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풀어 읽기 · 34장
이 장의 자리 · 25–40장 · 성막과 제사장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자 빛난 모세의 얼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그를 바라보던 아론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모세는 앞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함을 지나가게 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죄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 두 선언은 서로 쉽게 합쳐지지 않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만, 그들의 죄를 가볍게 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깨진 돌판을 대신할 돌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돌판을 들고 내려오는 사람의 얼굴이 달라져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깨진 돌판을 다시 만들라는 명령
하나님이 모세에게 처음으로 명령하시는 일은 돌판 두 개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너는 처음 것들과 같은 돌판 두 개를 깎아 만들어라. 네가 깨뜨린 처음 돌판들에 있던 말들을 내가 그 돌판들에 기록하겠다.」출애굽기 34:1 · 본디새김
금송아지 사건 이전에 모세가 받았던 증언판은 깨졌습니다. 출애굽기 32:16은 처음 돌판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그 글도 하나님이 쓰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세가 직접 돌판을 깎아 준비해야 합니다.
모세에게 맡겨진 것은 돌판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기록될 말씀의 근원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셨던 말씀을 다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깨진 것은 돌판이지만, 다시 주어지는 말씀은 이전에 주셨던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저지른 일을 없었던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깨진 돌판을 다시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일어난 일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시나이산으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침까지 준비하고 산꼭대기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함께 올라와서는 안 됩니다. 산에는 사람뿐 아니라 양과 염소, 소도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명령은 출애굽기 19장에서 처음 시나이산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의 규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에도 하나님은 백성이 산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모세에게 다시 자신을 드러내시는 자리에서도 그 경계가 유지됩니다.
앞서 백성은 아침 일찍 일어나 금송아지 앞에서 제물을 바쳤습니다(32:6). 이제 모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명령하신 돌판을 가지고 산에 오릅니다. 두 장면 모두 아침에 이루어지지만, 한쪽에서는 인간이 만든 형상 앞에서 예배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다시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받기 위해 나아갑니다.
모세의 손에는 아직 아무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돌판이 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무엇을 기록하실지는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구름 속에서 내려와 그곳에서 모세와 함께 서서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했다.출애굽기 34:5 · 본디새김
구름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반복해서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에도 구름기둥이 등장했고, 시나이산에서 말씀하실 때에도 구름이 산을 덮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이 자신을 여호와야훼라고 밝히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출애굽기 3:14–15; 6:2–3). 이번 선포의 특별함은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그분의 성품이 길게 선언된다는 데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이 가장 절실하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이 죄를 지은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 분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했다. 「여호와야훼, 여호와야훼,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함이 풍성한 하나님,」출애굽기 34:6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이 멸망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는 자리에서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선언이 먼저 나옵니다.
분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뜻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은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실 수 있지만, 그 진노만으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래 참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이 아직 존재하고 있고, 모세가 다시 돌판을 받으러 산에 올라왔다는 사실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배경이 됩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함
이어지는 표현은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함」입니다.
두 단어를 함께 읽으면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일 뿐 아니라, 그 사랑에서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언약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신실함이 풍성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인간의 불성실함이 드러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분노하기를 더디 하고」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코가 길다’는 뜻을 가진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코는 분노와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하므로, 이 표현은 쉽게 분노하지 않고 오래 참는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한결같은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애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맥에 따라 충성스러운 사랑, 인애, 관계를 지속하는 신실한 호의를 나타내며, 특히 언약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신실함」은 진실함과 신뢰할 수 있음, 신실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용서하시지만 벌하지 않고 그냥 두지는 않으십니다
7절은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문장 가운데서도 특별히 긴장감이 높은 구절입니다.
「수천의 사람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지키며, 악행과 반역과 죄를 용서하지만 벌하지 않고 그냥 두는 일은 결코 없으며, 아버지들의 악행을 자녀와 자녀의 자녀에게, 삼 대와 사 대까지 묻는 하나님이다.」출애굽기 34:7 · 본디새김
악행과 반역과 죄
악행과 반역과 죄는 각각 악행이나 죄책, 반역이나 의도적인 위반, 죄나 잘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서로 의미가 겹칩니다. 오히려 여러 표현을 함께 사용하여 인간의 죄를 폭넓게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반역’이라는 표현은 금송아지 사건의 성격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위해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단순한 실수보다 심각한 언약적 불충실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죄까지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용서와 심판은 어떻게 함께 존재하는가
그런데 같은 문장에서 하나님은 「벌하지 않고 그냥 두는 일은 결코 없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이해하는 한 가지 길은 용서와 심판이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그 죄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그 죄로 인해 발생한 모든 결과가 자동으로 사라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 가시며 새 돌판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금송아지 사건으로 사람들이 죽었고,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용서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 죄의 심각성을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것을 하나님이 언제나 일정한 양의 벌을 내리신 뒤에만 용서하신다는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34:7은 그러한 절차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가 중요하지 않다는 선언이 아니라, 죄가 실제로 심각한데도 관계를 다시 열어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 자녀와 손자에게까지 죄를 묻는가
7절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아버지들의 악행을 자녀와 자녀의 자녀에게, 삼 대와 사 대까지 묻는다는 말씀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삶에서 개인은 가족과 씨족, 공동체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한 세대의 행동은 다음 세대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죄와 그 결과가 한 세대 안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 언어를 모두 설명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7절은 단순히 부모의 잘못이 자녀에게 사회적 영향을 준다는 일반적인 관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들의 악행을 후손들에게 물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24:16은 아버지의 죄 때문에 자녀를 죽이거나 자녀의 죄 때문에 아버지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합니다. 에스겔 18:20도 아들이 아버지의 죄책을 지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의 죄책을 지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이 본문들은 개인의 책임을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반면 출애굽기 34:7은 죄와 심판의 영향이 세대를 넘어 이어질 수 있음을 하나님의 자기 선언 안에 포함합니다. 신명기는 구체적인 사법적 책임의 원칙을 제시하고, 에스겔은 개인의 책임을 강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문맥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모든 긴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34장은 후손들이 어떤 조건에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를 상세히 규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자녀가 부모의 죄 때문에 무조건 벌을 받는다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후손이 부모와 같은 죄를 반복하는 경우에만 벌을 받는다고 본문에 없는 조건을 덧붙여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한 개인이 저지른 순간의 작은 사건으로만 다루지 않으십니다. 죄는 관계와 공동체, 세대를 넘어 심각한 결과를 남길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문장에서 자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먼저 선언하십니다.
수천과 삼 대·사 대의 대조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수천’을 언급하고, 죄에 대한 심판을 말할 때는 ‘삼 대와 사 대’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수천이라는 표현에는 사람이나 세대라는 단위가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맥상 수천의 사람으로도, 수천 대에 걸친 사랑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6에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관련하여 ‘수천’을 가리키는 표현이 비슷하게 등장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34:7에서 사랑과 심판을 나타내는 수적 표현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대조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심판보다 훨씬 넓게 펼쳐지는 것으로 읽을 근거를 줍니다.
이 선언은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다시 등장합니다. 민수기 14:18에서 모세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백성을 위해 간청합니다. 시편 103:8도 여호와야훼가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요나 4:2에서는 요나가 하나님이 이러한 분이시기에 니느웨를 향한 재앙에서 뜻을 돌리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4장 자체에서는 바로 그 선언을 들은 모세가 서둘러 엎드려 절합니다.
「목덜미가 뻣뻣하기 때문입니다」 — 모세의 뜻밖의 간청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자 모세는 즉시 몸을 굽혀 절합니다.
그가 말했다. 「주님, 제가 당신의 호의를 얻었다면 부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함께 가 주십시오. 이 백성은 목덜미가 뻣뻣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악행과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아 주십시오.」출애굽기 34:9 · 본디새김
앞 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덜미가 뻣뻣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33:3). 그런데 모세는 이제 바로 그 사실을 언급하면서 함께 가 달라고 요청합니다.
같은 백성의 완고함이 서로 다른 방향의 논거로 등장합니다.
앞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간청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셨는지 들은 직후, 그 성품에 기대어 다시 간청합니다.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들의 악행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자신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백성의 죄를 인정하면서 그 죄의 문제를 자신의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요청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아 주십시오.」 모세는 죄의 결과만 없애 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죄로 훼손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다시 세워지기를 구합니다.
이 요청 직후 하나님은 언약을 맺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목덜미가 뻣뻣하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키(כִּי)는 이유를 나타내기도 하고, 문맥에 따라 앞말과 대조되는 상황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목덜미가 뻣뻣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읽으면 그들의 완고함 자체가 하나님의 동행이 더욱 필요한 이유가 됩니다. 반면 ‘목덜미가 뻣뻣하지만’이라고 읽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해 달라는 간청이 됩니다. 두 읽기는 서로 다른 강조점을 지닙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모세가 백성의 완고함을 감추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동행을 구한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새 언약의 약속은 왜 다른 신들을 경계하는 명령으로 이어지는가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보아라, 내가 언약을 맺는다. 온 땅과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한 번도 생겨난 적 없는 놀라운 일들을 네 온 백성 앞에서 행하겠다. 네가 그 가운데 있는 온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행하는 일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일이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4:10 · 본디새김
이 선언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의 이야기에서 중대한 전환점입니다.
하나님은 앞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셨고, 모세에게 처음 돌판에 있던 말씀을 다시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약을 맺겠다는 말씀은 이미 주어진 언약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확증하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은 앞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실 일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다만 본문이 어떤 개별 사건을 가리키는지 모두 명시하지는 않으므로, 특정한 미래의 사건 하나에만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11절에서는 가나안 땅의 여러 민족을 몰아내시겠다는 약속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곧바로 경고가 뒤따릅니다.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들이 네 가운데서 올무가 되지 않도록 하여라.」출애굽기 34:12 · 본디새김
두 언약이 나란히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회복되는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종교적 질서에 자신을 묶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관계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13–16절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의 제단과 기둥과 아세라를 없애야 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바쳐지는 제물과 혼인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따르게 되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아세라들’은 고대 가나안 종교와 관련된 숭배 대상 또는 그 상징물과 관계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물체를 가리키는지는 문맥마다 논의가 있지만, 이 절에서는 잘라 버려야 할 종교적 대상들로 언급됩니다.
특히 15–16절은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음행’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성적인 행위가 벌어졌다는 설명이 아니라, 다른 신을 따르는 행위를 혼인 관계의 불충실함에 비유하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관계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함께 섬기는 방식으로 충성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이 문맥에서 다른 민족과의 혼인에 대한 경고 역시 민족적 혈통 그 자체보다 다른 신들을 따르게 되는 종교적 결과에 초점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 땅 주민의 딸들이 자기 신들을 따르고, 이스라엘의 아들들까지 그 신들을 따르게 되는 상황을 명시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모든 민족 간 혼인이 본질적으로 죄라는 일반적인 명제로 확대하는 것은 본문의 구체적인 논점을 벗어납니다.
질투하는 하나님
14절은 이 경고의 이유를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합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엎드려 절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이며, 그는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4:14 · 본디새김
문맥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자신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관계를 다른 신들과 나누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이 누구를 섬기든 상관하지 않으시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언약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에 그 관계에 합당한 충성이 다시 요구됩니다.
용서는 언약의 의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언약 안에서 다시 살아갈 길을 여는 일입니다.
「너를 위해 금속을 부어 만든 신들을 만들지 마라.」출애굽기 34:17 · 본디새김
금송아지 사건 바로 뒤에 주어지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출애굽기 20장의 우상 금지 명령을 떠올리게 하지만, 지금은 그 명령을 실제로 어겼던 사람들에게 다시 주어지고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듣는 백성의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형상을 만드는 일이 어떤 죄인지 단지 법조문으로만 알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 일을 저질렀고, 그 결과 공동체가 무너질 뻔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다시 세우시면서 그 실패의 핵심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언약의 회복은 달력과 식탁, 노동과 수확으로 이어진다
17절에서 금속으로 신들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끝나자, 18절부터는 축제와 맏배, 안식일과 수확에 관한 규정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특정한 신앙 고백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시간과 노동, 가축과 농산물, 가족과 공동체의 삶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출애굽을 기억하는 축제
「누룩 없는 빵의 축제를 지켜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 달의 정해진 때에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라. 네가 아빕 달에 이집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4:18 · 본디새김
금송아지 사건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한 존재를 잘못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언약을 다시 세우시며 출애굽을 기억하는 축제를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만든 형상 앞에서 구원을 기념하는 대신,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그 구원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 자신들을 구원하셨는지를 공동체의 시간 속에 반복해서 새기는 일입니다.
맏배는 누구의 것인가
19–20절에서는 사람과 가축의 맏배에 관한 규정이 이어집니다.
「태를 처음 여는 것은 모두 내 것이다. 네 가축 가운데 수컷인 것, 곧 소와 양과 염소의 맏배도 모두 내 것이다.」출애굽기 34:19 · 본디새김
이 규정은 출애굽기 13:1–16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이집트의 맏아들들을 치셨지만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은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맏배는 특별히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구별됩니다.
하지만 모든 맏배가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20절에 따르면 나귀의 맏배는 양이나 염소로 대속해야 하고, 대속하지 않으면 그 목을 꺾어야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은 모두 대속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맏아들을 제물로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속하도록 규정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나귀의 맏배에 관한 엄중한 명령도 본문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은 대속하지 않은 나귀의 목을 꺾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령할 뿐, 왜 그 방식이어야 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과 후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맏배의 대속은 이스라엘이 누구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는지를 기억하는 행위가 됩니다.
가장 바쁠 때에도 쉬어라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어라. 밭갈이 때에도 추수 때에도 쉬어라.」출애굽기 34:21 · 본디새김
밭갈이와 추수는 농경 생활에서 일의 시기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때입니다. 밭을 갈아야 할 때를 놓치거나 수확을 늦추면 실제적인 손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때에도 쉬라고 명령하십니다.
성막을 만드는 일에 관한 명령 뒤에 안식일 규정이 주어졌던 것처럼, 이제는 농사라는 일상적인 생업 속에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시간은 인간이 일이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임의로 정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존이 오직 쉬지 않는 노동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도전받습니다.
일을 해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안에 놓여 있습니다.
모두가 축제를 지키러 올라가면 땅은 누가 지키는가
22–24절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축제들을 열거합니다.
일곱 주의 축제와 한 해가 돌아가는 때의 거두어들이기 축제가 등장하고, 23절은 한 해에 세 번 모든 남자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농업과 계절의 흐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네 앞에서 민족들을 몰아내고 네 영토를 넓혀 줄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한 해에 세 번 네 하나님 여호와야훼 앞에 나타나려고 올라갈 때,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않을 것이다.」출애굽기 34:24 · 본디새김
이 약속은 추상적인 종교적 위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직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위험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배할 시간을 정해 주시면서, 그 순종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두려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 구절을 오늘날 모든 예배 참석자에게 재산상의 손실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편적인 보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언약적 약속입니다.
제물과 첫 열매에 관한 규정
25–26절에서는 제사의 방식과 첫 열매에 관한 명령이 이어집니다.
누룩 든 것과 함께 제물의 피를 바치지 말아야 하고, 유월절 제물을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 됩니다. 이 명령들은 출애굽기 23:14–19에 나오는 절기와 제물 규정들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방식에 따라 드려야 합니다.
「네 땅의 첫 열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가져와라.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마라.」출애굽기 34:26 · 본디새김
본문은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특별한 음식 관습을 금지하는 것인지, 다른 민족의 종교적 행위와 관계되는지, 또는 어미와 새끼의 관계를 고려한 규정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이 명령과 관련된 특정한 가나안 종교 의례가 있었다고 확정하거나, 동물에 대한 자비를 가르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명령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가져오라는 규정과 함께 놓여 있고, 출애굽기 23:19에도 같은 형태로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정확한 이유는 불확실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음식을 다루는 방식도 하나님의 명령 아래 놓인다는 점에서 전체 규정의 흐름과 연결됩니다.
언약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고백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관계에 따라 일상의 삶이 다시 조직되어야 합니다.
돌판에 기록된 열 말씀은 무엇인가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여라. 이 말들에 따라 내가 너와, 또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4:27 · 본디새김
여기서 ‘이 말들’은 앞에서 주어진 언약의 규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8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를 남깁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여호와야훼와 함께 사십 일과 사십 밤을 지냈다. 빵을 먹지 않았고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돌판에는 언약의 말들, 곧 열 말씀이 기록되었다.출애굽기 34:28 · 본디새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라는 점입니다. 본문은 모세가 그 기간 동안 먹고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모든 신자가 이를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금식 규정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누가 무엇을 기록했는가
1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돌판에 처음 있던 말씀들을 기록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27절에서는 모세에게 ‘이 말들’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기록한 주체가 이름으로 명시되지 않습니다.
원문의 동사 흐름만 보면 앞서 언급된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1절의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으로 보면, 돌판에 기록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0:1–4는 이 사건을 다시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처음 돌판에 기록하셨던 열 말씀을 새로운 돌판에도 기록하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34:27–28은 모세가 언약의 규정들을 기록하는 일과 하나님이 돌판에 열 말씀을 기록하시는 일을 구별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4장 자체의 문장만 놓고 보면 두 기록 행위의 관계가 완전히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열 말씀’이 정확히 어느 내용을 가리키는가입니다.
한쪽 읽기에서는 이것을 출애굽기 20장에서 주어진 십계명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돌판의 말씀을 다시 기록하시겠다고 하셨고, 신명기 10:4도 그 열 말씀을 시나이산에서 처음 선포된 말씀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바로 앞에 등장하는 34:11–26의 언약 규정들과 연결합니다. 27절이 그 규정들을 기록하라고 명령하고, 28절이 이어서 ‘언약의 말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11–26절에는 열 개로 명확하게 구분된 명령들이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규정들을 어떻게 열 말씀으로 나눌 것인지도 해석의 문제가 됩니다.
두 읽기는 서로 다른 본문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을 본문이 전혀 허용하지 않는 해석으로 처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돌판이 깨졌지만,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과 언약의 말씀을 이어 가게 하십니다. 그 말씀은 모세가 백성에게 전달해야 할 내용이 됩니다.
이제 모세는 새로운 증언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판뿐 아니라 모세 자신에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온 사람의 얼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올 때의 일이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증언의 두 돌판이 모세의 손에 있었다. 모세는 여호와야훼와 말하는 동안 자기 얼굴의 피부가 빛을 내게 된 것을 알지 못했다.출애굽기 34:29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앞선 금송아지 사건에서 모세가 산을 내려오던 모습과 비교하면 더욱 인상적입니다.
그때도 모세의 손에는 증언판 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는 백성이 자신들이 만든 신의 형상 앞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모습을 보고 돌판을 깨뜨렸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능력으로 빛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그의 얼굴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왜 자신의 얼굴이 빛나는 줄 몰랐을까
모세 자신은 평소처럼 산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은 두려워하며 그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술은 그 변화가 모세의 의식적인 연출이나 자기 과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 만나는 동안 일어난 변화를 스스로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변화를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과 말씀을 나눈 뒤,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만큼 변화된 얼굴로 내려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후속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이 빛나는 사건은 단순히 모세 개인에게 주어진 영예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얼굴을 보고 두려워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부르다
앞서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형상 앞에 가까이 가서 제물을 바치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자 두려워하며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인간이 만든 형상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변화된 모세의 모습은 그들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대조를 통해 본문은 참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인간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이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그에게 돌아왔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했다.출애굽기 34:31 · 본디새김
먼저 아론과 지도자들이 돌아오고, 그다음에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시나이산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전달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은 백성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야 할 신비한 광경으로 남지 않습니다. 그는 백성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모세에게 주어졌지만, 그 만남에서 받은 말씀은 이스라엘 전체에게 전달됩니다.
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빛을 내다’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카란(קָרַן)입니다. 이 단어는 ‘뿔’을 뜻하는 케렌과 관계되어 있어, 빛이 뻗어 나가는 모습과 뿔이 돌출되는 모습 사이의 언어적 관련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고대에는 모세의 얼굴을 뿔과 연결해 이해한 번역 전통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의 머리에 실제로 뿔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얼굴 피부가 빛나는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칠십인역 역시 이 구절을 영광스럽게 된 얼굴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은 그가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이 만났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보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세는 언제 얼굴을 가렸는가
모세의 얼굴이 빛나는 장면은 잘 알려져 있지만, 얼굴 가리개를 사용하는 순서는 자주 놓치기 쉽습니다.
모세는 그들과 말하기를 마치고 자기 얼굴에 얼굴 가리개를 덮었다.출애굽기 34:33 · 본디새김
34–35절에서는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모세는 여호와야훼 앞에 들어가 말씀을 나눌 때 얼굴 가리개를 벗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이스라엘에게 명령받은 말씀을 전달합니다.
백성은 그때 모세의 얼굴 피부가 빛나는 것을 봅니다. 말씀 전달이 끝나면 모세는 다시 얼굴 가리개를 덮습니다.
출애굽기 자체의 이야기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듣고, 다시 백성에게 나와 그 말씀을 전달하는 일이 강조됩니다. 그의 얼굴은 그 과정에서 반복해서 빛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얼굴 가리개를 덮는 목적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백성이 빛나는 얼굴을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 두려움을 덜어 주려고 얼굴을 가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가능한 해석은 아닙니다. 얼굴 가리개는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특별한 상황과 그 밖의 시간을 구별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얼굴 가리개를 덮는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존중해야 합니다. 모세가 빛이 사라지는 모습을 백성에게 감추기 위해 얼굴을 가렸다고 주장하려면 다른 해석적 근거가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34장 자체는 빛이 점차 사라졌다는 사실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의 고린도후서 3:7–18에서 바울은 모세의 얼굴 가리개를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는 영광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는 출애굽기의 장면을 후대의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발전시켜 읽는 중요한 정경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4장 자체가 설명하지 않은 가리개의 모든 목적을 그 해석으로 곧바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만난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돌아오는가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손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신의 형상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신의 말씀으로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말씀이 오가는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은 그 관계가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눈에 보이게 드러냅니다.
출애굽기 34장은 모세가 빛나는 얼굴을 가리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 가리개를 벗고, 나와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합니다. 백성은 그가 말씀을 전달하는 동안 빛나는 얼굴을 봅니다.
그러고 나서 모세는 다시 얼굴을 가립니다.
모세의 얼굴은 가려질 수 있어도, 그가 하나님께 받아 전한 말씀은 이미 백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셨고, 산 아래에서는 모세가 그분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깨졌던 돌판은 다시 마련되었고, 두려워하던 백성은 다시 가까이 나아와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남은 빛은 그 만남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