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2–24장 · 아브라함의 길
약속을 받은 사람의 이름을 바꾸시는 하나님
창세기 17장이 시작될 때 아브람은 아흔아홉 살입니다.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열세 살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이제 자녀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십삼 년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시며,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아브람의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 안에서 아브람과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규정하십니다.
「내 앞에서 살아가라. 온전하여라」 — 약속과 함께 주어진 요구
십삼 년의 간격 뒤에 나타나신 하나님
아브람이 아흔아홉 살이었을 때, 여호와야훼가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했다. 「나는 엘 샤다이다. 내 앞에서 살아가라. 온전하여라.」창세기 17: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람은 여든여섯 살이었습니다. 창세기는 그 기간에 아브람의 집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기록된 이야기에서는 긴 시간이 지난 뒤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엘 샤다이는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흔히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되지만, 샤다이의 정확한 어원과 본래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창세기 28:3에서 이삭은 야곱에게 엘 샤다이께서 복을 주시고 번성하게 하시기를 빕니다. 35:11에서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엘 샤다이라고 자신을 밝히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장에서도 엘 샤다이라는 자기소개 뒤에 번성과 민족들, 왕들에 관한 약속이 이어집니다.
아브람의 현실로는 후손의 미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때에,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밝히시며 번성의 약속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곧바로 자녀에 관한 약속부터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아브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령하십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완벽하게 죄가 없다는 뜻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노아는 자기 세대 가운데 온전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고 기록됩니다. 그러나 노아에게 온전하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가 평생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창세기 9장은 홍수 이후 노아의 취약한 모습도 기록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온전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앞으로 그가 어떤 실수도 하지 않을 초인적인 상태에 도달하라는 요구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문맥상 이 명령은 하나님 앞에서 삶을 온전히 살아가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실 땅과 후손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약속의 결과를 기다리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부르셨고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관계 안에서 아브람에게 온전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
아브람은 이 말씀을 듣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이 자세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서 보이는 경외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 이름은 아브라함이 될 것이다」 — 약속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바꾸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 너는 수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창세기 17:4 · 본디새김
창세기 12장에서는 아브람을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에 이어 그의 이름이 바뀝니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네 이름은 아브라함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수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삼았기 때문이다.」창세기 17:5 · 본디새김
본문은 이름의 소리를 활용하여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실제로 수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기 전부터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이 그의 현재 이름이 됩니다.
그가 날마다 듣고 사용하는 이름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갑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그가 이미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기념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입니다.
왕들이 나오리라는 약속
「네가 아주 아주 많은 자손을 낳게 하고, 너를 여러 민족으로 만들겠다. 왕들이 너에게서 나올 것이다.」창세기 17:6 · 본디새김
「아주 아주」라는 반복은 약속의 규모를 강조합니다. 그의 후손들은 서로 다른 집단을 이루고, 정치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며, 왕을 세우는 역사까지 이어 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영향력과 번성은 그가 자신의 생애 안에서 직접 누릴 권세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의 생애를 넘어 여러 세대를 향합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
「나는 나와 너 사이에, 또 나와 네 뒤를 이을 네 후손 사이에 내 언약을 대대로 영원한 언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를 이을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겠다.」창세기 17:7 · 본디새김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인가를 한 번 주신 뒤 떠나시는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지속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은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영원한 언약」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아브라함 한 사람의 생애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8절에서는 그 관계가 땅의 약속과 연결됩니다.
「네가 나그네로 사는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를 이을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창세기 17:8 · 본디새김
아브라함은 그 땅에 살고 있지만 아직 완전한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가 나그네로 머무르는 땅을 하나님은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현재의 신분과 미래의 약속이 한 문장 안에 놓입니다.
그런데 8절도 땅의 약속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7절에 이어 같은 선언이 반복됩니다.
땅과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실제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관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내 언약은 너희 살에 남을 것이다」 — 몸에 새겨지는 언약
아브라함에게도 지켜야 할 일이 있습니다
9절에서 말씀의 방향이 바뀝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너는 내 언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를 이을 네 후손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창세기 17:9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해야 할 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 관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표가 주어집니다.
왜 할례가 언약의 표가 되었을까?
「나와 너희 사이에 또 나와 네 뒤를 이을 네 후손 사이에 맺는 내 언약, 곧 너희가 지켜야 할 언약은 이것이다.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세기 17:10 · 본디새김
「너희는 너희 포피의 살을 베어 내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창세기 17:11 · 본디새김
여기서 처음으로 할례가 아브라함의 언약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세기 9:12–13에서는 하나님이 노아와 모든 생물에게 주신 언약의 표로 무지개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표는 다릅니다.
하늘에 나타나는 무지개가 아니라, 사람의 몸에 남는 표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할 수 있는 표를 사람들의 신체에 남기게 하십니다.
「네 집에서 태어난 사람과 네 돈으로 산 사람은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 내 언약은 너희 살에 영원한 언약으로 남을 것이다.」창세기 17:13 · 본디새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은 마음속의 믿음이나 말로 표현되는 고백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 관계는 몸에 남는 표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다만 이것을 할례 자체가 사람의 내면을 자동으로 의롭게 만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15장에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할례의 명령은 17장에서 주어집니다.
믿음이 의로 여겨진 사건이 먼저 있었고, 언약의 표가 그다음에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는 이미 시작된 언약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 태어난 지 여드레 되는 남자아이에게도 할례를 베풀까?
「너희는 대대로 모든 남자가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면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 집에서 태어난 사람도, 네 후손이 아닌 외국인 가운데 돈으로 사들인 모든 사람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세기 17:12 · 본디새김
이 명령은 성인이 된 후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언약이 한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믿었다는 사건은 개인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맺은 언약이 앞으로 태어날 세대에도 이어지게 하십니다.
그 후손들은 아브라함이 처음 부르심을 받았던 순간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약에 속한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그 언약의 표를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도 할례를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는 가족과 후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외국에서 온 사람들, 돈으로 사들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할례 명령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즉, 이 장에서 언약의 표를 받는 사람들의 범위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사람을 돈으로 사들이는 현실을 전제합니다. 그들이 자유로운 사람으로 해방되었다거나, 할례를 받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동의를 표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당시의 신분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장면으로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렇다고 이스마엘이나 집안의 다른 남성들이 할례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의 표를 받는 공동체의 범위와, 약속의 계보를 이어 갈 사람을 하나님이 특별히 지정하시는 일은 완전히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내 언약을 깨뜨렸다」
14절은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포피의 살을 베어 내는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할례받지 않은 그 사람은 자기 겨레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그는 내 언약을 깨뜨렸다.」창세기 17:14 · 본디새김
할례는 선택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장식적인 표가 아닙니다.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끊어질 것이다」가 정확히 어떤 처벌을 의미하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것을 가리키는지, 자손이나 생명이 끊어지는 것과 관련되는지, 하나님이 직접 내리시는 심판인지에 관해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처벌의 시행 방식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5:18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말합니다. 언약을 맺는다는 표현과 공동체에서 끊어진다는 경고가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이것을 반드시 의도적인 말장난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표가 몸의 일부를 베어 내는 할례이며, 그 표를 거부한 사람에게는 공동체에서 끊어짐이 선언된다는 사실은 강한 대비를 이룹니다.
몸에 남는 작은 표가 얼마나 중요한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후 신명기 10:16과 30:6에서는 마음의 할례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신명기 10장은 마음의 완고함을 버리라고 요구하고, 30장은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창세기 17장의 할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표를 지닌 공동체가 하나님을 향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더욱 깊게 묻는 연결입니다. 신약의 로마서 4:11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할례를 그 의의 표와 인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창세기 15장과 17장의 순서를 직접 활용한 후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그의 이름은 사라다」 — 약속의 중심에 다시 등장한 아내
아브라함의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네 아내 사래의 이름을 사래라고 부르지 마라. 그의 이름은 사라다.」창세기 17:15 · 본디새김
사라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녀를 낳아 주어야 할 사람으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복을 약속하시는 인물입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고, 그에게서 너에게 아들도 주겠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겠다. 그는 여러 민족을 이루게 되고, 여러 백성의 왕들이 그에게서 나올 것이다.」창세기 17:16 · 본디새김
여기서 「내가 그에게 복을 주겠다」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사라 자신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거듭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여러 민족과 왕들의 약속이 사라에게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고 사라는 그 약속을 위한 수단으로만 남아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사라 역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당사자로 등장합니다.
하갈을 통해 아이를 얻으려 했던 계획과 무엇이 다른가?
이 말씀은 창세기 16장의 사건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사래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하갈을 통해 집안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사라가 직접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후손이 태어난다는 이전 약속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누가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될 것인지 처음으로 분명히 밝혀집니다.
문제는 하갈이 낳은 아이가 가치 없는 아이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을 이어 가실 구체적인 계보가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그 계보를 밝혀 주십니다.
사라는 더 이상 다른 여인의 출산을 통해서만 자신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사라에게 복을 주시고,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웃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래와 사라는 모두 히브리어에서 높은 신분의 여성이나 귀부인을 가리키는 말과 연결됩니다. 두 이름 사이의 어원적 차이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세부적인 뜻을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웃음에서 태어날 아이, 그러나 잊히지 않는 이스마엘
아브라함은 왜 웃었을까?
아브라함은 얼굴을 숙여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백 살 된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날까? 사라가 아흔 살인데 아이를 낳을까?」창세기 17:17 · 본디새김
이 장에는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언약을 말씀하시기 시작할 때입니다(17:3). 두 번째는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에는 웃음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웃음이 순수한 기쁨인지, 불신의 비웃음인지, 놀라움과 의심이 섞인 반응인지는 한 가지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의 웃음과 아이의 이름이 같은 어근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너무 놀라워 웃었던 약속이, 나중에는 그 아이를 부를 때마다 떠올려지는 이름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놀라움을 지워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놀라움이 약속의 이야기 안에 남게 하십니다.
「부디 이스마엘이 당신 앞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말했다. 「부디 이스마엘이 당신 앞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창세기 17:18 · 본디새김
그러므로 이 말이 사라를 통한 출산 약속을 거절하는 요청인지, 이미 있는 아들을 위한 간구인지, 두 의미가 함께 담긴 말인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이스마엘의 미래를 언급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미 태어난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면서도, 이스마엘에 관한 그의 간구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이 말했다. 「참으로 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그 이름을 이삭이라 불러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워, 그 뒤를 이을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겠다.」창세기 17:19 · 본디새김
하나님은 사라가 낳을 이삭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이스마엘에 관한 약속이 이어집니다.
「이스마엘에 관해서도 네 말을 들었다. 보아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었다. 그에게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하고 그 자손의 수를 아주 아주 크게 늘리겠다. 그는 열두 우두머리를 낳을 것이고, 나는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창세기 17:20 · 본디새김
창세기 25:12–16에서는 실제로 이스마엘의 후손과 열두 우두머리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따라서 17장의 약속이 이후 족보와 연결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특별히 언약의 계보를 이어 가도록 지정하신 아들입니다. 이스마엘은 그 계보의 중심 인물로 지정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고 번성의 약속을 받는 아들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마엘이 언약의 계승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그를 완전히 버리셨다는 뜻으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언약의 계승자로 선택하신다는 사실과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신다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합니다.
「네 말을 들었다」 —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울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말을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에도 바로 그 「듣다」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에게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르라고 하신 이유는 여호와야훼가 그녀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셨기 때문입니다(16:11). 이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의 미래를 위해 말하자 하나님은 다시 들으신다는 표현으로 응답하십니다.
어머니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던 하나님이, 이제 아버지 아브라함의 간구도 들으십니다.
하갈은 억압받고 달아난 여인이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언약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나온 두 사람의 말에 모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이삭의 이름에는 웃음이 담깁니다.
이스마엘의 이름에는 들으심이 담깁니다.
마침내 시점이 밝혀지다
21절에서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라의 출산 시점을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
「그러나 내 언약은 이삭과 세우겠다. 사라가 다음 해 바로 이 정해진 때에 너에게 그를 낳아 줄 것이다.」창세기 17:21 · 본디새김
기다림의 끝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시간 속에 놓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자신이 백 살이 될 때의 일을 기다리게 됩니다. 창세기는 아직 그 장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그 아이의 이름을 미리 알려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의 표현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약속의 실현 가능성을 의아하게 여긴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백 살 된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뒤에 창세기 18장에서 사라도 웃습니다. 그때 여호와야훼는 사라가 왜 웃었는지 물으시고, 여호와야훼에게 어려운 일이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18:13–14). 반면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웃음을 직접 꾸짖으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이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도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새롭게 태어날 아들이 언약의 중심이 된다는 말씀 앞에서, 이스마엘이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지 않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19절의 「참으로」에 해당하는 아발(אֲבָל)은 앞선 아브라함의 요청과 대조되는 「그러나」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가 낳을 이삭이 언약의 계승자가 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반면 「참으로」라는 확언으로 읽으면 사라의 출산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 두드러집니다.
하나님이 올라가신 뒤, 아브라함은 바로 그날 행동한다
말씀을 들은 자리에서 곧바로 시작된 순종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끝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자기 집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와 자기 돈으로 산 모든 남자, 곧 아브라함의 집안 사람들 가운데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하나님이 그에게 말한 대로 바로 그날 그들의 포피의 살을 베어 내어 할례를 베풀었다.창세기 17:23 · 본디새김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라가 실제로 임신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약속의 성취를 아직 보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행합니다.
할례를 받은 이스마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삭
24–25절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나이를 다시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은 아흔아홉 살입니다. 이스마엘은 열세 살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삭에게는 언약의 계승이 약속되어 있고, 이미 살아 있는 이스마엘에게는 언약의 표가 주어집니다.
창세기는 선택과 복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정리하지 않습니다.
왜 집안의 모든 남자를 다시 나열할까?
23절에서 이미 아브라함의 집안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다고 기록했는데, 27절은 그 사실을 다시 반복합니다.
그 집안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외국인에게서 돈으로 산 사람들도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다.창세기 17:27 · 본디새김
하나님은 12–13절에서 집에서 태어난 남자와 돈으로 사들인 남자도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는 그 명령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이 실제로 할례를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자신에게 편리한 부분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에 주어진 명령 전체를 실행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창세기 15장에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날 바로 행동합니다.
두 장면은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신뢰하는 것이고, 그 신뢰는 현재 주어진 말씀에 응답하는 행동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의 행동을 모든 신자가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17장의 할례 명령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특정한 언약의 표에 관한 말씀입니다.
맺으며 —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름이 먼저 주어졌다
약속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름이 먼저 주어졌고, 약속의 미래가 이루어지기 전에 그 약속에 속한 사람들의 현재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들의 이름과 몸과 가족의 미래 속에 들어옵니다.
창세기 17장은 사라가 아이를 낳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흔아홉 살의 아브라함과 열세 살의 이스마엘, 그리고 그 집안의 모든 남자가 같은 날 할례를 받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미래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의 표는 이미 그들의 몸에 남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