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46장
이 장의 자리 · 37–50장 · 요셉과 이집트
약속의 땅을 떠나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야곱은 평생 기다려 온 아들을 만나러 갑니다.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제 그 얼굴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6장은 이 기쁜 재회를 곧장 보여 주지 않습니다. 먼저 야곱을 브엘세바에 세웁니다. 그곳에서 그는 희생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은 밤중에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하나님의 허락과 약속이 필요했을까요?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은 단순한 가족 방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가나안에서 모은 재산과 가축을 모두 가져가고, 아들들과 손자들까지 함께 이주시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려는 것입니다.
창세기 46장의 중심에는 한 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멀어지는 길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멈춘 야곱 — 약속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조상의 하나님을 찾다
46장 1절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그는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에게 희생 제물들을 바쳤다.창세기 46:1 · 본디새김
브엘세바는 야곱에게 특별한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불렀고(창세기 21:33), 이삭도 이곳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26:23–25). 야곱 자신 역시 젊은 시절 이곳을 떠나 하란으로 향했습니다(28:10).
이삭은 흉년이 들었을 때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함께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26:1–5).
그런데 지금 야곱은 정반대의 길을 가려 합니다.
같은 흉년이라는 상황에서 이삭은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고, 야곱은 내려가도 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바뀌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은 다르지만, 두 명령을 떠받치는 약속은 같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삭에게는 가나안에 머무는 것이 그 약속에 대한 순종이었고, 야곱에게는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이 그 약속에 대한 순종이 됩니다.
야곱이 희생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이러한 전환점에 놓여 있습니다. 본문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제물을 바쳤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족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이동에 앞서 조상의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야곱아, 야곱아」 — 두려움을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밤의 환상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밤의 환상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말을 건넸다. 그가 말했다. 「야곱아, 야곱아.」 야곱이 말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창세기 46:2 · 본디새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던 장면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기 22:11), 훗날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들리는 「모세야, 모세야」(출애굽기 3:4)를 떠올리게 하는 부름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사람이 응답하는 짧은 대화 속에서, 가족의 이동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입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하나님,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거기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창세기 46:3 · 본디새김
본문은 야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큰 민족이 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음 부름받았을 때부터 약속된 일이었습니다(창세기 12:2).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 일이 이집트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에게 이집트는 당장의 굶주림을 피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장소입니다.
이 사실은 앞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5:13–16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손이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로 살며 압제를 겪은 뒤 돌아올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따라서 46장의 약속은 이집트 생활이 언제나 평안하리라는 보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 당장의 가족 재회보다 훨씬 긴 역사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내려가고, 내가 올라오게 하겠다」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고,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은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창세기 46:4 · 본디새김
야곱은 내려가지만, 하나님은 그 길을 지켜보시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함께 내려가십니다.
젊은 야곱이 가족을 떠나 하란으로 향했을 때,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8:15). 이번에도 하나님은 같은 방식으로 약속하십니다. 다만 이제 야곱은 홀로 도망치는 청년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느리고 이동하는 늙은 아버지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뜻밖에도 아주 개인적입니다.
앞에서는 큰 민족의 탄생과 귀환을 약속하시던 하나님이, 이제 야곱의 임종 곁에 누가 있을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요셉이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으리라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오랫동안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살아 있고, 그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볼 것입니다.
커다란 역사의 약속과 한 사람의 아주 사적인 슬픔이 한 말씀 안에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두 동작 앞에 「내가」가 거듭 강조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다시 데리고 올라오시겠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야곱 개인의 귀환입니다. 야곱은 이집트에서 죽지만, 그의 유해는 나중에 가나안으로 옮겨져 조상들의 묘지에 묻힙니다(창세기 50:12–13). 그러나 더 큰 문맥에서는 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미래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두 차원 중 어느 하나만이 이 구절의 유일한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 자체가 야곱의 장례와 후손들의 귀환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의 이야기를 함께 열어 놓습니다.
떠나는 가족, 시작되는 민족
파라오의 수레에 실려 가는 아브라함의 후손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길을 떠납니다.
이번에는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와 아이들, 아내들을 수레에 태웁니다. 그 수레는 파라오가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직접 이끌고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실제 이동에는 파라오의 허락과 수레가 사용됩니다.
46장 5–7절은 가족 전체가 이동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가축과 재산, 아들들과 손자들, 딸들과 손녀들이 함께 갑니다. 6절과 7절은 모두 「모든 자손」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잠깐 머물다가 돌아오는 여행이 아닙니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장면 바로 다음에 아주 긴 이름 목록을 배치합니다. 극적인 재회를 기다리던 독자는 갑자기 르우벤의 아들들부터 시작되는 족보를 읽게 됩니다.
왜 이처럼 감동적인 이야기의 한가운데 족보가 등장할까요?
그 이유는 이 이야기가 더 이상 요셉과 야곱 두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족보는 이동하는 가족의 얼굴을 보여 준다
8–25절의 족보는 네 여자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레아의 자손들이 먼저 등장하고, 이어 질파와 라헬, 빌하의 자손들이 나옵니다. 야곱에게서 태어난 열두 아들의 가계가 그 어머니들을 따라 묶여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처음부터 화목한 하나의 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경쟁, 두 여종을 통한 출산, 아버지의 편애, 형제들의 갈등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서로 얽히고 갈라졌던 가족이 이제는 하나의 무리로 이집트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족보는 과거의 갈등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갈등을 겪었던 가족의 구성 그대로를 기록합니다.
유다의 아들들은 에르와 오난과 셸라와 베레스와 세라였다. 에르와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 베레스의 아들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었다.창세기 46:12 · 본디새김
그들은 이집트로 내려간 사람이 아니지만 유다 가계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뒤이어 베레스의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창세기 38장에서 다말을 통해 이어졌던 유다의 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유다의 가족사는 부끄러운 일과 죽음, 예상하지 못했던 출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계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흠 없는 가족의 역사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잘못과 상실이 있었던 가계도 새로운 세대를 이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목록에는 여자들의 이름도 등장합니다. 야곱의 딸 디나(15절)와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그렇습니다. 실제로 야곱의 아들들의 아내들은 26절의 인원 계산에서 제외됩니다.
또한 시므온의 아들 사울은 「가나안 여자의 아들」로 소개되고, 요셉의 두 아들은 이집트 제사장의 딸 아스낫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됩니다(10절, 20절). 이처럼 족보에는 가나안 여자와 이집트 여자가 낳은 자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계가 외부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순수한 혈통이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 가계들이 이제 함께 이집트에 들어갑니다.
왜 예순여섯 명이었다가 일흔 명이 되는가
26절과 27절에는 서로 다른 숫자가 나옵니다.
26절은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간 사람들이 예순여섯 명이었다고 합니다. 27절은 야곱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일흔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차이는 집계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예순여섯 명은 야곱과 함께 이동한 그의 혈육을 가리키되, 야곱 자신과 이미 이집트에 있던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은 제외한 숫자입니다. 이들에게 야곱 한 명, 요셉 한 명, 요셉의 두 아들 두 명을 더하면 일흔 명이 됩니다.
본문이 제시하는 네 모계의 소계도 레아 서른세 명, 질파 열여섯 명, 라헬 열네 명, 빌하 일곱 명으로, 합계는 일흔 명입니다.
출애굽기 1:5는 이집트로 들어온 야곱의 자손이 일흔 명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합니다. 이어서 1:7은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고 매우 강해져 그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창세기 46장의 일흔 명은 그 뒤에 전개될 출애굽 이야기의 출발점이 됩니다.
신명기 10:22에서도 모세는 이 사실을 회상합니다. 이집트로 내려간 조상은 일흔 명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아직 거대한 민족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름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미래가 들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세부 이름을 하나씩 세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습니다. 특히 레아의 명단에서 이미 죽은 에르와 오난을 제외하면 이름이 확인되는 사람은 서른두 명인데, 15절의 소계는 서른세 명입니다. 야곱 자신을 집안 전체의 계산에 포함하면 총합 일흔 명이 설명되지만, 야곱은 레아의 자손이 아니므로 소계의 표현이 완전히 명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은 요셉의 자손 다섯 명을 더 기록하고, 전체 인원을 일흔다섯 명으로 제시합니다(칠십인역 창세기 46:20, 27). 이는 이름의 범위와 집계에 서로 다른 본문 전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족보를 모든 사람의 출입을 기록한 현대식 인구조사표로 취급하고, 기록되지 않은 인물을 임의로 더해 숫자를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요셉과 야곱의 재회 — 약속이 한 사람의 얼굴을 얻다
다시 앞에 서는 유다
28절에서 이야기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자기보다 앞서 고센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게 하려고 유다를 먼저 요셉에게 보냈다. 그들은 고센 땅에 도착했다.창세기 46:28 · 본디새김
창세기 37장에서 유다는 요셉을 죽이는 대신 팔자고 제안했던 사람입니다(37:26–27). 이후 창세기 44장에서는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대신 종이 되겠다고 나섰습니다(44:33–34).
요셉을 가족에게서 떠나보내는 데 관여했던 사람이 이제 가족을 요셉에게로 이끄는 자리에 섭니다.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계속 우는 요셉
29절에서 마침내 기다리던 재회가 이루어집니다.
요셉은 자기 병거에 말을 매고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고센으로 올라갔다. 그는 아버지 앞에 나타나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그 목을 껴안은 채 계속 울었다.창세기 46:29 · 본디새김
요셉이 자신을 드러낸 뒤 형제들과 함께 울던 장면(창세기 45:14–15)을 지나, 이제 오랫동안 헤어졌던 아버지와 마주한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형제들이 가져온 피 묻은 옷을 보고 그는 아들을 위해 오래 슬퍼했고,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37:33–35).
이제 야곱 앞에는 그 아들이 살아서 서 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성공한 관리로 등장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오랫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아들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네가 아직 살아 있어 네 얼굴을 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좋겠다.」창세기 46:30 · 본디새김
창세기 45:28에서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을 보러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표현의 중심은 죽음보다 「네 얼굴을 보았으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임종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 약속이 전제하는 가족의 재회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고통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야곱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의 슬픔을 바꾸십니다.
야곱에게 주어진 위로는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제 죽어도 좋겠다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 그의 가족에게는 새로운 삶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어디에 살며, 어떤 사람들로 살아갈 것인가요?
목자들이 살 땅을 마련하다 — 구원받은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요셉이 가족에게 준비시키는 대답
재회 이후 요셉은 곧바로 실무적인 일을 시작합니다.
그는 파라오에게 가족의 도착을 알리겠다고 말하면서, 가족들이 어떤 일을 해 왔는지도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양과 염소를 치는 사람들입니다. 가축을 길러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양과 염소 떼와 소 떼, 자기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가져왔습니다.』」창세기 46:32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이 이집트의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가족도 궁정에 속한 사람들처럼 행세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오랫동안 목축업에 종사해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려 합니다.
그리고 파라오가 직접 직업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지시합니다.
「『임금님의 종들인 저희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축을 기르며 살아왔습니다. 저희도, 저희 조상들도 그러했습니다.』 하고 말씀드리십시오. 이는 여러분이 고센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양과 염소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혐오하기 때문입니다.」창세기 46:34 · 본디새김
먼저 파라오 앞에서 「임금님의 종들」이라는 존중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집트에 살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직업이 아버지와 조상들에게서 이어져 왔음을 밝힙니다.
이집트 왕에게 예의를 갖추면서도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싫어하는 직업이 오히려 거주지를 결정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목자를 혐오한다면, 가족이 목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불리하지 않을까요? 요셉은 왜 굳이 그 사실을 강조하게 할까요?
그는 가족이 이집트의 아무 곳에나 흩어져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목축업을 계속하며 함께 머물 수 있는 고센 땅에 정착시키려 합니다.
목자를 싫어한다는 이집트 사회의 태도는 차별이나 사회적 거리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거리감이 가족을 별도의 지역에 정착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읽힙니다.
가족이 이집트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삶이 안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굶주림을 피했더라도 직업을 유지하고 살 곳을 얻어야 하며, 낯선 사회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는 파라오의 권한을 이용해 가족을 보호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족이 조상 때부터 살아온 방식을 버리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왕의 관리이지만, 그의 가족은 여전히 목자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들은 이집트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이집트 사회와 구별되는 생활을 이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극적인 구출뿐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거처를 마련하고 생업을 이어 가게 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조금 더 깊이
고센은 일반적으로 이집트 북동부의 나일강 삼각주 지역과 연결되지만, 이 이야기의 고센을 현대 지도의 정확한 경계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집트 사람들이 왜 목자를 혐오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유목 생활을 하는 외부 집단에 대한 경계일 수도 있고, 이집트인들의 사회적·종교적 관습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확정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또한 이 말을 이집트 사회에서는 목축업 자체가 금지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장인 창세기 47:6에서 파라오는 자기 소유의 가축을 관리할 사람을 요셉의 가족 중에서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46:34의 표현은 적어도 이야기 속에서 목자로 살아온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인들에게 사회적 거리감의 대상이었다는 뜻으로 읽는 편이 적절합니다.
약속을 따라 산다는 것
그럼에도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떠나고, 요셉은 가족이 살아갈 자리를 마련합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땅에만 계신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모든 선택을 직접 지시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의 결정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함께 내려가시겠다고 선언하신 이후, 사람들의 평범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집트에 들어온 그들은 아직 일흔 명의 가족입니다. 고센에서 살아갈 땅을 필요로 하고, 가축을 먹일 곳을 찾아야 하며, 이집트 왕에게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 왔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그들은 아직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큰 민족이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조상 때부터 길러 온 양과 염소와 소 떼를 이끌고, 낯선 땅에서 살아갈 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목자들의 가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고,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창세기 46장은 그 약속을 간직한 채 고센에 도착한 가족의 모습에서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