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혼인에 빗댄 이야기
사랑과 오랜 기다림
호세아 3장은 놀라운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여자를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단순히 데려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이 낯선 까닭은 여자가 여전히 간음하는 사람으로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잘못을 뉘우쳤다거나 관계를 회복할 준비가 되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욱 뜻밖인 것은 그 뒤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호세아는 여자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고, 그에게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남자에게 속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도 그 여자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즉각적인 부부 생활의 회복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을 명령하시면서도 곧바로 관계를 완성하지 않으실까요?
“다시 가서 사랑하여라” — 사랑의 방향이 달라지다
호세아 3장은 앞선 장들과 서술 방식이 다릅니다.
1장에서는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는 이야기가 주로 삼인칭으로 서술되었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이 혼인 관계의 언어로 이스라엘을 고발하시고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3장은 호세아 자신의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다시 가서,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을 향하면서 건포도 떡을 사랑하는데도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사랑하듯이, 짝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간음하는 여자를 사랑하여라.」호세아 3:1 · 본디새김
그리고 2절에서도 “나는”이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예언자가 자신의 행동을 직접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돌린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에게서 완전히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같은 사랑이라는 말, 서로 다른 대상
호세아는 여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여자는 짝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 자손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건포도 떡을 사랑합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는 건포도 떡이라는 먹거리를 등장시키는가요?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향하면서 건포도 떡을 사랑합니다. 이 병행 표현은 건포도 떡을 향한 애착이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제의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삶의 즐거움과 풍요였습니다. 건포도 떡은 바로 그런 구체적인 즐거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향하는데, 이스라엘의 사랑은 자신에게 유익을 줄 것이라고 믿는 것들을 향합니다.
이는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항상 올바른 관계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랑의 깊이만큼이나 무엇을 사랑하는지도 중요합니다.
“짝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간음하는 여자”
여자를 설명하는 표현에도 긴장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간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신실하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야훼 자신이 불성실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관계의 미래가 상대의 현재 상태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문맥상 이 여자를 1장에 등장한 고멜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미 호세아의 혼인이 소개되었고, 이제 다시 여자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장에는 고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가 앞서 등장한 고멜과 동일 인물인지, 새로운 상징적 행동에 등장하는 다른 여자인지에 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다시”라는 말이 앞선 혼인 관계를 다시 회복하라는 뜻인지, 이전과 같은 종류의 예언적 행동을 다시 하라는 뜻인지도 문법적으로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아(רֵעַ)는 친구, 동료, 가까운 상대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으면서도 간음하는 여자로 읽으면 호세아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병행됩니다. 반면 다른 남자에게 사랑받는 간음하는 여자로 읽으면 그녀가 이미 다른 관계 속에 있는 상태에서 호세아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으로 이해됩니다. 본문은 상대가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건포도 떡은 말린 포도를 뭉쳐 만든 음식으로 이해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음식 자체가 반드시 우상숭배를 뜻한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하 6:19에서는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뒤 백성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장면에 건포도 떡이 등장합니다.
은과 보리 — 사랑이 실제 행동이 되다
나는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과 보리 한 레텍을 주고 나를 위해 그 여자를 샀다.호세아 3:2 · 본디새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호세아는 여자를 샀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오늘날 독자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 행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은 호세아가 여자를 자신에게로 데려오기 위해 대가를 지불했다는 사실입니다.
1절에서 사랑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2절에서 사랑은 호세아가 자신의 자원을 내어놓는 행동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일에 실제적인 비용이 수반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행복한 재회의 장면이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말이 뒤따릅니다.
조금 더 깊이
여자가 누군가에게 종속된 처지에 있었고, 호세아가 그 상태에서 여자를 데려오기 위해 대가를 지불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구매 행위는 속박된 상태에서 여자를 되찾는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는 혼인이나 관계의 성립과 관련된 대가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돈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여자가 노예였다는 설명도 없고, 어떤 빚 때문에 팔렸다는 말도 없습니다. 따라서 호세아가 노예시장에서 고멜을 사 왔다거나, 다른 남자에게 값을 치르고 아내를 되찾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은의 단위는 히브리어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은 무게 단위를 고려해 세겔로 이해하지만, 본문 자체가 단위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호멜은 곡식의 부피를 재는 단위입니다. 레텍은 별도의 곡식 단위로, 전통적으로 반 호멜 정도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크기를 확실하게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이 은과 보리의 가치를 합산하여 출애굽기 21:32에 나오는 은 서른 세겔과 비교합니다. 그 구절은 소가 남의 종을 받아 죽였을 때 지불해야 할 배상액을 규정합니다. 하지만 호세아 3:2에서 보리의 가치를 정확하게 은으로 환산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가 정확히 노예 한 사람의 값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 — 사랑과 기다림 사이
나는 그 여자에게 말했다. 「너는 오랫동안 나를 위해 머물러야 한다. 음행하지 말고, 어떤 남자에게도 속하지 마라. 나도 너에게 그렇게 하겠다.」호세아 3:3 · 본디새김
본문은 구체적인 생활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즉시 정상적인 혼인생활로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머무른다는 말의 의미
호세아는 여자에게 삼십 일이나 일 년을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조건을 달성하면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이 기다림은 무의미한 정지 상태가 아닙니다. 여자에게는 더 이상 다른 관계를 추구하지 말라는 요구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에 여자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호세아에게 무엇이라고 응답하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독자는 쉽게 이 장면을 아름다운 화해 이야기로 완성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화해의 감정이나 친밀한 재회의 장면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한 관계의 미래를 위해 일정한 단절과 절제가 요구되는 시간을 보여 줍니다.
“나도 너에게 그렇게 하겠다”
호세아는 여자에게만 무엇을 요구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 기간에 여자와 관련하여 일정한 약속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말이 보여 주는 것은 관계의 회복이 단순히 한쪽에게 요구되는 변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기다림은 왜 필요한가?
이 장은 고대 사회의 혼인과 소속에 관한 언어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여 주는 예언적 행동입니다. 여자를 사들이고 일정한 관계를 금지하는 행위를 오늘날 인간관계에서 그대로 따라야 할 모델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통제하거나 고립시키는 일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도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잃은 상태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여자의 기다림과 이스라엘의 기다림은 서로를 해석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마지막 말은 해석에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그리고 나도 너에게”라는 짧은 표현입니다. 동사는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문맥을 따라 호세아 자신도 같은 절제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속하지 않는 동안 호세아도 다른 관계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상호적인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호세아 자신도 여자와의 부부관계를 일정 기간 유보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다만 원문이 생략한 동사를 구체적으로 복원하여, 두 사람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부생활을 다시 시작했는지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왕도, 제사도, 우상도 없는 시간
이스라엘 자손이 오랫동안 왕도 없고 고관도 없고, 희생 제사도 없고 제의용 기둥도 없고, 에봇도 드라빔도 없이 머무를 것이기 때문이다.호세아 3:4 · 본디새김
히브리어에서는 ‘많은 날들’이라는 시간 표현과 ‘머무르다’라는 동사가 두 절에 반복됩니다. 여자의 시간이 곧 이스라엘의 시간을 보여 줍니다.
정치와 종교의 거의 모든 기반이 사라집니다.
여섯 가지 부재가 말하는 것
이 여섯 항목은 대체로 세 묶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왕과 고관입니다.
왕은 국가의 통치를 대표하고, 고관들은 그 통치를 수행하는 지도층을 나타냅니다. 이 둘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정치적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북왕국은 자체 왕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조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17:6에는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가 선포한 정치적 상실은 이러한 북왕국의 멸망과 역사적으로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희생 제사와 제의용 기둥입니다.
희생 제사는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에서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제의용 기둥은 더욱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28:18에서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돌을 세워 기둥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16:22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미워하시는 제의용 기둥을 세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같은 형태의 돌기둥도 시대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세아 시대의 북왕국에서 제의용 기둥은 부적절한 숭배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그 기둥을 없애는 일만이 아니라 제사까지 함께 사라진다고 선언합니다.
세 번째는 에봇과 드라빔입니다.
에봇은 제사장과 관련된 복식이지만, 하나님께 뜻을 묻는 일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3:9–12에서는 다윗이 에봇을 가져오게 하여 여호와야훼께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에봇이 언제나 바른 예배에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사사기 17–18장에서는 미가의 집에 있던 에봇이 우상과 함께 등장합니다.
드라빔은 가정에서 보관하던 신상 또는 신탁과 관련된 물건으로 이해됩니다. 창세기 31:19에서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훔칩니다. 사무엘상 19:13에서는 미갈이 드라빔을 침상에 놓아 다윗이 누워 있는 것처럼 꾸밉니다.
이처럼 에봇과 드라빔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지만, 둘 다 신적인 도움이나 뜻을 구하려는 종교적 행위와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사라지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심판하신다면, 왜 제사와 같은 종교적 행위까지 사라진다고 말씀하시는가요?
만약 본문이 우상숭배의 도구들만 열거했다면, 이 구절은 잘못된 종교를 제거하는 순수한 정화의 선언으로 읽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여섯 항목에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제도뿐 아니라 정당한 예배에 사용될 수 있는 것과 잘못된 숭배에 사용되던 것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의지하고 사용하던 정치적·종교적 질서 전체가 중단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사람은 잘못된 것을 버릴 때 좋은 것이 즉시 그 자리를 채워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과정에 공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바로 새로 주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즉시 올바른 제사를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기간을 단순히 우상숭배가 사라진 복된 시간이라고만 볼 수도 없습니다. 왕도 없고 제사도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실제적인 상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 시간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라고만 말할 수도 없습니다. 5절에서 그 기다림의 끝에 돌아옴이 약속되기 때문입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제사와 신탁의 수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신적인 세계에 접근한다고 생각했던 익숙한 방식들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와 물건들이 없어진다고 해서 여호와야훼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 절은 하나님을 찾는 일을 회복의 중심에 놓습니다. 호세아 3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새로운 제도의 등장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누구를 찾아 돌아오느냐에 있습니다.
“그 뒤에” — 오랜 기다림의 끝에서 일어나는 일
그 뒤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와 자기들의 왕 다윗을 찾을 것이다. 마지막 날들에 그들은 두려워 떨며 여호와야훼와 그의 선함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호세아 3:5 · 본디새김
3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 표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오랫동안”이고, 다른 하나는 “그 뒤에”입니다. 3절과 4절에서 기다림이 강조되었다면, 5절에서는 그 기다림 이후에 일어날 일이 선언됩니다.
돌아오고, 찾고, 나아갑니다.
앞의 두 절에서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없이 머물렀다면, 이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어디로 돌아오는가?
여기서 돌아온다는 말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호세아 3:5에서는 바로 뒤에 여호와야훼를 찾는다는 말이 이어지므로, 그 돌아옴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향합니다. 마지막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돌아옴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아니라, 이미 그들을 향해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에 뒤늦게 응답하는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왜 다윗을 찾는가?
호세아가 예언하던 북왕국은 다윗 왕조의 통치를 받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북쪽 지파들이 분리되면서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열왕기상 12:16–20).
따라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찾는다는 말은 단순히 잃어버린 왕권을 되찾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분열 이전에 하나님이 세우셨던 다윗 왕조의 약속과 다시 연결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집과 왕국을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여호와야훼와 다윗을 함께 찾습니다.
이 두 대상은 서로 같은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다윗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왕권을 대표합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정치적 삶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이는 2:2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울 것이라고 했던 약속과 연결됩니다.
“마지막 날들”은 언제인가?
호세아 3:5에서도 이 표현은 오랜 상실의 시기가 지난 뒤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가리킵니다. 그 미래가 정확히 어느 역사적 시점에 해당하는지는 이 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두려워 떨며 하나님의 선함을 향해 나아간다는 역설
보통 사람은 두려운 것을 피하려 합니다. 위험을 느끼면 멀어지고, 위협이 있으면 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나 진노만이 아니라 “그의 선함”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선함을 향한다는 말
이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면서 좋은 것을 다시 받으리라는 기대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함을 단지 물질적 풍요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불성실할 때에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랜 상실의 시간을 선언하시면서도 그 뒤에 돌아올 미래를 열어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함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을 공급하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끊어 버린 관계를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까지 포함합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과 건포도 떡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자신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와 그분의 선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분리된 좋은 것들을 찾는 데서 벗어나, 좋은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다윗은 호세아보다 오래전에 살았던 왕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이미 죽은 역사적 다윗이 문자 그대로 돌아와 왕위에 앉는다는 뜻으로 읽을지, 다윗 왕조의 후손이나 다윗을 대표하는 미래의 왕을 가리킨다고 읽을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30:9는 백성이 여호와야훼와 하나님이 일으키실 다윗 왕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에스겔 34:23–24는 다윗이라는 이름으로 한 목자의 통치를 약속합니다. 이 본문들을 함께 읽으면 호세아 3:5의 다윗을 다윗 왕조와 관련된 미래의 통치자로 이해하는 근거가 생깁니다. 다만 호세아 3장 자체는 그 왕의 구체적인 신원이나 등장 시기를 밝히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들”이라는 말이 항상 세계 역사의 마지막 순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49:1에서 야곱은 아들들을 불러 후일에 그들에게 일어날 일을 말하겠다고 합니다. 민수기 24:14에서도 발람은 먼 훗날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 일어날 일을 예고합니다. 두려워 떨며 나아간다는 말의 한 가지 가능성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면서 그분의 거룩하심과 위엄을 새롭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상실의 시간을 지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스라엘은 이전처럼 그분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하나님의 뜻밖의 선하심 자체가 이스라엘을 떨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불성실했는데도 하나님이 여전히 사랑하셨고, 관계의 미래를 열어 주셨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움과 경외심을 느낀다는 이해입니다. 두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 두려움이 정확히 어떤 감정들의 조합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죄책감 때문에 떨었다거나, 하나님의 자비에 감격하여 떨었다고 어느 한쪽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호세아 3장이 남기는 장면
이것은 심판이 사랑의 부재를 뜻하지 않으며, 사랑이 심판의 부재를 뜻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둘은 쉽게 하나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면서도 그들의 죄를 문제 삼으시고, 그들이 기다려야 할 시간을 선언하시면서도 다시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이 기다림을 모든 고난에 적용하여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는 이유가 반드시 관계 회복을 위한 교육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호세아 3장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언약적 불성실함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개인이 경험하는 모든 상실과 고통을 이 본문에 그대로 대응시킬 근거는 없습니다.
호세아의 행동은 관계의 미래를 향한 사랑을 보여 주고, 이스라엘의 돌아옴은 그 사랑이 지향하는 끝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 장은 여자를 사 온 호세아의 승리나 그 여자의 즉각적인 변화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 회복이 눈앞에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랜 기다림 뒤의 미래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그 미래에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다른 신들이 주는 즐거움을 좇아 달려가지 않습니다. 두려워 떨면서도 여호와야훼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고, 오랜 날들이 지난 뒤 이스라엘이 마침내 그분을 찾습니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호세아는 마지막 문장으로 밝힙니다.
여호와야훼와 그의 선함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