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2–3장 · 한 몸이 된 두 백성

갇힌 사람에게 맡겨진 신비

에베소서 3장은 이상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나 바울, 곧 이방 사람들인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힌 사람은 —」

바울은 자기 이야기를 꺼내다가 문장을 끝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기 시작하고, 그 설명은 13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14절에 이르러 처음과 똑같은 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처음에 시작한 이야기를 이제야 이어 가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기도하려다가 자기 사명에 관한 긴 설명을 끼워 넣었을까요?

그 단서를 1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갇힌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가 갇혀 있는 이유는 「이방 사람들인 여러분을 위하여」 예수님께 속한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투옥은 단순한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 위에 계시며, 하나님이 만물을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모으고 계신다면,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왜 감옥에 갇혀 있습니까?

에베소서 3장은 이 긴장을 피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감추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갇혀 있는 바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하늘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땅에서는 한 사람이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복음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가 하늘에까지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대조를 충분히 이해해야 마지막에 바울이 왜 무릎을 꿇고, 무엇을 구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13장 본문 읽기 →

기도를 멈추게 한 사명 — 바울은 누구의 죄수인가

에베소서 3:1–4 본문 →

이 때문에 나 바울, 곧 이방 사람들인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힌 사람은 —에베소서 3:1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을 사도나 교사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갇힌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표현 앞에는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라는 말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갇힌 사람, 곧 예수님께 속한 죄수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누가 그를 구금했는가에 관한 법률적 설명이 아닙니다. 바울은 세상의 권력에 의해 자유를 제한받고 있지만, 자신이 이 자리에 있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그 갇힘을 이방인 수신자들과 연결합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바울은 수신자들이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먼저 자신의 사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야기합니다.

은혜는 바울에게 맡겨진 일이 되었다

여러분을 위하여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맡아 전하는 일에 관해 정말 들었다면 말입니다.에베소서 3:2 · 본디새김

바울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그가 혼자 간직할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맡아 전하는 일」(οἰκονομία)로 옮긴 그리스어는 집안이나 재산을 관리하는 일에서 발전하여, 맡겨진 일을 운영하고 실행하는 책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10에서는 하나님께서 때가 다 차면 이루실 계획을 설명하는 데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계획을 알리고 섬기는 책임이 바울에게 맡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큰 계획과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사명이 연결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계획을 소유하거나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 계획을 맡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이나 뛰어난 통찰에서 이 사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곧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가 나에게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짧게 적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에베소서 3:3 · 본디새김

바울은 신비를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알려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종교적 지식을 스스로 연구하여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나의 깨달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에베소서 3:4 · 본디새김

바울이 받은 계시는 개인적인 비밀 경험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글로 전달되어 다른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이 검토할 수 없도록 감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비밀 지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이해되어야 할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신비가 정확히 무엇인지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21:27–29에는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체포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데려왔다고 주장하면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사도행전이 그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은 바울의 이방인 사역이 어떤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는지 보여 줍니다. 다만 에베소서 3:1 자체는 체포 장소나 구체적인 혐의를 밝히지 않으므로, 사도행전의 사건을 이 구절의 직접적인 배경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감추어졌던 신비 — 이방인이 단지 복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일

에베소서 3:5–6 본문 →

그 신비는 이제 영 안에서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드러난 것만큼은 다른 세대들에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에베소서 3:5 · 본디새김

이 절에서 바울은 「다른 세대들」과 「이제」라는 두 시대를 대비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하나님의 뜻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드러난 것만큼은」이라는 비교 표현은 이전 세대와 현재의 계시 사이에 정도와 방식의 차이가 있음을 나타낼 여지를 남깁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49: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종이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두 본문은 각각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종의 사명을 다루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일이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전망을 함께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베소서 3장이 말하는 신비는 이방인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처음 알려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신비의 정체가 밝혀지다

곧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받고 한 몸을 함께 이루며 약속에 함께 참여하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에베소서 3:6 · 본디새김

그리스어 원문은 세 개의 단어를 나란히 놓습니다.

· 함께 상속받는 이들

· 한 몸을 함께 이루는 이들

· 함께 참여하는 이들

세 단어는 모두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에서 나온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무언가를 조금 나누어 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상속과 몸과 약속이라는 세 영역이 모두 언급됩니다. 이방인에게 주어진 것은 부차적인 복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누리는 온전한 참여입니다.

그들은 누구와 함께 참여합니까? 직전 문맥에서 이방인들과 구별되던 이스라엘,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과 함께 참여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방인들은 별도 공동체를 이루어 독립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상속과 하나의 몸과 하나의 약속을 함께 누립니다.

6절 마지막의 표현은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이 새로운 관계는 민족적 정체성이 저절로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신비는 단순한 관용을 넘어선다

어떤 공동체가 외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혜택을 제공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호의가 곧 그들을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신비는 이보다 더 깊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베푸는 자비를 밖에서 받는 사람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같은 상속을 받고 같은 몸을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이스라엘의 역사가 의미를 잃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주셨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하여 예상보다 깊고 넓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신비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가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이 신비를 알리는 일을 자신에게 맡겨진 은혜라고 부르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을 설명하면서 다시 뜻밖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가장 작은 이보다 더 작은 사람 — 사명의 크기와 자신의 작음

에베소서 3:7–9 본문 →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그분의 힘이 이루어 내는 대로 나는 그 복음을 섬기는 이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3:7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고, 하나님의 힘이 일했으며, 그 결과 바울이 복음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섬기는 이」는 문맥에 따라 시중드는 사람이나 어떤 일을 맡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주인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오히려 8절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놀라울 만큼 낮은 위치에 놓습니다.

모든 성도 가운데 가장 작은 이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 이방 사람들에게 끝을 찾아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넉넉함을 복음으로 전하고,에베소서 3:8 · 본디새김

「가장 작은 이보다 더 작은」(ἐλάχιστος)은 최상급 표현에 비교급의 성격이 덧붙은 그리스어 형태를 살린 말입니다. 이미 가장 작다는 표현에 다시 더 작다는 의미가 붙었습니다. 문법적으로 다소 이례적인 이 형태를 단순히 겸손을 표현하는 상투적인 인사말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9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고 말하고, 디모데전서 1:13–15에서도 과거의 박해와 하나님의 자비가 연결됩니다. 그러나 3장 자체에서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표현의 무게는 지금 맡은 사명의 크기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의 대조에 있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사람보다 더 작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주어진 것은 「끝을 찾아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넉넉함」을 전하는 일입니다.

끝을 찾아낼 수 없는 넉넉함

「끝을 찾아낼 수 없는」(ἀνεξιχνίαστος)의 그리스어는 발자국이나 흔적을 따라 추적하는 것과 관련된 어근을 지닌 말로, 끝까지 찾아내거나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로마서 11:33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할 때 같은 계열의 표현이 사용됩니다.

사람이 어떤 길을 따라가며 그 끝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따라가도 그 길을 끝까지 추적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넉넉함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은혜는 인간이 쉽게 측정하고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한정된 재산이 아닙니다.

자신의 작음과 예수님의 넉넉함이 나란히 놓입니다.

사명의 중요성은 사역자의 위대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전하는 예수님의 넉넉함에서 나옵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계획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안에 오랜 시대부터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를 펼쳐 이루는 계획이 무엇인지 모두가 깨닫도록 밝히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3:9 · 본디새김

왜 바울은 감추어진 신비를 설명하면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언급했을까요? 이 표현은 신비의 범위가 특정 민족이나 한 시대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지역 신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뜻은 오랜 시대 동안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고, 이제 예수님 안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이 같은 상속과 몸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단지 공동체 운영 방식의 변화가 아닙니다. 만물의 창조주께서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사람들을 예수님 안에서 함께 부르고 계시고, 바울의 사명은 그 계획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 이르러 그 계획을 알아야 할 대상이 갑자기 넓어집니다.

지상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하늘의 통치들과 권세들까지 등장합니다.

교회가 하늘에 무엇을 보여 주는가

에베소서 3:10–11 본문 →

하늘에 속한 곳에 있는 통치들과 권세들에게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지가지로 무늬진 지혜가 이제 알려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3:10 · 본디새김

보통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과 천사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방향이 다릅니다. 하늘의 권세들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됩니다. 그 지혜가 드러나는 수단은 화려한 천상의 현상이나 거대한 자연의 기적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입니다.

가지가지로 무늬진 지혜

「가지가지로 무늬진」은 다양한 색과 무늬, 여러 가지 양상을 지닌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지혜를 단순히 매우 뛰어난 지혜라고 부르지 않고,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는 다채로운 지혜로 묘사합니다.

이 지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상속받고 한 몸을 이루는 일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민족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누리는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오랜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여 뛰어난 화해의 기술을 증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통하여 이전에 서로 분리되어 있던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통치들과 권세들은 누구인가

「통치들과 권세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들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천사적 권세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읽는 해석이 있고, 6:12에서 통치들과 권세들이 악한 영적 세력과 연결된다는 점을 근거로 예수님의 승리를 알게 되는 적대적 권세들이 중요하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1:21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통치와 권세 위에 계시고 6:12에서는 영적인 악의 세력과 싸우는 일이 언급되듯, 에베소서에서 이 표현은 한 종류의 존재만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3:10의 통치들과 권세들이 선한 존재들인지 악한 존재들인지, 또는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지 본문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정체를 완전히 규정하지 않아도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지혜를 하늘의 권세들에게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는 수단이 됩니다.

하늘의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알려지고 있는 바로 그 시대에, 그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권력의 크기만으로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10절이 교회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지혜와 동일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의 존재와 삶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를 드러낼 때, 그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가 알려집니다. 교회 자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배받거나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대들에 걸친 하나님의 뜻

시대들에 걸친 뜻, 곧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그 뜻을 따라 된 일입니다.에베소서 3:11 · 본디새김

「시대들에 걸친 뜻」은 오랜 시간에 걸친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냅니다. 이를 시대 이전부터 세워진 영원한 뜻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그 뜻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뒤늦게 고안하신 임시적인 해결책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목적의 일부입니다.

이제 바울은 처음에 이야기했던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는 여전히 감옥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은 달라져 있습니다.

갇혀 있지만 자유롭게 나아가는 사람

에베소서 3:12–13 본문 →

그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믿음을 통하여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와 나아갈 길을 확신 가운데 지니고 있습니다.에베소서 3:12 · 본디새김

갇혀 있는 사람이 자유와 나아갈 길에 관하여 말합니다.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는 두려움이나 위축 없이 말할 수 있는 자유와 담대함을, 「나아갈 길」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뜻합니다. 바울은 지상에서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고 있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가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감옥에 갇힌 현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실제로 고난을 겪고 있고, 다음 절에서 그 사실을 다시 언급합니다. 다만 자신의 외적인 상황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까지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인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인가

12절의 「그분의 믿음」은 문법적으로 두 방향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해석으로, 믿는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신뢰로 나아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 자신의 믿음 또는 신실하심을 통하여 나아간다는 해석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신실하게 순종하심으로 나아갈 길을 여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분의 믿음」이라는 번역은 예수님께 속한 믿음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두 가능성을 검토할 여지를 남깁니다. 어느 읽기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길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격을 증명하여 하나님 앞에 설 권리를 확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위한 나의 환난 가운데서 낙심하지 말기를 청합니다. 그 환난이 여러분의 영광입니다.에베소서 3:1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자기 고난을 수신자들의 영광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고난 자체가 언제나 영광스럽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사역을 증명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 때문에 환난을 겪고 있고, 그 사역을 통하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고난은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일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존귀한 지위와 관계가 있습니다. 고난이 선하다는 사실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라는 요청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역자가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바울이 갇힌 상황 속에서도 이방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제 바울은 처음에 시작하려던 기도를 마침내 이어 갑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그분의 믿음을 통하여」(디아 테스 피스테오스 아우투)를 어떻게 읽을지는 바울 서신의 여러 구절에서 논의되어 온 그리스어 소유격의 해석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 표현을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해석이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해석은 아닙니다.

무릎을 꿇는 바울 — 하늘과 땅의 모든 가문이 이름을 얻는 아버지 앞에서

에베소서 3:14–16 본문 →

이 때문에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에베소서 3:14 · 본디새김

1절의 「이 때문에」가 다시 등장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기도를 시작하려다가 자신의 사명을 설명했습니다. 수신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 은혜를 설명한 뒤, 바울은 이제 그 기도로 돌아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하기도 했으며, 무릎을 꿇는 자세는 간구와 경외를 표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하늘의 통치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알려진다고 말했지만, 그 권세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모든 가문이 이름을 얻는 아버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가문이 그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얻습니다.에베소서 3:15 · 본디새김

이 표현에는 한국어로 완전히 살리기 어려운 말놀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아버지」는 파테르(πατήρ)이고, 「가문」은 파트리아(πατριά)입니다. 두 단어는 같은 어근을 지니며, 가문이라는 이름이 아버지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가문」(파사 파트리아)은 관사가 없는 표현이므로 「모든 가문 각각」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하나의 거대한 가족을 이룬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도 있지만, 문법적으로는 각각의 가문이 하나님에게서 이름을 얻는다는 읽기가 더 직접적입니다.

하늘에 있는 가문은 천상의 존재들을 여러 집단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하늘과 땅에 걸친 하나님의 백성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그 가문들의 구성원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므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관계와 이름의 궁극적인 근원이신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인간의 가정 제도를 하나님께 확대하여 적용한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가 하나님께 근거한다는 방향으로 설명됩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위대하심을 고백한 뒤, 그는 수신자들이 강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힘을 구하는 것일까요?

속사람이 굳세어지기를

그분 영광의 넉넉함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이 힘으로 굳세어지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베소서 3:16 · 본디새김

바울은 수신자들이 자신 때문에 낙심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이제 그들이 무엇으로 굳세어져야 하는지 구합니다. 외적인 권세나 사회적 영향력이 아니라, 「속사람」이 굳세어지기를 구합니다.

이것을 인간의 내면이 육체보다 본질적으로 더 선하다는 철학적 구분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16에서도 바울은 겉사람이 쇠하여 가는 동안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로워지는 인간의 내적 존재를 나타냅니다.

이 굳세어짐은 단순한 심리적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 기준은 「그분 영광의 넉넉함」입니다. 기도의 근거가 인간의 가능성이나 의지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넉넉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으로 무엇을 하게 될까요? 더 강한 권세를 행사하거나 놀라운 일을 이루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자리 잡아 사신다는 말

에베소서 3:17 본문 →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 잡아 사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 터를 잡은 상태로,에베소서 3:17 · 본디새김

바울의 수신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아 사시기를 다시 기도할까요?

바울은 이미 그들이 예수님 안에 있으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처음 들어오시기를 구하는 말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 안에서 지속적이고 깊은 임재를 이루시기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잠깐 방문하는 것과 자리 잡아 사는 것

「자리 잡아 사시기를」(κατοικέω)은 거주하거나 머무른다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예수님의 임재는 예수님을 기억하거나 좋은 생각을 하는 일보다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들의 삶 안에 거하시며, 그들의 존재가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일을 가리킵니다.

17절의 마지막에는 「뿌리내리고」와 「터를 잡은」이라는 두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식물은 뿌리를 내림으로써 자라고, 건물은 견고한 터 위에 세워짐으로써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서로 다른 두 그림을 하나의 문장에 결합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성도가 수행해야 할 여러 미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뿌리를 내리고 견고하게 서는 자리로 제시됩니다. 이 사랑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인지, 성도들이 서로 실천하는 사랑인지 엄격하게 분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이 등장하고, 에베소서의 뒤에서는 성도들이 사랑 가운데 살아가도록 권면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임재는 특별한 종교적 감정이나 내적인 체험의 강도가 아니라, 사랑 안에 뿌리내린 삶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다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기도를 확장합니다. 사랑 안에 뿌리내린 사람들이 이제 어떤 것의 크기를 파악하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 무엇의 크기를 재려는가

에베소서 3:18 본문 →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무엇인지 파악할 힘을 얻고,에베소서 3:18 · 본디새김

바울은 네 가지 차원을 나열합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인가,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인가

원문에는 그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 읽기가 갈립니다. 바로 다음 절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킨다는 읽기, 바울이 지금까지 설명한 하나님의 신비와 지혜, 계획 전체의 광대함을 가리킨다는 읽기, 앞 장에서 묘사한 하나님의 성전의 규모와 연결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보는 읽기가 문맥상 강하지만, 이 차이 때문에 네 차원 각각에 고정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무엇의 크기를 가리켰든, 그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쉽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바울은 수신자들이 그 크기를 혼자 파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파악하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이 표현을 놓치면 3장의 기도를 개인적인 영적 체험에 관한 기도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동 참여를 설명한 뒤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이방인들도 함께 상속받고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신비의 크기를 깨닫는 일도 「모든 성도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이해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자기 혼자 깊은 지식을 소유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로 만드신 공동체 안에서 함께 깨닫는 일입니다. 사람들을 배제하고 자기만 특별한 지혜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이 기도의 방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그 기도는 더욱 역설적인 표현에 도달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는 읽기는 19절에서 바울이 「앎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구한다는 점에 기대며, 바로 앞뒤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신비와 계획 전체로 보는 읽기는 3장이 지금까지 설명해 온 내용에 기댑니다. 성전으로 보는 읽기는 바로 앞 장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지는 모습을 묘사했고,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건축물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 기댑니다. 너비는 모든 민족을 향한 사랑, 길이는 영원한 사랑, 높이는 하나님의 영광, 깊이는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지만, 본문이 네 차원에 각각 그런 의미를 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설명은 본문의 직접적인 뜻이라기보다 후대의 묵상적 적용에 가깝습니다.

앎을 넘어서는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

에베소서 3:19 본문 →

또 앎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힘도 얻기를 빕니다. 이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에 이르도록 채워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3:19 · 본디새김

알 수 없다는 뜻이라면 왜 알게 해 달라고 구할까요?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참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앎이 하나님의 사랑 전체를 완전히 포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함께 붙잡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하여 역사 속에 드러났고,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를 설명해 왔습니다. 그 사랑은 막연한 신비가 아니라 내용이 알려진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랑이지만, 우리가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더 깊이 알수록 그 사랑이 자신의 이해보다 크다는 사실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아는 지식과 그 사랑 앞에서 겸손해지는 태도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에 이르도록 채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19절의 마지막은 더욱 대담합니다. 앞에서는 교회를 예수님의 충만함과 연결했고, 이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에 이르도록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표현을 성도들이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가 되거나 신적인 본질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별이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충만함은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생명과 사랑으로 채워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16–19절의 기도 전체가 연결됩니다. 바울은 그들이 강해지기를 구했지만, 그 힘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거하시고, 수신자들이 사랑 안에 뿌리내리며, 모든 성도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능력이 강해질수록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구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힘입니다.

사랑과 충만함은 왜 연결되는가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상속받는 사람들로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러한 새로운 공동체가 가능하도록 하는 근거이고, 그 공동체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충만함에 이르는 일은 하나님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랑과 화해의 현실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본문은 이 과정을 측정 가능한 단계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큰 것을 구하면서도 기도를 끝내지 못합니다. 자신이 구한 것보다 더 큰 일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깨닫는 모든 것보다 더 넘치게

에베소서 3:20–21 본문 →

우리 안에서 일하는 그 힘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깨닫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넘치게 이루실 수 있는 분께,에베소서 3:20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 우리가 깨닫는 모든 것보다 더 큰 일을, 그것도 훨씬 더 넘치게 이루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훨씬 더 넘치게」로 옮긴 그리스어에(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는 넘어서고 풍성하게 남는다는 의미가 겹쳐 있어, 일반적인 정도의 말을 넘어서는 강조를 보여 줍니다.

무엇을 넘치게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인가

20절만 따로 읽으면 하나님이 인간이 원하는 모든 일을 상상보다 훨씬 크게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바울은 수신자들의 속사람이 굳세어지고, 예수님께서 마음에 거하시며,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채워지기를 구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소망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반드시 실현해 주신다는 보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앞에서 구한 깊은 영적 변화와 연결됩니다. 그 일은 인간의 능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충분히 능력 있게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은 먼 곳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는 그 힘」, 곧 지금 믿는 사람들 안에서 일하는 힘입니다.

갇혀 있는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즉시 감옥에서 풀어 주시기를 여기서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자유나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이 말하는 것은 그가 실제로 드린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는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의 삶을 채우기를 구하고, 그렇게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모든 세대에 걸쳐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에베소서 3:21 · 본디새김

바울은 영광이 나타나는 자리를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로 표현합니다. 이 두 표현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예수님과 별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독립적인 주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통하여 형성되었으며,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찬양은 「모든 세대에 걸쳐」 이어집니다. 바울은 앞에서 세대들 동안 감추어져 있던 신비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 신비가 드러난 뒤, 하나님의 영광이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 가운데 찬양받기를 구합니다.

이렇게 바울의 긴 기도는 「아멘」으로 끝납니다.

무릎을 꿇은 사람의 기도가 하늘과 땅을 향합니다

에베소서 3:1–21 본문 →

바울이 기도를 멈추고 긴 설명을 끼워 넣은 까닭이 이제 보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을 보고 낙심할 수신자들에게, 그는 먼저 자신이 왜 갇혀 있는지, 그 갇힘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고 계신지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함께 상속받고 한 몸을 이루었고,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다채로운 지혜가 하늘의 권세들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처지가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된 일이 그의 고난을 이해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그는 무릎을 꿇고, 그들이 모든 성도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기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에서 바울의 감옥 문이 열렸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의 외적인 상황이 바뀌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입니다.

그는 갇혀 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의 넓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이보다 더 작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부르지만, 끝을 찾아낼 수 없는 예수님의 넉넉함을 전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성도가 함께 더 깊이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의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리는 교회를 위해, 땅의 감옥에 갇힌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