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8장 · 백성을 향한 고발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의 제사

호세아 4장은 뜻밖의 모순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에는 제사장들이 있고, 희생 제사가 계속되며, 사람들이 산과 언덕에 올라가 제물을 바칩니다. 심지어 「여호와야훼는 살아 있다」라는 말로 맹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고 종교적 행위가 이어지는 사회에, 정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앞선 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오랜 상실의 시간을 지난 뒤 여호와야훼를 찾을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4장은 그들이 왜 하나님을 다시 찾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제 호세아의 시선은 한 가정의 혼인 관계에서 이스라엘 사회 전체로 옮겨 갑니다. 사람들은 서로 속이고 죽이며,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가르쳐야 할 말씀을 버리고, 제사는 계속되지만 삶은 더욱 무너져 갑니다. 마침내 땅과 그 안에 사는 생물들까지 쇠약해집니다.

이 장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어떻게 사라집니까? 그리고 그 지식이 사라졌을 때, 왜 제사와 종교적 열심조차 공동체를 지켜 주지 못합니까?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법정으로 부르시다

호세아 4:1–3 본문 →

이스라엘 자손아,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여호와야훼가 이 땅에 사는 이들과 다툴 일이 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한결같은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기 때문이다.호세아 4:1 · 본디새김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상대로 다투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정식으로 잘못을 제기하시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미가 6:1–2에도 나옵니다. 거기서 여호와야훼는 산들과 땅의 기초들을 증인처럼 불러 이스라엘과 다투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언약에 근거하므로, 그 언약을 저버리는 일은 책임을 물어야 할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진실함과 사랑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종교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 맺은 관계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에 관한 말이 많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만들어 내야 할 진실함과 신실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고발은 구체적인 범죄로 이어진다

저주하고 속이고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간음하며, 그들은 한계를 뚫고 나갔다. 피 흘림이 피 흘림에 맞닿았다.호세아 4:2 · 본디새김

이 목록을 읽으면 십계명이 떠오릅니다. 거짓과 속임, 살인, 도둑질, 간음은 출애굽기 20:13–16과 신명기 5:17–20에서 금지된 행위들과 겹칩니다. 앞에 등장하는 저주 역시 하나님이나 이웃을 향한 파괴적인 언어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한 사건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피가 흘러 서로 맞닿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본문이 특정 살인 사건들을 가리키는지, 폭력이 끊이지 않는 사회 전체를 묘사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폭력이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라는 인상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은 한계를 뚫고 나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가 많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삶을 보호해야 할 경계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 혼인 관계, 신뢰를 보호하는 기준이 더는 존중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예배 장소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의 죄 때문에 땅이 슬퍼한다

그런데 3절에서 시야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그러므로 땅이 슬퍼하고, 그 안에 사는 모든 이가 들짐승과 하늘의 새와 함께 쇠약해질 것이다. 바다의 물고기마저 사라질 것이다.호세아 4:3 · 본디새김

레위기 18:24–28에서는 주민들의 악행 때문에 땅이 더럽혀지고, 그 결과 땅이 그 주민들을 토해 낸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창세기 3:17에서도 인간의 불순종 이후 땅이 저주받는다고 말합니다.

땅은 단순히 인간이 마음대로 이용하는 배경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함께 고통받는 세계로 묘사됩니다.

들짐승, 하늘의 새, 바다의 물고기. 이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영역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는 생명이 나타나고 번성하지만, 호세아의 고발에서는 그 생명들이 쇠약해지고 사라집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창조 질서가 거꾸로 무너지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호세아가 창세기 1장의 특정 구절을 순서대로 뒤집어 인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두 본문 사이에는 주제와 이미지의 연결이 있습니다.

그들의 불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땅의 생명까지 위협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아발은 애도하거나 슬퍼한다는 뜻이며, 땅이 마른다는 뜻으로도 풀이됩니다. 여기서는 땅의 고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지식을 버리다

호세아 4:4–6 본문 →

「그러나 아무도 다투지 말고, 아무도 책망하지 마라. 네 백성은 제사장과 다투는 자들 같다.」호세아 4:4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의 고발과 묘한 긴장을 이룹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과 다투실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아무도 다투거나 책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 잘못을 따지는 일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드러납니다.

본디새김은 “네 백성은 제사장과 다투는 자들 같다”라고 옮겼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히브리어 본문의 문장 구조를 따르면 가능한 읽기입니다. 이 경우 백성은 자신들을 가르치고 책망해야 할 제사장의 권위를 거스르는 사람들처럼 묘사됩니다.

다른 읽기는 원문의 일부를 달리 재구성하여 “제사장아, 내가 너와 다툴 일이 있다”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고발 대상이 백성 전체에서 제사장으로 직접 좁혀집니다. 다만 어느 쪽이든 6절에서 제사장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너는 낮에 넘어지고, 예언자도 밤에 너와 함께 넘어질 것이다. 내가 네 어머니를 멸하겠다.」호세아 4:5 · 본디새김

낮은 길이 보이는 시간이고 밤은 보이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낮과 밤의 대비는 넘어짐이 어느 한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효과를 냅니다.

여기서 예언자가 반드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언자라는 직함이나 역할이 그 사람을 심판에서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네 어머니”는 앞의 혼인 비유를 떠올리게 하지만, 여기서는 제사장 개인의 생모보다는 그가 속한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실패가 공동체 전체의 파멸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다는 것과 지식을 버렸다는 것은 다르다

「내 백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멸망했다. 네가 그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나를 위해 제사장으로 일하지 못하게 하겠다. 네가 네 하나님의 가르침을 잊었으니, 나 역시 네 자녀들을 잊겠다.」호세아 4:6 · 본디새김

단순한 무지에서 책임 있는 거부로 고발이 깊어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 단지 배울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보존하고 전달해야 할 사람들이 그 지식을 버렸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이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달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10:10–11에서는 제사장들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여호와야훼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33:10에서도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야곱에게,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제사장은 제사만 드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말씀을 버리면, 공동체는 종교적 행위를 유지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나 역시 네 자녀들을 잊겠다”

6절에는 ‘버리다’와 ‘잊다’가 각각 대응하여 나타납니다. 제사장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그를 제사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잊었으므로 하나님도 그의 자녀들을 잊겠다고 하십니다. 언약 관계 안에서 더 이상 그들을 이전처럼 돌보거나 인정하지 않겠다는 심판의 언어입니다.

제사장의 실패는 당대의 직무 상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실패가 다음 세대의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자녀들은 부모의 죄 때문에 언제나 직접적인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24:16은 부모와 자녀가 각자 자기 죄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규정합니다. 여기서는 지도자의 직무와 그 직무가 공동체 안에서 이어지는 관계가 무너지는 심판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의 실패에는 단순한 태만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죄를 먹고 있었습니다.

백성의 죄를 먹는 제사장들

호세아 4:7–10 본문 →

「그들은 수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내게 죄를 지었다. 내가 그들의 영예를 수치로 바꾸겠다.」호세아 4: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수가 늘어나는 일은 본래 하나님의 복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수가 많아지는 만큼 죄도 늘어납니다.

7절의 “그들”을 앞에 등장한 제사장들에게 연결할 수도 있고, 공동체 전체의 증가를 함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번성이 신실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여기서 영예는 그들이 누리던 사회적·종교적 지위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직무를 맡은 사람들이 그 직무를 저버렸으므로, 그들이 누리던 영예도 유지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내 백성의 죄를 먹고, 그 백성의 죄악에 저마다 제 마음을 쏟는다.」호세아 4:8 · 본디새김

죄를 먹는다는 말에 담긴 중의성

히브리어에서 하타트(⁨חַטָּאָה⁩)는 문맥에 따라 ‘죄’를 뜻하기도 하고 ‘속죄 제물’을 뜻하기도 합니다. 레위기 6:26에서는 속죄 제사를 드린 제사장이 그 제물의 일부를 먹도록 규정합니다. 레위기 10:17에서는 제사장들이 속죄 제물을 먹는 일이 공동체의 죄를 처리하는 제사장 직무와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이 배경을 고려하면 호세아 4:8의 “죄를 먹는다”에는 두 가지 의미가 겹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들이 백성이 바친 속죄 제물을 실제로 먹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제사장들이 백성의 죄를 통해 이익을 얻거나 그 죄를 탐한다는 비판입니다. 두 의미는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는 행위 자체는 율법이 허용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백성의 죄악에 마음을 쏟는다는 다음 문장입니다. 본문이 정확히 어떤 경제적 구조를 고발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지만, 제사장들이 백성의 죄를 바로잡기보다 그 죄와 연결된 종교적 행위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했을 가능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제사장의 직무가 본래의 목적을 잃습니다. 죄를 다루는 제도가 죄에서 돌이키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죄가 계속되는 상황에 의존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백성이 같아지다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같아질 것이다. 내가 그의 길에 따라 그를 벌하고, 그의 행실을 그에게 되돌려 주겠다.」호세아 4:9 · 본디새김

직책이나 지위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향한 태도에서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백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제사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습니다.

백성은 죄를 짓고, 제사장은 그 죄악에 마음을 쏟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둘 다 그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일반 구성원에게만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더 큰 책임을 맡은 사람의 잘못도 그대로 다루십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그들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음행해도 불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야훼를 따르는 일을 버렸기 때문이다.」호세아 4:10 · 본디새김

제사장들은 백성의 죄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풍요와 번성을 기대하며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음행해도 불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신명기 28:38–41에 나오는 언약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수고하여 씨를 뿌려도 충분히 거두지 못하고, 포도나무를 길러도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거기서도 선언됩니다.

먹는 일도, 번성하려는 일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린 채 그러한 것들을 삶의 최종 목적으로 삼으면, 그것들이 이스라엘의 삶을 온전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나무는 묻고 사람은 듣는다 — 뒤집힌 분별력

호세아 4:11–14 본문 →

「음행과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분별력을 빼앗는다.」호세아 4:11 · 본디새김

구약에서 마음은 감정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며 의지를 결정하는 중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음행과 술이 마음을 빼앗는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흐트러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 판단하는 능력이 손상된다는 뜻입니다.

「내 백성은 제 나무에게 묻고, 제 막대기가 그에게 알려 준다. 음행의 영이 그들을 빗나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 아래에서 벗어나 음행했다.」호세아 4:12 · 본디새김

여기서 나무가 구체적인 우상이나 점술에 사용되는 물건을 가리키는지, 막대기를 어떤 방식으로 신탁에 사용했는지는 본문만으로 충분히 재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무엇을 풍자하는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물건이나 생명이 없는 사물에게서 신적인 가르침을 얻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이사야 44:9–20에서 나무를 깎아 우상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풍자와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한 나무의 일부로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고, 남은 부분으로 신상을 만들어 절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지자, 사람이 만든 물건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리에 올라섭니다.

좋은 그늘 아래서 드리는 잘못된 제사

「그들은 산꼭대기들에서 희생 제사를 지내고, 언덕들에서, 참나무와 포플러나무와 테레빈트나무 아래서 제물을 태운다. 그 그늘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고,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할 것이다.」호세아 4:13 · 본디새김

호세아는 이 종교적 장면을 설명하면서 장소의 편안함과 매력을 언급합니다. 고대 근동의 무더운 기후에서 큰 나무의 그늘은 실제로 사람들이 머물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편안함이 잘못된 숭배를 설명하는 말로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그늘 아래 모여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진실과 사랑과 지식은 그들의 삶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장소의 쾌적함과 종교적 열심이 바른 예배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왜 딸들과 며느리들이 등장하는가?

13절의 끝은 갑자기 가족 안의 성적 문제로 넘어갑니다.

「나는 너희 딸들이 음행한다고 그들을 벌하지 않고,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한다고 그들을 벌하지 않겠다. 그 남자들 자신이 창녀들과 함께 따로 물러나고, 성소의 창녀들과 함께 희생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쓰러질 것이다.」호세아 4:14 · 본디새김

여기서 고발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이것을 여성들의 행위에는 도덕적 책임이 전혀 없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은 본문의 초점을 벗어납니다. 앞에서는 딸들과 며느리들이 문제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비난하는 데 머무르지 않으시고, 바로 그 공동체의 남성들이 저지르는 행동을 드러내십니다.

공동체의 잘못을 힘이 약한 구성원에게 돌리면서, 더 큰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동일한 잘못은 묻지 않는 태도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남성들이 창녀들과 어울리는 일과 희생 제사가 한 장면 안에 놓여 있습니다. 종교적 행위가 그들의 불성실함을 가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성실함과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회는 잘못된 것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성소의 창녀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케데쇼트입니다. 이 말은 ‘거룩하게 구별하다’라는 뜻의 어근과 관련되며, 종교적으로 구별된 여성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종교적 의례와 연결된 성매매 여성들을 뜻한다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실제 제의에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성적인 행위가 정식 제의의 일부였는지는 충분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38:15, 21–22에서도 일반적인 창녀를 가리키는 말과 이 단어의 단수형이 같은 이야기 안에 등장합니다. 두 표현이 완전히 같은 의미인지, 사회적·종교적 성격의 차이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호세아 4:14를 근거로 북왕국의 모든 산당에서 특정한 성적 제의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벳엘은 어떻게 벳아웬이 되었는가

호세아 4:15 본문 →

이스라엘아, 네가 음행하더라도, 유다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벳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야훼는 살아 있다」 하며 맹세하지 마라.호세아 4:15 · 본디새김

여기서 예언의 시야가 잠시 남쪽 유다로 향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은 이미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이 유다에게까지 확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유다 역시 같은 길을 걸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경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길갈에 들어가지 말라는 이유

길갈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기억을 가집니다.

여호수아 4–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넌 뒤 길갈에 진을 치고, 그곳에서 할례와 유월절을 지킵니다. 특히 여호수아 5:9에서는 하나님이 이집트의 수치를 그들에게서 굴려 버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길갈이라는 지명도 ‘굴리다’라는 말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바로 그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같은 시대의 예언자인 아모스도 벧엘과 길갈을 찾아가지 말라고 말합니다(아모스 5:5). 이는 이 장소들이 당시 잘못된 종교적 행위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라는 사실이 현재의 불성실함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죄악의 집으로 불리다

벳아웬이라는 이름에는 더욱 날카로운 언어적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호세아의 문맥에서는 이것을 벧엘에 대한 풍자적인 이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뒤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던 장소입니다(창세기 28:16–19). 그러나 북왕국을 세운 여로보암 1세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이 그곳에서 예배하도록 했습니다(열왕기상 12:28–33).

하나님을 만난 기억이 있는 장소가 뒤에는 잘못된 숭배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찾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언자는 그들이 찾아가는 곳을 죄악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이름을 가진 장소라고 해서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반드시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야훼는 살아 있다”라고 맹세하지 말라는가?

“여호와야훼는 살아 있다”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고백은 아닙니다. 신명기 6:13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고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명령합니다. 예레미야 4:2도 진실과 공정과 의로움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을 언급합니다.

문제는 고백의 문장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에게 도움을 구하면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를 부르는 언어와 실제로 의지하는 대상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5:2에서도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거짓으로 맹세한다고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는 진실함이었습니다.

고집 센 암소와 넓은 들판의 어린양

호세아 4:16–17 본문 →

고집 센 암소처럼 이스라엘이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이제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넓은 곳에서 어린양처럼 먹일 것이다.호세아 4:16 · 본디새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고집을 부리다’라는 동사와 ‘고집 센’이라는 표현이 같은 어근으로 연결됩니다. 반복을 통해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집 센 암소는 자신을 이끄는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짐승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는 어린양이 등장합니다.

넓은 곳은 구원의 장소인가, 위험한 장소인가?

본디새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넓은 곳에서 어린양처럼 먹이실 것이라고 옮깁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명시적인 의문사가 없으므로 이렇게 선언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이 고집 센 이스라엘을 넓은 곳에 풀어 놓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넓은 곳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넓은 장소는 양이 자유롭게 풀을 뜯는 좋은 목초지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18:19에서도 하나님이 시인을 넓은 곳으로 이끌어 내시는 일이 구원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구절의 문맥에서는 넓은 곳을 보호받지 못하는 장소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목자의 인도를 거부하는 짐승이 울타리 없는 넓은 곳에 놓이는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다른 읽기에서는 이 문장을 수사적인 질문으로 이해합니다. 고집 센 암소 같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어린양처럼 넓은 초장에서 먹일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이 경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부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히브리어의 표현과 앞뒤 문맥을 고려할 때 어느 한쪽만이 가능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구절이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문제 삼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에브라임은 우상들과 결합해 있다”

17절에서는 경고가 한층 짧고 강해집니다.

에브라임은 우상들과 결합해 있다. 그를 내버려 두어라.호세아 4:17 · 본디새김

에브라임은 북왕국에서 중요한 지파였으므로, 예언서에서는 북왕국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잠시 우상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상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등장한 혼인 관계의 언어와도 어울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리고 다른 존재와 결합한 상태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앞선 장에서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이 돌아올 미래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회복 약속을 이유로 17절의 심각성을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이 명령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내려졌으며, 그들을 내버려 두는 상태가 역사적으로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같은 방식의 경고와 보호가 계속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두려운 것은 눈에 보이는 형벌만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에 깊이 결합된 사람이 그 길을 계속 가도록 내버려지는 상태입니다.

바람의 날개에 감싸여 사라지는 나라

호세아 4:18–19 본문 →

그들의 술이 다했다. 그들은 거듭 음행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수치를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호세아 4:18 · 본디새김

하나님은 그들이 수치를 당했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수치를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상태와, 잘못된 행동 자체를 좋아하게 되는 상태는 다릅니다.

사람은 잘못을 부끄러워할 때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치를 사랑하게 되면 그 판단 자체가 무너집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바람

19절에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바람이 이스라엘을 제 날개로 감싸 묶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희생 제사 때문에 부끄러워할 것이다.호세아 4:19 · 본디새김

그동안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원하는 곳으로 찾아다녔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갔고, 나무 아래에서 제물을 태웠으며, 길갈과 벳아웬 같은 장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가 아니라 바람에 휩싸이는 대상이 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붙잡거나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이스라엘이 자기 운명을 통제하지 못하고 심판의 힘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호세아서 안에서 뒤에 다시 나타날 주제이기도 합니다. 호세아 6:6에서는 하나님이 희생 제사보다 한결같은 사랑을,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제사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가 하나님과의 실제 관계에서 벗어났을 때 무엇을 잃어버리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그들의 술이 다했다”는 표현은 원문상 술이 다 없어졌다는 뜻으로도, 술이 변질되었다는 뜻으로도 이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수치를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라는 표현에는 사랑과 관련된 히브리어 낱말들이 반복되어 있으며, 마지막의 “통치자들”에 해당하는 말도 원래는 ‘그녀의 방패들’이라는 표현입니다. 방패가 공동체를 보호하는 통치자들을 비유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문장의 구체적인 연결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18절을 토대로 당시 이스라엘의 특정한 술자리나 성적 의식의 모습을 자세히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 바람을 특정한 외국 군대나 역사적 사건과 정확히 동일시할 근거는 이 구절에 없습니다. 그러나 북왕국이 장차 겪게 될 정치적 파국을 생각하면, 이 이미지는 역사적 심판의 예고로 읽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왜 삶을 바꾸어야 하는가

호세아 4:1–19 본문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실제 삶에서 사라지는 일이 공동체 전체의 파멸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와 예배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도 제사와 예배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들을 하나님과 연결해 준다고 믿었던 종교적 행위가, 실제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산꼭대기와 언덕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큰 나무의 좋은 그늘 아래에 앉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이스라엘을 감싸는 것은 좋은 그늘이 아닙니다.

바람입니다.

그 바람이 이스라엘을 날개로 감싸 묶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드렸던 희생 제사 때문에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호세아 4장은 아직 그 바람이 지나간 뒤에 무엇이 남을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에 무엇이 이미 사라져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스라엘에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