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2–24장 · 아브라함의 길
하갈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16장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장의 중심에 서게 되는 사람은 그 약속을 받은 아브람도, 자녀를 기다리는 사래도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온 여종 하갈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간단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녀를 괴롭혔던 관계가 즉시 바뀌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창세기 16장은 이 불편한 긴장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의 집에서 벌어진 부당한 일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 그리고 그 집에서 가장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어쩌면 제가 그 여종을 통해 집안을 이루게 될지 몰라요」
사래의 계획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그에게 아이를 낳아 준 일이 없었다. 사래에게는 이집트인 여종이 있었고, 그 이름은 하갈이었다.창세기 16:1 · 본디새김
사래의 자녀 없음과 하갈의 존재가 한 문장 안에서 연결되는 순간, 독자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전 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의 몸에서 나올 사람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4). 그러나 그 아이가 언제 태어날지, 누가 어머니가 될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사래는 바로 그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3절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온 지 열 해가 지났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직후 성급하게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자녀가 없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보세요, 여호와야훼께서 제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막으셨어요. 제 여종에게 들어가 주세요. 어쩌면 제가 그 여종을 통해 집안을 이루게 될지 몰라요.」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창세기 16:2 · 본디새김
이것은 사래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말이지, 하나님이 직접 사래의 출산을 막으셨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아닙니다. 사래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하나님의 행동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합니다.
「집안을 이루다」는 자녀를 얻어 가문이 이어지고 집안이 세워지는 일을 건축에 빗대어 말합니다.
사래는 무너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미래를 하갈을 통해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확신보다 불확실성이 남아 있습니다. 사래는 이 계획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기다리는 가운데,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해 보려 합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까?
고대 사회에서는 자녀를 얻지 못한 부부가 여종을 통해 후손을 얻는 방식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창세기 안에서도 나중에 라헬과 레아가 자신의 여종을 야곱에게 주는 비슷한 사건이 등장합니다(30:3–13).
그러나 어떤 관습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 관습이 모든 당사자에게 정당하고 평등했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하갈은 사래의 여종입니다.
그녀는 자유로운 입장에서 혼인을 협상하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소유한 여주인이 자기 남편에게 그녀를 넘겨주는 상황에 놓입니다.
3절은 사래가 하갈을 「아내로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갈이 아브람과 혼인 관계에 들어갔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사래와 동일한 지위나 권리를 보장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하갈을 아내로 주었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사래의 여종으로 부릅니다. 아브람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아내가 되었지만, 동시에 사래의 권한 아래 있는 여종입니다.
이 불안정한 관계가 곧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아브람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아브람은 사래의 제안을 듣고 실행합니다.
그런데 이 결정에 앞서 아브람이 하나님께 다시 묻거나, 하갈의 의사를 확인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본문은 그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술된 행동만 놓고 보면, 아브람은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인 당사자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는 표현은 창세기 3:17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아내의 말을 들었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이야기에서는 여성이 제안하고 남성이 그 말을 따라 행동하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을 여자의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따르는 행위는 문맥에 따라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고 잘못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말했느냐가 아니라, 그 제안을 받아들여 어떤 행동이 이루어졌느냐입니다.
사래는 아이를 얻기 위해 하갈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브람은 그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계획의 중심에 있는 하갈에게는 아무런 말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래와 아브람은 하갈을 통해 미래를 얻으려 하지만, 하갈 자신의 미래에 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아이를 얻었지만 관계는 무너지다
하갈의 임신은 왜 갈등이 되었을까?
아브람이 하갈에게 들어갔고, 하갈은 임신했다. 하갈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여주인을 하찮게 여겼다.창세기 16:4 · 본디새김
사래는 지금까지 여주인이었습니다. 하갈은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라는 한 가지 문제에서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당시 가문과 상속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이 차이는 상당한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하갈은 여전히 사래의 여종이지만, 아브람의 아이를 임신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갈의 태도와 그녀가 처한 권력관계를 구별해야 합니다. 하갈이 여주인을 업신여겼다고 해서 여주인이 그녀에게 어떤 행동이든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래는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가?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제가 당하는 이 부당한 일은 당신 탓이에요. 제가 제 여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는데, 그 여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저를 하찮게 여겼어요. 여호와야훼께서 저와 당신 사이를 판가름해 주시기를 바라요.」창세기 16:5 · 본디새김
그 계획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사래 자신이었습니다. 그녀는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아브람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사래가 느끼는 모욕감은 본문에 실제로 나타납니다. 하갈이 그녀를 하찮게 여겼다는 서술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사래의 책임 추궁이 사건의 모든 책임을 정확하게 배분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브람은 그 계획에 동참한 사람이고, 하갈은 그 계획에 따라 아브람에게 주어진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의 위치는 같지 않습니다.
사래는 자기 계획의 결과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불편한 결과를 아브람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호와야훼가 사래의 판단을 옳다고 선언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래는 하나님께 판단을 구했지만,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판결이 아니라 아브람의 대답입니다.
아브람은 하갈을 다시 사래의 손에 넘긴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했다. 「보시오, 당신 여종은 당신 손안에 있소. 당신 눈에 좋을 대로 그 여종에게 하시오.」 사래는 하갈을 괴롭혔고, 하갈은 사래에게서 달아났다.창세기 16:6 · 본디새김
조금 전에는 하갈이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생기자 아브람은 그녀를 다시 「당신 여종」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하갈을 자신의 아내로서 보호하려 했다는 흔적은 여기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사래에게 판단과 행동의 권한을 넘깁니다.
본문은 여기서 사래의 행동을 단순한 훈계나 가벼운 책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괴롭혔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누군가의 고통이 발생한 것은 단순히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래가 원했던 임신 자체는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오히려 계획이 이루어진 뒤에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목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까지 옳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5장은 앞으로 아브람의 후손이 외국 땅에서 억압받는 역사를 예고했습니다. 창세기 16장은 이미 아브람의 집안에서 외국인 여종이 억압받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후대의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고통받게 되지만, 지금은 이집트 출신의 하갈이 아브람의 집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을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광야의 물샘에서 이름을 불러 주시는 하나님
하갈을 찾아낸 것은 누구인가?
여호와야훼의 사자가 광야의 물샘 곁에서, 곧 수르로 가는 길의 샘 곁에서 하갈을 발견했다.창세기 16:7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 하갈은 다른 사람들이 결정한 일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데려다 아브람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하갈에게 들어갔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이르자 이야기의 주도권이 달라집니다.
본문은 하갈이 하나님을 찾아 기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특별한 신앙고백을 하거나,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한 기록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말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갈이 말했다. 「저는 제 여주인 사래에게서 달아나는 중입니다.」창세기 16:8 · 본디새김
여기서 처음으로 하갈의 이름이 직접 불립니다.
사래와 아브람은 하갈을 자신의 계획과 권한 안에서 대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사자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질문합니다.
다만 그 이름 뒤에는 여전히 「사래의 여종」이라는 표현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녀의 현실적인 지위를 지워 버리거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롭게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갈은 어디서 왔는지 말합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의 대답에는 가야 할 곳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달아나는가입니다.
수르로 가는 길은 이집트와 연결되는 광야의 통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갈이 이집트 출신이라는 점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실제로 이집트를 목적지로 정했다고 본문이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녀의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돌아가 그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어라」 — 가장 어려운 명령
여호와야훼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어라.」창세기 16:9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창세기 16장에서 가장 어렵고 불편한 구절입니다.
왜 하나님은 괴롭힘을 당한 하갈에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실까요?
이 구절은 특정한 상황에 놓인 하갈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본문은 사래가 하갈을 괴롭힌 행동을 옳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책임을 회피한 행동을 칭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갈이 돌아간 뒤 어떤 보호를 받게 될지, 사래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 시점에 하갈을 돌아가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본문만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갈과 태아가 광야에서 살아갈 현실적인 위험을 고려한 지시라고 이해할 여지도 있지만, 본문은 그것을 명시적인 이유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을 근거로 학대받는 사람에게 무조건 돌아가서 참고 복종하라고 권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은 9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사자는 돌아가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갈 자신과 그녀의 아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에서는 사래가 하갈에게 고통을 가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9절에서는 하갈이 자신을 낮추고 사래의 권한 아래에 놓이라는 명령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어근이 서로 다른 주체와 문법 형태로 사용된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네 고통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하갈에게도 후손의 약속이 주어진다
여호와야훼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했다. 「내가 네 후손을 반드시 크게 늘리겠다.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것이다.」창세기 16:10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지금까지 창세기에서 아브람에게 주어진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3:16). 또한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5).
하갈은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의 수신자입니다.
앞에서는 그녀를 둘러싼 결정들이 모두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직접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미래는 단순히 사래의 집안을 세우는 역할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에 담긴 응답
여호와야훼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했다. 「보아라, 너는 임신했고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불러라. 여호와야훼가 네 고통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창세기 16:11 · 본디새김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이슈마엘(יִשְׁמָעֵאל)로, 「하나님이 들으신다」 또는 「하나님이 들으셨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갈이 하나님께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녀가 겪는 고통은 하나님에게 들렸습니다.
하갈이 앞으로 자신의 아들을 부를 때마다, 그 이름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셨다는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사래는 자녀를 얻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하나님이 막으신 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하갈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두 여인의 경험을 단순히 한 사람은 믿음이 있고 다른 사람은 믿음이 없다는 구도로 정리할 수는 없습니다. 사래의 고통도 실제입니다. 아이를 얻지 못하는 긴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래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선택한 방법은 하갈에게 새로운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하갈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들나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2절에서는 이스마엘의 미래가 독특한 비유로 묘사됩니다.
「그는 들나귀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의 손은 모두에게 맞서고, 모두의 손은 그에게 맞설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형제들의 맞은편에 살 것이다.」창세기 16:12 · 본디새김
「들나귀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단순히 거칠고 사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들나귀는 구약에서 반드시 부정적인 성격만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욥기 39:5–8에서 하나님은 들나귀에게 자유를 주시고 광야를 거처로 삼게 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들나귀는 사람의 통제 아래 있는 집짐승과 달리, 광야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이 배경을 고려하면 이스마엘에게 주어진 비유는 독립적이고 얽매이지 않는 삶의 모습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삶이라는 의미만 남겨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곧바로 그의 손이 모두에게 맞서고, 모두의 손이 그에게 맞설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호 대립과 갈등이 그의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의 「형제들의 맞은편」이라는 표현은 그들과 대립하는 관계로 읽을 수도 있고, 그들 앞이나 곁에 거주하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상호 대립 표현 때문에 긴장된 관계의 의미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이 예언을 후대의 특정 민족 전체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라는 평가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스마엘 개인과 그의 후손의 미래를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대의 어떤 민족의 성격을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스마엘에게는 번성의 약속과 갈등의 예고가 함께 주어집니다.
하갈이 사래의 집에서 경험한 삶은 다른 사람의 손에 자신의 운명이 놓인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들에 관해서는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들나귀의 이미지가 주어집니다. 이 대비를 하갈의 모든 억압이 이제 끝났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미래가 여종이라는 어머니의 현재 지위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1장에서 사라와 하갈 사이의 갈등은 다시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집에서 내보내집니다. 창세기 21:17에서는 하나님이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6장에서 주어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당신은 저를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 하갈이 하나님을 부르다
하갈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하갈은 자기에게 말한 여호와야훼를 「당신은 저를 보시는 하나님입니다」라고 불렀다. 하갈이 「내가 여기서 나를 보시는 분을 뵌 뒤에도 여전히 볼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창세기 16:13 · 본디새김
하갈이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행동에 근거하여 그분을 이렇게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이 고백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갈 자신이 보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사자는 그녀를 발견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물었습니다.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이 하나님을 알게 된 자리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곳이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던 현실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발견하신 자리였습니다.
「여전히 볼 수 있단 말인가?」 — 하갈의 놀라움
그녀는 하나님을 바라보지만, 먼저 자신이 하나님에게 보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물에 남겨진 이름
그래서 그 우물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라고 불렸다. 보라, 그 우물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창세기 16:14 · 본디새김
「브에르 라하이 로이」라는 이름은 대체로 「나를 보시는 살아 계신 분의 우물」 또는 이와 가까운 의미로 이해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 장소가 하갈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과 연결되어 기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이 있는 장소에서 하갈은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장소의 이름에 남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아타 엘 로이는 하나님이 보시는 분이라는 고백과 연결됩니다. 이 표현에는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에 관한 해석상의 여지가 있지만, 본문의 흐름과 뒤따르는 하갈의 말을 함께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보셨다는 의미가 중심을 이룹니다. 「여전히 볼 수 있단 말인가?」라는 문장은 히브리어에서도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하갈이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을 뵌 뒤에도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을 보시는 분을 이곳에서 직접 보았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뵙고도 살아 있다는 놀라움을 담은 말로 풀이하는 전통도 있지만, 그 의미가 문법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 가지 해석을 유일한 뜻으로 단정하기보다는, 하갈이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놀라움 속에서 고백한다는 점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브에르 라하이 로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의 세부적인 연결 방식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누가 실제로 그 우물의 이름을 붙였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하갈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브람이 부르다
이야기는 다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온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불렀다.창세기 16:15 · 본디새김
하갈이 광야에서 들었던 이름이 가족의 삶 속에 등장한 것입니다. 다만 하갈이 아브람에게 광야에서의 경험을 자세히 전해 주었는지, 아브람이 어떻게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주었을 때, 아브람은 여든여섯 살이었다.창세기 16:16 · 본디새김
마지막 두 절에서 하갈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반복됩니다. 이 아이는 아브람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갈이 낳은 아들입니다.
본문은 그의 출생을 기록하면서 하갈의 이름을 지우지 않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날 때는 일흔다섯 살이었습니다(12:4).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이제 아브람에게 실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6장은 이스마엘의 출생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래에게는 여전히 자녀가 없습니다. 하갈과 사래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사래가 주도한 계획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하갈이 낳은 아들의 출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갈라디아서 4:21–31에서는 바울이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언약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인물들을 신약의 언약 논의 안에서 읽는 후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그 읽기가 창세기 16장에 나오는 하갈의 고통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지워 버리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16장 자체에서 하갈은 먼저 실제 고통을 겪은 여인이며, 여호와야훼가 찾아오시고 말씀하신 사람입니다.
맺으며 — 아무도 묻지 않던 여인에게 하나님이 물으셨다
사람들의 계획 속에서 도구처럼 취급되었던 하갈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집에서 벌어진 일을 보셨고, 광야로 달아난 여인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에게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아브람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계획 속에서 자기 삶을 말할 기회조차 없었던 여인이, 광야의 물샘 곁에서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하갈은 자신의 고통이 들렸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아들의 이름은 이스마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을 지닌 그 이름과 함께, 하갈의 이야기는 다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