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세상과 사람의 시작

눈은 열렸지만, 길은 닫혔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사람에게 놀라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눈이 열리고 하나님처럼 되어 좋고 나쁨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면 뱀의 말은 뜻밖에도 일부 실현됩니다. 두 사람은 열매를 먹고 실제로 눈이 열립니다. 나중에는 여호와야훼 하나님 자신도 사람이 좋고 나쁨을 아는 일에서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뱀은 옳은 말을 한 것일까요?

바로 앞 장의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벌거벗음은 가려야 할 것이 되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동산은 몸을 숨기는 장소가 됩니다.

이 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창세기 3장은 뱀이 여자를 유혹했다는 사건만 설명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며, 서로의 관계와 땅에서의 삶이 달라지는 과정을 세심하게 보여 줍니다.

창세기 3장은 눈이 열리는 장면에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해, 결국 하나의 길이 닫히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03장 본문 읽기 →

뱀의 첫 질문 —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창세기 3:1–3 본문 →

뱀은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만든 들의 모든 짐승보다 교활했다. 뱀이 여자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정말 『너희는 동산의 어느 나무에서도 먹지 마라』고 말씀하셨느냐?」창세기 3:1 · 본디새김

뱀은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만드신 들의 짐승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은 뱀이 어디에서 왔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 밖에서 침입한 독립적인 신이나 악의 세력이라고도 소개하지 않습니다.

뱀은 여자를 공격하거나 열매를 강제로 먹이지 않습니다. 먼저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지만, 정확하게 되풀이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2:16에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너는 동산의 어느 나무에서든 마음껏 먹어도 된다」였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나무 하나에 대해서만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질문에서는 그 풍성한 허락이 사라집니다.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금지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옮깁니다. 히브리어 문장의 부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어느 나무에서도 먹지 마라」라는 전면적인 금지로도, 「모든 나무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부분적인 금지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전면적인 금지로 옮겼고, 다음 절에서 여자가 먹을 수 있다고 반박하는 흐름은 이 읽기와 잘 맞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뱀은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 풍성한 허락보다 금지에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뱀이 처음으로 바꾸려는 것은 열매의 맛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여자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여자가 뱀에게 말했다. 「우리는 동산의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창세기 3:2 · 본디새김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너희가 죽지 않도록 그 나무에서 먹지도 말고 그 나무를 만지지도 마라』고 말씀하셨다.」창세기 3:3 · 본디새김

여자는 처음부터 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앞서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과 조금씩 다릅니다.

첫째, 하나님이 말씀하신 「마음껏」이라는 강조가 그의 대답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 여자는 금지된 나무를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라고 부릅니다. 2:9에서는 생명의 나무가 동산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먼저 명시되었고, 지식의 나무의 정확한 위치는 같은 정도로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셋째, 여자는 「만지지도 마라」는 금지를 추가합니다. 2:17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에는 먹지 말라는 말만 있습니다. 넷째, 죽음에 관한 표현도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지만, 여자는 「너희가 죽지 않도록」이라고 말합니다.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기록되지 않은 추가적인 설명을 들었는지도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원래의 명령이 남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만, 여자가 그것을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차이들을 모두 여자의 잘못이나 영적 무지의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독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뱀의 질문과 여자의 대답 속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듣습니다.

이야기는 아직 열매를 먹는 행동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화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두 존재가 그 말씀의 의미와 결과를 놓고 서로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음에 뱀은 질문을 멈추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바로 앞 장의 마지막에서 두 사람은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그 표현과 이 절의 「교활했다」(⁨עָרוּם⁩)는 말은 소리가 매우 비슷합니다. 이 소리의 겹침은 7절에서 두 사람이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깨닫는 순간 다시 돌아옵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뱀의 교활함과 인간의 벌거벗음이 문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 진실의 일부와 치명적인 부정

창세기 3:4–5 본문 →

뱀이 여자에게 말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창세기 3:4 · 본디새김
「너희가 그 나무에서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어 좋고 나쁨을 알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창세기 3:5 · 본디새김

뱀의 두 번째 말은 첫 번째 질문보다 훨씬 대담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행동의 결과에 대해 정반대의 주장이 제시됩니다.

뱀은 단지 열매를 먹으면 어떤 일이 생긴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 열매를 금지하셨는지에 대한 해석까지 제시합니다.

그 설명대로라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좋은 것을 숨기고 계신 셈입니다.

앞 장에서 동산을 마련하시고 먹을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뱀의 설명 속에서는 인간이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막으시는 분처럼 그려집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악한 의도로 그것을 숨기셨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본문은 뱀이 하나님의 동기를 설명한 내용을 하나님의 진술로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그 일의 의미와 결과까지 진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지금의 상태를 넘어 새로운 지식과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여자는 이제 나무를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처럼」이라는 표현 자체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엘로힘(⁨אֱלֹהִים⁩)은 문맥에 따라 하나님이나 신적인 존재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처럼」으로 읽을 수도 있고, 「신적인 존재들처럼」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호함은 22절에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이라고 말씀하시는 자리와 연결됩니다. 그때에도 「우리」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따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자가 본 것은 무엇인가 — 좋은 나무에서 금지된 열매로

창세기 3:6–7 본문 →

여자는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길을 끌며, 또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다는 것을 보았다. 그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던 남편에게도 주었다. 그도 먹었다.창세기 3:6 · 본디새김

이 절에서는 이야기의 속도가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뱀과 여자 사이에 여러 문장의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실제 행동은 매우 짧게 서술됩니다. 서술자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고민했는지, 서로 무엇을 상의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뱀과 여자의 대화를 처음부터 듣고 있었는지도 명시하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이 동산의 나무들을 「모습이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것들로 만드셨다는 설명을 기억하면 이 장면은 더욱 뜻밖입니다. 금지된 나무도 여자에게는 먹기에 좋고 보기에 매력적으로 나타납니다.

금지된 나무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동산에 있었으며, 열매 자체가 독하거나 파괴적인 물질이라고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그 나무에 대해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매력과 하나님이 주신 경계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순간, 여자는 열매를 먹는 쪽으로 행동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고 좋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자가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를 보고 「먹기에 좋다」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충돌할 때, 무엇을 따라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무가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다」는 표현도 앞선 뱀의 말과 연결됩니다. 여자는 단순히 배가 고파서 열매를 먹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 열매는 새로운 지식을 얻는 길처럼 보입니다.

눈은 열렸지만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꿰매어 자신들을 위한 허리 가리개를 만들었다.창세기 3:7 · 본디새김

변한 것은 몸 자체가 아니라 그 몸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앞에서는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가립니다.

흙먼지에서 빚어진 인간이 식물의 잎을 이용해 몸을 가리는 물건을 제작합니다. 그들이 만든 것은 온몸을 덮는 옷이 아니라 허리에 두르는 가리개입니다. 이 차이는 뒤에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장면을 이해할 때 중요해집니다.

그들은 뱀이 약속한 지식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처음 드러나는 모습은 새로운 자유가 아니라 자신을 감추려는 행동입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 앞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숨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 장면에 사용된 「좋다」(⁨טוֹב⁩)는 같은 히브리어 낱말입니다. 이야기는 지식을 갖는 것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지혜와 분별력을 적극적으로 권합니다(잠언 2:1–11). 또한 두 사람의 눈이 열린 것을 단순히 성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앞 장에서 이미 두 사람이 벌거벗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 두려움과 책임을 마주하다

창세기 3:8–13 본문 →

그들은 낮바람이 불 때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는 소리를 들었다. 그 사람과 그의 아내는 여호와야훼 하나님을 피해 동산의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창세기 3:8 · 본디새김

앞에서는 동산의 나무들이 먹을 것과 아름다움을 제공했습니다. 이제 그 나무들은 하나님을 피하기 위한 은신처가 됩니다. 그 장소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십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러 그에게 말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 본디새김

하나님은 금지된 열매를 누가 먹었는지부터 묻지 않으십니다. 먼저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십니다. 이야기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숨은 사람을 부르시고, 그가 대답할 자리를 마련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말했다. 「제가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벌거벗고 있어서 두려웠고, 그래서 숨었습니다.」창세기 3:10 · 본디새김

그런데 독자는 이 설명에서 빠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벌거벗은 것은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 장에서는 벌거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시는 소리가 특별히 달라졌다고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얻은 앎은 자기 몸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고, 그 변화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벌거벗음은 더 이상 단순한 몸의 상태가 아닙니다. 감추고 싶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행동의 문제를 짚으신다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말했다. 「네가 벌거벗었다고 누가 네게 알려 주었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에서 네가 먹었느냐?」창세기 3:11 · 본디새김

하나님은 사람이 두려워한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대화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앞의 질문이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드러냈다면, 이 질문은 그 상태에 이르게 된 행동을 향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벌거벗었다고 느끼는 것을 문제의 끝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 변화의 배경에 있는 명령 위반을 짚으십니다.

그런데 남자의 대답은 묘하게 깁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저와 함께 있도록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제게 주었고, 제가 먹었습니다.」창세기 3:12 · 본디새김

여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이 사람은 내 뼈에서 나온 뼈이고 내 살에서 나온 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는 여자가 자신과 깊이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기뻐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과의 공통성을 앞세웠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그 여자를 자신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앞세웁니다.

이 대답에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여자가 그에게 열매를 주었고, 그가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배열하는 방식은 자신의 행동보다 여자의 행동을 먼저 보게 만듭니다.

나아가 「당신이 … 주신 여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여자를 주셨다는 사실까지 끌어들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명시적인 고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남자의 대답이 책임의 초점을 자신에게만 두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가 실제로 한 행동을 고백하는 말은 문장의 마지막에 짧게 붙습니다.

여자의 대답도 같은 자리에서 끝난다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여자에게 말했다. 「네가 이 무슨 일을 했느냐?」 여자가 말했다. 「뱀이 저를 속였고, 제가 먹었습니다.」창세기 3:13 · 본디새김

여기서 「속였다」는 말은 단순히 사실과 다른 정보를 전달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상대를 꾀어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뱀이 여자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앞의 대화에서 확인됩니다.

그러나 여자가 뱀에게 속았다고 말하는 것과 여자가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다른 존재가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자신이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잘못된 행동에는 다른 존재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이 행동한 사람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여자에게 질문하시지만, 뱀에게는 질문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심판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야기는 이제 행동의 원인을 밝히는 대화에서 그 행동의 결과를 선포하는 장면으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낮바람이 불 때」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그날의 바람에」에 가깝습니다. 흔히 저녁 산들바람이 불 때라고 이해하지만, 원문은 정확한 시각을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두 사람이 들은 것이 하나님이 거니시는 소리인지, 동산을 옮겨 다니는 어떤 소리인지는 문법적으로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로 읽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본문은 하나님의 지식이 어디까지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르셨기 때문에 찾으셨다거나, 모든 것을 이미 아셨으므로 형식적으로 물으셨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창세기 4장에서는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은 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4:9). 이 질문은 3장의 「네가 어디 있느냐?」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장면 모두 하나님이 인간에게 질문하시고, 인간이 자신의 행동과 마주하게 되는 구조를 이룹니다.

뱀에게 내려진 말씀 — 관계가 적대로 바뀌다

창세기 3:14–15 본문 →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뱀에게 말했다. 「네가 이 일을 했으므로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 저주받았다. 너는 네가 사는 모든 날 동안 배로 기어 다니고 흙먼지를 먹을 것이다.」창세기 3:14 · 본디새김

뱀은 앞에서 다른 짐승들보다 교활한 존재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짐승들보다 더 저주받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뱀의 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의를 두겠다. 그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세기 3:15 · 본디새김

앞에서 뱀과 여자는 서로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여자는 뱀의 설명을 듣고 나무를 바라보았으며, 결국 열매를 먹었습니다. 뱀과 여자의 관계는 더 이상 유혹하는 자와 그 말을 듣는 자의 관계로만 이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적대는 그들 자신에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머리와 발꿈치 — 누가 이기는가

두 부위의 차이 때문에 머리를 다치는 쪽이 더 큰 손상을 입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어느 쪽이 마지막에 승리한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이 절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뱀과 여자의 후손들 사이에 적대 관계가 이어지고, 서로 상처를 입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뱀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관계가 계속 우호적인 관계로 유지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자와 남자에게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흙먼지를 먹는다」는 표현 역시 뱀의 먹이 종류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흙을 핥거나 먹는 모습이 낮아짐과 굴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미가 7:17; 이사야 49:23). 하지만 본문이 이 표현으로 뱀의 생물학적 기원과 상징적인 굴욕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설명하려 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5절의 두 문장에서 「상하게 하다」(⁨שׁוּף⁩)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같습니다. 그러나 이 동사의 정확한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예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후손」은 한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여러 후손을 집합적으로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반드시 한 사람의 특정한 후손이 나타나 뱀을 결정적으로 죽일 것이라고 문법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최초의 약속으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의 이야기 자체에서는 먼저 뱀과 여자, 그리고 그들의 후손 사이에 놓인 적의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특정한 한 인물에 대한 예언으로 확정하는 것은 후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사야 65:25에서는 장차 이루어질 평화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뱀이 흙을 먹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3:14의 뱀에 대한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의 문맥에서는 창세기에서 저주와 연결되었던 이미지가 새로운 평화의 질서를 설명하는 가운데 다시 등장합니다.

여자와 남자에게 내려진 말씀 — 생명을 이어 가는 일과 생명을 유지하는 일의 고통

창세기 3:16–19 본문 →

뱀에게 내려진 저주는 그의 몸과 후손의 관계를 다루었습니다.

여자와 남자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영역을 다룹니다. 여자에게는 임신과 출산, 남편과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남자에게는 땅을 일구고 먹을 것을 얻는 일이 언급됩니다.

여자의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

여자에게는 말했다. 「내가 네 고통과 네 임신을 크게 늘리겠다. 너는 고통 속에서 자녀를 낳을 것이다. 너의 갈망은 네 남편을 향할 것이고, 그는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세기 3:16 · 본디새김

히브리어 원문에는 「고통과 임신」이라는 두 명사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임신의 고통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고통과 임신이라는 두 요소를 구별해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두 낱말을 구별하여 옮겼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출산의 고통이 직접 언급되므로, 생명을 낳는 일이 고통과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출산에 관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갈망」에 해당하는 테슈카(⁨תְּשׁוּקָה⁩)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매우 드물게 등장합니다. 창세기 4:7에서는 죄의 갈망이 가인을 향한다고 표현하며, 가인은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반면 아가 7:10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갈망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낱말 자체만으로 갈망이 사랑과 친밀함을 뜻하는지, 상대를 지배하려는 욕구를 뜻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그는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말은 남편에게서 아내를 향한 권력 관계가 나타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남편이 아내를 다스려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앞으로 나타날 관계를 예고하시는 것일까요?

이 절의 문장 흐름을 보면 후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고통 속에서 자녀를 낳게 될 것이며, 갈망이 남편을 향하고, 남편이 그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 앞으로의 상태를 알리는 서술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남편에게 아내를 지배하라는 명령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상응하는 돕는 이」를 지어 주셨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보고 자신의 뼈와 살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몸이 되는 관계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두 사람 사이에 갈망과 다스림이라는 복잡한 관계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지배해야 한다는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계가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을 말씀하십니다. 이 예고가 어떤 문화와 시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지를 본문 하나로 모두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구절을 인간 사이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명령으로 사용할 근거는 없습니다.

남자의 고통과 땅바닥의 저주

그 사람에게는 말했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에서 먹었으므로, 땅바닥은 너 때문에 저주받았다. 너는 네가 사는 모든 날 동안 고통을 겪으며 그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것이다.」창세기 3:17 · 본디새김

문제는 아내의 말을 들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아내가 준 열매를 먹었고, 그 행동이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금지를 어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을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바꾸어 읽는 것은 본문의 초점을 벗어납니다.

뱀은 직접 저주받았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경우 저주받았다고 명시된 것은 땅바닥입니다.

사람은 땅바닥의 흙먼지로 빚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땅바닥을 일구도록 동산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바닥이 사람 때문에 저주받았다고 선언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그가 살아가는 환경과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할 것이고, 너는 들의 풀을 먹을 것이다.」창세기 3:18 · 본디새김

앞에서 땅바닥은 하나님이 명령하셨을 때 식물을 돋게 했습니다. 동산에는 보기 좋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자라났습니다. 사람은 앞으로도 땅에서 먹을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고통과 수고가 따르게 됩니다.

이것은 일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장면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동산을 일구고 지키는 일을 맡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일의 조건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동산에서 일했습니다. 이제는 저주받은 땅바닥에서 고통을 겪으며 먹을 것을 얻어야 합니다. 여자에게 출산의 고통이 예고되었다면, 남자에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의 고통이 예고됩니다.

두 사람의 삶에서 생명을 이어 가고 유지하는 일에 고통이 들어온 것입니다.

「너는 흙먼지이니 흙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네가 땅바닥으로 돌아갈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리며 음식을 먹을 것이다. 네가 거기에서 취해졌기 때문이다. 너는 흙먼지이니 흙먼지로 돌아갈 것이다.」창세기 3:19 · 본디새김

19절 마지막은 창세기 2:7과 정확하게 맞물립니다.

앞에서는 흙먼지에 생명의 숨이 주어지면서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출발점인 흙먼지로 돌아가는 일이 예고됩니다. 사람은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생명에는 시작이 있었고, 이제 끝도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뱀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흙먼지라는 자신의 기원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인간은 실제로 좋고 나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이 인간을 하나님처럼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흙먼지에서 나온 존재이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3:16에서 여자에게 주어진 「갈망」과 「다스림」이라는 표현은 4:7에서 거의 같은 문장 구조로 다시 등장합니다. 3장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4장의 죄와 가인의 관계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같은 낱말의 반복은 독자로 하여금 갈망과 다스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가인에게는 땅과 관련된 새로운 심판이 주어집니다. 그는 땅에서 저주를 받고, 땅을 일구더라도 그것이 더는 제 힘을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창세기 4:11–12). 이것은 3장에서 사람 때문에 땅바닥이 저주받은 사건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5:29에서는 노아라는 이름을 지으며 여호와야훼께서 저주하신 땅으로 인한 수고와 고통에서 위로를 얻기를 바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3:19의 선언이 인간에게 생물학적 죽음이 처음으로 가능해진 순간인지는 본문만으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2–3장은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일과 생명의 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는 일을 연결하지만, 창조 세계 전체에 죽음이 언제 처음 발생했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시편 90:3은 하나님이 인간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3:19에서 사람에게 선언된 흙먼지로의 귀환이 인간 삶의 유한성을 성찰하는 언어가 된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로마서 5:12–19가 한 사람의 불순종과 죽음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순종과 연결하여 신학적으로 전개합니다.

죽음이 선고된 뒤에 붙여진 이름 — 하와

창세기 3:20–21 본문 →

그 사람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었다. 그 여자가 살아 있는 모든 이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창세기 3:20 · 본디새김

죽음에 관한 선언이 끝난 직후,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흙먼지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죽음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여자는 생명과 관련된 이름을 얻습니다.

죽음의 선언과 생명의 이름이 나란히 놓인 것입니다.

첫 출산은 다음 장에서야 등장합니다(창세기 4:1). 그런데 이미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이의 어머니로 불립니다. 이름이 먼저 주어지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일은 앞으로 전개됩니다.

여자의 이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다음 장면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행동하십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과 그의 아내를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혔다.창세기 3:21 · 본디새김

앞에서 두 사람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허리 가리개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가죽옷을 만드십니다. 그들이 만든 것은 허리에 두르는 가리개였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몸에 입는 옷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돌보심이 같은 이야기 안에 함께 남아 있습니다.

가죽옷을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완전한 선언으로 이해하면, 뒤에 이어지는 추방의 의미가 약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오직 벌을 내리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면, 하나님이 직접 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행동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곧이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동산에서 내보내십니다.

옷을 입혀 주신 행동이 동산에 계속 머물 수 있다는 허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을 남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고백한 행위라고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에게 죽음이 선고되었지만, 여자를 통해 생명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야기의 위치를 고려하면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남자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으며, 그가 믿음이나 희망 때문에 하와라는 이름을 선택했다고 직접 말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두 사람 사이의 새로운 권력 관계를 드러낸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남자의 의도를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가죽을 어디에서 얻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물이 희생되었다거나, 그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 제사였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가죽이라는 재료에서 동물의 죽음을 연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이 구절의 명시적인 사건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다」 — 인간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창세기 3:22–23 본문 →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말했다. 「보아라. 그 사람이 좋고 나쁨을 아는 일에서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뻗어 생명의 나무에서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지 않도록…」창세기 3:22 · 본디새김

앞에서 뱀은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 좋고 나쁨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이 실제로 그 앎에서 신적인 존재와 비슷해졌음을 인정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뱀이 옳았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아직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뱀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의 나무에서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지 않도록 하시려 하십니다. 이 말은 인간이 좋고 나쁨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는 사실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두 나무의 의미가 갈라진다

좋고 나쁨에 관한 지식의 나무는 이미 열매를 먹은 나무입니다. 생명의 나무는 아직 먹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창세기 2:9에서는 두 나무가 함께 등장했지만, 그때에는 각각이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지식의 나무는 인간의 앎과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 연결됩니다.

생명의 나무는 영원히 사는 문제에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미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대신 사람이 생명의 나무에까지 손을 뻗는 일을 막으십니다.

또한 22절의 문장은 완결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행동이 나옵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어, 그가 취해진 땅바닥을 일구도록 했다.창세기 3:23 · 본디새김

하나님은 말로 결론을 설명하는 대신 행동하십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동산에 두셨습니다. 이제는 동산에서 내보내십니다. 앞에서 사람은 동산을 일구고 지키도록 놓였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취해진 땅바닥을 일구게 됩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람에게 일이 주어지지만, 일하는 장소가 달라졌습니다. 앞에서 동산은 사람이 만든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자리를 잃습니다.

눈이 열린 인간은 이제 자신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마주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우리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의 「우리」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26의 복수형 표현처럼 하늘의 회중을 떠올리는 읽기와 하나님의 자기 지시로 이해하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 절의 핵심은 사람이 좋고 나쁨을 아는 일에서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왜 그 상태의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을 막아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상태로 영원히 살아가는 일을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목적을 직접 진술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설명을 하나님의 확정적인 동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22절의 말은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끝까지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주절이 생략된 채 문장이 끊깁니다.

생명의 나무로 가는 길 — 닫힌 문이 아니라 지켜지는 길

창세기 3:24 본문 →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내쫓고, 생명의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도록 에덴 동산 동쪽에 케루브들과 이리저리 도는 칼의 불꽃을 두었다.창세기 3:24 · 본디새김

23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내보내셨습니다. 24절에서는 그를 내쫓으셨다고 다시 말합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동산을 떠나 새로운 땅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막혔는가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단순히 동산 전체를 봉쇄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22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려 하셨다는 말씀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나무들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동산에서 쫓겨난 뒤에는 더 이상 그 나무들 사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피해 스스로 숨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생명의 나무에 이르는 길을 막으십니다.

동산의 나무들은 처음에 먹을 것과 아름다움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다 사람이 하나님을 피해 숨는 장소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사람이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생명의 나무가 남습니다.

창세기 3장은 나무에서 시작된 유혹의 이야기를 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는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케루브들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케루브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거룩한 공간에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25:18–22에서는 언약궤 위에 케루브들이 있으며, 하나님이 그 사이에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에덴 동산의 케루브들을 하나님과 관련된 특별한 공간을 지키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이리저리 도는」(⁨הָפַךְ⁩)이라는 표현은 문법상 칼에 연결됩니다. 그러나 케루브들과 불꽃이 어떤 배치로 놓였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2:1–2에는 생명의 나무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들은 창세기 3장의 후대 정경적 해석과 발전이며, 창세기 3장 자체가 모든 내용을 직접 진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산 밖으로 나가는 사람

창세기 3:1–24 본문 →

인간은 새로운 지식을 얻었지만, 그 지식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온전하게 유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뱀이 약속한 지식의 획득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뱀이 제시한 기대와 달랐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나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결과를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들이 입은 옷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만, 그들이 떠나야 하는 자리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생명의 나무가 있던 곳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동산 동쪽에는 케루브들이 있고, 이리저리 도는 칼의 불꽃이 생명의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킵니다.

눈이 열린 두 사람 앞에 이제 하나의 길이 닫혀 있습니다.

그들은 옷을 입고 동산 밖에 서 있습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입혀 주신 옷을 걸친 채, 그 하나님이 막으신 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