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부르심에 맞는 삶
한 몸을 자라게 하는 서로 다른 지체
에베소서 4장에는 흥미로운 긴장이 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성도들에게 「평화라는 매는 줄로 영의 하나됨을 지키기에 힘쓰면서」 살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조금 뒤인 13절에서는 「우리가 다 믿음에서, 또 하나님의 아들을 깨달아 앎에서 하나됨에 이르고」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미 있는 하나 됨을 지키라고 하고, 뒤에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하나 됨에 이르러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 됨은 이미 주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앞으로 이루어야 할 것일까요?
바울에게 교회의 하나 됨은 사람들이 서로 잘 지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한 분의 주님, 한 영, 한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라는 사실과 하나 된 몸답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한 몸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할 지체들이 오히려 서로를 해칠 수도 있고, 진리를 말해야 할 입에서 거짓과 헐뜯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공동체에 하나가 되라고 권하면서, 그 하나 됨을 만들어 내신 분이 누구인지 먼저 보여 줍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하나 됨을 이루시는 방법은 모든 사람을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선물을 주십니다. 한 분에게서 여러 선물이 나오고, 그 선물을 받은 지체들이 각자 자기 몫을 감당할 때 하나의 몸이 자랍니다. 이렇게 에베소서 4장은 하나 됨에서 다양성으로, 다양성에서 성장으로, 성장에서 일상의 말과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마지막에 이르면 교회의 하나 됨은 거대한 신학적 개념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자기 손으로 번 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지,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의 문제가 됩니다.
부르심에 걸맞게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사람인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걸맞게 걸으라고 권합니다.에베소서 4:1 · 본디새김
바울은 다시 자신을 「갇힌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지 않고, 그가 권하는 내용에 시선을 모읍니다. 문장의 중심은 「부르심에 걸맞게 걸으라」는 요청입니다.
걸음의 기준은 이미 받은 부르심입니다
여기서 「걸으라」는 표현은 일상생활 전체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순서가 반대입니다.
이미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걸맞게 걸으라는 것입니다. 「걸맞게」는 어떤 가치나 지위에 합당하게, 그것과 어울리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요청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자격을 갖추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부르심과 실제 삶 사이에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나 놀라운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더없는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너그러이 받아 주며, 평화라는 매는 줄로 영의 하나됨을 지키기에 힘쓰면서 말입니다.에베소서 4:2–3 · 본디새김
이것들은 개인의 성품을 아름답게 만드는 덕목이기도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태도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판단을 하고 같은 속도로 성장한다면 서로를 오래 참아야 할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오래 참음과 너그러이 받아 줌을 요청한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 실제적인 차이와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하나 됨은 차이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차이가 존재하는 가운데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겸손과 온유는 왜 필요한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겸손을 나타내는 일부 표현은 낮은 신분이나 비굴함과 연결되어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설명하는 중요한 덕목으로 등장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겸손은 자신이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다른 지체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온유 역시 힘이 없어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의 힘이나 권리를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성숙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뒤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려면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참지 못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연결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갇힌 사람이 말하는 「매는 줄」
바울은 자신을 구속하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지만,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결속은 강제로 묶이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들을 묶는 것은 평화입니다.
또한 바울은 「영의 하나됨을 만들어 내라」고 말하지 않고 「지키기에 힘쓰라」고 합니다. 지키고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만들어 내지 않은 하나 됨을 성도들이 지켜야 합니다.
교회의 하나 됨이 사람들의 합의에만 근거한다면, 합의가 깨지는 순간 하나 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미 한 분의 하나님께 속하고 한 영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 관계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근거를 바울은 곧이어 일곱 번의 「하나」로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매는 줄」의 그리스어 쉰데스모스는 묶고 결속하는 것을 가리키며, 1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갇힌 사람」이라고 부를 때 사용한 단어와 어근상 연결됩니다. 갇힌 사람을 묶어 두는 것과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이 같은 어근의 언어로 표현된 셈입니다. 이 대조가 의도적인 언어유희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두 표현을 나란히 놓으면 뜻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의 「하나」 — 교회의 하나 됨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러분도 그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듯이, 몸도 하나요 영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며,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일하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에베소서 4:4–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마치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처음에는 몸과 영과 소망을, 그다음에는 주님과 믿음과 세례를, 마지막에는 모두의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을 말합니다. 영과 주님과 아버지가 차례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는 훗날 삼위일체 신앙고백에서 발전될 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여기서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식화하고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관심은 교회가 하나인 근거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한 몸이라는 말은 먼저 한 영이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교회가 한 몸이라는 선언은 단지 여러 사람이 비슷한 신념을 공유한다는 의미보다 깊습니다. 한 영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그 관계 때문에 한 몸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배경이나 현재의 형편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 됨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부르심과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
「주님도 한 분」이라는 선언은 신앙 공동체를 결정적으로 규정합니다. 성도들에게 서로 다른 여러 주인이 있어서 각자 별도의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분의 주님께 속합니다.
「한 믿음」은 모든 신자가 신앙의 모든 세부 사항을 똑같이 이해한다는 뜻으로 좁히기 어렵고, 예수님을 향한 공통의 믿음과 그 믿음의 내용을 함께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한 세례」는 그 믿음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일이 공적으로 표시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한 영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 세례와 연결됩니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근거는 어느 사람이 더 뛰어난가가 아니라, 그들 모두가 한 분의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하나님, 모두의 아버지
하나님도 한 분이시며,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일하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에베소서 4:6 · 본디새김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십니다. 그러나 세상과 아무 관계 없이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해 일하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공동체의 하나 됨에 대한 최종적인 근거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그런데」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하나라는 말을 일곱 번 반복한 바울이 이제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 됨과 서로 다름은 충돌하지 않을까요?
조금 더 깊이
「모든 것」의 범위를 정확히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는 문맥과 사본의 차이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바로 앞에서 한 몸을 이루는 성도들에 관하여 말했으므로, 공동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직접적인 초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모든 존재 안에 같은 방식으로 내재하신다는 철학적 주장으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 단락은 여호와야훼가 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신명기 6:4의 이스라엘 신앙고백을 떠올리게 합니다.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주제적 연결입니다.
한 몸이지만 선물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하나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 은혜가 주어졌습니다.에베소서 4:7 · 본디새김
시선이 공동체 전체에서 각각의 사람에게로 이동합니다. 바울은 하나 됨을 이야기한 다음 개인의 차이를 지워 버리지 않고, 오히려 「우리 하나하나에게」 주어진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은혜가 주어지는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의 분량」입니다. 어떤 사람이 더 가치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한 선물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모두가 같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지만, 모두가 동일한 역할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지체가 같은 일을 할 때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지체가 같은 주님께 속하여 각자의 일을 할 때 드러납니다.
높이 올라가신 승리자가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사로잡힌 이들을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었다.」에베소서 4:8 · 본디새김
출처는 시편 68:18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이 시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승리하신 왕처럼 올라가시고 포로들과 예물을 받으십니다.
원래 시편의 장면에서는 높이 올라간 승리자가 선물을 받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에서는 선물을 주십니다.
동작의 방향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단순한 번역상 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가 이 시편을 사용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높이 올라가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선물을 주시는 분은 공동체에 필요한 일을 분배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죽음과 악한 권세를 이기시고 높아지신 분이십니다.
올라가신 분이 먼저 내려가셨습니다
그런데 「올라갔다」라는 말은 그분이 땅의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도 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에베소서 4:9 · 본디새김
「땅의 더 낮은 곳」이 어디를 가리키는가는 유명한 해석상의 갈림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지상에서의 삶, 곧 높은 하늘과 대비되는 이 땅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죽은 자들의 세계, 곧 땅 아래의 깊은 영역에 내려가신 일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그리스어의 속격 구조는 「땅에 속한 낮은 곳」으로도 「낮은 곳 곧 땅」으로도 읽힐 수 있어 두 가능성을 모두 허용하고, 역사적으로 두 해석 모두 지지를 받아 왔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바울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내려가신 분과 올라가신 분이 같은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내려가신 그분이 곧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모든 하늘 위로 올라가신 분입니다.에베소서 4:10 · 본디새김
중요한 것은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그리는 일이 아니라, 높아지심이 만물을 향한 그분의 사역과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분의 일을 이야기한 뒤, 다시 교회에 주어진 선물로 돌아옵니다.
이 연결을 놓치면 다음의 직분 목록을 교회 조직에 관한 독립적인 규정으로만 읽게 됩니다. 바울에게 이 목록은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자신의 몸을 어떻게 세우시는지 보여 주는 설명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의 히브리어 본문(히브리어 성경의 절 번호로는 68:19)과 칠십인역에는 선물을 「받았다」는 표현이 있지만, 에베소서 4:8은 「주었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인용되었는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승리자가 조공을 받은 뒤 그것을 백성에게 나누어 준다는 시편 전체의 의미를 바탕으로 해석했다는 견해가 있고, 선물을 받는 표현을 주는 표현으로 바꾸어 설명하던 유대교 해석 전통과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다만 어느 설명이 인용이 만들어진 과정을 정확히 재구성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것은 직책만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이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전하는 이로, 어떤 이들은 목자와 가르치는 이로 주셨습니다.에베소서 4:11 · 본디새김
사람들을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문장은 사도직이나 예언의 능력 같은 추상적인 기능만을 열거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이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그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7절에서 각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졌다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선물은 개인의 소유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사용되도록 주어집니다.
사도, 예언자, 복음 전하는 이, 목자와 가르치는 이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의 기초를 놓는 일과 연결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공동체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앞의 2:20과 3:5에서 언급한 예언자들과의 연결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이들은 복음을 널리 선포하는 사람들로, 사도행전 21:8에서 빌립이 「복음 전하는 이」로 불립니다.
마지막의 「목자와 가르치는 이」는 특별히 가까운 관계로 제시됩니다. 목자는 공동체의 행정을 관리하거나 사람들을 통제하는 존재로만 소개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돌보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록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왜 이런 사람들을 주셨을까요?
조금 더 깊이
앞의 역할들은 각각 관사를 가지고 등장하는 반면, 「목자」와 「가르치는 이」는 하나의 관사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 때문에 두 표현을 사실상 하나의 집단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고, 두 역할이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완전히 같은 범주일 필요는 없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리스어 문법만으로 두 역할이 모든 경우에 동일한 사람들에게 속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둘이 특별히 가까운 관계로 제시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도자들이 모든 일을 하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준비시켜 섬김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뜻에서입니다.에베소서 4:12 · 본디새김
사도와 예언자와 복음 전하는 이와 목자와 가르치는 이가 주어진 목적은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문장에는 목적을 나타내는 세 표현이 이어지며 그 정확한 문법적 관계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지만, 성도들을 준비시켜 섬김에 참여하게 한다는 읽기는 문맥과 잘 어울립니다.
몇몇 사람에게 역할을 주시고 나머지 성도들이 그들의 활동을 구경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성도들을 준비시켜 몸 전체가 섬김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교회의 성장은 소수의 뛰어난 지도자만이 감당하는 일이 아니라, 각 지체가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 몸 전체가 자라는 일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역할을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역할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합니다. 사람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필요한 섬김을 감당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성공은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일이 집중되는가가 아니라, 성도들이 자라서 자기 몫의 섬김을 감당하게 되는지로 가늠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교회의 성장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교회의 목표는 어린아이를 벗어나 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믿음에서, 또 하나님의 아들을 깨달아 앎에서 하나됨에 이르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맞는 키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그러합니다.에베소서 4:13 · 본디새김
여기서 3절의 질문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미 하나 된 공동체가 왜 다시 하나 됨에 이르러야 할까요? 3절의 하나 됨은 성도들이 이미 공유하는 영적 현실입니다. 13절의 하나 됨은 그 현실 안에서 공동체가 도달해야 할 성숙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이미 한 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함께 알고 믿으며, 그 몸에 합당하게 자라나는 일은 계속됩니다.
「온전한 사람」은 누구인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에서 「사람」은 단수로, 성숙한 한 사람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완벽한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만 읽으면 문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합니다. 앞뒤에서는 몸 전체가 자라는 일을 이야기하므로, 공동체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하나의 존재로 자라나는 모습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2:15의 「한 새사람」과도 연결됩니다. 다만 2:15에서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을 한 새사람으로 지으시는 일이, 여기서는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가 성숙한 사람의 상태에 이르는 일이 강조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아직 성장해야 합니다.
성숙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바울은 몸의 성장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키가 자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공동체의 성숙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기만 커지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키의 기준이 「그리스도의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
1:23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묘사되었고, 3:19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에 이르도록 채워지기를 구했습니다. 세 구절의 문법과 강조점은 같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생명과 완성에 결정적인 분이시라는 사실은 일관됩니다. 교회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을 기준으로 성숙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왜 어린아이처럼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게, 사람들의 속임수 속에서 또 헤매게 하는 술책을 꾀하는 간교함 속에서 물결에 흔들리고 온갖 가르침의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14 · 본디새김
바울은 어린아이와 배의 이미지를 결합해 성숙하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분별력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를 비유합니다.
바울은 모든 새로운 가르침을 무조건 의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속임수와 간교함입니다. 「속임수」는 주사위 놀이와 관련된 말로, 문맥에서는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의 교활한 수단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자라야 하는 이유는 지식이 많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짓 가르침에 대응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또 하나의 요소를 붙입니다. 사랑입니다.
진리를 말하되 사랑 안에서
도리어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하며 모든 면에서 자라 머리이신 그분, 곧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15 · 본디새김
「참된 말을 하며」(알레테우온테스)는 참된 내용을 말한다는 뜻으로도, 진실하게 행동하고 진리를 실천한다는 더 넓은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6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의미가 뚜렷하지만, 에베소서 4:15에서는 바로 앞의 속임수와 간교함에 대조되는 진실한 삶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참된 말을 하며」라는 번역은 말의 진실성에 초점을 두는데, 바울이 25절과 29절에서 공동체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계속 설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참된 말은 반드시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모욕하거나 파괴하는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방치하거나 참된 것을 감출 수도 없습니다.
몸이 어떻게 자라는가
그분에게서 온몸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마디마디를 통해 짜맞추어지고 함께 엮이며, 각 부분이 제 분량대로 활동함에 따라 몸이 자라 사랑 안에서 자기를 세워 갑니다.에베소서 4:16 · 본디새김
이 절은 에베소서 4장 전반부의 결론입니다.
여기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각 부분을 연결하는 마디들, 그리고 제 분량대로 활동하는 각 지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몸은 머리에게서 자라지만, 그 성장은 각 지체의 활동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몸의 모든 부분이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 부분은 몸 전체의 성장에 참여합니다.
7절에서 사람마다 다른 분량의 선물을 주신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경쟁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면서 몸 전체가 자라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몸이 자라 사랑 안에서 자기를 세워 갑니다」는 교회가 그리스도 없이 스스로 성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비롯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몸을 세우시는 방식이 각 지체의 참여를 통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몸에 속한 사람들이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부터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키」에 해당하는 헬리키아(ἡλικία)는 문맥에 따라 신체의 키나 연령, 성숙의 정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것은 이전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방 사람들이 자기 생각의 헛됨 속에서 걷는 것처럼 여러분이 더 이상 걷지 말라고 말하고 주 안에서 증언합니다.에베소서 4:17 · 본디새김
1절에서는 부르심에 걸맞게 걸으라고 권했고, 17절에서는 이전과 같이 걷지 말라고 말합니다. 두 표현이 4장의 앞뒤를 묶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상당 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이방 사람들이」 걷는 것처럼 걷지 말라고 말합니다.
민족적 정체성과 삶의 방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자신의 민족적 배경을 부정하고 유대인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어지는 절의 표현들을 모든 비유대인에 대한 객관적·보편적 성격 규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이 이전에 속했던 삶의 질서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배우게 된 새로운 삶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 대비의 중심은 민족적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생각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생각이 어두워졌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무지 때문이고 그들 마음이 굳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4:18 · 본디새김
바울은 잘못된 삶을 규칙을 어기는 행동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그 행동을 만들어 내는 인식과 욕망의 상태까지 살펴봅니다. 생각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가입니다.
여기서 무지는 아직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 상태만이 아니라, 마음이 굳어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들은 무디어져서 탐욕스럽게 온갖 더러움을 일삼으려고 자기를 방탕에 내주었습니다.에베소서 4:19 · 본디새김
본문은 사람들이 외부의 힘에 수동적으로 끌려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를 … 내주었습니다」. 죄는 잘못된 행동의 결과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어떤 욕망에 내어 주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20절에서 바울은 이 설명을 갑자기 중단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에베소서 4:20 · 본디새김
그리스도에 관하여 배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웠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웠다」고 말하며, 그리스어에서도 그리스도가 배움의 직접적인 대상입니다.
성도들이 배운 것은 추상적인 윤리 체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그분을 듣고, 예수 안에 진리가 있는 그대로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말입니다.에베소서 4:21 · 본디새김
「그분을 듣고」는 수신자들이 지상 사역을 직접 찾아가 들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고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진리가 막연한 종교적 이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사실과 이전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일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다
곧 여러분이 지난날의 처신에 속한 옛사람, 속임의 욕망을 따라 썩어 가는 그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생각의 영에서 새로워지고, 하나님을 본으로 하여 진리의 의와 거룩함으로 지어진 새사람을 입으라는 가르침입니다.에베소서 4:22–24 · 본디새김
옷을 벗고 입는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나쁜 습관 몇 가지를 버리고 좋은 습관 몇 가지를 갖는 일로만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속임의 욕망을 따라 썩어 가는」 옛사람과 「진리의 의와 거룩함으로 지어진」 새사람이라는 두 존재 방식을 대비합니다.
새사람이 「지어졌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존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세 동사는 모두 가르침에 매달려 있다
「벗어 버리고」(ἀποτίθημι), 「새로워지고」(ἀνανεόω), 「입으라」(ἐνδύω)에 해당하는 세 동사는 모두 부정사로, 21절의 「가르침을 받았다」에 연결되어 성도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 동사를 각각 독립적인 명령으로 분리하면 원문의 문장 구조가 달라집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야 할 삶의 방향이 담겨 있지만, 바울은 우선 그들이 이미 받은 가르침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부정사들이 이전에 받은 가르침의 요청을 전하는지, 이미 일어난 변화를 설명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배우게 된 삶이 이전의 삶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새로워지는 곳은 생각의 영이다
「생각의 영」이라는 결합은 다소 낯섭니다. 여기서 「영」이 인간의 내적 성향을 가리키는지, 거룩한 영과 관련된 새로움의 영역을 가리키는지에 관해 견해가 갈리며, 본문은 이 표현만으로 그 의미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운 삶이 외적인 행동을 수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각의 방식 자체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옛사람을 벗는 것과 새사람을 입는 것 사이에 놓인 「새로워지고」는 현재형 부정사로, 지속되는 새로움의 과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과거 어느 시점에 신분만 바뀌었다는 말로 끝나지 않고, 현재의 생각과 삶에서 계속 드러나야 합니다.
새사람은 창조 이야기와 연결된다
24절의 「하나님을 본으로 하여」는 창세기 1:26–27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특별한 지위와 책임을 부여받습니다. 에베소서는 그 창조의 언어를 새로운 삶에 적용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울은 다음 절부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거짓말, 분노, 도둑질, 말, 헐뜯음, 용서라는 일상적인 행동이 등장합니다.
새로운 창조는 일상의 가장 구체적인 자리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세 부정사는 각각 아포테스타이, 아나네우스타이, 엔뒤사스타이입니다. 23절의 「생각의 영에서 새로워지고」는 로마서 12:2에서 생각이 새로워짐으로써 변화된다는 표현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이유 — 우리는 서로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리를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4:25 · 본디새김
25절에서는 실제 명령형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거짓말을 하면 벌을 받기 때문이라고도, 개인의 품격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몸의 이미지가 윤리적 명령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몸의 지체가 서로를 속인다면
몸의 각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른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서로 연결된 지체들이 거짓된 정보를 주고받는다면 몸 전체가 올바르게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이유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진실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회복된 공동체에 요구되었던 진실함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운 근거를 얻습니다.
그런데 공동체를 해치는 것은 거짓말만이 아닙니다.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노가 생길 수 있습니다.
화가 났을 때 죄짓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노하되 죄짓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노여움을 품은 채로 해가 져서는 안 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에베소서 4:26–2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분노를 무조건 금지하는 말씀처럼 읽히기도 하고, 어떤 분노는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말씀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원문의 표현을 살펴보면 조금 더 복잡합니다.
「노하되 죄짓지 마십시오」는 시편에서 온 말이다
이 표현은 시편 4:4와 연결됩니다. 히브리어 시편에서는 떨거나 동요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가 사용되지만, 칠십인역에서는 분노를 나타내는 동사로 번역되었고, 에베소서는 그 언어를 따릅니다. 따라서 바울이 처음부터 분노를 권장하려고 이 말을 사용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노가 정당한지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보시고 노여워하신 마가복음 3:5 같은 다른 본문들과 함께 더 넓게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4:26의 직접적인 관심은 분노가 죄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 해가 지기 전에 노여움을 다루어야 하는가
「노여움을 품은 채로 해가 져서는 안 됩니다」는 분노를 오래 붙들고 있지 말라는 요청입니다. 모든 갈등을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는 문자적인 시간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분노를 계속 품고 있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관계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는 태도입니다.
분노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 상대방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과거의 잘못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마저 차단할 수 있습니다.
「틈」은 장소나 기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분노를 계속 품고 있는 것이 악한 세력에게 활동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 반드시 악한 영이 들어온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몸의 지체들이 서로를 해치기 시작하면 몸 전체가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분노를 다루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보존하는 일과 관련됩니다.
도둑질하던 손이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 되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더 이상 도둑질하지 말고, 도리어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나누어 줄 것을 가지도록 제 손으로 선한 일을 하며 수고해야 합니다.에베소서 4:28 · 본디새김
도둑질을 멈추라는 데까지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누어 줄 것을 가지도록 수고하라고 합니다.
도둑질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멈추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행동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손의 목적이 달라진다
이 구절을 성실하게 노동하라는 일반적인 교훈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점을 놓칩니다. 노동의 의미가 개인의 생존과 소득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보는 일과 연결됩니다. 4장 앞부분에서 각 지체가 몸 전체를 위해 자기 몫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 내용이 구체적인 일상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공동체의 윤리는 금지 명령만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멈추는 것과 함께, 그 자리를 새로운 선한 행동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썩은 말과 세우는 말 — 입으로 몸을 자라게 할 수 있는가
썩은 말은 무엇이든 여러분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듣는 이들에게 은혜를 주도록, 오직 세움이 필요한 곳을 세워 주는 선한 말만 나와야 합니다.에베소서 4:29 · 본디새김
「썩은」은 썩거나 부패하여 쓸모없어진 것을 가리키는 말로, 마태복음 7:17–18에서는 썩은 나무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그 표현이 말에 적용됩니다.
말도 썩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썩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썩은 말은 욕설이나 노골적으로 저속한 표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대되는 말이 「세움이 필요한 곳을 세워 주는 선한 말」이므로, 다른 사람을 해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말은 썩은 말의 범위 안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중한 말이라도 사람을 속이거나 헐뜯거나 모욕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공동체를 세우는 목적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선한 말은 무조건 듣기 좋은 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해야 한다고 했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때로 불편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상대방을 세우기 위한 것인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인지는 중요합니다.
말이 은혜를 줄 수 있다는 표현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제 성도들이 하는 말도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말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와 동일한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몸은 각 부분이 필요한 것을 공급할 때 자랍니다. 그 공급에는 물질적인 도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들 사이의 말을 다루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영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이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영으로 속량의 날에 이르도록 인침을 받았습니다.에베소서 4:30 · 본디새김
바울은 지금까지 거짓말과 분노와 도둑질과 해로운 말을 경계했습니다. 이제 이런 삶이 사람들 사이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영이 슬퍼하신다는 말
「슬프게 하다」는 슬픔이나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거룩한 영을 비인격적 능력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그 영과 성도들의 삶 사이에 관계적인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표현 하나만으로 거룩한 영의 감정이 인간의 감정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속량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 인침은 「속량의 날」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완성될 구원을 향해 살아가도록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잘못된 말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이 즉시 떠나가 버린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순서가 중요합니다.
거룩한 영을 받기 위해 먼저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그 관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혼자만의 내면생활이 아니라, 앞뒤에서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을 향한 말과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이제 바울은 이 단락을 마무리하면서 치워야 할 것과 갖추어야 할 것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쓴 마음을 치우고 속이 따뜻한 사람이 되다
온갖 쓴 마음과 격분과 노여움과 고함과 헐뜯음이 온갖 악함과 함께 여러분에게서 치워져야 합니다.에베소서 4:31 · 본디새김
이 목록에는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된 적대감이 점차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흐름이 보입니다. 쓴 마음은 오래 남아 있는 원망을, 격분과 노여움은 그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는 상태를, 고함과 헐뜯음은 그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단어들이 반드시 한 단계씩 진행되는 과정을 설명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바울이 내적인 태도와 외적인 행동을 함께 언급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자애롭고 속이 따뜻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며 말입니다.에베소서 4:32 · 본디새김
속이 따뜻하다는 말
「속이 따뜻한」은 내장을 나타내는 표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깊은 감정과 연민을 신체의 내부와 연결하여 표현하곤 했고, 한국어에서도 「속이 깊다」거나 「속이 따뜻하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됩니다. 바울은 바로 뒤에서 그 태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설명합니다.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나님께 용서받는다는 순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으므로, 그 용서를 받은 사람답게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며」에 해당하는 동사 카리조마이(χαρίζομαι)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와 같은 어근으로, 어떤 것을 거저 주는 일과 잘못을 용서하는 일을 모두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잊어버리는 심리적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물론 용서가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없애거나, 관계를 즉시 이전 상태로 회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도 그러한 세부적인 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직접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를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마지막 절의 명령은 하나다
32절에서 명령형은 「되십시오」이고, 「용서하며」는 분사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두 개의 별개 명령을 나열하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에게 자애롭고 속이 따뜻한 사람이 되라는 명령에 용서하는 태도가 연결된 구조입니다.
용서는 자애로운 사람이 되는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몸이 자라는 소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다
에베소서 4장은 하나라는 말이 일곱 번 반복되는 장면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된 공동체가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사도와 예언자, 복음 전하는 이와 목자와 가르치는 이, 제 분량대로 활동하는 각 지체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시선은 사람들의 생각과 욕망을 거쳐, 마침내 그들의 손과 입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의 물음이 여기서 닫힙니다. 영의 하나 됨은 이미 주어진 현실이고, 그 하나 됨에 걸맞은 성숙은 그리스도께 받은 것을 가지고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서로를 받아 주라고 권했고, 마지막에는 자애롭고 속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 서로 용서하라고 권합니다. 그 가운데에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선물을 주시고, 각 지체가 자기 몫을 감당하며, 몸 전체가 사랑 안에서 자라나는 설명이 놓여 있습니다.
그 선물은 몇몇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공급받으며, 「마디마디를 통해 짜맞추어지고 함께 엮이며」 자랍니다.
도둑질하던 손은 이제 수고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던 입에서는 이제 그 사람을 세워 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서로에게 쓴 마음을 품던 사람들은 자애롭고 속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몸의 지체들은 서로에게 은혜가 되는 말을 건네며,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 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