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풀어 읽기 · 32장

이 장의 자리 · 25–40장 · 성막과 제사장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이 만든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신을 기념하며 축제를 열었습니다. 제단을 쌓고, 번제를 올리고, 친교 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론은 그날을 「여호와야훼를 위한 축제」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보고 이스라엘이 타락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문제는 제사가 부족하거나 축제가 정성스럽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나셔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대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 앞에서 자신들이 구원받은 사건을 다시 설명했습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성막을 만들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안식일을 지키게 하시며, 모세에게 직접 기록하신 증언판 두 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머무실 장소와 질서를 마련하시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백성이 자신들을 인도할 신의 형상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만날 자리를 마련하고 계셨고, 인간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신을 만나려 했습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32장 본문 읽기 →

모세가 보이지 않자 백성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출애굽기 32:1–6 본문 →

이야기는 하나님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모세의 귀환이 늦어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는 것을 보고 아론에게 몰려가 말했다. 「일어나 우리 앞에서 갈 신들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린 이 모세라는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출애굽기 32:1 · 본디새김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에 올라갔습니다. 출애굽기 24:18은 그가 사십 일 밤낮을 산에 머물렀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 있는 백성에게는 그동안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첫째, 백성은 「우리 앞에서 갈 신들」을 원합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단순히 예배할 대상만이 아닙니다. 자기들 앞에서 움직이며 앞으로의 길을 이끌어 줄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앞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길을 이끄셨습니다(13:21–22).

그런데 지금 백성은 자신들 앞에서 갈 존재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둘째, 그들은 모세를 「이 모세라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에는 모세와 거리를 두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을 인도하던 사람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그를 제삼자처럼 말합니다.

여기서 백성의 불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이끌던 지도자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불안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행동이 문제입니다.

금을 내놓는 백성과 금송아지를 만드는 아론

아론은 이 요구를 듣고 금고리들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백성은 그 명령에 따라 자신들의 귀에 달린 금고리들을 떼어 아론에게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앞서 이스라엘에게 금을 비롯한 귀한 재료를 가져오게 하시고, 지혜를 주신 일꾼들이 그것으로 거룩한 기구들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백성의 금이 전혀 다른 목적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금이 필요하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솜씨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분을 섬길 기구를 만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신의 형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아론은 그들의 손에서 금을 받아 조각 도구로 모양을 잡고, 그것으로 송아지를 부어 만들었다. 그들이 말했다. 「이스라엘아, 이들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린 너의 신들이다.」출애굽기 32:4 · 본디새김

이 선언은 시간을 뒤집어 놓습니다.

금송아지는 이제 막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그 형상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올렸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는 대신, 그 사건의 주인을 자신들이 만든 형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아론은 그것을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았다. 아론이 외쳐 말했다. 「내일은 여호와야훼를 위한 축제다.」출애굽기 32:5 · 본디새김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전혀 다른 신을 섬기려 했을까요? 아니면 여호와야훼를 송아지 형상으로 나타내려 했을까요?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출애굽기 20:4–5에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형상 제작과 숭배의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백성은 일찍 일어나 번제와 친교 제물을 바칩니다. 그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놉니다. 번제와 친교 제물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예배에서도 사용되는 제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제물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드려집니다.

그런데 산 위에서 하나님은 전혀 다르게 그 사건을 판단하고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송아지 형상은 하나인데, 백성의 말에서는 ‘이들’이라는 복수 지시어가 사용되고, ‘너의 신들’과 ‘이끌어 올린’ 역시 복수 형태를 띱니다. 다만 이 문법만으로 백성이 실제로 여러 신을 생각했는지, 특정한 신을 나타내는 형상에 관습적인 종교 표현을 사용했는지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호와야훼를 눈에 보이는 송아지 형상과 결합하여 예배하려 했다는 해석은 5절에서 근거를 얻습니다. 반면 1절에서 백성이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4절에서 만들어진 형상에 출애굽의 공로를 돌리는 모습은 단순한 상징물 이상의 역할을 그 형상에 부여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두 가능성의 경계를 본문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놀았다’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모세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춤추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보아 떠들썩한 축제였다는 점은 알 수 있지만, 반드시 성적인 방종이 있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열왕기상 12:28에서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고, 그것들을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연결해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32:4의 선언이 거의 같은 형태로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을 여로보암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읽는 것은 아니지만, 두 본문은 신의 형상을 만들어 예배하고 그것에 출애굽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신약에서도 고린도전서 10:7은 출애굽기 32:6의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놀았다」는 말씀을 직접 인용하며 우상숭배를 경계합니다.

하나님의 「네 백성」과 모세의 「당신의 백성」

출애굽기 32:7–14 본문 →

산 아래에서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가서 내려가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린 네 백성이 타락했다.」출애굽기 32:7 · 본디새김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하면서 그 표현을 바꿉니다.

모세는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여호와야훼, 어찌하여 당신께서 큰 능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분노를 불태우십니까?」출애굽기 32:11 · 본디새김

이 대화에서 이스라엘이 누구에게 속하는가라는 문제가 전면으로 떠오릅니다. 앞서 금송아지 앞에서 백성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올린 존재가 그 형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실제로 그 일을 이루신 분이 여호와야훼라고 다시 밝힙니다.

백성은 금송아지에게 구원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모세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근거로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목덜미가 뻣뻣한 백성

9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목덜미가 뻣뻣한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표현은 농경 사회에서 익숙한 동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목을 뻣뻣하게 하고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는 짐승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와 명령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를 내버려 두어라.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분노를 불태워 그들을 멸하겠다. 나는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출애굽기 32:10 · 본디새김

그런데 모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통해 큰 민족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보다,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듭니다. 모세의 간청은 세 가지 근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먼저 그는 출애굽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큰 능력과 강한 손으로 이끌어 내신 백성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이집트 사람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지 묻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시기 위해 이끌어 내셨는데,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한다면 이집트 사람들이 그 구원을 악한 목적의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자신을 걸고 그들에게 맹세하시고,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내가 말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겠다. 그들은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32:13 · 본디새김

여기서 ‘이스라엘’은 야곱에게 주어진 이름입니다(창세기 32:28; 35:10). 모세는 현재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위해 간청하면서, 그 민족의 이름을 받은 조상 이스라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특히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을 걸고」 맹세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백성의 선함을 근거로 용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벌써 충분히 뉘우쳤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이 시점의 백성은 산 아래에서 여전히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모세가 붙드는 근거는 백성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모세가 간청할 수 있는 이유 자체가 하나님의 과거 행동과 약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조상들에게 맹세하지 않으셨다면, 모세가 붙들 근거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간청은 하나님께 새로운 의무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말한 재앙에 대해 뜻을 돌렸다.출애굽기 32:14 · 본디새김

이야기는 모세의 간청과 하나님의 응답 사이에 실제적인 관계를 설정합니다.

14절은 이스라엘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에 대해 뜻을 돌리셨다고 말합니다.

백성 전체의 멸망은 피했지만, 죄 자체는 여전히 해결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뜻을 돌렸다」를 하나님이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으셨다는 설명으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인간이 이해하기 쉽게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라고 본문의 서술을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말씀하셨고, 모세는 간청했으며, 하나님은 재앙에 대한 뜻을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글이 새겨진 돌판과 인간이 만든 금송아지

출애굽기 32:15–20 본문 →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두 손에는 증언판 두 개가 들려 있습니다.

판들은 양면에 글이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판들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글도 하나님이 직접 쓰셨습니다.

돌판은 금송아지와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금송아지는 인간이 신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형상이고, 증언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두 물건 모두 사람들의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눈에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돌판이라는 물질적인 형태로 자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는 것과, 하나님을 자기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쟁 소리인가, 노래하는 소리인가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와 여호수아는 진영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전쟁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기거나 지는 군대의 외침이 아니라 노래하는 소리라고 대답합니다.

산 위에서는 이스라엘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 처할 만큼 심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고통이나 두려움의 소리가 아닙니다. 백성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위기를 불러왔는지 모른 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진영에 가까이 와서 송아지와 춤추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분노가 타올랐다. 그는 두 손에 든 판들을 내던져 산 아래에서 깨뜨렸다.출애굽기 32:19 · 본디새김

산 위에서 그는 백성의 생존을 구했습니다.

산 아래에서 그는 백성이 저지른 죄를 직접 마주합니다.

이 두 반응은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백성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그들의 죄를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모세는 돌판을 깨뜨린 뒤 금송아지를 불태우고,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갈아 물에 뿌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합니다.

자기들 앞에서 갈 신이라고 불렀던 형상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완전히 파괴됩니다.

그 형상은 이스라엘을 인도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지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제 그 물건을 실제로 만든 사람에게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출애굽기 15장의 노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바다에서 구원받은 뒤 여호와야훼께 노래했습니다. 미리암과 여자들은 소고를 들고 춤추며 그 구원을 기념했습니다(15:20–21). 노래하고 춤추는 행동 자체가 죄가 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기념하고 누구에게 구원의 영광을 돌리는지가 달라졌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왜 돌판을 깨뜨렸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의도적으로 언약 파기를 상징하는 의식을 행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출애굽기 24:3–8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약속하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제 모세가 그 언약의 증언을 담은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는 동안, 백성은 이미 하나님의 명령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돌판의 파괴는 이미 훼손된 언약 관계를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언약이 완전히 폐기되었다는 결론까지 뜻하지는 않습니다. 뒤이어 하나님은 백성이 계속 나아갈 길을 말씀하십니다. 송아지를 파괴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가루를 물에 섞어 마시게 하는 행위의 정확한 의식적 의미는 본문에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특정한 고대 재판 의식이라고 단정하거나, 물을 마시는 순간 어떤 초자연적인 심판이 자동으로 일어났다고 설명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32:21–25 본문 →

모세가 아론에게 던진 질문은 예상과 다릅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말했다. 「이 백성이 당신에게 무엇을 했기에 당신은 이들을 큰 죄에 빠뜨렸습니까?」출애굽기 32:21 · 본디새김

백성이 먼저 금송아지를 요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론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고, 금을 모으게 했으며, 실제로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앞에 제단을 세우고 축제까지 선포했습니다.

출애굽기 28–29장에서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아론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해 섬길 사람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산 아래에서 아론은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을 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일을 수행하고 종교적 형식을 갖추어 주었습니다.

백성을 하나님 앞에서 섬길 사람이 백성의 요구에 따라 신의 형상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의 대답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아론이 말했다. 「내 주여, 분노를 불태우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에 빠져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아십니다.」출애굽기 32:22 · 본디새김

백성이 먼저 요구했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아론 자신의 행동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금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 떼어 내어라.』라고 하자, 그들이 제게 주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습니다.」출애굽기 32:24 · 본디새김

4절에서 아론은 금을 받아 조각 도구로 모양을 잡고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설명에서는 자신이 형상을 만들기 위해 수행한 작업이 사라집니다. 송아지가 마치 불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들립니다.

금송아지를 만들 때에는 아론의 손이 필요했지만, 책임을 설명할 때에는 그 손이 사라집니다.

모세는 백성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아론이 그들을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그들의 대적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되게 했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2:25 · 본디새김

여기서 ‘제멋대로 행동하다’라는 표현은 통제와 규율이 무너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반드시 옷을 벗은 상태나 특정한 성적 행동을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이집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잘못 해석할 것이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백성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조롱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하는 행동은 공동체 안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의 백성이며 어떤 구원을 경험했는지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 모세는 백성 전체를 향해 결단을 요구합니다.

「누가 여호와야훼의 편이냐?」 — 공동체를 가르는 심판

출애굽기 32:26–29 본문 →

모세는 진영의 문에 서서 외칩니다.

모세는 진영의 문에 서서 말했다. 「누가 여호와야훼의 편이냐? 내게로 와라.」 레위 자손이 모두 그에게 모였다.출애굽기 32:26 · 본디새김

이 질문은 5절의 아론의 선언과 대조됩니다. 아론은 금송아지 앞에서 「내일은 여호와야훼를 위한 축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사용하여 축제를 열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여호와야훼께 충성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는 레위 자손들에게 칼을 차고 진영을 오가며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28절은 그날 약 삼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은 함께 이집트를 떠났고, 함께 시나이산에 도착했으며, 함께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지금 자신들의 내부에서 심판을 겪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단지 종교적 상징 하나를 잘못 선택한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자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죄로 다루어집니다.

그렇다고 이 장면을 오늘날 종교적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가까운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시나이 언약 아래에서 벌어진 특정한 심판 사건을 서술하며, 현대의 신앙 공동체에 일반적인 폭력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오늘날 독자에게 일으키는 윤리적 불편함을 쉽게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죽임당한 사람들의 개별 행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은 해석의 한계로 남습니다. 이 장면을 가볍게 넘기거나, 죽임당한 사람들의 죽음을 추상적인 교훈을 위한 장치처럼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레위 자손이 받은 것은 무엇인가

29절에는 앞선 제사장 위임식에서 사용된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모세가 말했다. 「오늘 너희 자신을 여호와야훼에게 바쳐라. 저마다 자기 아들과 자기 형제에게 맞섰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 너희에게 복이 주어지게 하려는 것이다.」출애굽기 32:29 · 본디새김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든 책임자였지만, 레위 자손들은 지금 여호와야훼의 편에 모여 심판을 수행합니다. 같은 지파에 속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본문은 아론의 책임이 다른 레위 자손들의 행동으로 상쇄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먼저 본문은 이 명령을 모세가 여호와야훼의 말씀으로 전달했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이를 모세가 개인적인 분노만으로 실행한 보복 행위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의 서술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명령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모세에게 주셨는지 별도로 설명되는 장면은 없습니다. 또한 본문은 죽임당한 약 삼천 명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각 사람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선정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모두 금송아지 제작을 주도했던 사람들이라거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특정 집단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 자신을 여호와야훼에게 바쳐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너희 손을 채워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서 출애굽기 29장에서 제사장에게 직무를 맡기는 상황에 사용된 관용적인 표현과 같습니다. 29장에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무를 맡는 의식이 규정되었습니다. 반면 32:29는 레위 자손들이 여호와야훼께 자신을 바치는 일과 복을 받는 일을 말할 뿐, 이들에게 모두 제사장 직함이 주어졌다고 직접 선언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신명기 33:8–11에서는 레위의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직무가 특별히 언급됩니다. 이 본문은 레위 지파의 역할을 더 넓은 정경 안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하지만, 출애굽기 32장의 모든 행동을 윤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하신다면…」 — 끝나지 않은 모세의 간청

출애굽기 32:30–35 본문 →

30절에서 모세는 다시 산에 오르겠다고 말합니다.

다음 날 모세가 백성에게 말했다. 「너희는 큰 죄를 지었다. 이제 내가 여호와야훼에게 올라가겠다. 어쩌면 너희 죄를 속죄할 수 있을 것이다.」출애굽기 32:30 · 본디새김

모세는 자신이 반드시 백성의 죄를 속죄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앞서 그는 하나님께 간청했고, 하나님은 재앙에 대한 뜻을 돌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는 죄 자체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묻기 위해 다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모세는 여호와야훼에게 돌아가 말했다. 「간청합니다.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금으로 신들을 만들었습니다.」출애굽기 32:31 · 본디새김

모세는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의 심각성을 줄여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정확하게 고백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간청합니다.

백성을 위해 간청하는 것과 백성의 죄를 정당화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그렇지 않다면, 부디 당신께서 쓰신 당신의 책에서 저를 지워 주십시오.」출애굽기 32:32 · 본디새김

문장은 끝까지 완성되지 않고, 곧바로 「그렇지 않다면」으로 이어집니다. 모세가 가장 바라는 것은 백성의 죄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요청을 완성하지 못한 채, 용서받지 못할 경우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지 말합니다.

모세는 무엇을 내놓으려 하는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자리를 걸고 백성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새로운 민족의 미래를 내려놓았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까지 내놓으려 합니다.

그는 백성의 죄에 가담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집행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운명을 자신과 무관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모세의 행동은 아론의 변명과 대조됩니다. 아론은 백성의 요구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축소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운명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내놓으려 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이야기에서 지우려 하고, 다른 사람은 백성의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제안을 받아들이셨는가

하나님의 응답은 모세가 요청한 방식과 다릅니다.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내 책에서 지우겠다.」출애굽기 32:33 · 본디새김

이 대답은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누군가의 자발적인 희생 의사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모세가 중재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가 모든 죄의 책임을 자기 뜻대로 대신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간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어떻게 다루실 것인지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사자가 네 앞에서 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죄를 묻는 날에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한 벌을 내리겠다.」출애굽기 32:34 · 본디새김

하나님은 백성과의 관계를 여기서 완전히 끝내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그들이 지은 죄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지도 않으십니다.

여호와야훼는 백성이 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을 쳤다. 그 송아지는 아론이 만든 것이었다.출애굽기 32:35 · 본디새김

아론은 앞서 송아지가 불 속에서 나왔다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마치는 서술자는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론의 변명이 사건의 진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첫 번째 조건절은 완성되지 않은 채 남습니다. 칠십인역은 그 빈자리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읽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끊어진 구조는 해설자가 함부로 채울 수 없는 특징입니다. 왜 모세의 말이 끊어졌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감정이 북받쳐서 말을 잇지 못했을 수도 있고, 간청의 긴박함을 표현한 문학적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책’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본문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에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라는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시편 69:28과 다니엘 12:1에서도 그러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2:32의 책을 후대의 모든 ‘생명의 책’ 표현과 완전히 동일한 개념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35절의 심판의 구체적인 방식과 규모는 여기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앞서 죽은 약 삼천 명과 단순히 동일한 사건으로 확정하거나, 별도로 몇 명이 더 죽었다고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깨진 돌판을 남겨 두고 계속되는 길

출애굽기 32:1–35 본문 →

처음에는 백성이 ‘우리 앞에서 갈 신들’을 요구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내 사자가 네 앞에서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 앞에 세우려던 것은 인간이 만든 형상이었지만, 하나님이 앞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보내시는 사자입니다.

다만 이 말씀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앞서 간다는 약속과 하나님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백성 가운데 머무실 것인가는 다음 장에서 다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깨진 돌판은 아직 새것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는 파괴되었지만 그 죄의 결과는 남아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위해 간청했지만, 그들이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도 사라지고, 손에 들려 있던 증언판도 부서진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을 앞세우고 가려 했지만, 결국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다시 길을 열어 주셔야만 앞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금송아지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