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세상과 사람의 시작

땅이 삼킨 피, 하나님이 들으신 소리

창세기 4장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가인의 살인이지만, 이야기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살인의 순간이 아닙니다. 가인이 화를 내자 여호와야훼가 찾아와 말을 건네시는 장면, 살인 후에 여호와야훼가 다시 그를 불러 물으시는 장면, 그리고 형벌을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보호의 표징을 주시는 장면이 오히려 더 깁니다.

아벨은 이 이야기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은 형과 함께 등장하지만, 그의 생각이나 감정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죽는 순간에도 비명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아벨이 침묵했다고 해서 그의 죽음까지 침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흐름을 따라가면 창세기 4장은 최초의 살인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리고 인간이 생명을 파괴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74장 본문 읽기 →

얻었다고 기뻐한 아들, 이름보다 먼저 등장한 동생

창세기 4:1–2 본문 →

그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했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말했다. 「내가 여호와야훼와 함께 남자아이를 얻었다.」창세기 4: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사람은 에덴동산을 떠났습니다.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었고, 남자는 고생하며 땅을 일구어야 했습니다(3:16–19). 그러나 동산 밖에서 처음 기록되는 사건은 죽음이 아니라 탄생입니다. 에덴에서의 삶은 끝났지만 인간의 삶 자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와의 말에는 아들을 얻은 기쁨과 여호와야훼를 향한 인식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와는 아들의 탄생을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고, 여호와야훼와 관련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가인과 달리, 아벨의 탄생은 매우 짧게 기록됩니다.

하와가 다시 가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과 염소 떼를 치는 이가 되었고, 가인은 땅바닥을 일구는 이였다.창세기 4:2 · 본디새김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그의 동생’이라는 말이 ‘아벨’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나옵니다. 이야기 속 아벨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동생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이 물으실 때에도,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말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네 동생’입니다. 가인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자기 동생을 죽였습니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이 에덴 밖에서 감당해야 했던 노동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직업의 차이 자체를 선악의 차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목축이 경작보다 거룩하다거나, 가인이 땅을 일구었으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일어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여호와야훼와 함께」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해석이 갈립니다. 여기 사용된 말을 ‘함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목적어를 표시하는 말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후자의 경우 문장 구조와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어려움이 생깁니다. 본디새김은 하와가 여호와야훼의 도움 또는 참여 속에서 아이를 얻었다는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해석이지만, 원문의 모든 가능성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은 예물보다 중요한 질문

창세기 4:3–7 본문 →

얼마 뒤 두 형제가 여호와야훼에게 예물을 가져옵니다.

가인은 땅바닥에서 난 것의 일부를 가져옵니다. 아벨은 자기 양과 염소 떼의 첫 새끼 몇 마리와 그 기름진 부분을 가져옵니다.

아벨도 자기 양과 염소 떼의 첫 새끼 몇 마리와 그 첫 새끼들의 기름진 부분을 가져왔다. 여호와야훼가 아벨과 그의 예물을 호의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가인과 그의 예물을 호의로 바라보지 않았다. 가인은 몹시 화가 났고 얼굴을 떨구었다.창세기 4:4–5 · 본디새김

두 예물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인의 예물에는 특별한 품질이나 순서가 언급되지 않지만, 아벨의 예물에는 ‘첫 새끼’와 ‘기름진 부분’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뒤의 이스라엘 제사 규정에서 처음 난 것과 기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레위기 3:16–17; 출애굽기 13:12).

그러나 그 후대의 규정을 그대로 이 장에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4장은 아직 어떤 예물이 적합하다는 규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가인의 예물이 상한 것이었다거나, 남은 것을 대충 가져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곡식과 땅의 소산 자체가 부적합한 제물인 것도 아닙니다. 레위기 2장은 곡식으로 드리는 예물을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피가 있는 동물 제물만 받아 주시기 때문에 아벨의 예물을 받으셨다는 설명은 창세기 4장에서도, 뒤의 제사 규정과 비교해서도 충분한 근거를 얻기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의 이름이 예물보다 먼저 나옵니다. 여호와야훼는 ‘아벨과 그의 예물’, ‘가인과 그의 예물’을 바라보십니다. 예물은 그것을 가져온 사람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서로 다르게 바라보셨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하나님이 예물을 다르게 바라보신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가인이 그 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직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여호와야훼가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가인에게 말했다. 「너는 왜 화가 났느냐? 왜 얼굴을 떨구었느냐?」창세기 4:6 · 본디새김

가인은 이미 화가 났지만 아직 그 화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그 사이에 주어집니다.

「네가 잘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잘하지 않으면 죄가 문 앞에 웅크리고 있다. 그것의 갈망은 너를 향하지만, 너는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창세기 4:7 · 본디새김

죄는 멀리 떨어져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위험으로 그려집니다. 아직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가까이 와 있습니다.

‘갈망(⁨תְּשׁוּקָה⁩)’과 ‘다스리다(⁨מָשַׁל⁩)’는 바로 앞 장인 창세기 3:16에서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된 낱말과 같습니다. 3장에서는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관계에 생겨난 갈망과 지배의 긴장을 보여 주었습니다. 4장에서는 같은 표현이 가인과 죄 사이에 놓입니다.

가인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 다가온 죄를 다스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물을 호의로 바라보지 않으셨지만, 그에게 다시 말씀하시고 자기 행동을 돌아볼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가인이 이 말씀에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자기 동생에게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먼저 「얼굴을 들 수 있지 않겠느냐?」에 해당하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드는 것’에 가깝습니다. 무엇을 드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고 했으므로 얼굴을 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어근에는 죄를 짊어지거나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도 있어, 용서받거나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말한다고 읽는 길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가인의 현재 상태가 마지막 상태일 필요는 없다는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히브리어에서 ‘죄’인 하타트는 여성 명사인데, ‘웅크리고 있다’는 로베츠는 남성형입니다. 이어지는 ‘그것의 갈망’과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도 남성형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표현의 문법적 관계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웅크린 죄를 짐승처럼 의인화했다고 이해하는 읽기가 가능하지만 그 영상의 정확한 성격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동사는 문법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당위로도, ‘다스릴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도, ‘다스릴 것이다’라는 미래의 진술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당위로 옮겼습니다. 따라서 이를 가인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약속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없이 죽은 아벨, 말하는 피

창세기 4:8–12 본문 →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했다. 둘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였다.창세기 4:8 · 본디새김

가인이 아벨에게 말했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했는지가 없습니다.

살인의 장면은 놀랄 만큼 짧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하나님의 질문은 길고 무겁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가인에게 말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말했다. 「모릅니다. 제가 제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기 4:9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죄를 지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3:9). 이제 그 질문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3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디에 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4장에서는 그 사람의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상태만이 아니라 자기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도 질문받는 일입니다.

아벨은 살아 있을 때 양과 염소 떼를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인은 그런 아벨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그는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동생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말은 자신의 행동과 책임 사이를 끊으려는 대답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끊으려는 관계를 계속 붙드십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네가 무슨 일을 했느냐? 네 동생의 피의 소리가 땅바닥에서 내게 부르짖고 있다.」창세기 4:10 · 본디새김

여기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들리게 만듭니다.

가인은 들에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곳에는 이 일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증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아벨의 피가 흘러 들어간 땅바닥에서 그 소리를 들으십니다.

이어서 땅은 입을 가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제 너는 땅바닥으로부터 저주받았다. 그 땅은 네 손에서 네 동생의 피를 받으려고 입을 벌렸다.」창세기 4:11 · 본디새김

땅바닥은 가인이 평생 일구어 온 곳입니다. 그곳에서 난 것으로 그는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같은 땅바닥이 동생의 피를 받아들였고, 그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3:17에서는 아담 때문에 땅바닥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4:11에서 저주를 받는 주체는 가인 자신입니다.

「네가 땅바닥을 일굴 때 그 땅은 더 이상 네게 그 힘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땅에서 떠돌며 헤매는 사람이 될 것이다.」창세기 4:12 · 본디새김

그가 땅에서 태어난 생명을 죽였기 때문에 땅이 그의 삶을 지탱해 주지 않게 된다는 연결이 이야기 안에 형성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농사가 잘되지 않으리라는 예고가 아닙니다. 가인이 세상과 맺어 온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흘린 피를 땅속에 묻힌 채 지나가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동생을 지킬 책임이 있는지 반문했을 때, 하나님은 아벨의 생명이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임을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아벨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전체의 흐름에서도 이 문제는 이어집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9:5–6).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이 인간 사이의 폭력을 판단하는 근거로 제시됩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12:24는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가 말하는 것을 대비합니다. 이는 창세기 4:10의 이미지를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피가 지니는 의미를 밝히는 후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 자체의 이야기는 먼저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들으셨다는 사실 위에 서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소라 히브리어 본문에는 말한 내용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반면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에는 둘이 들로 나가자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 말이 히브리어 본문 전승에서 빠진 것인지, 이야기의 빈자리를 메우는 과정에서 더해진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디새김은 마소라 본문의 빈자리를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10절의 ‘피’는 복수형입니다. 피를 흘린 사건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이 복수형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피를 뜻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부르짖고 있다’에 해당하는 말도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피 흘림 자체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처럼 표현된 것입니다. 11절의 ‘으로부터’는 땅과의 단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고, 저주가 땅으로부터 온다는 뜻이나 앞서 저주받은 땅보다 더욱 저주받는다는 비교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죄인을 떠돌게 하면서도 죽이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4:13–16 본문 →

심판을 들은 가인은 여호와야훼에게 말합니다.

가인이 여호와야훼에게 말했다. 「제 벌은 제가 감당하기에 너무 큽니다.」창세기 4:13 · 본디새김

그는 땅바닥에서 쫓겨나고, 여호와야훼의 얼굴을 피해 숨게 되며, 떠돌아다니는 동안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합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인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야훼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 일곱 배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 가인을 만나는 누구도 그를 치지 못하도록 여호와야훼가 가인에게 표징을 주었다.창세기 4:15 · 본디새김

가인에게 내려진 심판은 유지되지만, 그를 향한 무제한의 폭력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피에 응답하시면서 동시에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십니다.

이는 가인의 행위를 가볍게 여기시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다른 사람들의 보복 욕구에 맡기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가인은 떠납니다.

가인은 여호와야훼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살았다.창세기 4:16 · 본디새김

14절에서 가인은 여호와야훼의 얼굴을 피해 숨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6절에서는 실제로 여호와야훼 앞을 떠납니다. 앞 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 밖으로 나왔다면, 이제 가인은 그곳에서 더욱 멀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에덴 동쪽’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연속성을 느끼게 합니다(3:24).

‘놋(⁨נוֹד⁩)’은 히브리어에서 떠돌고 헤매는 일을 나타내는 낱말과 소리로 이어집니다. 가인은 떠돌며 헤매라는 선고를 받았고, 이제 그 이름이 헤맴을 연상시키는 땅에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원문은 그가 놋 땅에 ‘살았다’고 합니다. 머물러 살았다는 뜻입니다.

떠돌라는 사람에게도 머무는 곳은 있었습니다. 이 긴장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조금 더 깊이

‘벌’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본은 죄, 죄책, 죄로 인한 형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또한 ‘감당하다’에 해당하는 동사에는 짐을 지는 뜻과 죄를 용서한다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자기 죄가 용서받기에는 너무 크다는 탄식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이 견디기에는 너무 무겁다는 호소일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뒤의 의미를 택했습니다. 이어지는 14절에서 가인이 길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죄보다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말만으로 회개의 유무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15절의 표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이마에 새긴 낙인이라는 설명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본문은 몸의 어느 부분에 무엇을 표시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떠도는 사람이 세운 성읍, 그리고 일흔일곱 배의 노래

창세기 4:17–24 본문 →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가인은 성읍을 짓고 있었고, 그 성읍의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불렀다.창세기 4:17 · 본디새김

가인은 자신이 아벨에게서 빼앗은 것과 같은 생명을 새로운 아들 안에서 얻습니다. 본문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건설이 완료되었다는 말보다 성읍을 짓고 있었다는 진행의 느낌을 줍니다.

이 장면은 앞의 심판과 긴장을 이룹니다. 떠돌며 헤매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사람이 한 장소에 정착할 수 있는 성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의도적인 반역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떠돌아야 하는 사람이 안정된 거처를 찾는 자연스러운 시도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의 후손들이 소개됩니다.

라멕에게 이르러 계보는 잠시 멈추고, 그의 가족이 이룬 생활의 모습들을 자세히 보여 줍니다. 야발은 천막에 살며 가축을 기르는 이들의 조상입니다. 유발은 킨노르와 우가브를 다루는 이들의 조상입니다. 두발가인은 구리와 철로 된 도구를 벼리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이것은 인간 문화의 여러 기원을 설명하는 서술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 역사에서 각각 그 기술을 최초로 발명했다는 사실까지 독립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을 특정 생활 방식이나 기술 전통의 조상으로 소개합니다.

본문은 성읍을 짓는 일, 악기를 다루는 일, 금속을 가공하는 일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술과 문화가 발전했다는 사실 자체를 하나님의 심판이나 인간의 타락과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형제를 죽인 사람의 계보에서도 가족이 생기고 공동생활이 이루어지며 새로운 기술과 문화가 발전합니다.

인간의 삶은 도덕적인 실패가 일어났다고 해서 단순히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발전이 곧 인간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라멕의 노래 — 하나님의 보호를 자기 보복의 자랑으로 바꾸다

라멕은 앞서 두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창세기 서술에서 두 아내를 둔 남자가 구체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앞서 제시된 남자와 여자의 결합(2:24)과 비교하면 달라진 결혼 형태를 볼 수 있지만, 이 구절 자체는 그 변화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덧붙이지 않습니다.

이어 라멕은 자기 아내들을 불러 말합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했다. 「아다와 씰라야,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가 내 상처 때문에 남자를, 내 멍 때문에 젊은이를 죽였다.」창세기 4:23 · 본디새김

상대가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지, 라멕이 당한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살인이 어떤 상황에서 일어났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자신이 죽인 사람에 대한 슬픔이나 두려움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내들에게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며, 자신이 행사한 폭력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의 절정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이 다시 등장합니다.

「가인을 위한 보복이 일곱 배이니, 라멕을 위한 보복은 일흔일곱 배다.」창세기 4:24 · 본디새김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 라멕에게서는 자신의 보복이 얼마나 클 것인지를 자랑하는 말이 됩니다.

라멕은 실제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실행할 권한을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선언합니다. 가인에게 주어진 보호는 폭력의 반복을 막는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라멕의 노래는 폭력을 더욱 크게 갚겠다는 선언으로 변합니다.

가인은 자신이 죽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라멕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뽐냅니다.

인간은 새로운 집을 짓고, 새로운 소리를 만들고, 새로운 도구를 제작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커진다고 해서 형제를 대하는 태도가 저절로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은 점점 다양해지지만, 그 힘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가 끝나자, 이야기는 전혀 다른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라멕의 노래에서 ‘남자’와 ‘젊은이’, ‘상처’와 ‘멍’이 서로 짝을 이룹니다. 따라서 라멕이 두 사람을 죽였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을 두 가지 표현으로 반복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시에서 의미가 비슷한 말을 나란히 놓는 방식이 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후손을 주셨다 — 다시 태어나는 생명, 다시 불리는 이름

창세기 4:25–26 본문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했다.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부르며 그 이유를 말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므로 하나님이 아벨 대신 내게 다른 후손을 주셨다.」창세기 4:25 · 본디새김

본문은 가인의 계보를 따라 여러 세대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처음의 부모에게 시선을 되돌립니다. 처음 가인을 낳았을 때 하와는 「내가 여호와야훼와 함께 남자아이를 얻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아벨 대신 내게 다른 후손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두 말에는 모두 하나님과 관련된 생명의 선물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커다란 상실이 있습니다. 하와는 아벨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를 죽인 사람이 가인이라는 사실도 말합니다.

새로운 아들의 탄생은 아벨의 죽음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하와는 셋을 말하면서도 아벨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후손을 주셨다고 하와가 고백하는 가운데, 상실을 겪은 가족에게 새로운 생명이 등장합니다.

셋에게도 아들이 태어났다. 셋이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불렀다. 그때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시작되었다.창세기 4:26 · 본디새김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은 사람의 이름을 짓는 일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로 옮겨 갑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다’는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한다는 뜻을 넘어,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 어떤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한 앞에서 가인과 아벨이 예물을 드렸으므로, 이때 비로소 사람들이 하나님을 처음으로 알거나 하나님께 처음으로 예배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마지막 문장을 바로 앞의 라멕의 노래와 나란히 읽어 보면 두 장면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자기 힘과 보복을 크게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것이 가인의 계보에 속한 모든 사람은 악하고 셋의 계보에 속한 모든 사람은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런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이 표현은 뒤에도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며(12:8; 13:4), 이삭도 그렇게 합니다(26:25). 창세기 4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처럼 뒤의 족장 이야기에서 되풀이되는 신앙 행위와도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후손’은 씨앗이나 자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낱말은 창세기 3:15에서 여자와 뱀의 후손에 관해 말할 때에도 등장했습니다. 두 구절을 나란히 읽으면 에덴에서의 불순종과 그 이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셋의 출생을 곧바로 3:15의 약속이 완성된 사건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4장은 셋에게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거나 그가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남는 질문

창세기 4:1–26 본문 →

하나님은 가인의 분노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아벨의 피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죄인에게 가해질 또 다른 폭력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심판과 생명을 향한 관심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와는 아벨을 잃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은 채 다른 후손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고, 그때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시작됩니다.

가인은 여호와야훼의 얼굴을 떠났고, 라멕은 자기 말을 들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는 다른 목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