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칼데아를 일으키심
하나님의 대답이 더 큰 질문이 될 때
하박국은 하나님이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대답하시자, 예언자는 오히려 더 깊은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그 일이 하박국이 기대했던 정의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폭력을 심판하시기 위해 더 강력한 폭력을 휘두르는 민족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악한 자를 사용하신다면, 그 악한 자의 폭력은 어디까지 허용됩니까?
율법이 마비되고 판결이 뒤틀리다
하박국의 첫마디는 설명도 가르침도 아닙니다.
「여호와야훼, 제가 도와 달라고 부르짖어 왔는데도, 당신은 언제까지 듣지 않으실 것입니까? 제가 당신께 『폭력입니다』 하고 외쳐도 당신은 구해 주지 않으십니다.」하박국 1:2 · 본디새김
여기서 중요한 말은 「언제까지」입니다. 이미 오래 부르짖어 왔습니다. 기도했지만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고,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징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실제로 짓밟고 삶을 파괴하는 폭력 앞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왜 제게 불의를 보게 하시며, 당신은 해악을 바라보십니까? 파괴와 폭력이 제 앞에 있고, 다툼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납니다.」하박국 1:3 · 본디새김
불의를 보는 것 자체가 괴로운데, 그것을 볼 수밖에 없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침묵까지 견뎌야 합니다. 하박국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단순히 개인적인 위로를 받지 못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불의가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동안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마비되고, 판결은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악인이 의로운 이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판결이 뒤틀린 채 나옵니다.」하박국 1:4 · 본디새김
율법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은 있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야 했습니다. 힘없는 사람을 보호하고, 악을 억제하며, 공동체가 정의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그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이 판결에 관해 얼핏 모순처럼 들리는 두 진술을 나란히 놓습니다. 먼저 판결이 결코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곧이어 판결이 뒤틀린 채 나온다고 말합니다.
정의로운 판결은 나오지 않지만, 불의한 판결은 나오고 있습니다.
제도가 존재하더라도 악인이 의로운 이를 에워싸고 있다면, 재판은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불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악인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부당한 힘에 포위되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하박국은 이 상황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문제로 인식합니다. 따라서 첫 번째 탄식의 직접적인 배경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력해진 공동체, 곧 유다 내부의 현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2–4절 자체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가해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므로, 특정 왕이나 사건으로 한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재판정을 바로잡는 장면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시야가 갑자기 국경 밖으로 넓어집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민족
「너희는 민족들 가운데를 보고 살펴보아라. 너희 시대에 내가 일을 행하고 있으니, 놀라고 또 놀라라. 그 일이 전해져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다.」하박국 1:5 · 본디새김
하박국이 하나님의 무활동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에도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나 회복을 기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다음 절에서 드러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보아라, 내가 칼데아 사람들, 그 매섭고 성급한 민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는 자기 것이 아닌 거처들을 차지하려고 땅의 넓은 곳들을 누빈다.」하박국 1:6 · 본디새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은 칼데아 사람들, 곧 바벨론 세력입니다. 예언자는 폭력이 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휘두르는 정복자가 등장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그 민족을 일으키겠다고 하십니다.
「그는 섬뜩하고 두렵다. 그의 판결과 위엄은 그 자신에게서 나온다.」하박국 1:7 · 본디새김
여기서 「판결」(מִשְׁפָּט)은 앞서 4절에 등장한 것과 같은 히브리어 낱말입니다. 4절에서 하박국은 판결이 뒤틀렸다고 탄식했습니다. 이제 7절에서 소개되는 정복자는 자기 자신의 힘과 권위를 판결의 근거로 삼습니다. 자신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권력입니다.
왜곡된 판결을 바로잡기 위해 등장하는 민족이, 스스로를 판결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조금 더 깊이
하박국의 예언은 바벨론이 고대 근동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4:1–2는 유다가 바벨론의 압박을 받게 된 상황을 전하고, 예레미야 46:2는 바벨론 군대가 이집트 군대를 무찌른 갈그미스 전투를 언급합니다. 하박국 1장 자체는 구체적인 연도를 밝히지 않으므로, 이 신탁이 그 역사적 과정의 정확히 어느 시점에 선포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신약의 사도행전 13:41은 하박국 1:5를 직접 인용하여 하나님의 뜻밖의 일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때 인용된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본문의 「민족들 가운데」와 달리 듣는 이들을 「멸시하는 자들」로 부르는 독법을 보입니다. 사도행전의 인용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반응을 촉구하는 새로운 문맥에서 사용되지만, 하박국 1장 자체에서는 먼저 바벨론의 등장이라는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폭력을 심판하러 온 폭력
8절부터는 바벨론 군대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그들의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의 늑대보다 사나우며, 기병들은 먹이를 향해 날아드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서로 다른 맹수의 이미지가 하나의 군대에 겹쳐집니다. 표범은 속도를, 늑대는 사나움을, 독수리는 먹이를 향한 급격한 접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무리 전체가 폭력을 휘두르러 온다. 그들의 얼굴이 향하는 곳은 동쪽이다. 그는 포로를 모래처럼 모은다.」하박국 1:9 · 본디새김
여기서 「폭력」(חָמָס)은 하박국이 2절과 3절에서 사용했던 바로 그 낱말입니다. 예언자는 「폭력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외침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속에서 등장한 민족이 「폭력을 휘두르러」 옵니다.
여기서 모래는 정복자가 사로잡는 사람들의 압도적인 수를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그들에게 사람은 고유한 삶과 존엄을 가진 존재이기보다 정복의 결과로 축적되는 대상이 됩니다.
「그는 왕들을 조롱하며, 통치자들은 그에게 웃음거리다. 그는 모든 요새를 비웃고, 흙을 쌓아 그것을 점령한다.」하박국 1:10 · 본디새김
왕과 통치자는 질서와 권위를 대표합니다. 요새는 군사적 방어 능력을 나타냅니다. 강력한 군대 앞에서 다른 나라들의 정치적 권위와 방어 체계는 무력해집니다.
그러나 그 힘의 절정에서 본문은 갑자기 정복자를 평가합니다.
「그때 그는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간다. 자기 힘을 자기 신으로 삼는 그는 죄가 있다.」하박국 1:11 · 본디새김
하나님이 그를 일으키셨다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최고의 권위가 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승리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으로 바뀝니다. 7절의 「그의 판결과 위엄은 그 자신에게서 나온다」라는 말이 이제 그 신학적 실체를 드러냅니다.
바벨론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짓밟도록 허용하십니까?
하박국은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근거로, 하나님의 행동에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흙을 쌓아」 요새를 점령한다는 표현에는 실제 공성전의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성벽에 접근하기 위한 공격용 경사로와 토축을 쌓는 방식입니다. 11절이 앞선 여호와야훼의 발언에 계속 속하는지, 아니면 예언자가 덧붙이는 평가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실 수 있지만, 바벨론이 자기 힘을 절대화하는 죄까지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구별은 이사야 10:5–15에서도 발견됩니다. 그 본문에서 아시리아는 하나님의 진노를 수행하는 도구로 묘사되지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스스로 위대해진 아시리아 왕 또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근거로 하나님께 묻다
「여호와야훼, 저의 하나님, 저의 거룩한 이여, 당신은 옛적부터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은 심판을 위해 그를 두셨고, 반석이여, 책망을 위해 그를 세우셨습니다.」하박국 1:12 · 본디새김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대답을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해 이해하려 합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을 「옛적부터」 계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바벨론은 역사의 한 시기에 등장해 세력을 떨치는 민족이지만, 여호와야훼는 그보다 앞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벨론의 힘이 아무리 커도 역사의 궁극적인 주권은 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어 「저의 하나님」, 「저의 거룩한 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그가 의지해 온 하나님이십니다.
그 가운데 「저희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놓입니다.
앞에서는 「저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던 예언자가 여기서는 「저희」라고 말합니다. 그의 시선이 개인에게서 공동체로 넓어진 것입니다. 이 말은 유다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으리라는 확정적인 예언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하박국은 바로 이어 하나님이 그 민족을 심판과 책망을 위해 세우셨다고 인정합니다.
오히려 이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공동체의 미래가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지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32:4는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그분에게 불의가 없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이 일으키신 민족은 폭력을 휘두르며 자기 힘을 신으로 삼습니다.
이 긴장이 13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당신은 눈이 너무 깨끗하여 악을 보실 수 없고, 해악을 바라보실 수 없습니다. 왜 배신하는 자들을 바라보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더 의로운 이를 삼킬 때 잠잠하십니까?」하박국 1:13 · 본디새김
하박국은 하나님께 모순이 있다고 단정하는 대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현재 벌어지는 일 사이의 긴장을 질문으로 제시합니다. 「더 의로운」이라는 비교는 심판을 당하는 자와 심판을 수행하는 자 사이의 도덕적 차이를 드러냅니다. 유다에 불의가 있다는 사실이 바벨론의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하박국의 질문은 그래서 단순히 왜 의인이 고난당하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자가 심판받는 자보다 더욱 악하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드러납니까?
하나님의 행동이 드러났지만, 예언자가 느끼는 하나님의 침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물고기로 만드는 제국
하박국은 마지막 질문을 던지기 전에 매우 독특한 장면을 그립니다.
「당신은 사람을 바다의 물고기처럼, 다스리는 이 없는 기어 다니는 것들처럼 만드셨습니다.」하박국 1:14 · 본디새김
앞에서는 바벨론 군대가 맹수와 맹금류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정복당하는 사람들은 물고기와 물속의 생물처럼 묘사됩니다.
창세기 1:26–28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바다의 물고기를 비롯한 생물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이 바라보는 세계에서는 인간이 오히려 물고기처럼 잡히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이 창세기를 직접 인용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강렬한 대조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사냥감처럼 취급됩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폭력이 창조 세계의 질서를 얼마나 심하게 뒤틀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이미지입니다. 바벨론의 정복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질서를 세워 줄 통치자를 잃어버린 생물들처럼 그려집니다.
「그는 그 모두를 낚싯바늘로 끌어 올리고, 자기 그물로 끌어내며, 자기 고기잡이 그물에 모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하박국 1:15 · 본디새김
본문이 여러 포획 도구를 나열하는 것은 정복자 앞에서 누구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부를 축적하는 성공적인 활동입니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그 일은 삶의 파괴이지만, 정복자에게는 풍성한 수확입니다.
이 감정의 불균형이 16절에서 종교적인 행위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그물에 희생 제물을 잡아 바치고, 자기 고기잡이 그물에 제물을 태워 바칩니다. 그것들 덕분에 그의 몫이 기름지고 그의 음식이 기름지기 때문입니다.」하박국 1:16 · 본디새김
제사는 본래 신적인 존재를 향한 종교적 행위인데, 여기서는 사람들을 포획하는 도구 자체가 제사의 대상이 됩니다. 「자기 힘을 자기 신으로 삼는」 정복자는 이제 자기 힘을 행사하는 도구에 제물을 바칩니다.
그물은 정복을 가능하게 한 힘의 상징입니다. 그는 그물을 통해 풍성한 몫과 음식을 얻었기 때문에 그물에 감사합니다. 자신의 부를 만들어 준 능력이 숭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거룩한 자리에 올라섭니다.
이 대목을 단순히 바벨론 사람들이 어떤 종교 의식을 행했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박국은 정복자의 사고방식을 제사라는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니 그가 자기 그물을 비우고, 민족들을 살려 두지 않고 끊임없이 죽일 것입니까?」하박국 1:17 · 본디새김
그가 그물을 비우는 까닭은 더 이상 물고기를 잡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시 그물을 던져 새로운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의 정복이 한 차례의 심판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다른 민족들을 집어삼키는 끝없는 폭력이 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믿음
하박국이 믿는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이는 능력만 가진 분이 아니십니다. 거룩하시며,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했다는 이유만으로 질문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 능력이 하나님의 정의와 어떻게 함께 드러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박국 1장의 칼데아에 관한 선언은 예언자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계시입니다. 오늘의 어떤 전쟁이나 재난을 그와 동일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선언하려면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별도의 근거가 필요합니다.
하박국 1장의 마지막에는 어떤 승리의 찬송도, 완성된 설명도 없습니다.
그저 거대한 그물을 비우는 정복자가 있습니다. 그물에는 수많은 사람의 삶이 걸려 있었고, 정복자는 그것으로 풍요를 누립니다. 그는 다시 그물을 던질 준비를 합니다.
예언자는 그 장면을 보며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니 그가 자기 그물을 비우고, 민족들을 살려 두지 않고 끊임없이 죽일 것입니까?」
하박국은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가 어디까지 폭력을 허용할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질문을 끝내지 않습니다. 끝없는 폭력 앞에서, 끝내 정의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