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적대감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흐름이 보입니다. 독한 마음은 오래 남아 있는 원망과 적대감을, 격한 분노와 노여움은 그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는 상태를, 고함과 헐뜯음은 그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단어들이 반드시 한 단계씩 진행되는 과정을 설명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바울이 마음속의 태도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함께 언급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공동체를 해치는 일은 겉으로 드러난 폭언이나 다툼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품고 있는 적대감과 원망도 관계를 해칠 수 있기에 바울은 그것들을 「모두 버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부정적인 것을 없애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에베소서 4:32 · 두루새김

불쌍히 여긴다는 말

「불쌍히 여기십시오」(εὔσπλαγχνος)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내장을 나타내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깊은 감정과 연민을 몸의 내부와 연결하여 표현하곤 했고, 한국어에서도 「속이 깊다」거나 「속이 따뜻하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 되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바울은 바로 뒤에서 그 태도가 서로 용서하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용서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바울은 서로 용서하라고 요청하면서 그 근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에 둡니다.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나님께 용서받는다는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으므로 그 용서를 받은 사람답게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χαρίζομαι)에 해당하는 동사는 은혜를 뜻하는 그리스어와 같은 어근으로, 어떤 것을 거저 주는 일과 잘못을 용서하는 일을 모두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잊어버리는 마음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물론 용서가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없애거나, 관계를 즉시 이전 상태로 회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도 그러한 세부적인 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직접 요청하는 것은 성도들이 독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계속 품는 대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대하신 방식을 기억하며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는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32절의 원문에서 명령형은 「되라」는 동사 하나이고, 「용서하십시오」에 해당하는 표현은 분사입니다. 따라서 원문은 친절한 사람이 되라는 요청과 용서하라는 명령을 별개로 나열하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에게 친절하고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에 용서하는 태도를 연결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십시오」와 「서로 용서하십시오」로 나누어 풀어 옮겼습니다. 용서는 친절한 사람이 되는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맺으며 — 한 몸이 자라는 소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다

에베소서 4:1–32 본문 →

바울은 처음에 겸손하고 온화하게 행동하며 오래 참고 서로를 받아 주라고 권했고, 마지막에는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고 권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선물을 주시고, 각 부분이 제 역할을 하며, 몸 전체가 사랑 안에서 자라나는 설명이 놓여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루신 하나 됨은 이미 주어졌지만, 그 하나 됨은 그리스도께 받은 것을 가지고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지켜지고 자라 갑니다.

그래서 성숙한 교회는 아무도 실수하지 않고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 공동체라기보다, 갈등 속에서도 자신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서로를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마침내 바울의 시선은 사람들의 손과 입에 머뭅니다.

도둑질하던 손은 이제 수고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던 입에서는 이제 그 사람을 세워 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서로에게 독한 마음을 품던 사람들은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높이 올라가셔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몇몇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몸은 살아 있습니다.

마디마디가 연결되고, 각 부분이 움직이며, 필요한 것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몸의 각 부분은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말을 건네며,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 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