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4–8장 · 백성을 향한 고발
하나님을 찾았지만 이미 물러나 계셨습니다
호세아 5장에는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 떼와 소 떼를 이끌고 하나님을 찾아갈 것입니다.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리라는 예고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뜻밖의 결과를 전합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물러났다.」
왜 하나님을 찾으러 간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아가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물러나 계십니다.
이 어긋남이 호세아 5장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으러 갔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언젠가 자신을 간절히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찾음’이 왜 처음에는 실패하고 마지막에는 미래의 가능성으로 남습니까? 이 질문을 따라가면 호세아 5장이 보여 주는 심판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백성을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덫이 되다
「제사장들아, 이것을 들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주의를 기울여라. 왕의 집안아, 귀를 기울여라. 이 심판은 너희를 향한 것이다. 너희가 미스바에 덫이 되고, 다볼 위에 펼쳐 놓은 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호세아 5:1 · 본디새김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예배를 담당했고, 왕의 집안은 나라의 통치를 책임졌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은 그 지도 아래 살아가는 공동체 전체입니다. 하나님은 이 가운데 어느 한 집단만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덫과 그물은 모두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 놓는 도구입니다. 덫에 걸린 짐승은 자신이 지나가던 길에서 붙잡히고, 그물에 걸린 새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제사장과 왕은 백성이 올바른 길을 걷도록 도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오히려 백성을 사로잡는 덫과 그물이 되었다고 고발하십니다.
길을 안내해야 할 사람이 길 위에 덫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왜 미스바와 다볼인가?
다볼은 갈릴리 지역의 두드러진 산으로, 사사기 4:6–14에서는 드보라가 바락에게 군대를 모으라고 명령한 장소로 등장합니다. 미스바는 구약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지명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망보는 곳’, ‘파수하는 곳’과 관계됩니다.
여기서 어느 미스바를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역의 미스바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장소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두 장소를 지리적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 지역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장소의 정확한 위치보다 분명한 것은 그곳에 덫과 그물이 놓였다는 고발입니다.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종교적·정치적 활동을 비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다만 그곳에 어떤 제단이 있었는지, 어떤 의식이 행해졌는지, 특정한 정치적 음모가 이루어졌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깊이 들어간 사람들
2절에서는 덫의 이미지에 살육이라는 말이 더해집니다.
「빗나간 자들은 살육에 깊이 들어갔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징계가 된다.」호세아 5:2 · 본디새김
현재 전해지는 본문을 따르면 빗나간 사람들이 살육에 깊이 빠졌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육이라는 말이 실제 폭력을 가리키는지, 잘못된 제의에서 이루어진 희생 제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읽기는 일부 낱말을 달리 이해하여 싯딤에 깊은 함정을 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앞 절의 덫과 그물이라는 이미지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본문을 다르게 읽거나 재구성해야 하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빗나간 사람들이 잘못에 깊이 들어갔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시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른다
「나는 에브라임을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서 숨겨지지 않았다.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했고, 이스라엘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호세아 5:3 · 본디새김
에브라임은 북왕국의 중요한 지파였으므로, 호세아서에서는 북왕국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신다는 사실은 위로가 아니라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그들의 음행과 더러워진 상태를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실제 모습을 정확히 아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돌보신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자기 행위가 그분 앞에서 숨겨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행실이 돌아오는 길을 막는다
그들의 행실은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돌아가게 두지 않는다. 음행의 영이 그들 안에 있고, 그들이 여호와야훼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호세아 5:4 · 본디새김
여기서 행실은 그들이 반복해 온 행동과 살아가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잘못된 행동을 되풀이하면 그 행동은 단지 지나간 사건으로 남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의 방향을 형성하고, 어떤 것을 원하며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을 반복했고, 이제 그 삶의 방식 자체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장애가 되었습니다. ‘음행의 영’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내면을 지배할 만큼 깊어진 불성실한 성향을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언제나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이 자기에게 불리한 증인이 되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에게 불리하게 증언했다.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은 자기들의 죄악으로 넘어질 것이다.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질 것이다.호세아 5:5 · 본디새김
이 표현에는 법정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높이고 자신들의 길을 정당화하던 태도가 오히려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가 됩니다.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킬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에브라임의 음행을 지적하셨지만, 그 심판이 북왕국에만 갇혀 있지는 않습니다. 같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알고 있다는 사실, 북왕국과 다른 정치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심판에서 자동으로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았는데, 왜 만나지 못했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양 떼와 소 떼를 데리고 여호와야훼를 찾으러 가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가 그들에게서 물러났다.호세아 5:6 · 본디새김
이는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가축을 가져가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방식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에는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레위기 1–7장).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러 가는 상황입니다.
앞에서는 그들의 행실이 하나님께 돌아가게 두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고, 교만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증언한다고 했습니다.
삶에서는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면서, 종교적 행위에서는 하나님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제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동과, 실제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러 간 동기를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반드시 계산적인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린 상태에서 제물이 그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물러났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전처럼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받기 위해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처럼 취급되실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31:17–18에 나오는 경고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게 돌아설 때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자신들 가운데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고 묻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낯선 자녀들을 낳았다는 고발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배신했다. 낯선 자녀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제 초하루가 그들을 그들의 몫과 함께 삼킬 것이다.호세아 5:7 · 본디새김
‘낯선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외국인과 혼인하여 자녀를 낳았다는 기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혼인 비유와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지 않은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자란 다음 세대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일이 한 세대의 개인적 행동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삶과 신앙적 방향은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히브리어 호데시(חֹדֶשׁ)는 초하루, 곧 새로운 달의 시작을 뜻할 수도 있고 한 달이라는 기간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초하루로 읽으면 종교적 절기와 관련된 심판이 됩니다. 한 달로 읽으면 심판이 짧은 시간 안에 닥칠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그들과 그들이 소유한 몫이 함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일이 단지 종교적 경험의 실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땅과 재산, 공동체의 기반까지 위협받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는 그 위협이 전쟁의 나팔 소리로 들려옵니다.
북쪽에서 울리는 경고가 유다의 경계까지 이르다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고, 라마에서 나팔을 불어라. 벳아웬에서 함성을 질러라. 베냐민아, 네 뒤에.호세아 5:8 · 본디새김
갑자기 예언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팔은 전쟁의 위험을 알리고 사람들을 소집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민수기 10:9에는 적과 싸우러 나갈 때 나팔을 불라는 규정이 나오고, 예레미야 4:5에서도 전쟁의 위험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등장합니다.
위험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가?
기브아와 라마는 베냐민 지역과 관계된 성읍들입니다. 벳아웬은 호세아 4:15에서도 등장했으며, 이 문맥에서는 벧엘과 관련된 장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지명들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사이의 경계 지역에 전쟁의 위기가 닥쳤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베냐민 지역은 북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길목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위험이 유다 쪽으로도 다가오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 눈에 보이는 전쟁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경고는 이미 주어졌다
「에브라임은 책망의 날에 황폐해질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서 확실한 것을 알려 주었다.」호세아 5:9 · 본디새김
이것은 앞의 덫과 그물이라는 이미지와 대조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사로잡는 덫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경고하는 나팔을 울리게 하십니다.
위험을 숨기는 지도자들과 위험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대비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왜 경계를 옮기는 사람들에 비유되는가?
10절에서는 시선이 유다로 향합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경계를 옮기는 자들처럼 되었다. 내가 그들 위에 내 격노를 물처럼 쏟겠다.」호세아 5:10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토지의 경계는 단순한 편의상의 표시가 아니었습니다. 땅은 가족과 지파가 물려받은 기업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경계표를 옮기는 일은 이웃의 토지를 침범하고 그들의 권리를 빼앗는 행위였습니다.
신명기 19:14는 조상들이 정해 놓은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27:17에서는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따라서 유다의 지도자들을 경계를 옮기는 사람들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정당한 몫을 침해하는 자들처럼 행동했다는 고발입니다.
하나는 실제 영토 문제와 관련된 비유라는 읽기입니다. 북왕국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유다의 지도자들이 이웃 나라의 땅을 차지하려 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경계표를 옮기는 일을 일반적인 불의의 비유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영토 분쟁이나 사건을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심판은 나팔 소리로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쏟아지는 물처럼 묘사됩니다. 경계표를 옮겨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막아 낼 수 없는 힘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기꺼이 따랐던 명령
「에브라임은 억눌리고, 심판에서 짓눌렸다. 그가 기꺼이 명령을 뒤따라갔기 때문이다.」호세아 5:1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모든 잘못을 지도자들에게만 돌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앞에서 지도자들은 덫과 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성 역시 잘못된 명령을 기꺼이 따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잘못된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백성의 책임이 함께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8절의 마지막 표현, “베냐민아, 네 뒤에”는 정확한 뜻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뒤에서 적이 다가온다는 경고로 읽을 수도 있고, 베냐민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촉구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군사적 움직임을 독려하는 표현으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만으로 어느 군대가 어떤 경로를 따라 진격했는지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11절의 ‘명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브(צַו)는 이 문맥에서 뜻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통상적인 의미로는 명령이나 지시를 뜻하지만, 어떤 읽기에서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합니다. 또한 누가 그 명령을 내렸는지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 왕의 명령이나 어떤 종교 지도자의 지시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좀벌레에서 사자로 — 하나님이 심판의 주체가 되시다
「나는 에브라임에게는 좀벌레 같고, 유다 집안에게는 썩음과 같다.」호세아 5:12 · 본디새김
좀벌레는 옷감을 갉아먹습니다. 겉으로 당장 큰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천이 약해지고 구멍이 생깁니다. 썩음 역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것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립니다.
두 이미지는 공통적으로 서서히 진행되는 파괴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반드시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무너뜨리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심판은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나라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왕이 있고, 정치적 제도가 있으며, 여전히 다른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이미 그들을 갉아먹는 존재처럼 행동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쇠약함은 단지 우연히 일어난 일이거나 외부 환경의 변화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그 역사적 쇠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자기 병을 알아차렸지만, 치료할 사람을 잘못 찾다
「에브라임은 자기 병을 보았고, 유다는 자기 상처를 보았다. 에브라임은 아시리아로 갔고, 야레브 왕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너희를 고칠 수 없고, 너희에게서 상처가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호세아 5:13 · 본디새김
이것은 앞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상태와 다릅니다. 적어도 이제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병을 알아차리는 일과 병의 원인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상태를 정치적·군사적 위기로 인식하고, 그 위기를 해결할 힘을 가진 존재를 찾아갑니다. 아시리아는 실제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 힘이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아시리아는 왜 치료할 수 없는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에브라임에게 좀벌레 같고 유다에게 썩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병과 상처는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다른 나라의 왕에게 치료를 구했습니다.
자신의 병을 보았지만, 무엇이 자신을 병들게 했는지는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본문을 모든 외교적 협력이나 군사적 동맹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호세아가 고발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백성이 그 문제의 해결을 강대국에게서 찾으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한쪽에서는 종교적 행위가 관계의 단절을 해결하지 못했고, 다른 쪽에서는 정치적 힘이 하나님의 심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한 두 길이 모두 실패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가 찢고 가겠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사자 같고, 유다 집안에게 젊은 사자 같기 때문이다. 내가, 내가 찢고 가겠다. 내가 빼앗아 가겠고, 건져 낼 자는 없다.」호세아 5:14 · 본디새김
좀벌레의 파괴는 눈에 잘 띄지 않고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러나 사자가 먹잇감을 덮치는 일은 갑작스럽고 압도적입니다. 처음에는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쇠퇴로, 나중에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공격으로 나타납니다.
이 반복은 심판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강조합니다. 에브라임은 아시리아 왕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찢고 빼앗아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백성이 하나님을 돌아보지 않은 채 다른 힘으로 그 심판을 막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자의 행동은 찢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자는 떠납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15:19–20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아시리아 왕 불에게 은을 주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후 열왕기하 17:3–4에서는 호세아 왕과 아시리아 왕 사이의 조공과 반역 문제가 등장합니다. 남왕국 유다도 아시리아의 힘을 빌리려 한 역사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16:7–9에서 아하스 왕은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5:13이 이 가운데 정확히 어느 사건을 가리키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야레브를 특정 아시리아 왕의 이름이나 칭호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한편 이 표현을 ‘다투는 왕’, ‘논쟁하는 왕’과 연결되는 별칭으로 해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레브가 정확히 누구인지, 당시의 어떤 공식 칭호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시는가?
「그들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내 얼굴을 찾을 때까지 나는 가서 내 자리로 돌아가 있겠다. 고통 속에서 그들은 나를 간절히 찾을 것이다.」호세아 5:15 · 본디새김
호세아 5장의 마지막 절은 심판의 장면을 갑자기 조용하게 만듭니다.
물러나 계시는 하나님
“내 자리로 돌아가 있겠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물러나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찾는 백성에게 곧바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물러나 계시겠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6절의 찾음과 15절의 찾음
앞에서는 그들이 가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갔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시편 27:8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일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기도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장소를 방문하거나 제물을 바치는 행동보다 더 깊은 관계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이 어떤 상태인지 마주해야 합니다.
“간절히 찾을 것이다”
15절은 이스라엘이 어떤 말을 하며 회개할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자마자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일, 그리고 고통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 될 일을 선언합니다.
이 절의 끝은 회복의 완성 장면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앞에서 하나님이 사자에 비유되었으므로 사자가 먹잇감을 취한 뒤 자신의 굴로 돌아가는 장면이 이어진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거처로 돌아가신다는 표현을 그분이 하늘의 자리로 물러나시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자리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자의 굴이나 하늘의 성소 가운데 어느 하나로만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15절의 “자기 죄를 인정하고”라는 표현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예시무(אָשַׁם)는 아샴이라는 어근에서 나옵니다. 이 어근은 죄가 있거나 죄책을 지는 상태를 나타내며, 문맥에 따라 죄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과 죄의 결과를 감당하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죄를 인정할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죄에 대한 형벌을 감당할 때까지 하나님이 물러나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이어지는 “내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죄를 인정하는 쪽으로 옮겼습니다. 문맥상 충분히 가능한 선택입니다. 다만 원문 자체가 허용하는 다른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구해 낼 수 없는 곳에서 남겨진 말씀
처음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가 보였다면,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인정해야 하는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이 실제로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응답이면서, 그들이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고 하나님을 찾게 될 미래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모든 행동이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결국 회개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호세아 5장의 심판은 실제 심판입니다.
호세아 5장은 특정한 역사적 공동체인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언약적 심판입니다. 개인이 겪는 질병이나 상실을 이 장의 심판에 직접 대응시킬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더 이상 나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사자도 먹잇감을 찢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뒤에 남는 것은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시간과 고통 속에 있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잊은 백성에게서 물러나셨지만, 그들이 영원히 자신을 찾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호세아 5장은 아직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계십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이제 하나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더 많은 제물을 준비하는 길도, 더 강한 왕을 찾아가는 길도 아닙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들에게서 물러나신 여호와야훼의 얼굴을 찾는 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