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세상과 사람의 시작

하나님이 보신 세상과 남기려 하신 생명

창세기 6장에는 세 번의 중요한 ‘봄’이 등장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봅니다. 그다음에는 여호와야훼가 사람을 보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땅을 보십니다.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취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시고, 그 세상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확인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고 매우 좋다고 평가하셨습니다(1:31). 그러나 이제 같은 세계를 바라보시며 그곳이 망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세상에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이 자녀를 낳고,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가며, 이름난 용사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힘이 커지는 동안, 그들이 살아가는 땅에는 폭력이 가득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생물을 지워 버리겠다고 선언하신 뒤, 노아에게 그것들을 살아 있게 할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모든 것을 멸하겠다는 선언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어떻게 살려 둘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창세기 6장은 홍수가 일어나는 장이 아닙니다. 홍수가 왜 임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홍수 속에서도 생명이 어떻게 보존될 것인지를 하나님이 밝히시는 장입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76장 본문 읽기 →

자기들이 택하는 대로 누구든 — 힘을 가진 이들의 세계

창세기 6:1–4 본문 →

사람이 땅바닥 위에서 많아지기 시작하고 그들에게 딸들이 태어났을 때,창세기 6:1 · 본디새김

이 장의 첫 문장은 창세기 1:28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 장의 계보에서 반복되던 출생과 번성이 이제 인류 전체의 상황으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번성이 어떤 세계를 만들어 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하는 대로 누구든 아내로 맞아들였다.창세기 6:2 · 본디새김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첫째는 하늘에 속한 존재들이라는 해석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계보에 속한 남성들이라는 해석입니다. 셋째는 왕이나 권력자들이라는 해석입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느냐에 따라 사건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하늘에 속한 존재들의 경계 침범으로 볼 수도 있고, 인간 공동체 안에서의 잘못된 결혼과 권력 행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6장만으로 이들의 정체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눈여겨볼 표현은 오히려 「자기들이 택하는 대로 누구든」입니다.

본문은 그 여자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결혼을 원하는지, 누구를 선택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선택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것만으로 모든 결혼이 강압적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문장은 선택권을 가진 이들의 행동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3:6에서 여자가 나무를 보고 그 열매가 먹음직하다고 여긴 뒤 가져다 먹었던 장면도 떠오릅니다. 두 장면 모두 ‘보다’와 ‘취하다’라는 행동을 연결합니다. 다만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건의 성격이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많아진 세계에서 누가 무엇을 원하는가뿐 아니라, 누가 자기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영원히 다투지 않겠다는 선언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내 영이 사람과 영원히 다투지는 않을 것이다.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될 것이다.」창세기 6:3 · 본디새김

먼저 「다투지는 않을 것이다」(⁨דִּין⁩)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의 뜻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처럼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다툰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영이 사람 안에 머무른다거나 사람을 다스린다는 방향으로 읽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끝없이 인간의 악함과 다투시거나 그것을 억제하시지 않겠다는 뜻이 됩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인간에게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으리라는 뜻에 가까워집니다. 두 읽기 모두 이어지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수명이 백이십 년으로 제한된다는 읽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 수백 년을 살았던 사람들이 등장한 직후이므로, 인간의 생애가 제한되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홍수가 오기까지 백이십 년의 유예 기간을 주셨다는 읽기도 있습니다. 앞뒤 문맥이 인류의 악함과 심판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첫 번째 읽기에는 홍수 이후에도 백이십 년을 넘게 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창세기 11:10–32). 두 번째 읽기에는 이 선언부터 홍수까지의 기간이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누구든 취할 수 있는 듯 행동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날이 한정되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네피림과 이름난 사람들

그때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뒤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가고 그 여자들이 그들에게 자녀를 낳아 주곤 하던 때에도 있었다.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 이름난 사람들이었다.창세기 6:4 · 본디새김

네피림의 정확한 정체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이름을 히브리어의 ‘떨어지다’라는 동사와 연결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네피림이 ‘타락한 천사’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민수기 13:33에서는 가나안을 정탐한 사람들이 네피림을 언급하며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보였다고 말하지만, 그 보고는 정탐꾼들의 진술이므로 창세기 6장의 네피림에 대한 객관적인 신체 묘사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의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 이름난 사람들이었다」가 정확히 네피림을 가리키는지, 그 관계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네피림이 반드시 그 결합으로 태어난 자녀들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는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시선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토록 힘 있는 존재들과 이름난 사람들이 있었던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늘에 속한 존재들이라는 해석은 욥기 1:6과 2:1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야훼 앞에 나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문맥에서는 인간이 아닌 하늘의 존재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대조도 이러한 읽기를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계보에 속한 남성들이라는 해석은 앞 장에서 셋의 후손을 따라 계보가 이어졌고, 창세기 4:26에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기록됩니다. 다만 창세기 6장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손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앞선 계보를 연결해 읽는 해석인 것입니다. 왕이나 권력자들이라는 해석은 고대 사회에서 왕권과 신적인 지위를 연결하는 표현들이 사용되었고, 이 구절에서도 자기들이 원하는 여자를 누구든 아내로 맞아들이는 권력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을 왕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든 세상을 보고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6:5–8 본문 →

여호와야훼는 땅에 사람의 악함이 크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성향이 언제나 오직 악할 뿐임을 보았다.창세기 6: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아름다움과 선택, 용사와 명성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기억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신 것은 인간의 악함입니다.

히브리어 문장에는 악함이 얼마나 깊고 넓게 퍼졌는지를 강조하는 말들이 겹쳐 있습니다. ‘모든’, ‘언제나’, ‘오직’, ‘악’이라는 표현이 한 문장에 모입니다.

단순히 사람들이 가끔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과 의도가 만들어지는 방향 자체가 악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평가입니다. 문장의 강조점은 인간의 악함이 일시적이거나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자기가 땅에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했고, 마음 아파했다.창세기 6:6 · 본디새김

사람의 마음에서 악함이 나오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고통을 느끼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망가진 것을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신이 세우신 규칙이 위반되었으므로 기계적으로 벌을 내리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만드신 사람들의 상태를 보시고 깊이 반응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땅바닥 위에서 지워 버리겠다. 사람에서 집짐승까지, 기어 다니는 것까지, 하늘의 날짐승까지 지워 버리겠다. 내가 그들을 만든 것을 후회하기 때문이다.」창세기 6:7 · 본디새김

여기서 ‘지워 버리겠다’(⁨מָחָה⁩)는 말은 무엇인가를 없애거나 닦아 내는 동사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각각의 동물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동물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도덕적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인간의 악함이 인간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전체가 심판의 범위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야훼의 호감을 얻었다.창세기 6:8 · 본디새김

‘그러나’로 시작하는 새로운 가능성

이 짧은 접속사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꿉니다.

‘호감을 얻었다’(⁨חֵן⁩)는 히브리어 관용구는 문자적으로 ‘눈에 호의를 찾았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노아가 특별한 호의를 받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8절은 노아가 왜 호의를 얻었는지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곧이어 그의 의로움이 소개되지만, 그 의로움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공로였는지, 하나님의 호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 짧은 문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먼저 하나님의 호의를 말하고, 그다음 노아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합니다.

조금 더 깊이

‘후회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함(⁨נָחַם⁩)입니다. 문맥에 따라 후회하다, 뜻을 돌이키다, 위로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바로 앞 장에서 라멕이 노아의 이름을 지으며 「이 아이가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에도 같은 어근이 사용되었습니다(5:29). 라멕은 고통받는 사람이 위로받기를 기대했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이 만드신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며 후회하시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이 표현이 하나님의 지식에 관해 어떤 철학적 결론을 내려야 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은 인간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매우 직접적인 말로 보여 줍니다.

모두가 자기 길을 망가뜨렸을 때, 하나님과 함께 걸은 사람

창세기 6:9–13 본문 →

노아의 내력은 이러했다.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자기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서 온전했다.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창세기 6:9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을 알립니다.

앞 장이 아담의 내력을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면, 이제는 노아의 내력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출생과 수명의 숫자가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노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먼저 설명됩니다.

‘온전하다’는 말을 노아에게 특별한 혈통적 순수성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구절은 그의 조상이나 유전적 특성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의로움과 하나님과의 동행이 함께 기록되는 문맥에서는 그의 삶의 온전함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은 그의 생애 전체에 죄가 전혀 없었다는 명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걸었다’는 표현은 창세기 5:22–24에서 에녹에게 사용된 것과 같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 표현이 특별히 새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길을 망가뜨렸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뜻하는지는 뒤의 이야기에서 조금씩 드러납니다. 적어도 이 장의 마지막에는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기록됩니다.

망가진 땅을 하나님이 보시다

노아의 세 아들이 소개된 뒤, 본문은 다시 땅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땅이 하나님 앞에서 망가졌고,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창세기 6:11 · 본디새김

5절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악하다고 평가했습니다. 11절에서는 그 악함이 사회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이것은 앞 장들에서 점점 확장되어 온 문제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자기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다음에는 라멕이 자기에게 생긴 상처에 대해 사람을 죽였다고 노래했습니다. 이제 폭력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땅 전체를 설명하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땅을 보았다. 보라, 땅이 망가져 있었다. 모든 육체가 땅 위에서 자기 길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창세기 6:12 · 본디새김

세계의 상태와 그 안에 사는 존재들의 행위가 같은 낱말로 연결됩니다. 이때 ‘모든 육체’가 인간만을 가리키는지, 다른 생물들까지 포함하는지는 문맥에 따라 논의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홍수의 대상에는 동물도 포함되지만, 폭력과 도덕적 책임에 관한 서술은 주로 인간의 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은 왜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했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이르렀다. 그들 때문에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겠다.」창세기 6:13 · 본디새김

‘망가뜨리다’(⁨שָׁחַת⁩)와 ‘멸하다’는 히브리어로 같은 어근을 사용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파괴적인 행위와 하나님의 파괴적인 심판을 같은 어휘로 연결합니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폭력과 하나님의 심판이 도덕적으로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인간의 폭력을 심판의 원인으로 설명하고, 하나님의 행동을 그 세계에 대한 심판으로 제시합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망가뜨린 행동이 이제 그 세계를 잃는 심판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독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명령을 듣습니다.

멸하겠다는 선언 다음에 나온 건축 명령

창세기 6:14–16 본문 →

「너를 위해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에 칸들을 만들고, 그 안과 밖에 역청을 발라라.」창세기 6:14 · 본디새김

파괴를 선언하신 하나님이 건축을 명령하십니다.

그것도 단지 노아 한 사람을 피신시키는 장소가 아니라, 앞으로 여러 생물이 함께 들어갈 공간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6장의 방주에도 배를 움직이기 위한 돛이나 노, 방향을 조종할 키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방주가 어떤 재료로 만들어지는지, 그 안에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지입니다. 생물들이 들어갈 여러 공간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숫자로 설명되는 생명의 공간

「너는 그것을 이렇게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암마, 너비는 오십 암마, 높이는 삼십 암마로 하여라.」창세기 6:15 · 본디새김

길이는 너비의 여섯 배이고, 너비는 높이의 5:3 비율입니다. 이어 지붕과 입구, 세 개의 층을 만들라는 지시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막연히 안전한 곳을 찾아 피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방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하나씩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방주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이미 앞으로 살아 있게 될 존재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방주’(⁨תֵּבָה⁩)에 해당하는 낱말은 노아의 방주와, 출애굽기 2:3에서 아기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띄운 갈대 상자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두 장면에서 모두 물은 생명에 위협이 됩니다. 그러나 같은 물 위에 띄워진 상자 같은 구조물이 생명을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페르 나무’가 어떤 수종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붕으로 옮긴 히브리어 초하르(⁨צֹהַר⁩)가 정확히 어떤 구조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빛이 들어오는 창이나 개구부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위쪽에서 한 암마에 이르도록 마무리하라는 표현 역시 구조를 확정적으로 복원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짧은 설명만으로 방주의 정확한 외형을 완전히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멸하겠다는 하나님이 살아 있게 하라고 명령하시다

창세기 6:17–21 본문 →

「보아라. 바로 내가 몸 안에 생명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를 하늘 아래에서 멸하려고 땅 위에 홍수의 물을 가져오겠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숨이 끊어질 것이다.」창세기 6:17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은 처음으로 심판의 구체적인 수단을 밝히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물을 나누시고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1:6–10). 그리고 그 땅과 하늘과 바다에 살아갈 생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아직 실제 홍수의 진행이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물이 창조된 생명들의 삶을 위협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창조 질서가 뒤집히는 모습이 예고됩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명의 숨은 사람만이 아니라 몸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들을 설명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언약을 너와 세우겠다. 너는 방주로 들어가라.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너와 함께 들어가라.」창세기 6:18 · 본디새김

여기서 또다시 「그러나」라는 전환이 나타납니다.

처음 등장하는 언약

창세기에서 ‘언약’이라는 낱말이 처음 등장하는 자리가 바로 이곳입니다. 노아가 먼저 하나님께 어떤 조건을 제안하거나 협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하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앞 장에서 이어져 온 출생과 계보가 이제 한 가족의 생존 문제와 연결됩니다. 노아의 생명이 보존되는 것은 그 혼자만의 삶이 지속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가족들이 살아남는 일이기도 합니다.

뒤의 창세기 9:9–17에서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후손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물과 관련된 언약을 밝히십니다. 창세기 6장은 아직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이미 언약 선언 바로 다음에 다른 생명들을 방주에 들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살아 있게 하라는 명령

「살아 있는 모든 것 가운데서, 모든 육체 가운데서 각각 둘씩 방주로 데려와 너와 함께 살아 있게 하여라. 그것들은 수컷과 암컷이어야 한다.」창세기 6:19 · 본디새김

하나님은 모든 육체를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이 노아에게 생물들을 살아 있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에게는 다른 생명들을 보존할 책임이 맡겨집니다.

각각 수컷과 암컷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말씀은 지금 당장의 생존만이 아니라 이후에 생명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까지 포함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생물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그 종류대로 생물들을 방주에 들이도록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창조의 다양성이 심판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 오게 될 생물들

「네가 그것들을 살아 있게 하도록, 날짐승은 그 종류대로, 집짐승은 그 종류대로, 땅바닥의 모든 기어 다니는 것은 그 종류대로 각각 둘씩 네게 올 것이다.」창세기 6:20 · 본디새김

19절에서는 노아가 생물들을 방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20절에서는 그 생물들이 노아에게 올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노아에게는 생물을 데려와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 일을 가능하게 할 생물들의 움직임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포함됩니다. 노아가 어떻게 각각의 생물을 모으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이 장에서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너는 너를 위해 먹을 수 있는 모든 먹거리 가운데서 가져다가 네게 모아 두어라. 그것이 너와 그 생물들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창세기 6:21 · 본디새김

방주를 튼튼하게 짓는 것만으로 생물을 살아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서 먹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방주를 건축하는 명령이 생명들을 돌보는 명령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에게 맡겨진 역할은 창세기 1:28의 다스림과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른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노아에게는 그 생물들을 살아 있게 하는 구체적인 책임이 주어집니다. 이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다스림이 반드시 마음대로 취하거나 이용하는 행위로만 이해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때 하나님은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앞서 이미 맺어진 어떤 언약을 확인하는 것인지, 이제 노아에게 처음 세우실 언약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이 구절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하다

창세기 6:22 본문 →

창세기 6장은 매우 짧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노아가 그렇게 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대로 했다.창세기 6:22 · 본디새김

이 한 절은 앞에서 길게 이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아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씀을 들은 노아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두려워했는지, 망설였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방주를 만드는 전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지 않습니다. 방주의 어느 부분을 먼저 만들었는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절을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즉시 모든 제작을 마쳤다는 시간적 설명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는 사실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택하는 대로 누구든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했습니다.

물론 인간이 선택한다는 사실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선택이 어떤 관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앞의 장면에서는 욕망과 선택권을 행사하는 이들의 행동이 강조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노아의 행동이 강조됩니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따르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망가진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창세기 6:1–22 본문 →

창세기 6장은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와 생명을 보존하도록 지시받은 방주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면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교훈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노아가 의롭고 온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정적인 행동들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폭력으로 가득 찬 땅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가져오시겠다고 말씀하신 홍수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 한가운데에서 다른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고페르 나무로 방주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여러 칸이 마련되고, 바깥과 안쪽에는 물을 막기 위한 역청이 발라집니다. 아래층과 둘째 층과 셋째 층이 만들어지고, 생물들이 먹을 음식이 준비됩니다.

인간이 자기 길을 망가뜨린 세상에서, 노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물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위한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