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42장
이 장의 자리 · 37–50장 · 요셉과 이집트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형들이 죄를 알아보다
요셉의 형 열 명이 이집트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곡식을 사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곡식을 파는 사람 앞에 엎드리는 순간, 오래전에 꾸었던 꿈 하나가 현실이 됩니다.
형들은 끝까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이 그에게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동생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동생이 겪었던 고통은 기억해 냅니다.
창세기 42장은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만나는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먼저 자신들이 외면했던 죄와 다시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곡식을 구하러 가는 열 형제, 집에 남겨진 한 형제
「너희는 왜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왜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창세기 42:1 · 본디새김
이야기는 굶주림에서 시작합니다.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고, 야곱의 가족은 먹을 것을 구해야 합니다.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야곱은 아들들에게 그곳으로 내려가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에서 아들들이 이집트로 가기를 꺼렸다고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집트가 요셉이 팔려 간 곳이기 때문에 형들이 불편해했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문은 그런 동기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보아라.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곳으로 내려가서 우리를 위해 거기서 곡식을 사 와라.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고 죽지 않을 것이다.」창세기 42:2 · 본디새김
여기서 「살아남고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강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뒤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다시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42:18, 20).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에서 형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한 사람의 생존을 위협했던 일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왜 열 명만 내려갔는가
요셉에게는 형 열 명과 동생 베냐민 한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그 애에게 해가 닥칠까 두렵다.」라고 했기 때문이다.창세기 42:4 · 본디새김
두 사람은 라헬이 낳은 아들들입니다(창세기 30:22–24; 35:16–18). 야곱은 이미 요셉을 잃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라헬에게서 태어난 다른 아들 베냐민마저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다른 열 아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베냐민만 아버지 곁에 남습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된 가족의 문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야곱은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특별히 사랑했고, 그 차별적인 사랑은 형제들의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37:3–4).
이제 요셉이 사라진 뒤에도 가족 안에는 특별히 보호받는 아들이 있습니다.
베냐민을 보내는 일은 단순히 여행에 동행할 사람 한 명을 더하는 일이 아닙니다. 야곱에게는 마지막으로 지키려는 아들을 다시 위험에 내놓는 일입니다.
꿈은 이루어졌지만,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열일곱 살 요셉이 꾸었던 꿈
그 땅을 다스리는 사람은 요셉이었고, 그 땅의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사람도 그였다. 요셉의 형들이 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했다.창세기 42:6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창세기 37:7에 등장하는 요셉의 첫 번째 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꿈에서 요셉의 곡식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그 단을 둘러싸고 절했습니다. 형들은 그 꿈을 듣고 요셉에게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려느냐고 물었습니다(37:8). 그런데 지금 요셉은 실제로 곡식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고, 형들은 곡식을 사기 위해 그에게 절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베냐민은 아직 오지 않았고, 부모에 관한 두 번째 꿈의 장면도 이곳에서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형들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했던 형들 앞에서 우쭐거리지도 않습니다.
대신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알아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요셉은 형들을 보고 알아보았지만, 그들에게 모르는 사람처럼 굴며 거칠게 말했다. 그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했다. 「먹을 것을 사려고 가나안 땅에서 왔습니다.」창세기 42:7 · 본디새김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창세기 42:8 · 본디새김
요셉이 형들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이 두 번 반복됩니다. 요셉은 자신과 형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지금 자신들을 심문하는 이집트 통치자가 바로 그때 팔아넘긴 동생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리고 요셉은 이 차이를 유지하기로 선택합니다.
요셉은 이미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질문합니다. 이 질문으로 그는 형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듣기 시작합니다.
꿈을 기억하고 정탐꾼이라고 몰아붙이다
요셉은 그들에 관해 꾸었던 꿈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정탐꾼이다. 이 땅의 허술한 곳을 보러 왔구나.」창세기 42:9 · 본디새김
그러나 꿈을 기억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이후의 모든 행동을 어떤 의도로 계획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형들을 시험하여 달라졌는지 알아보려 했을 수 있습니다. 베냐민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랜 상처와 분노가 그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요셉이 자신의 동기를 직접 설명하는 장면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처음부터 형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모든 과정을 치밀하게 설계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독자는 형들이 실제로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말은 사실과 다른 고발입니다.
본문은 요셉의 모든 행동을 모범적인 것으로 평가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지켜보게 합니다.
「저희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 사실이면서도 불편한 말
정직하다는 주장
형들은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즉시 부인합니다.
「저희는 모두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저희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나리의 종들은 정탐꾼이었던 적이 없습니다.」창세기 42:11 · 본디새김
그들의 말은 지금 이집트에 온 목적과 관련해서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사려고 왔으며, 이집트를 정탐하러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독자는 그들의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동생을 팔아넘겼고, 그의 옷에 피를 묻혀 아버지를 속였습니다(창세기 37:31–33). 그런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을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집트를 정탐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자신의 가족에게 정직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요셉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형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감추었던 진실을 스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열두 형제 가운데 없는 한 사람
형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설명합니다.
그들이 말했다. 「나리의 종인 저희는 열두 형제이며, 가나안 땅에 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막내는 저희 아버지와 함께 있고, 한 명은 없습니다.」창세기 42:13 · 본디새김
그 ‘없는 한 명’이 바로 자신들을 심문하고 있는 요셉입니다.
여기서 형들은 요셉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명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형들이 요셉의 죽음을 확신했는지, 그저 가족 가운데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말했는지는 이 표현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열두 형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가족 안에는 없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족 정보이면서 동시에 오랜 상실의 기록입니다.
왜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는가
요셉은 막내 동생을 데려오라고 요구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시험을 받을 것이다. 파라오의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너희 막내 동생이 이곳에 오지 않으면 너희는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창세기 42:15 · 본디새김
정탐꾼 혐의를 검증한다는 명분이지만, 베냐민을 데려오는 일이 어떻게 첩자 여부를 직접 입증하는지는 완전히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요구가 형제들을 다시 가족의 문제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어 하지 않아 집에 남겨 둔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형들이 살아남고 자신들의 혐의를 벗으려면 그 베냐민을 이집트로 데려와야 합니다.
요셉의 요구는 처음에 더욱 엄격했습니다.
한 사람만 보내고 나머지 모두를 감옥에 가두겠다고 합니다(42:16). 그리고 실제로 형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둡니다.
과거에 형들은 요셉의 자유를 빼앗아 구덩이에 가두었습니다. 이제 요셉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고, 형들은 그의 명령으로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은 형들을 계속 가두지 않습니다. 사흘이 지난 뒤 자신의 조건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 달라진 조건
요셉은 형들을 모두 가두지 않는다
사흘째 되는 날, 요셉은 형들을 다시 불러 말합니다.
사흘째 되는 날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여 살아남아라.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창세기 42:18 · 본디새김
처음에는 한 사람만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모두가 감옥에 남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조건을 바꿉니다.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너희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은 너희가 갇혀 있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 나머지는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덜어 줄 곡식을 가지고 가라.」창세기 42:19 · 본디새김
가나안에 있는 가족이 굶주리고 있으므로 많은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야 합니다. 형들이 대부분 감옥에 남아 있다면 가족이 필요로 하는 식량을 운반하는 데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행동은 요셉이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가족들의 생존을 위한 길을 열어 두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앞서 요셉은 파라오의 생명을 두고 맹세했습니다(42:15–16). 그런데 사흘 뒤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처음 맹세를 철회한다는 형식적인 선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왕의 권위를 내세운 위협과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고백을 서로 가까이 배치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사건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창세기 22:12).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나타냅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한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모든 행동이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탐꾼이라는 거짓 혐의를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다만 이 장면에서 그 고백 뒤에 나오는 행동은 형제들에게 살아남을 길을 열어 주는 일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생사를 좌우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그 권한의 최종적인 주인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창세기 42장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거나 행동하셨다는 서술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거짓 고발이나 형들의 감금까지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선한 결과를 이루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악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그가 사흘 동안 형들을 가두면서 어떤 감정적 변화를 겪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요셉이 처음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처음부터 형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이러한 과정을 마련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한쪽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형들에게 가혹한 요구를 내놓았다가, 사흘 뒤에는 그 요구를 완화했다는 사실입니다.
형들은 처음으로 동생의 울음소리를 이야기한다
왜 지금 요셉의 일을 떠올리는가
요셉이 조건을 제시하자 형들은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했다. 「우리는 정말 동생에게 죄를 지었어. 그 애가 우리에게 애원할 때 겪던 괴로움을 우리가 보고도 그 말을 듣지 않았지. 그래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창세기 42:21 · 본디새김
요셉은 정탐꾼이라고 몰아붙이고, 동생을 데려오라고 요구했으며, 형들 가운데 한 사람을 인질로 남기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동생을 팔았던 일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괴로움이 그때의 잘못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자유를 빼앗겼던 것처럼 이제 형들은 요셉에게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형들도 이집트 통치자의 결정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형들에게 애원했듯이, 이제 형들도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자신들이 정직하다고 거듭 주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처지의 역전 속에서 그들은 오래전 자신들이 외면했던 동생의 괴로움을 떠올립니다.
창세기 37장에는 없었던 장면
형들의 말에는 이전 이야기에서 직접 묘사되지 않았던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넣고 팔아넘기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요셉이 그들에게 애원했다는 장면은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형들이 기억하는 것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 하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 일을 당하던 동생이 얼마나 괴로워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동생이 겪었던 괴로움과 자신들이 겪는 괴로움이 같은 말로 이어집니다. 이 반복은 형들이 현재의 고통을 과거의 고통과 연결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형들이 그렇게 해석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형벌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명시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르우벤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르우벤이 형들의 말에 응답합니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했다. 「내가 너희에게 『그 애에게 죄를 짓지 마라.』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듣지 않았다. 보아라. 이제 그 애의 피에 대한 책임까지 추궁되고 있다.」창세기 42:22 · 본디새김
창세기 37:21–22에서 르우벤은 요셉을 죽이지 말라고 말했고, 나중에 그를 구덩이에서 꺼내 아버지에게 돌려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지금 자신의 과거 행동을 언급하는 데는 실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이 말로 자신을 완전히 무죄라고 선언하고 있다고까지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형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지금 그들에게 동생의 피에 대한 책임이 추궁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형들이 요셉이 실제로 죽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과 같은 심각한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의 말을 누가 듣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요셉이 알아듣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요셉과 그들 사이에 통역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창세기 42:23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끼리 과거의 죄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죄의 피해자가 그 고백을 듣고 있습니다.
요셉은 왜 울었는가
요셉은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물러나 울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돌아와 말을 하고, 그들 가운데서 시므온을 데려다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묶었다.창세기 42:24 · 본디새김
울었다고 해서 곧바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거나 형들을 모두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는 형들의 고백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만, 동시에 한 사람을 인질로 남기는 조치를 실행합니다.
그리고 형들은 그가 우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시므온이 묶이는 모습을 봅니다.
독자는 두 모습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르우벤은 이 일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지만, 수동 표현만으로 누가 책임을 추궁하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눈물의 이유를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형들이 자신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움직였을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 자신이 겪은 일이 떠올랐을 수도 있고, 형들의 죄책감과 현재의 처지를 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요셉이 왜 울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왜 시므온을 선택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르우벤이 앞서 요셉을 보호하려 했기 때문에 시므온을 택했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러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돌려받은 은이 왜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 되는가
요셉이 내린 세 가지 명령
형들을 돌려보내면서 요셉은 사람들에게 명령합니다.
요셉이 명령하자 사람들이 그들의 자루를 곡식으로 채웠다. 또 요셉은 그들의 은을 각자의 자루에 돌려 넣으라고, 그들에게 길에서 먹을 양식을 주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들에게 그렇게 해 주었다.창세기 42:25 · 본디새김
곡식을 채워 주고 여행 중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는 행동은 형들과 가나안의 가족이 살아남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러나 은을 몰래 돌려 넣는 행동은 그 의미가 조금 더 복잡합니다.
요셉이 왜 은을 돌려 넣었는지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형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형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피려는 목적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두 요소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은을 돌려준 일을 순수한 선물이나 치밀하게 계획된 시험 가운데 하나로만 단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이 은을 돌려 넣게 했지만 형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은을 발견한 형들의 두려움
가는 길에 한 형제가 자기 자루를 열었다가 은을 발견합니다.
그가 형제들에게 말했다. 「내 은이 돌아왔어. 여기 내 자루 안에 있어.」 그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떨면서 서로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찌 이런 일을 하셨을까?」창세기 42:28 · 본디새김
그들은 이미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은 이집트에 인질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곡식을 산 대가로 지불한 은이 다시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누군가 자신들이 값을 치르지 않고 곡식을 가져갔다고 주장할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형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을 예상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은을 자루에 돌려 넣도록 명령한 사람이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하나님과 연결하여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믿음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인지 묻고 있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심판하고 계신 것인지 두려워하는 질문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보는 사람들
독자는 요셉이 형들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형들은 모릅니다.
독자는 요셉이 형들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형들은 모릅니다.
독자는 은을 돌려 넣으라고 명령한 사람이 요셉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형들은 그것도 모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일부만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일부만으로 사건 전체의 의미를 설명하려 할 때, 실제 상황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42장은 죄를 깨닫는 일이 곧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일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집으로 돌아온 두려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형들은 가나안으로 돌아와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탐꾼으로 몰렸고, 한 형제를 남겨 둔 채 돌아왔으며, 막내 동생을 데려와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저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저희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는 정탐꾼이었던 적이 없습니다.』」창세기 42:31 · 본디새김
그런데 실제로 요셉을 팔아넘겼던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그들이 요셉 앞에서 나눈 죄책감의 고백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그 고백을 전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 자신이 속였던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같은 단계가 아닙니다.
한 개가 아니라 열 개의 은 꾸러미
형제들이 자루를 비우자 새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이 자루를 비우는데, 각자의 은 꾸러미가 자기 자루 안에 있었다.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는 그 은 꾸러미들을 보고 두려워했다.창세기 42:35 · 본디새김
가는 길에서는 한 사람의 자루에서 은이 발견되었습니다. 형들이 길에서 경험했던 두려움이 아버지에게까지 확장됩니다.
특히 야곱에게는 이 사건이 이미 겪은 상실과 연결됩니다. 그는 아들들이 곡식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시므온이 돌아오지 않았으며 이제 베냐민까지 보내야 한다는 문제에 집중합니다.
「이 모든 일이 나에게 닥치는구나」 — 아버지가 보는 세계
야곱은 아들들을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내게서 자식들을 앗아 갔다. 요셉도 없고 시므온도 없는데, 베냐민마저 데려가려 하는구나. 이 모든 일이 나에게 닥치는구나.」창세기 42:36 · 본디새김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믿고 있으며, 그 죽음에 형들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설명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야곱은 아들들이 돌아올 때마다 가족의 일부가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독자는 야곱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죽지 않았습니다. 시므온도 이집트에 살아 있습니다.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요구를 한 사람도 요셉입니다.
그의 고통은 실제입니다. 요셉을 잃었다고 믿고 살아온 시간도 실제였고, 시므온이 돌아오지 않은 현실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사건의 모든 진실을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야곱이 보고 있는 현실은 거짓이 아니지만, 그가 알고 있는 현실이 전부는 아닙니다.
르우벤의 약속은 왜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는가
르우벤은 베냐민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부탁합니다.
르우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그 애를 아버지께 데려오지 못하면 제 두 아들을 죽이십시오. 그 애를 제 손에 맡겨 주십시오. 제가 그 애를 아버지께 돌려드리겠습니다.」창세기 42:37 · 본디새김
이 제안은 가족의 상실을 막기 위해 다른 가족의 생명을 담보로 내놓는 형태입니다. 르우벤이 얼마나 절박하게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 약속이 실제로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베냐민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르우벤의 두 아들을 죽인다고 해서 베냐민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야곱에게는 손자들까지 잃을 가능성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본문은 야곱이 이 제안의 어떤 점 때문에 거절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베냐민을 보내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가 말했다.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 애의 형은 죽었고 그 애만 홀로 남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가는 길에서 그 애에게 해가 닥치면, 너희는 백발이 된 나를 슬픔 속에 스올로 내려가게 할 것이다.」창세기 42:38 · 본디새김
요셉을 잃었다고 믿는 야곱은 베냐민에게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직 떠나지 못하는 가족
시므온은 여전히 이집트에 갇혀 있습니다. 그를 구하려면 베냐민을 데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결과 시므온을 되찾을 길도 막힙니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시작된 여행이 이제 가족 안에 남아 있는 두려움과 불신을 드러내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야곱에게는 다른 아들들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애만 홀로 남았다’는 말은 모든 아들 가운데 베냐민 하나만 남았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문맥상 라헬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 가운데 이제 베냐민만 남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야곱은 베냐민마저 잃게 되면 자신이 슬픔 속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처음에 형들은 자신들이 굶어 죽지 않으려고 이집트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그들은 오래전에 자신들이 한 사람을 어떤 처지에 몰아넣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직 화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상처를 주었던 사람의 고통을 기억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야곱은 백발이 된 자신이 슬픔 속에 죽게 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잃었다고 믿는 요셉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더구나 그 요셉이 지금 시므온의 석방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며,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요구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다고 믿고, 형들은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며, 동생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습니다.
창세기 42장은 아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가족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화해에 필요한 말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지만,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진실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